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제주의 무위자연과 오롯이 하나되어 살다가, 너무 일찍 떠나간 장인.  사진 작가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를 통하여 그를 만난다.  평생을 독신으로, 아니다.  보통 사람처럼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요절한 사람이니 '평생' 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뭍에서 태어난 사람이 어느 날, 운명처럼 섬에 매료되어 이십 여 년을 제주의 절경에 동화되어 쉴새없이 셔터를 눌러 댄다.  사진을 찍다가 어느 때 사고를 당하여 죽을지 모르니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데 아무래도 사진이라는 작업에 올인하기 위한 예술가의 변명이지 않을까 싶다.삼백 예순 날을 똑 같은 장소에 매일 나가도 매일 다른 느낌이었다는 데 절대빈곤과 절대고독 속에서 그리고 절대고집으로 그는 사진찍기에만 매진한다.  빗 속에서, 눈보라 속에서, 바람속에서, 생명을 담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한 컷을 담기 위해 오름에서 섬으로, 바다에서 들판으로 그는 항상 분주하다. 그 동안 제주에서 찍은 사진의 필름값만 따져도 이삼 억은 넘을 정도라 하니 그의 작업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대목이다.

 

  그의 마음에는 가족도 친구도 들어 올 자리가 없다.  스스로 먼저 그들을 외면하고 단절한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으며 자신의 궁핍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가슴을 꽉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진 뿐이다.  쌀은 떨어져도 좋다.  하지만 인화지와 필름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핀잔도 참으며 막노동 아르바이트도 서슴치 않는다.  필름만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쌀 살 돈으로 인화지와 필름을 장만하고 허기진 속은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달랜다. 

 

  사진 전시회를 열때마다 찬사로 줄을 이었고 이제는 필름과 인화지 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때 쯤 그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바로 루게릭 병.  카메라를 들 힘도 걸을 수 있는 힘도 점차 사라지고 그의 몸은 퇴화하기 시작한다. 3년을 넘기기 힘들거라는 의사의 말에 마냥 누워서만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창고 안에 가득한 사진을 그냥 곰팡이의 밥이 되게 할 수 없다.  어차피 정해진 삶의 시간이라면 절망을 털고 일어나자.  그래서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의 8칸 짜리 폐교를 빌려서 갤러리를 꾸미기 시작한다.  물론 주위 사람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도시도 아니고 구석진 시골에 있는 갤러리에 사람들이 오겠느냐고 오직 병치료에만 전념하라고.  그러나 그는 귀담아 듣지 않고 손수 공사에 착수한다. 

 

  그의 갤러리 '두모악'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2002년에 드디어 갤러리의 문을 여는데 의외로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현재는 제주도에 가면 한 번쯤 들러야 하는 제주도만의 명소가 되었다.  그는 6년 정도 투병생활을 하다가 2005년,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뼈는 두모악 주변에 뿌려졌다고 한다.  이렇게 멋지게 운영되고 있는 갤러리의 모습을 그가 살아서 함께 하고 있다면 얼마나 흐뭇할까.  하늘은 열정의 예술가를 아무래도 못견디게 시기했나보다.  

  


  책을 다 읽고 맨 뒷장을 보니 갤러리 입장할인권이 붙어있다. 절취해 오는 사람에게 할인이 적용된단다.  나는 거침없이 가위질을 한다.  수첩에 넣어가리라.  당당히 절취한 이 할인권을 내고 직접 그의 사진들을 감상하리라. 참, 그의 사진에는 제목이 없단다.  제목을 달아 놓으면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하여 작가는 제목없는 사진을 전시한다고 했다.  그의 독특한, 그다운 배려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금강 지음 / 불광출판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다운 소통이 있는 글이다.  대중과 미황사의 원활한 의사소통, 건강하고 투명하며 밝고 명랑하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땅끝마을 해남' 그 곳에 있는 아름다운 천년의 고찰 '미황사' 와 그만큼 아름다운 '금강스님'의 이야기.  사찰이라 하면 자칫 대중과 동떨어져 '그들만의 사찰' 이 되기 쉬운데 미황사는 일주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마을로 걸어 나온다.  거짓없는 대지와 산과 바다와 하나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희망과 고민을 나누고 정을 쌓아간다. 그래서 미황사의 주인은 주지스님이라기 보다는 인근 삼동네 주민들이 아닐까 싶다.

