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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余命 : 1개월의 신부
TBS 이브닝 파이브 엮음, 권남희 옮김 / 에스비에스프로덕션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을 편 순간부터 책을 덮는 순간까지 하염없이 내 눈시울을 적시고 눈물 짓게 했던 <여명 余命, 1개월의 신부>는 스물네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으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나가시마 치에라는 한 여자의 투병기를 다룬 책이었다. 나가시마 치에, 여느 또래들처럼 좋아하는 가수의 스타일을 따라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에 건강하기만 했던 그녀에게 뜬금없이 찾아든 암의 존재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가슴에서 만져지는 낯선 응어리에 설마하며 찾아갔던 병원에서 받게 된 믿기 힘든 유방암 선고. 그녀는 그렇게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물세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몸안에 자리잡은 암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가슴에 응어리가 생겼어. 실은 엄마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내게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낫지 않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야. 나는 설령 암이라 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할 수 있다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 그러나 타로와 사귀면 타로에게 고통만 안겨 주게 될 거야."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치에의 병이 낫도록 나도 도와줄테니까."
"그렇지만 말이야. 엄마가 옛날에 투병할 때 봤었는데, 항암제 치료를 하면 머리카락도 흉하게 빠지고……. 나중에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진심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나는 외모만으로 치에를 좋아한 게 아니야. 치에가 지금 그대로의 치에로만 있어 준다면 세상 끝이 오더라도 사귀고 싶어."-p37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어떠한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변함없는 일상을 살아오던 그녀에게 찾아온 사랑, 아카스 타로. 그녀가 유방암이라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함께 이겨내자며 손을 잡아주는, 그녀의 든든한 연인이자 마지막 사랑인 타로와 가족, 친구들과 함께 그녀는 암과의 힘겨운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치에 그녀가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고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를 여러 감상에 젖어들게 하고 많은 것을 상기시키게 했다. 아파도 봤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야만 했던 경험도 있기에. 치에처럼 중병도 아니었고 수술을 통해 씻은듯이 나아 지금은 건강한 나 이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과 그녀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열여섯의 나를 잠시 회상하게 되었다. 치에처럼 건강한 줄만 알았던 내게도 늑골에 자리잡은 종양의 소식은 비록 양성으로 판정받긴 했지만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철부지였던 열여섯의 소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도 수술을 받아야한다는 것도 남의 일인마냥 낯설기만 했다. 갑작스러웠던 종양의 소식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졌던 수술. 모든 것이 꿈인 것만 같았다. 건강한 지금도 여전히 꿈인 것만 같은 그 때의 일이지만 어느 새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옅게 자리잡은 수술자국을 볼 때마다 그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수술을 받고나서도 건강한 지금도, 이제는 희미해졌다고는 하나 가슴 윗쪽으로 자리한 수술자국은 여전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은 존재이다. 하물며 한쪽 가슴을 적출해야만 하는 치에의 마음은 어땠을까! 같은 여자로서도 충분히 공감가는 일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녀의 마음이, 그녀가 수술을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것이 더 절실히 이해됐다.
