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거대했다. -327p———요약 다음에 따라오는 배경들이 나릇나릇 깔리는 플롯이 마음에 든다.패전이 명확해지던 나치가 평화 협정을 시도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연합국 빅3 지도자 암살 작전은 무슨 미드에서나 볼 법한 소재인데, 이게 역사적 사실이라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이런 첩보물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나치도 그렇고 구소련도 그랬지만 망한 국가들의 가장 강력한 권력기관의 내부를 들춰보면, 그나마 납득할 만한 시스템이라 생각되는 독재자나 당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은 거의 없고, 결국 극도로 비효율적인 지들 밥그릇 싸움으로 인해 필멸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공통점을 항상 수반한다.문체도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고 사실에 입각한 핵심만 찔러내는 구성이라, 첩보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싫어할 수가 있을까. 나치와 미국의 두 가지 시점에 추가로 영국의 시점까지 포함되었더라면 완벽했을 텐데(사실상 소련이 다 했다) 그리고 마지막 그 유명한 음모론은 첩보소설의 백미.
페어워닝_Fair Warning (마이클 코넬리, 2020)술술 넘어가는 글들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말 오래간만에 제대로 읽히는 범죄 탐사 소설.본인 경력이 없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을 듯한 기자의 디테일한 심리 상태와 저널리즘의 그 어떤 마지노선을 아찔하게 넘나드는 쾌감이 공존하는 이 소설은 맥주 한잔하며 안주와 함께 신나는 미니시리즈를 보는 기분인데, 민감한 개인정보 이슈와 유전공학 소재를 적절히 버무려 가장 대중적인 장르 소설의 표본을 보여준다.
인간은 모든 것이 복합적이고, 끝까지 착한 놈 끝까지 나쁜 놈이 있기나 하나? 그리고 그런 캐릭터에 애정을 쏟긴 어려운 일이다. ‘왕좌의 게임’에서 보았듯이 시대와 배경과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은 휙휙 뒤바뀌고 시점에 따라 원수가 되기도 하고 정의도 사도가 되기도 한다.처음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이런 폭풍 같은 아침드라마가 이미 19세기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이름 때문에 조금 헷갈리긴 한데, 사랑과 복수란 정말 진부한 타이틀도 고전 버프를 받아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필체에 기진맥진 녹다운.신분 상승이 금기시되는 가장 간절한 시대에 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지금 21세기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공식적인 신분제도는 없지만 사회 구조는 엄연히 ‘신분제도화’되어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패배감에 휘둘리는 시대다.———한데 과연 그런 사람들도 저세상에서 행복할까요? 저는 그게 무척 궁금해요 -288p
그로테스크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크리처 에고 싸이킥으로 빈대떡 말아놓고 친한 친구들과 서로 누가 더 쿨한 척 못 알아듣는 대화를 하는지, 내기 걸고 자아를 찾아 떠들고 떠나는 인생의 가위눌림.실상은 오랜 친구들과의 맛없는 맥주 한 잔의 우정들과 달달한 음담패설이 거의 전부, 나머진 미친 것들 나열하기. 그래서 고독과 슬픔과 허무가 폭풍처럼 증폭된다.신기하게도 그로테스크하다는 단어보다 더 어울릴 듯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데, 장면 묘사가 월등히 다양하고 무의미하며 복잡한 텍스트라 더욱 신기하다. 장르적 쾌감은 바닥까지 떨어지지만.. 사실 장르는 꿈속 탐사극이 더 맞는 말 같다. 진행이 느리지만, 역시나 구조는 독창적이고, 후반부 어느 순간 전혀 생각 못 한 반전이란 게 있지만 (그게 반전인지도 모르겠다) 지독하게 불쾌한 그놈의 사랑. 저주받은 가족. 코맥 매카시가 그리는 리바이어던.가장 독하게 못 알아먹는 소설이었다. 지적 허영심을 어디까지 실험할 것인가. 근데 실험할 대상이라도 있는 건가. 지적 허영심이든 네임 밸류이든 후회는 먼지다. 아무튼 읽기 시작하면 무조건 완독을 할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 추천.같이 출간된 스텔라 마리스와 교집합 된 이야기가 있으니 스텔라 마리스를 먼저 보고 패신저를 완독하는 게 좋을 듯(아닌가?)./들어주는 오빠와 떠드는 거 좋아하는 여동생./그놈의 지저스는 강박에 가깝다./몇몇 단어들의 번역은 번역을 하지 않는 게 휠씬 좋아 보인다.———사람들은 늘 우리를 속이지. -68p푼돈에서는 지혜롭고 큰돈에서는 어리석다. -104p책상 램프 갓 안에서 담배 연기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246p하지만 수천 가지 중에서 의미 있는 문제를 골라내는 것조차 지천으로 널린 재능은 아니야. -297p늙기에는 너무 이르고 똑똑해지기에는 너무 늦었어. -449p너는 그냥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사람을 원할 뿐이야. -535p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지만. -543p그건 가정에 기초한 질문이오. 의미 없소. -547p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뇌는 우리를 케어 하기는커녕 죽지도 못하게 -처절하게- 찔끔찔끔 극도의 효율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가두고 훈련시키고 외롭고 비참하게 만든다.이 분 글을 처음 읽고 느꼈던 건 나도 글쓰기를 해 볼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란 뉘앙스의 단어와 전혀 다른 뜻이다. 표현 방식이 친절하지 못한데, 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날 것의 그 고약한 느낌이 있다. 그렇다고 환상문학도 아니라 뚜렷한 정신이 뒤엉켜있다고 해야 되나.생각지도 못한 소재가, 내가 좋아하는 소재가 포함되어 있어 아주 신이 났다. 코맥 매카시가 쓴 과학자라니. 양자역학도 거론하고 오펜하이머, 이중 슬릿도. 소설에서 거론되는 여러 지식들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는 사실에 꽤 뭐랄까 뿌듯한 느낌이었다. 철학은 논외로.코맥 매카시의 단어들은 오탈자가 생기더라도 의도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독보적이다.-근래에 본 가장 멋진 북 디자인.———도움이 되거나 생각난 작품들.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그의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수재나 캐헐런의 ‘가짜 환자, 로젠한 실험 미스터리’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코맥 매카시의 ‘선셋 리미티드‘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더글러스 엠린의 ‘동물의 무기’———자기가 미친 걸 알만큼 제정신이면 자신이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만큼 미친 건 아니니까요. -25p실재의 의미를 정의해주세요. -29p사람들은 결국 세상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걸 파악하게 돼요. -43p그렇지만 자기 문제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세상의 문제가 뭘 의미할 수 있겠어요? -88p하루하루는 길지만 한 해는 짧죠. -94p기쁨은 그와 반대로 고마움조차도 가르치지 않죠. -161p안 괴로운 꿈도 있나요? -222p괜찮나요?괜찮아요.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나을까요?괜찮아요. -237p미치려면 언어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300p이해를 정의해주세요. -31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