 

  언제부터인지 템플스테이(산사체험)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시간이나 만만치 않은 비용문제로 미루고 또 미루었는데 미황사에서의 템플스테이라면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금강스님이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마음 수행의 길,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꿈의 산책로를 거닐며 느리게 느리게 자연속에서 심신의 이완을 느껴보고 싶다.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빠질 수 없다는 운력 (노동)에도 동참하고 싶다.  풀을 뽑고 마당을 쓸고 쓰레기를 줍는 동안 분명 자신의 몸과 마음도 함께 정화되어 개운해질 것이다. 이 또한 자기수행의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폐교위기의 아랫마을 서정분교를 살려낸 일화는 찡한 감동을 일으킨다.  전교생이 다섯 명이던 것을 육십 여 명으로 되살려낸 금강스님의 노력. 사십 여 분이 걸리는 곳에서 통학해야하는  아이들을 위해 예쁜 스쿨 버스를 마련하기까지의 동분서주했던 스님의 발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아이들이 없는 농어촌은 이미 희망을 꿈꿀 수가 없으며 그들은 우리나라는 물론 농어촌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것을 알고 있던 스님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하고 나선다.

 

  미황사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차 한잔과 함께 건내는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  하루에도 어찌나 많은 차를 따르는지 '몸이 차로 가득 차, 바늘로 손끝을 찔러보면 푸른 찻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금강 스님의 말씀,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또 있을까. 미황사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한문학당' 이나 집중수행인 '참사람의 향기' 에서도 꼭 1시간씩의 차마시는 시간을 넣는다고 하니, 스님의 차사랑은 참으로 열렬하다.  스님이 따르는 차 한 잔은 단순한 찻물이 아니라 참다운 소통과 휴식과 치유의 의미가 함께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금강스님이 미황사에서 10년 넘게 주지를 맡아오면서 일궈어 낸 초등 한문학당, 중등문화학교, 템플스테이, 참선 수련회, 작은 음악회 등은 대중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며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낭만 가득한 멋진 순례길을 책 속에 제시해 주는데 따로 공책에 적어두어야겠다.  땅끝마을에서 미황사까지 다섯 시간 정도 걸어와 미황사에 머물겠다고 하면 아무 조건없이 언제든지 쉴 곳을 내어주겠다 하신다.  햇살 좋은 어느 날,  나는 이 책을 배낭에 넣어 매고 스님이 적어 준 순례길을 따라 미황사까지 꼭 닿고 싶다.  그리고 스님께 작설차 한 잔 청해야지.  큰 소리로 장담하셨으니 모른 척 하지는 않으시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왕들의 생로병사
강영민 지음 / 이가출판사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조선의 27대 왕들, 스물 일곱 편의 사극을 보고 난 느낌? 우리에게 익숙하여 친근한 임금에서부터 이름조차 생소할 만큼 재위기간이 짧았던 왕들의 건강이야기와 시대 상황들.  신기한 것은 그 시대상황과 왕의 건강은 무관하지 않다는 것, 왕위 계승을 위한 암투와 정쟁과 외세의 침략, 가정의 불화 등은 왕의 건강을 위협하는 첫번 째 이유가 된다.  손도 까닥하지 않으며 구중궁궐에서의 호의 호식과 절대 권력을 누렸을 그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는데, 읽다보니 나름의 스트레스로 천수를 누리지 못한 왕들이 태반이다.  과유불급이라 과음과 과식, 과색과 용변도 제 손으로 해결하지 않을 만큼의 운동부족 등이 발병의 또 다른 요인이 되어 결국 몸으로까지 나타나기도 하고 부왕의 체질이 유전되어 병을 앓기도 한다. 

 

  조선의 역대 27명의 왕 가운데 60세를 넘긴 왕은 6명에 불과하다.  모든것이 요족한 상황에서 단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에서 말한 잘못된 궁중생활의 습관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당시 의학의 한계를 들 수 있다. 대부분 왕들은 등창이나 중풍, 페결핵, 당뇨 등으로 사망을 하였는데, 특히 종기는 조선왕들을 괴롭혔던 대표적인 질환중의 하나이다.  현대 의학에서야 중병에 들지도 않을만큼 치료가 간단하지만 당시에는 사망의 원인이 되는 무시무시한 병이었던 것이다.  종기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한 왕은 문종, 성종, 효종,정조, 순조 등이다.

 

  여러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겨 우리에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은 풍병,소갈증,등창,각기병으로 심한 고생을 하였고 그 외에도 임질이나 안질을 앓았다고 한다.  한 가지 병이 나으면 또 이어 한 가지 병이 생기는 상황에서도 많은 업적을 이루어 낸 것을 보면 그의 집념과 끈기는 남달라 보인다.  그의 부왕이었던 태종 이방원 역시 많은 병을 앓았다.  빼놓을 수 없는 종기와 풍병과 이질을 앓았으며 팔이 시리고 목이 뻐근한 증상도 갖고 있었다.  왕위 쟁탈전 가운데 우뚝 섰던 사람으로서  피바람을 몰고 다니며 폭풍우처럼 살았으니 편안한 심신으로 한 평생을 누렸을리는 만무하다.

