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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3번 안석뽕 - 제17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 수상작(고학년) ㅣ 창비아동문고 271
진형민 지음, 한지선 그림 / 창비 / 2013년 3월
평점 :
‘기호 3번 안석뽕’제목에서 느껴지는 친근함은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나의 초등학교 때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는 무심하게 남겼던 일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초등학교 전교 어린이 회장 선거가 치루어지는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를 엮은 것으로 아이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학교, 나아가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담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다루고 있는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솔직하고,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만한, 그러면서도 무심하게 지나쳤던 상황을 재미있게 펼쳐 보여 읽는 이에게 공감을 갖게 한다.
이 이야기는 문덕 초등학교 전교 어린이 회장 선거 후보 등록 마감일인 금요일을 시작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안석진으로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이다. 석진이네 집은 문덕 시장에서 떡집을 하고 있고, 석진이는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같은 반 반장인 고경태가 전교 회장 후보로 나서 괜히 거들먹거리자 친구인 기무라와 조조의 부추김으로 석진도 회장 후보가 되어버렸다.
엉겁결에 회장후보가 된 석진은 월요일부터 시작된 고경태의 화려한 선거유세를 보고는 나름 작전을 세웠고, 급기야는 석진이 제일 싫어하는, 시장사람들이 부르는 석뽕을 이름대신 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기호 3번 안석뽕’이라는 문구를 넣은 손 팻말을 손에 들고 본격적인 선거유세에 들어갔다. 기무라는 휴대용 오디오를 틀어 팔도 민요 메들리를 운동장에 울리고, 조조는 할머니 고무줄 치마에 머릿수건까지 쓰고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에 이마와 양쪽 뺨에는 연지곤기를 찍고, 긴 가래떡을 손에 들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석진은 한복을 입고 돗자리 위에 앉아 화선지에 붓글씨를 써내려 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큰소리로 안석뽕을 외쳤다.
석진이와 친구들은 후보가 내세워야 할 공약에 대해 고민하다가 철학관 거봉 선생의 조언으로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직접 알아보게 되었고 5가지 공약을 완성하게 되었다.
나는 석진이가 전교 어린이 회장 후보가 된 것이 무척 반가웠다. 왜냐하면 나도 6학년 때 전교 회장 후보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석진이와 같은 기호 3번으로, 나는 그 때 우리 반 회장으로 처음부터 전교 어린이 회장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석진이의 마음과는 좀 다르긴 했지만 석진이가 선거유세를 하는 과정은 나도 겪어보았기 때문에 쉽게 마음에 와 닿았다. 석진이처럼 친구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준비물을 만드느라 밤늦도록 머리를 맞대고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석진이가 꼴찌들을 위한 주제로 한 것에 비해 나는 친구들이 원하는 소리를 들어주는 신문고가 되겠다는 주제로 손 팻말을 들고 . 갑자기 가슴이 쿵쿵거린다. 그 때의 기억으로.
나는 석진이의 색다른 공약을 보며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들이라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시험은 일 년에 한 번만, 나머지 공부는 없애고, 수학시간을 줄이고, 6학년 수학여행은 공짜로, 급식도우미는 엄마들 대신 선생님들이 하는 것으로.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님들이 보기에는 장난스럽고 어이없는 약속이지만 실상 학생들에게는 공감 가는 내용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무거워진다. 그 약속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에, 하지만 이렇게라도 우리들의 마음을 대놓고 드러낸다는 것만으로도 통쾌해진다. 석진이의 말처럼 일등부터 꼴등까지 다 좋아하는 학교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요일부터 석진이는 조조, 기무라와 함께 교실을 돌며 선거유세에 나섰다. 조조는 중국 사람을, 기무라는 일본 사람처럼 옷은 물론 말투까지 흉내를 내서 가는 곳마다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석진의 담임선생님은 한 반에 회장 후보가 두 명이면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은근히 회장 후보 사퇴를 종용했고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부반장 서영지로부터 선거를 진지하게 하라는 따끔한 충고도 들어야 했다. 게다가 석진은 같은 반 친구로, 시장골목 슈퍼집 딸인 백보리, 백발마녀의 부탁으로 피마트에 가서 바퀴벌레를 풀어 놓는 일을 보게 되었다.
