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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볼커 이야기 - 유전체 의학의 불씨를 당기다
마크 존슨.케이틀린 갤러 지음, 금창원 외 옮김, 서정선 감수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어느 부모라도 자신의 아이가 아프면 차라리 자신이 아팠으면 합니다.
신종 플루가 전국을 뒤덮을 때 저도 딸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서 초조하게 보내고 타미플루를 먹고 환청에 환각에 시달려하는 아이를 껴안고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물며 그 아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 지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는 두 살배기인데다가 가장 신뢰해야 할 의사마저도 정확한 진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아이는 먹기만 하면 장에 염증이 생겨서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서 하위 3%에 해당하는 정도의 체중으로 갈수록 앙상하게 말라만가고...아이의 엄마인 애밀린 볼커는 가슴 성형 수술까지 받아 가면서 여자로서의 삶보다 엄마로서의 삶으로 올인을 합니다.
이야기는 5년의 세월을 정확한 병의 진단을 위해 찾아 헤맸던 "닉 볼커"라는 아이에게서 32억 쌍이 넘는 염기서열에서 딱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해내고, 아이의 면역체계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주는 치료를 통해 아이를 살려낸다는 기적 같은 얘기입니다. 이제 닉 볼커는 11살이 되어서 집 근처 숲을 뛰어다니고, 더 이상 먹는 것으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괜찮아"진 것이지요.
1953년에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 Francis Crick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고, 1990년부터 시작한 미국 정부 주도의 인간 게놈프로젝트가 2003년 32억 개로 이루어진 한 인간의 전체 게놈을 분석하고 나서도 게놈 해독의 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닉 볼커 이후에 드디어 미국에만 2,500만에서 3,0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 10명 중 1명에 해당하는 희귀 질병 환자들은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공동저자인 마크 존슨 Mark Johnson과 케이틀린 갤러거 Kathleen Gallagher는 2011년 퓰리처상 해설보도 부문을 수상한 언론인들입니다. 2010년 12월에 닉 볼커의 이야기를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준으로 상세하게 보도하였던 것을 다시 한 권의 책으로 구성하여 2016년 현재의 닉 볼커 이야기와 당시 보도되지 않았던 내용까지 꾸민 것이 이 책입니다.
닉은 조나스 브라더스 밴드를 좋아했다. 애밀린은 닉이 그 밴드 노래들 중 한 곡의 특정 소절을 부르는 것을 자주 들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난 괜찮아질 거야"라는 부분이었다.
책에는 내용이 상세히 소개되지 않았습니다만, 조나스 브라더스 밴드에도 Nick 과 이름이 같은 Nick Jonas가 있습니다. 1형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Nick Jonas가 직접 불렀던 "A Little Bit Longer"의 가사에는 'A little bit longer and I'll be fine'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네 살 먹은 꼬마 아이가 자기와 이름이 같은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힘을 내다니, 닉 볼커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유전체 의학을 다루는 의사들이나 그의 어머니나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은 가족도 있지만, 살려는 의지를 결코 놓지 않은 닉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연히도 두 명의 Nick의 이름의 유래가 된 성 니콜라우스는 3세기~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활동하였던 기독교의 성직자로,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인물로 어린이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제대혈 이식을 앞두고서는 여태껏 배트맨 망토를 두르고 배트맨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던 닉은 <라스트 에어벤더 The Last Airbender> 라는 영화를 보고서는 스스로를 '아앙Aang'이라는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물과 불과 흙과 공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진정한 영웅이 되려고 100번이 넘는 수술을 거치고도 다시 용기를 낸 닉은 이식수술 후 합병증을 견뎌내고 진짜 영웅이 되어갑니다.
한편, 닉의 치료 방법을 놓고 고민하던 의사들은 정답을 알아내고서도 다시 한번 고민을 합니다. 게놈 해독을 치료에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나서도 "닉의 치료에 성공하고 유전체 의학의 선구자가 되는 대신, 의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해를 끼치지 말라'는 원칙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었다."
"참 괜찮은 죽음"으로 번역된 헨리 마시의 책의 영어 원제가 "Do No Harm"이었습니다. 골수이식으로도 환자의 병이 해결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어찌할지, 그런 경우에 인정하기 힘들지만 현대 의학을 하는 의료진의 무지를 인정하고 내버려 두는 편이 오히려 환자 입장에서 더 나은 것은 아닌지 겸손하게 다시 고민하는 의사들의 모습에서, 그렇게 고민을 하고 나서도 "우리가 이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우리는 왜 여기에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으면서 실패를 각오하고 불확실하고 자신의 경력이 끝장날 수도 있는 한 걸음을 내딛는 의사들의 모습에서 저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닉의 질병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것보다 닉과 그의 가족의 입장에서 질병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치료로까지 이어져야 성공으로 보겠다는 그들의 굳은 결심이 진정으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따르는 참된 의료진의 자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책은 시간 순서와 상관없는 23개의 장으로 구성됩니다. 매트 리들리 Matt Ridley의 "Genome : The Autobiography of a species in 23 chapters"가 23장으로 구성되었던 것과 유사합니다. 사람의 모든 유전자가 23쌍의 염색체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닉 볼커가 스스로 삶의 끈을 놓지 않고 버티고, 그런 닉 볼커를 살려내기 위한 그의 가족들과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이 23개의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모든 유전자가 23개의 염색체 내에 있는 것은 아니듯이 이 책에 담아낸 내용 외에도 닉 볼커 이야기는 분명히 더 있겠지요.
물론 닉 볼커를 살려냈다고 해서 모든 환자들의 게놈을 분석해야 된다는 당위성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게놈체 의학을 돈벌이 사업으로 연관시키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도 안되는 것이구요.
번역도 매끄럽고 어려운 전문 용어 없이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이 장점입니다. 다만, 4명의 옮긴이의 공동 작업의 영향인지 닉이 다른 아이들이 잠들 때 쥐고 자는 곰인형과도 같은 베이글 바이츠 Bagel Bites 봉투가 12장과 1장에서 다르게 설명되는 것과 같은 미미한 오류(아마 23장을 장별로 나눠서 작업하신 듯)는 있어 보입니다.
원저자들이 해설보도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언론인들이라, 이런 주제를 처음 대하는 사람도 미리 사전 학습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싶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게놈에 대해서 더 자세히 공부하고 싶다는 분들은 MID 출판사에서 이전에 나왔던 "천달러게놈"이나 과학동아에서 나왔던 "내 생명의 설계도 DNA", 김영사에서 처음 나왔다가 절판되고 최근 반니에서 다시 나온 매트 리들리의 "게놈"을 다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분류상 과학책으로 봐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책 자체로도 감동을 받았고 또다른 책을 찾아보게 만드는 책이어서 저는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