 

  2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에도 세종의 좋은 영향 속에서 자랐던 문종은 여러 치적을 남겼으나 아버지의 체질마저 물려받아 큰 종기로 고통을 받다가 39세 나이로 세상을 뜨게된다.  피고름 나는 종기 하나로 왕이 죽어가야하는 시대였으니 현대 의학의 혜택속에 사는 우리는  그에 비하면 참 행복한 편이다.  조카를 몰아내고 어린 그에게 죽음까지 내렸던 수양대군, 세조는 종기가 등에 풀칠을 하듯 생겨나 썩어갔으며 문둥병 형상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인과응보인가. 사람은 역시 죄짓고는 오래 못사는 것을 보면 세상은 가끔은 공평하기도 하다. 가끔 꿈에 원귀가 나타나 침을 뱉았는데, 그 침방울 튄 곳마다 종기가 생겨 피고름이 났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단다. 

 

  야사에 등장하는 독살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인종,선조,효종,현종,경종,정조,고종 등이 독살설의 주인공이다.  왕권 앞에서는 핏줄도 없다.  권력에 대한 탐욕이 사람을 얼마나 악하고 추하게 만드는지, 겉으로는 화려하고 부족함 없는 궁궐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그런 두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왕이 되고 싶은 사람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타의 조종으로 희생양이 되듯 왕이 되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것이 참 안타깝다.

 

  반면에 당파 싸움으로 아들을 뒤주 속에서 28세의 나이로 죽게 했던 영조, 그는 정작 83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역대 왕 중에 최장수가 되는 셈이다.  그는 과중한 업무 중에도 식사 시간만큼은  꼭 챙겼으며 평소에 인삼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스스로도 자신의 건강비결은 인삼이라고 했으며 어느 해는 1년 동안 먹은 인삼의 양이 20근이 될 때도 있었단다.  그는 70세가 넘어서도 수염과 머리카락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며 피부가 청년시절과 같았고 81세때는 건강이 좋아서인지 빠진 이가 새로 나기도 했단다.  역시 건강 비결은 본인의 철저한 관리가 최우선인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탄 피크닉 민음 경장편 2
이홍 지음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탄 피크닉'  제목만 본다면 한없이 즐거운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어적인 표현이라면 갑자기 씁쓸해지고 만다.  로또!  사람들은 설마하면서도 간절히 '814만 분의 1' 이라는 로또당첨의 행운아가 되고싶어 한다.  그래서 잊지않고 복권을 산다.  되면 운수대통 기적이고 안 돼도 그만이고, 재미지 뭐, 재미.  주인공 은영,은비,은재의 집에서는 이런 말도 안되는 확률의 행운을 얻게되고 '강남으로의 입성'을 실현한다. 

 

  '압구정동의 한양아파트'  금방 쓰러져갈 듯, 재건축을 앞 둔 아파트지만, 이 곳에 산다고 하면 학교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고, 대우도 남달랐으며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이 넘쳐 날때도 이 집이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로또에 당첨이 되고 압구정동으로 옮기면서 은영의 가족은 해체의 맛을 본다.  부모의 이혼, 둘째 은비의 맹목적인 사치로 인한 원조교제, 막내 은재의 학교생활 부적응 등.  뿐만 아니다.  은영의 옆집 부부는 남편의 폭력으로 불화가 끊이질 않고 남편의 폭력을 피해 은재네로 도망오는 여자는 은재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기도 한다.  압구정동 밖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겉으로 보이는 그들을 부러워하겠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생각만큼 행복하지가 않다.

 

  사건의 절정은 은비의 원조교제 대상이던 남자가 은비의 협박에 분노하여 은비네 집에 찾아오면서 오히려 삼남매의 감금에 목숨까지 잃게 된다.  고의적인 살인은 아니었으나 숨을 거둔 남자의 사체를 삼등분하여 삼남매는 골프가방에 최고급 여행용 트렁크에 배낭에 나누어 담고 사체를 유기하기 위하여 예전에 살던 동네 뒷산에서 12월 15일 0시에 만나기로 한다. 

 

 좀 더 행복하기 위하여 돈이 필요했고 로또 당첨이 간절했다.  그런데 그 돈으로 인하여 이 가족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초래하고 만다.  그렇다고 송충이(비강남인)는 솔잎만 먹어야  할까.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자신의 분수는 파악해야하지 않을까. 능력이 되면 입성도 하고 누리면 된다.  그러나 또 강남입성이 행복의 절대조건은 아니지 않은가.  마음먹기에 따라 사람답게 누려야 할 행복은 구석구석 우리가 찾아내기만 하면 여기저기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돈만 많았지 불행을 감수하며 사는 사람들도 강남에도 비일비재할테니까.  다 사람사는 것은 오십보백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행복을 남의 잣대로, 남의 행복을 나의 잣대로 잴 수 는 없는 일! 