목요일, 석진은 선거관리 위원회로부터 선거유세 때 가래떡을 떼어 준 것이 유권자에게 음식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고경태는 음식제공을 약속했다는 이유로 1차 경고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방송실에서 방송유세를 했는데 석진은 기무라가 거봉 철학관에서 몰래 가져온 신통방통 부적을 몸에 갖고 있었으면서도 너무 떨려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게다가 학교 공부가 끝나고 떡집에 오자마자 경찰차를 타고 파출소에 가야 했다. 피마트에서 백발마녀가 바퀴를 풀어놓는 장면이 몰래 카메라에 찍혔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피마트는 소독을 이유로 영업을 정지한 상태였으니.
석진이 아버지가 피마트 점장에게 무조건 용서를 구하는 반면 백발마녀의 엄마인 슈퍼아줌마는 오히려 큰소리로 피마트가 시장 옆에 들어선 것에 대해 근본적인 잘못을 따졌다.
나는 목요일 석진이의 힘든 하루를 보며 안타까워졌다. 공부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은근히 후보사퇴압력을 받고,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서영지로부터 쌀쌀한 눈총을 받고, 게다가 백발마녀을 따라간 것 밖에 없는데 바퀴벌레 사건으로 파출소에 가야 했으니.......
그 뿐인가? 기무라가 철학관에서 몰래 가져온 신통방통 부적이 힘을 빼는 부적이었으니. 솔직히 말하면 백발마녀의 바퀴벌레 사건도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으로 한 피마트의 잘못이다. 육십년 동안 이어져 오는 문덕시장을 삶의 근거지로 살아가고 있는 시장사람들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으니, 석진이 부모를 비롯한 시장사람들이 장사를 뒤로 하고 피마트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덕적으로 보면 그 곳에는 피마트가 들어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피마트는 법적인 규제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신고를 하고는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이럴 때는 백발마녀를 용기 있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아마도 석진이 엄마가 파출소에서 나온 후, 석진이에게 오천 원을 주며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먹으라고 하는 마음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금요일, 회장선거 투표 날, 석진은 피마트 사건이 학교에 알려져 학교명예회손으로 후보자격이 상실 될뻔 했지만 교감선생님의 도움으로 면하게 되었다. 석진은 마지막으로 강당에서 연설을 했고 결과는 2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석진은 그제서야 자신이 멋진 회장이 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2학기 때는 다시 한 번 선거에 나가기로 했다.
나는 석진이 회장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기표소에서 투표할 때 나는 다른 후보에 기표를 했었다. 자신을 찍는다는 게 잘못된 것으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당연한 것은 한 표라도 더 모으기 위해 자신에게 기표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기다리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마음을 조이고, 막상 결과가 나왔을 때 불과 몇 표 차이로 떨어졌다는 사실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마 석진이도 그랬을 것이다.
다른 후보들처럼 집이 잘 살지 못해도, 공부를 잘 하지 못해도, 엄마가 예쁜 멋쟁이가 아니어도, 석진이는 많은 것을 갖고 있었다.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아버지의 믿음이, 내색은 잘 하지 않지만 자상한 엄마의 따뜻함이, 언제나 함께 하는 친구들의 우정이, 거칠어 보이지만 정으로 함께하는 시장사람들의 웃음이.......
석진이가 말했던 것처럼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먼저 생각하고 뭘 물어뜯어야 같은 일이 다신 안 벌어질지 잘 판단한 다음 행동하는 현명한 사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좋아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가진 자와 못가진 자, 힘 있는 자와 약한 자, 우리 모두 함께 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