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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다산 정약용’ 이름만으로도 반가움이 전해져온다. 그 분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책이나 교과서를 통해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로 많은 저서를 남긴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는 위인전을 읽으며 훌륭한 학자로, 자라서는 교과서를 통해서 조선시대의 실학자로, 그 후에는 ‘유배지에서 온 편지’를 통해 두 아들의 자상한 아버지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지금
‘삶을 바꾼 만남’을 통해서는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스승으로 묵직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은 교수로 학문적 자료를 탐사하며 유용한 정보를 발굴하는 작업을 하는 저자가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는 맛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럼으로써 삶 자체가 단 한번으로 높아가기를.
책속에는 정약용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 황상의 만남을 중심으로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황상에 대한 자취를 꼼꼼하게 추적하여 그의 문집과 다산이 평생 동안 준 편지나 쪽지 등을 통해 저자는 그의 감동적인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황상’ 낯선 이름만큼이나 그의 삶이 궁금해진다. 다산 정약용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제자라는 사실이 아직은 배움에 전념하고 있는 내 마음을 긴장시킨다.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리라는 믿음으로. 정갈한 마음으로 그 분과 마주한다.
다산은 천주학쟁이 사학죄인으로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강진마을에서도 냉대를 받아 그나마 주막에서 지내며 시를 지어 마음을 추스르고 아들들에게 당부하는 편지를 보내고, 흑산도에 있는 형님 정약전에게 편지를 보내고, 가끔씩 주막집 주인 노파와 이야기를 나누는 적막한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1년쯤 되어갈 무렵부터는 주변의 경계심이 풀려 주막집에서 작은 서당을 열고 아전 자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아이가 황상이었다.
소년 황상이 자신은 너무 둔하고, 앞뒤가 곡 막혔고 답답한 것이 공부하는데 있어 문제라고 하자 다산은 오히려 그런 문제들이 공부하기에 좋은 것으로 막힌 것을 틔우기 위해 부지런히 해야 하고, 연마하는 것도 부지런히 하면 되고, 부지런하면 마음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문답을 글로 적어 주었다. 그 한 번의 가르침은 소년 황상의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고 인생도 바뀌게 되었다. 그렇게 열다섯 살에 다산의 제자가 된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새겼고 스승이 시키는 대로만 했으며 그 후로 60여년이 지나 일흔 다섯의 늙은이가 되어 첫 만남을 떠올리며 ‘임술기’를 지었다.
열다섯 황상의 배움에 대한 두려움을 한 번의 가르침으로 깨우쳐준 다산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뜻의 ‘삼근계’는 마음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잘 따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좀 더 쉽게, 좀 더 빠르게 익히는 방법을 찾게 되는 것도. 갑자가 당황하게 된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그런데도 황상은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아로새겨 스승이 써 준 글의 종이가 누더기가 될 정도로 평생을 함께 했으니. 그 우직한 모습을 통해 이제는 내가 가르침을 받는다.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들이 파고, 막힌 것을 틔우고 갈고 또 닦아야 한다는 것도.
다산은 주막집 서당에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의 4가지를 추구한다는 의지를 담은 ‘사의재’라는 이름을 내걸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배우는 일로 유배생활 속에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획기적인 학습법을 적용했다. 짜임새 있는 학습교재와는 거리가 먼 천자문 대신 글자 속에 깃든 뜻과 정신을 알고 슬기구명이 열릴 수 있게 하는 ‘문상혜두’를 기본으로 낡은 방식을 물리치고 종류를 따라 종횡으로 확장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깨달아 합리적인 사고를 기르게 하고, 그러면서도 중간에 제자들의 개성과 특징을 살펴 문학과 이학으로 전공을 살려주고, 일정 수준에 오른 뒤에는 매일 숙제를 주어 기초를 다지고 시를 지어 서로 주고받게 하고, 거기에 평을 붙여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다산이 황상을 아끼는 만큼 황상은 스승의 사랑에 근면과 성실로 답을 했고 그의 글 솜씨도 하루가 다르게 진보했다. 황상이 편지와 시를 스승에게 보내면 다산은 답으로 평을 보내주고, 제자의 소식이 뜸하면 먼저 소식을 보내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황상은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끊임없이 초서하며 익히고 외웠고 열다섯 살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시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다산은 결코 만만한 스승이 아니어서 한없이 자애롭다가도 나무랄 때는 매섭게 꾸짖곤 했다. 황상이 열여덟 살에 장가를 들어 공부에 무심해지자 편지를 통해 호된 꾸짖음으로 불러들어 고성사 승방으로 보내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다.
다산의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은 생각에 엔진을 달고 공부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으로 지금의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면에서 보면 다산의 실학은 학습적인 부분에서도 이루어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관습처럼 이어져 내려오던 학습방법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기만의 방법을 적용한 것은 그만큼 자신도 열린 사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도 컸을 것이다.
