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 꼿꼿하고 당당한 털의 역사 사소한 이야기
커트 스텐 지음, 하인해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헤어"(커트 스텐, 하인해, MID, 2017)
부제가 '꼿꼿하고 당당한 털의 역사'를 읽었습니다.

책을 읽기전에 얼핏 생각이 설마 머리털만은 아닐테고 하면서 제가 한 생각은 영화 '색계'에서 보였던 탕웨이의 겨드랑이 털이었습니다. 마냥 야하지만은 않았지만, 적어도 제게는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충격이었습니다. 아마도 1940년대 중국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일테고, 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일것 같습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1486년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비너스는 길고 매력적인 금발을 제외하고는 털이 거의 없는 성숙한 여인의 몸을 이상적인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영어 단어 hair로 흔히들 연상하는 머리에 난 털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집니다.

저자인 커트 스텐은 지난 30년 동안 털을 연구한 학자로 20년 간 학교에서의 연구와 존슨 앤 존슨에서 피부생물학 디렉터로 산업계 근무 경력까지 갖고 있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협소하게 '털'에 대해 해석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p.88
털은 인간다움과 문명을 표현하거나 과시하고 교육하는 데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반대로 인간다움을 말살시키기 위해서도 널리 쓰였다.

잔 다르크가 화형당하기 전에도 앤 불린도 참수당하기 전 머리가 깎이고,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입소 등록후에 머리를 깎아버렸다고 합니다.
반면에, 헤어스타일이 당신이 누구인가, 당신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영화 "왕과 나"에서 왕의 역할을 했던 율 브리너의 삭발한 머리는 건강한 섹시미와 권위와 성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경험많은 저자는 진화의 관점에서 털없는 원숭이로서의 인간의 얘기에서부터 가발산업, 미용산업, 털로 하는 예술 작품, 테니스 공의 재료에서 해양 기름 유출 사고의 흡착제, 범죄현장의 증거자료까지 다양한 주제를 종횡무진하면서 다룹니다.
한 달에 보통 1센티미터씩 자란다는 사람들 대비 저는 2센티미터는 자라는 것 같아 이상한가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p.52
예를 들어, 속눈썹은 30일 동안만 자라기 때문에 길이가 1센티미터도 안 된다.

중국 소설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단 말씀이야."  
물론 허삼관을 통해 위화가 보이려했던 것은 중국 사회의 불평등이었습니다만, 과학적 사실로도 증명이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미문화권에서 양모의 이야기가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언어에도 흔적을 남겼다는 저자의 관찰도 눈여겨볼만했습니다.
'직물과 같은 삶의 구조fabric of life', '베트처럼 대대로 물려주는 가보heirloom'에서 '북통처럼 왔다 갔다 하는 우주왕복선space shuttle'.

예술가의 붓에 대해서도 붓은 털로 만들어진다는 것도 상세한 얘기가 나오는데, 저자가 서구문화권에만 집중하다보니 중국 왕희지가 가끔 사용했다는 '서수필'(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마리당 8개 정도가 나오다보니 붓 하나를 만들려면 200마리 이상이 필요) 얘기같은 부분이 나오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습니다.