탈모, 구토 등 견디기 힘든 항암제 부작용을 이겨내며 암을 조금씩 몰아냈지만 결국 그녀는 최후의 보루인 가슴 적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가슴 한쪽을 잃었지만 성공적인 수술과 꾸준한 치료 덕택에 건강과 평범한 일상을 되찾아가는 치에. 고통스러웠던 치료과정을 그녀 특유의 밝은 성격과 강함으로 이겨내는 모습과 시스템 엔지니어라는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모습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힘들수록 더 힘을 내고 긍정적인,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존경스러우면서도 나 자신이 정말 부끄럽게 느껴졌다.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며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건강을 되찾으면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주어진 이 모든 시간에 최선을 다하자, 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 어머니께도 내게도 자랑스런 사람이 되자'라고 했던 그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 새 모든 것을 잊고 그저 현실에 안주하며 작은 어려움조차 이겨내기 버거워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되면서 내가 얼마나 투정을 부리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내 나약함을 인식하고 치에처럼 강인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번 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가던 치에 그녀가 사랑하는 가족, 연인과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무색하게 암은 어느 새 재발, 흉막에까지 전이 되어 그녀를 힘든 상황으로 몰고 가게 된다. 또 다시 충격받고 힘든 기로에 놓인 치에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암과의 싸움에서 또 한번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투병생활을 시작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여전히 밝은 웃음을 지닌 그녀와 달리 그녀의 몸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여명 餘命,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한달이라는 잔인한 예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안하면서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힘든 투병생활을 밝게 이겨내가는 치에와 그런 그녀의 남은 생이 한달이라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차마 알리지 못한 채 내색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이미 매듭지어진 결말임에도...아주 간절히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 타로와 친구 모모코에 의해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식이 이루어졌다. <여명, 1개월의 신부>라는 책의 제목처럼 여명 1개월을 앞두고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라들의 축복을 받으며 타로와 결혼을 올렸다. 처음에는 죽기 전에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시작된 단순하지만 안타깝기 그지 없는 사진촬영이었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 친구들에 의해 두 사람은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치뤘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아픈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밝게 웃고 말하며 그렇게. 비록 진짜 결혼식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치에와 타로, 그리고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축복한 사람들에게는 그 어느 결혼식보다 아름답고 숭고한, 진정한 결혼식이었다.
내일의 기적을 바라면서도 치에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여명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마음은 더 오래이길 바랐겠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어쩌면 그녀 자신이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지도. 타로의 신부가 되고 싶으면서도 훗날 타로의 곁을 함께 할 사람을 생각해 결혼이라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습이나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투병의지를 보여주고 힘과 용기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인터뷰에서 "지금은 치료하고 있다는 감각이 없다."라고 씁쓸하게 말하는 치에에게서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은연중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암으로 떠나 보냈기에 자신의 상황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더 잘 알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한다. 여명을 안다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서서히 찾아드는 죽음의 시간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두려운 일이테니깐. 그래서 여명을 알릴 지 말지 타로와 마사토가 갈등한 것도 이해가 된다. 치에, 그녀의 마지막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조용히 잠들었듯이 그저 편안했길. 암과의 싸움에 지치고 다가오는 죽음에 불안했을 치에가 아닌 눈부시게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행복했던 치에의 모습으로 눈 감았길.
치에 그녀는 비록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그녀와 교감하는 시간을 가졌고 치에 그녀가 친구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의 아픔이 더 안타까웠고, 어느 새 그녀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사실에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곁에서 지켜본 것처럼 그녀의 환한 미소가 떠오를뿐만 아니라 병중에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던 그녀의 소녀같은 순수함이 전해져왔다.
"저도 그랬지만, 병이란게 자기가 걸리기 전까지는 완전 남얘기같죠. 흔히 부모가 죽고 난 후에야 효도를 하고 싶어진다고 말하는데, 정말로 자기가 병에 걸린 후가 아니면 건강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병에 걸린 후에 건강의 고마움을 깨닫는 건 이미 늦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요. 일찌감치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특히 젊은 사람은 진행도 빠르고, 재발 가능성도 높으니, 젊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건강 관리를 잘 해주었으면 해요." -p116~117
"살아 있다는 건 기적인 것 같아.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 있잖아. 나, 건강해지면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p199
모두가 기적을 바랐지만 기적은 없었다. 치에는 떠났고 남겨진 사람들은 치에를 추모하고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 타로가 어느 새 일상이 된 듯 치에의 아버지 마사토를 찾아가 치에의 이야기를 나누듯 치에는 여전히 모두의 기억 속에 살아 있고, 그녀가 전해준 따뜻하고 소중한 이야기는 그녀를 인터뷰하고 방영한 TBS-TV의 이브닝 파이브에 의해 많은 이들에게 삶의 소중함과 희망을 주었을뿐만 아니라 건강의 중요성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책으로 다시 태어나, 치에와 그녀를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힘든 상황에 처해 힘들어하거나 쉽게 좌절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삶에 대한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용기와 힘을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가시마 치에, 천가지의 은혜라는 그녀의 이름처럼 내가 그녀를 통해서 너무도 값진 은혜를 받은 것처럼. 치에의 말처럼 내일이 온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기적을 좀 더 아름답게 가꾸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