다산과 황상,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황상이 학질로 고생할 때 다산이 ‘학질 끊는 노래’로 시를 지어주며 제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을 보내고 다산이 학질에 걸렸을 때는 증상을 일러주며 메모를 보내 약을 지어올 것을 부탁하고. 마치 부자지간처럼 느껴진다.
서른셋의 나이로 강진의 백련사 주지로 온 혜장은 다산이 유배이후 만난 사람들 중 학문적 대화가 통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천재로 어려서부터 여러 스승을 쫒아 불경을 배웠고 유교경전에도 해박했으며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은 대단한 학승이었다. 다산은 혜장이 마음에 들어 그를 만난 이후 ‘다산문집’에 온통 혜장과 주고받은 시문으로 도배될 정도였고 혜장의 ‘이암집’에도 다산과 주고받은 시뿐이었다.
다산은 한창 과거시험 준비를 할 나이에 패족이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자식들을 안타까워하며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격려하고 공부의 맥을 놓지 않도록 나무라고 야단도 쳤으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원포가꾸는 방법과 구체적인 품목까지 알려주었다.
두 아들 중 맏아들인 정학연이 스물세 살 때 강진으로 찾아오자 다산은 고승사로 옮겨 지내며 공부하게 했고 황상과는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배워가게 하고 혜장을 불러 네 사람이 함께 돌림노래 시 짖기 시합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연과 황상은 혜장을 따라 대둔사 구경을 가게 되었는데 학연은 이때 여행을 ‘유두류산기’로 남겼다. 학연은 그렇게 넉 달을 아버지와 함께 하고는 다시 마재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야 했다. 그 후부터는 황상과도 편지로 우정을 나누었다.
해어진 지 8년 만에 스물셋의 청년으로 다산초당을 찾아온 둘째 아들 학유, 다산은 다음날부터 아들의 공부를 점검하고 황상에게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제목을 주어 시를 짓게 했고 매일 주요경전을 읽고 정리하는 일도 하게 했다. 그러게 거의 2년을 곁에 두고 가르치는 동안 다산은 마비 증세를 겪는 등 건강이 나빠졌다.
다산을 비롯한 벗 혜장, 아들 학연, 제자 황상의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5자로 이루어진,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의 의미는 물론 표현의 자유로움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한시는 직접적이고 강해서 섬세하거나 부드러운 표현을 할 수 없어, 딱딱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풀이를 보니 오히려 감정의 풍부함은 물론 정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풀이를 담아 시를 짓기 위서는 부지런히 배워야 하고 어느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시 또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앎에 대한 기본이 ‘삼근계’라는 것도.
황상이 부친상을 치르면서 유언을 따라 시묘도 하지 않고 장례도 삼일장으로 끝내자 다산은 매일 쪽지 편지를 보내 나무랐고 황상은 두 달간 시묘살이를 함으로써 스승의 분노를 달랬다. 그 후로 가세가 기울어지자 그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조용한 곳에서 지내는 유인의 삶을 택해 백적산으로 들어갔다. 그 삶은 다신이 꿈꾸던 것으로 다산초당에 실행으로 옮겼는데 욕심을 비우고 마음을 닦아 맑게 살다가는 삶으로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을 거두고 자연 속에서 내면을 응시하며 마음 맞는 사람과 소박하게 왕래하며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복된 삶이다. 황상이 예전에 고승사에서 학연과 함께 주역을 공부할 때 다산으로부터 ‘제황상유인첩’이라는 글을 받고 그에게 꿈으로 품게 했다.
1818년 9월 15일,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해배되어 강진을 떠나며 다산은 제자들과 다산계를 맺어 강진에 남겨놓은 전답을 종잣돈으로 삼아 계원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재산관리의 목적도 겸했다. 그 해 봄에는 ‘목민심서’를 마무리 지었고 제자들도 최고의 학술 집단으로 변모해있었다. 그 후로 다산의 제자들은 수시로 스승을 찾아와 은근한 도움을 요청했지만 정작 다산은 현실정치 복귀도, 제자들을 위한 후광도 되어줄 수 없었고 그런 일로 갈등을 빚어 결국 제다들이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럴수록 다산은 황상을 그리며 몇 차례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다가 다산의 회혼현이 열리는 날, 집으로 찾아왔다.
스승은 일흔다섯, 황상은 마흔아홉으로 18 년 만에 재회에서 황상은 쇠약해진 스승을 위해 직접 병 수발을 들었고 말할 기력조차 없던 다산은 황상에게 작은 꾸러미를 건넸다. 그 속에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라는 뜻으로 책자 한 권, 먹과 붓 하나, 부채 한 자루와 담뱃대 하나, 그리고 엽전까지.
그게 스승과 제자를 마지막 만남으로 다산는 황상이 떠난 지 사흘 후에 자신의 잔칫날 아침 세상을 떠났고 황상은 장례의 모든 절차를 자식처럼 곁에서 지켰다.