옮긴이의 글을 보면 원서 제목인 "Hair: A Human History"을 두고 '헤어'와 '털'을 두고 고민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저도 아마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포유류가 털이 나기 시작한 4억 년 전에서부터 털이 인간의 삶에 이제까지 해온 그리고 앞으로의 역할에 대해서 한 권의 책에 오롯이 담긴 저자의 정성과 애정을 보니 책값이 전혀 비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데 '터럭' 끝만큼도 사심이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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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세계를 굴리다 - 바퀴의 탄생, 몰락, 그리고 부활 사소한 이야기
리처드 불리엣 지음, 소슬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바퀴, 세계를 굴리다"는 부제처럼 바퀴의 탄생, 몰락, 그리고 부활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간 그러려니 혹은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총,균,쇠"의 재레드 다이아몬드나 "말, 바퀴, 언어"의 데이비드 앤서니의 입장중에서 바퀴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이는 악의적인 조롱이나 폄하가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역사적 현실과 개연성에서 저장의 주장으로 다시 보면 과연? 이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옮긴이 소슬기 씨가 얘기하듯 어쩌면 우리는 '보고 싶은 결과'를 보기 위해 마음이 움직여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간단히 요약을 하면, 바퀴의 발명과 관련된 전체 개념이 오도된 것이라는 과감한 주장입니다. 저자는 세 가지 개념적으로 다른 유형의 바퀴(윤축, 독립 차륜, 캐스터)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발명되었고, 그 사용은 수 세기에 걸쳐 매우 다양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p.12)  바퀴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20 세기에 시작된 신화일 뿐이라고 일축합니다. 바퀴의 세 번째 유형인 캐스터 (1700 년경 발명된 바퀴)의 보급 때문에 우리 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19 세기에 아무도 바퀴가 대단한 발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자도 증기 엔진은 분명히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임은 인정합니다.  
청동기 시대 이후부터 바퀴의 개념을 이미 알고 있는 많은 사회들이 나름의 여러 가지 이유로 교통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결코 몰라서 안 쓴 것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로마시대 하면 떠올리는 마차에 대해서 영화 글래디에이터, 벤허에 나오는 멋진 마차를 연상하지만, 제대로 고증을 거치지 않고 자극적이고 흥미 위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마트에서 장볼 때 쓰는 카트의 바퀴가 캐스터이고, 오늘날 자전거 앞바퀴도 대부분 캐스터입니다.  
단단한 오크나무였을 최초의 나무 바퀴가 구르고 굴러서, 또 닳고 닳아서 오늘날의 자전거 바퀴로 이어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참 감개무량합니다.  

19세기 중반 이전에는 일본에서의 운송에 바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1869년에 인력거가 발명되고서야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저자의 주장은 기원전 3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수송용 바퀴는 없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있었을 것 같은 편한 상상과, 앞에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가 늘 있었을 것이라는 머릿속의 그림을 여지없이 파괴합니다.  

유럽의 수레에 쓰인 바퀴와 중국의 수레 디자인에 대해서도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를 두지 않습니다. 유럽의 기술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발달한 토착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늘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해외에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늘 기민한 관찰자였다는 보장도 없고,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아이디어를 항상 잘 이해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습니다.  

