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킨>(리커버 에디션)을 접하기 전 약간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SF인데다가, 그 분야에서는 '그랜드 데임 Grand Dame'으로 추앙받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무게, 무엇보다 처음 읽은 그의 <와일드 시드>를 힘겹게 페이지를 넘긴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킨>은 이 모든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닫게 한다.


「작가로 현대를 살아가는 다나는 인텔리 흑인 여성이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백인 케빈이고 역시 작가다.

원인 모를 특이한 현상으로 다나는 100여 년 전 노예 시대 뉴욕의 아래쪽에 위치한 메릴랜드 주로 시간 이동하는데, 거기서 오래전 조상 루퍼스를 만난다. 루퍼스는 백인 농장주의 아들인데 그가 위기에 빠지면 다나가 소환되고, 다나가 죽을 위험에 처하면 현대로 복귀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다나는 애증의 대상인 루퍼스의 평생을 목격한다. 다나가 목격하고 체험하는 건 그때 그 시절 흑인 노예들의 처참한 삶이다.」



"흑인 여자를 강간한다고 부끄러울 것은 없어도,

흑인 여자를 사랑한다면 부끄러울 수 있는 시대였다." - P 236


미국 남부에서 흑인 노예는 주인 맘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었다. 인권은 배부른 소리요 사치다.

도망치다가 잡히면 귀가 잘리고, 특별한 이유 없이 '교화' 차원에서 등 가죽이 벗겨지도록 채찍질을 당하고, 어젯밤까지는 성적 노예로 봉사하다 다음 날이면 노예 상인에게 팔리고, 엄마의 피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녀들은 팔려서 이산가족이 되고, 결국 흑인 부부는 자녀라는 판매가 가능한 생산물을 낳고(다다익선이다) 계속 주인을 위해 봉사하도록 딴 맘먹지않게하는 안정화 장치일 뿐이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건방진 검둥이보다 더 나쁜 건 없는' 시절이다. <킨>은 인류의 아픈 기억을 들추어낸다.

현대 사회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던 다나가 어느 날 갑자기 야만의 시대로 내던져지면서 선명한 대비를 통해 충격은 배가된다. 애당초 과거 시점에서 주인공 1인칭 화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방식보다 훨씬 충격적이고 현대 독자에게 전달되는 아픔은 몇 배는 고통스럽다. 맨 처음 다나가 채찍질을 당하는 순간, 마치 내 등 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통증이 전달된다. 다나의 선조인 루퍼스는 불쑥 나타난 특이한 존재 다나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다른 농장주에 비해서 덜 악랄한 사람일 수는 있으나, 그 역시 도긴개긴이다. 다나는 외모를 닮은 앨리스를 보고 본능적으로 유전자를 느끼고, 루퍼스는 다른 육체지만 다나와 앨리스를 거의 동일한 인물처럼 느낀다. 다나의 선조가 백인 루퍼스와 흑인 앨리스라는 점이 특이하긴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 꽃 피는 나무'가 아니었다는 점과 앨리스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비극성은 고조된다.

타임슬립은 SF에서는 흔한 장치지만 이토록 효과적인 방식은 인상 깊다. <킨>을 읽고 직접적으로 선조들의 고된 삶을 느끼고 피눈물을 흘릴 현대의 흑인 독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주인공 다나와 함께 하는 추체험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독서 체험이다. 기대 이상으로 페이지는 잘 넘어가고,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지만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당신 영혼에 문신을 새길 강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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