‘수만 권의 서고가 무너졌다’는 말처럼 다산이 생전에 저술한 책들의 부문별로 쌓으면 키와 맞먹을 정도였다는 사실에 그 분의 학문적 열정을 느끼게 된다. 그 열정은 오롯이 제자 황상에게 쏟아주었으니. 다산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었을 것이다. 해배이후에는 제자들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게 된 원인이 제자들의 입신양명이고 보면 학문을 배움에 있어서 다른 욕심을 우선순위로 두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다신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평생을 살아가는 황상,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산의 삶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마음으로 지은 시 속에서도 스승의 필체가, 원포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도 마음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그러고 보면 훌륭한 스승도 중요하지만 믿고 따르는 제자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황상의 우직한 모습에 다시 또 얼굴이 홧홧해진다. 지금까지 배움을 익히면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것이 자신보다는 스승의 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제자로서 기본적인 자세도 갖추지 못한 채 스승을 믿고 따르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스승을 찾아 기웃거리고만 있었으니.......
쉰여덟의 나이로 황상은 두 번째로 마재를 찾아와 학연, 학우와 정황계를 맺어 두 집안이 대대로 우의를 이어갈 수 잇도록 했다. 그리고 정학연의 소개를 통해 황상의 시문이 알려지자 그의 존재감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추사 김정희의 높은 평가로 시명도 높아졌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귀양을 살 때 우연히 황상의 시를 보고는 높이 평가했고 학연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궁금하니 더 해져 귀양에서 풀려나자 그를 만나기 위해 애를 썼다.
황상의 네 번째의 상경은 예순여섯의 노인으로 추사와의 만남을 위해서였다. 그동안 학연은 패족의 멍에를 벗고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고 황상과 추사, 두 사람은 의기가 맞아 시를 통해 교분을 이어나갔고 황상의 명성도 펴져갔다.
추사와 황상이 함께 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추사에 대하서는 잘 알고 있지만 추사도 놀랄 만큼의 실력을 갖추었는데도 황상의 이름이 낯선 것은 그만큼 그의 삶이 내면에 치중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혼자만의 공간인 일속산방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백발 황상의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특히 자신의 일생을 담은 4언 8장의 시는 담담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다산과의 만남을 기이한 인연으로, 신처럼 유일한 가르침 삼근계를 삼고, 스승의 해배와 그 후 10년간 소식이 두절됨으로써 스승에게 큰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후회, 스승의 회혼례를 맞아 처음 상경했던 때의 심정, 스승과의 재회와 영결, 추사 형제와의 교우, 정학연이 세상을 뜬 뒤 막막한 슬픔, 송사가 빚어진 연유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너그러운 처사를 바라는, 그리고 죽을 때까지 초서를 공부하고 시를 짓다가 훌쩍 세상을 떠난.......
여든셋의 수를 누렸지만 오직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살다간 그는 스승을 배웠지만 스승과 조금도 같지 않았고, 사기를 배웠지만 하나도 닮지 않은, 자기만의 독창적 언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치원’치자를 좋아하는 황상을 위해 다산이 지어준 호로서리에도 잎이 시들지 않고 눈 속에서도 푸름을 지니고 재목감은 못되지만 꽃 하나에서 하나씩의 열매를 맺는 치자. 그에게 행함에 있어 반드시 결실을 맺고 흰 꽃처럼 고결하게, 노란빛으로 꽉차있는 씨의 열매처럼 ‘자중황’을 잊지 말라는 뜻을 그대로 따르다보니 애써 욕심을 내지 않아도 인정을 받았고 스승이 꿈꾸었던 그 꿈을 다시 품었던 유인의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다산과 황상,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무엇보다 황상의 삶을 바꾸어버린 다산, 평생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스승을 만나 황상이 부러워진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내 자신의 마음가짐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승을 믿고 따르는,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해야하는 삼근계를 실천하는 것도.
지금까지 나는 내 삶이 멍들어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목표인 것처럼 여겨 재수, 삼수 그리고 사수까지 버티어왔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통해 얻은 것도 많았지만 반면 잃은 것도 많이 지금도 가끔씩 가슴이 아려오곤 한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대학 생활을 통해 나는 늦은 만큼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는 치기어린 결심으로 학업 이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동아리활동은 물론 체육대회나 축제 때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와 부대끼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신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활이라 해도 혼자 씨름하던 예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몸이 지치고 마음도 따라 지쳐 공부해야 하는 의미조차 갖지 못했었다. 그런 나에게 황상은 한숨을 거두고 삼근계를 실천하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래서 이제 다시 시작한 공부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는 내면으로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두툼한 분량의 책만큼이나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다산이라는 웅장한 산자락 끝에 미미한 언덕이었던 열다섯 소년 황상이 세월이 흐르면서 작은 봉우리로, 울창한 숲으로 채운 커다란 산봉우리로 우뚝 서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리고 나도, 그런 만남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울퉁불퉁하고 꼬여있기만 한, 스물여섯의 삶을 바꿔줄 스승과의 만남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