Jared Diamond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서반구의 대형 가축 부족으로 바퀴 달린 차량이 발명되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늘 우리가 익숙해진 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게으름에 경종을 울리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톤헨지는 바퀴가 없이 지어졌습니다. 가장 초기의 마차는 무거운 돌을 운반할 만큼 강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바퀴는 무거운 돌을 움직이게 하는 롤러에서 진화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p.119의 그림 34를 두고 저자가 조목조목 반박하는 부분이 이 책에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굴림대가 끝이 바퀴처럼 작동할 만큼 충분히 마모되었다면 바퀴처럼 끝이 모든 무게를 견뎌야 되고, 그러면 굴림대의 장점은 사라집니다. 경사면, 스키드 및 많은 사람을 동원해서 끄는 것이 큰 돌로 기념비적인 건물을 짓는 데 굴림대나 바퀴보다 더 유용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바퀴의 문제는 호모 사피엔스가 짐을 나르는 데 약 9 만년 동안 바퀴를 사용하지 않았고 이후에 가축의 등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짐을 어떻게 나누어 운반할 수 있는지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자의 추측은 새로운 유형의 하중이 직면했을 때 바퀴가 발명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만들면서 돌을 움직이다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집트나 다른 곳에서 피라미드를 만들 때는 바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유형의 하중을 구리 광산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추측하면서 자신도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저자는 특히 캐스터의 역사를 조사하면서 놀랬다고 합니다. 쇼핑 카트, 유모차, 휠체어, 사무실 의자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유형인 캐스터는 축 또는 피벗 축으로부터 오프셋 된 회전을 가지며 측면에서 밀 때 방향을 바꾸거나 뒤에서 미는 다른 측 방향 압력이 작용할 때 사용합니다. 따라서 오랫동안 바퀴에서 아킬레스건이었던 방향 조정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바퀴를 사용하고 안 하고는 어느 문명이 앞서고 뒤처졌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선택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아쉬운 점은 세 번째 바퀴의 얘기가 11장 하나로 끝이 나버리는 바람에 뭔가 기대했던 바램을 아쉽게 접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쉬운 점을 넘어서는 이 책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이 책을 읽고 나면 "말, 바퀴, 언어"(데이비드 앤서니, 공원국, 에코리브르, 2015)나 "총,균,쇠"(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문학사상사, 2005)를 다시 읽어보게끔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좋은 책 경험하게 되어 2016년 겨울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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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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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째 출판사는 재번역이 있다는 대답을 반복하면서 이 책을 계속 팔고 있습니다. 책이 공산품으로만 볼 수 없겠지만, 이 책은 반드시 리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역도 오역이고, 원서의 내용이 너무 많이 생략되었습니다. 편집상의 사정이란 말로 넘어가기 힘든 수준입니다.30%가 사라졌습니다.
(업데이트)
이창신씨 새로운 번역이 오역이나 생략된 부분은 거의 다 잡았다 싶습니다. 번역자 확인하고 구매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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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 없이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붉은 재앙
조나단 월드먼 지음, 박병철 옮김 / 반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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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t, 녹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이렇게 깊이 있게 파고들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에 탄복했습니다. ˝가슴이야기˝와 ˝사소한 것들의 과학˝과 함께 읽으면 더 재밌습니다.
모호한 문장이 많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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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볼커 이야기 - 유전체 의학의 불씨를 당기다
마크 존슨.케이틀린 갤러 지음, 금창원 외 옮김, 서정선 감수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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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모라도 자신의 아이가 아프면 차라리 자신이 아팠으면 합니다.
신종 플루가 전국을 뒤덮을 때 저도 딸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서 초조하게 보내고 타미플루를 먹고 환청에 환각에 시달려하는 아이를 껴안고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물며 그 아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 지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는 두 살배기인데다가 가장 신뢰해야 할 의사마저도 정확한 진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아이는 먹기만 하면 장에 염증이 생겨서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서 하위 3%에 해당하는 정도의 체중으로 갈수록 앙상하게 말라만가고...아이의 엄마인 애밀린 볼커는 가슴 성형 수술까지 받아 가면서 여자로서의 삶보다 엄마로서의 삶으로 올인을 합니다.

이야기는 5년의 세월을 정확한 병의 진단을 위해 찾아 헤맸던 "닉 볼커"라는 아이에게서 32억 쌍이 넘는 염기서열에서 딱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해내고, 아이의 면역체계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주는 치료를 통해 아이를 살려낸다는 기적 같은 얘기입니다. 이제 닉 볼커는 11살이 되어서 집 근처 숲을 뛰어다니고, 더 이상 먹는 것으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괜찮아"진 것이지요.

1953년에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 Francis Crick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고, 1990년부터 시작한 미국 정부 주도의 인간 게놈프로젝트가 2003년 32억 개로 이루어진 한 인간의 전체 게놈을 분석하고 나서도 게놈 해독의 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닉 볼커 이후에 드디어 미국에만 2,500만에서 3,0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 10명 중 1명에 해당하는 희귀 질병 환자들은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공동저자인 마크 존슨 Mark Johnson과 케이틀린 갤러거 Kathleen Gallagher는 2011년 퓰리처상 해설보도 부문을 수상한 언론인들입니다. 2010년 12월에 닉 볼커의 이야기를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준으로 상세하게 보도하였던 것을 다시 한 권의 책으로 구성하여 2016년 현재의 닉 볼커 이야기와 당시 보도되지 않았던 내용까지 꾸민 것이 이 책입니다.