 

'붉은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경찰복을 입고 찾아올 청년 (은비에게), 제자에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하기 위해 전화로 따스한 목소리를 남길 스승(은재에게), 그리고 손꼽아 기다려왔던 입사 합격 통보까지(은영에게), 내일 아침(성탄절)이면 그들이 사는 608호로 크리스마스 선물이 도착할텐데.그 세 남매가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억지욕심을 부리면 화를 부르는 법, 그들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운 바다 성산포 우리글대표시선 12
이생진 지음 / 우리글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년 전 겨울, 섬에 대한 열병을 크게 앓았었다.  오매불망 섬에 대한 그리움으로 안절부절.  그럴때 마다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껴 안고 살았다.  당장 떠나면 되었을 것을, 왜 그 때는 속앓이만 하고 있었을까.  이 시집을 구입한 것은 약 20여 년 쯤 된 듯하다.  그래서 해진 쪽은 투명 테이프를  붙여서 읽곤 하였는데.  책꽂이에 늘 서 있는 시집.  이 시집을 재발견하게 된 것은 10여 년 전의 한 토막 추억때문이다.

 

  그때도 12월 쯤해서 겨울의 우도를 찾은 적이 있다.  난생 처음 섬에서 섬을 찾은 것인데 그때의 숨막히는 황홀감은 지금도 잊을 수 가 없다.  그런데 우도 닿는 배에 승선을 하고나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제주도의 날씨는 변덕스러우니까, 금방 그치겠지 했다.  일찍 해가 져서 우도 어느 마을에 숙소를 정하고 잠깐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온다.  바다는 내일 아침 만나기로 하자. 마음놓고 실컷 보기로 하자. 그러나.......,

 

맨 먼저/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귀를 찢기고/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베인 적이 없었다/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이 없었다//  (38 수평선)

 

   밤부터 아침까지 폭풍우에 싸인 우도의 바다.  창문을 통해 멀리 내다본 바다는 포도빛깔이었다. 붉은 포도빛.  지금까지도 나는 그런 바닷빛깔을 본 적이 없다. 정말 붉은 포도주빛깔이었을까.  나의 착시현상은 아니었을까.  더 자세히 봤어야하는데, 신비스러움과 함께 엄습한 두려움. 더 이상 바다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바다구경은 물건너가고 일단 우도를 떠나야했다.  출렁이는 배 안에서의 공포.  그것이 우도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항상 아쉬운 생각. 우도 바다에 대한 갈증.  그래서 꺼내본 것이 '그리운 바다 성산포'  갈증으로 숨이 막힐 듯 당장 해갈이 필요했다.

 

돈을 모았다/바다를 보러간다/상인들이 보면/흉볼 것 같아서/숨어서 간다// (25 바다로 가는 길)

 

 드디어 결행.  그렇게 2년 전 배낭을 꾸리고 우도를 목적으로 떠났다.  배낭 귀퉁이에 이 시집을 끼워 넣고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성산포행 버스를 타고 성산 일출봉에 도착.  10년이 넘은 성산포의 모습은 참 많이도 변했다.  그때는 성산봉에 오르는 길이 철삯으로 되어있어서 어찌나 아슬아슬했던지.  지금은 반듯반듯한 돌계단으로 단장을 하고 수많은 관광객을 맞고 있다.  성산일출봉 꼭데기서 바라다 보이는 장엄한 우도.  또 우도 예찬이 시작된다.  틈나는대로 이 시집을 꺼내 읽었는데, 남들이 보면 대단한 문학인이나 등단을 앞 둔 시인정도로 생각했을지도? 얼른 내려가 우도로 가서는 하룻밤 머문다. 찬찬히 걸어도 보고 자전거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와 했던 심장 쿵쾅거리던 제주바다 여행. 

 

성산포에서는/설교를 바다가 하고/목사는 바다를 듣는다/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성산포에서는/사람보다 바다가 더/잘 산다//   (2  설교하는 바다)

 

  다시 또 겨울이 한창이다.  그 바다 그리움병이 도지려고 한다.  임시방편, 시집을 꺼내읽는다.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 이겨낼 수 없기를!  머지않아 난 제주행 배낭을 꾸릴지도 모르겠다.  제발 그러기를.......,

 

바다에서 돌아오면/가질것이 무엇인가/바다에선 내가 부자였는데/바다에서 돌아오면/가질 것이 무엇인가/바다에선 내가 가질것이 없었는데/날아가는 갈매기도/가진 것이 없었고/나도 바다에서/가진 것이 없었는데/바다에서 돌아가면/가질 것이 무엇인가//    (81 바다에서 돌아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