닉은 조나스 브라더스 밴드를 좋아했다. 애밀린은 닉이 그 밴드 노래들 중 한 곡의 특정 소절을 부르는 것을 자주 들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난 괜찮아질 거야"라는 부분이었다.
책에는 내용이 상세히 소개되지 않았습니다만, 조나스 브라더스 밴드에도 Nick 과 이름이 같은 Nick Jonas가 있습니다. 1형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Nick Jonas가 직접 불렀던 "A Little Bit Longer"의 가사에는 'A little bit longer and I'll be fine'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네 살 먹은 꼬마 아이가 자기와 이름이 같은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힘을 내다니, 닉 볼커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유전체 의학을 다루는 의사들이나 그의 어머니나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은 가족도 있지만, 살려는 의지를 결코 놓지 않은 닉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연히도 두 명의 Nick의 이름의 유래가 된 성 니콜라우스는 3세기~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활동하였던 기독교의 성직자로,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인물로 어린이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제대혈 이식을 앞두고서는 여태껏 배트맨 망토를 두르고 배트맨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던 닉은 <라스트 에어벤더 The Last Airbender> 라는 영화를 보고서는 스스로를 '아앙Aang'이라는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물과 불과 흙과 공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진정한 영웅이 되려고 100번이 넘는 수술을 거치고도 다시 용기를 낸 닉은 이식수술 후 합병증을 견뎌내고 진짜 영웅이 되어갑니다.


한편, 닉의 치료 방법을 놓고 고민하던 의사들은 정답을 알아내고서도 다시 한번 고민을 합니다. 게놈 해독을 치료에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나서도 "닉의 치료에 성공하고 유전체 의학의 선구자가 되는 대신, 의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해를 끼치지 말라'는 원칙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었다."
"참 괜찮은 죽음"으로 번역된 헨리 마시의 책의 영어 원제가 "Do No Harm"이었습니다. 골수이식으로도 환자의 병이 해결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어찌할지, 그런 경우에 인정하기 힘들지만 현대 의학을 하는 의료진의 무지를 인정하고 내버려 두는 편이 오히려 환자 입장에서 더 나은 것은 아닌지 겸손하게 다시 고민하는 의사들의 모습에서, 그렇게 고민을 하고 나서도 "우리가 이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우리는 왜 여기에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으면서 실패를 각오하고 불확실하고 자신의 경력이 끝장날 수도 있는 한 걸음을 내딛는 의사들의 모습에서 저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닉의 질병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것보다 닉과 그의 가족의 입장에서 질병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치료로까지 이어져야 성공으로 보겠다는 그들의 굳은 결심이 진정으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따르는 참된 의료진의 자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책은 시간 순서와 상관없는 23개의 장으로 구성됩니다. 매트 리들리 Matt Ridley의 "Genome : The Autobiography of a species in 23 chapters"가 23장으로 구성되었던 것과 유사합니다. 사람의 모든 유전자가 23쌍의 염색체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닉 볼커가 스스로 삶의 끈을 놓지 않고 버티고, 그런 닉 볼커를 살려내기 위한 그의 가족들과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이 23개의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모든 유전자가 23개의 염색체 내에 있는 것은 아니듯이 이 책에 담아낸 내용 외에도 닉 볼커 이야기는 분명히 더 있겠지요.

물론 닉 볼커를 살려냈다고 해서 모든 환자들의 게놈을 분석해야 된다는 당위성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게놈체 의학을 돈벌이 사업으로 연관시키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도 안되는 것이구요.
번역도 매끄럽고 어려운 전문 용어 없이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이 장점입니다. 다만, 4명의 옮긴이의 공동 작업의 영향인지 닉이 다른 아이들이 잠들 때 쥐고 자는 곰인형과도 같은 베이글 바이츠 Bagel Bites 봉투가 12장과 1장에서 다르게 설명되는 것과 같은 미미한 오류(아마 23장을 장별로 나눠서 작업하신 듯)는 있어 보입니다.
원저자들이 해설보도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언론인들이라, 이런 주제를 처음 대하는 사람도 미리 사전 학습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싶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게놈에 대해서 더 자세히 공부하고 싶다는 분들은 MID 출판사에서 이전에 나왔던 "천달러게놈"이나 과학동아에서 나왔던 "내 생명의 설계도 DNA", 김영사에서 처음 나왔다가 절판되고 최근 반니에서 다시 나온 매트 리들리의 "게놈"을 다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분류상 과학책으로 봐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책 자체로도 감동을 받았고 또다른 책을 찾아보게 만드는 책이어서 저는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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