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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서현의 우리도시기행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생각이 났다.
나로 하여금 다른 도시의 이야기를 하라고 하지 말라. 바로 이 곳에서 수년동안의 나의 불안, 나의 희망이 그물 안에 얽혀 들었던 이 유일한 도시에 대해서 지껄이게끔 나를 내버려다오. 단정치 못한 커다란 어부처럼, 거대하고 무심한 강변에 자리잡고 앉아 변함없이 부패한 은빛의 어획물을 낚아들이는 이 도시의 모습을 나는 보고 있다. 은 빛깔의 불안을, 부패한 희망을. < 잉게보르크 바하만, <삼십세> 중에서 >
서울 생활 12년째지만, 이 넓은 서울시 안에서 특별히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나 가보고 싶은 곳이 별로 없다. 서울 시내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탁한 공기와 자동차와 시커먼 먼지, 그리고 깨진 타일, 많은 사람들, 그래서 너무 걷기 불편하다는 것 등이다. 이 책에서는 매일 신촌거리를 왔다갔다하면서 영등포를 지나다니면서 대학로에서 친구를 만나면서 내가 느꼈던 편치 못함의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책에 공감이 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지은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건물이 그리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거리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머금었다가 품어내는 스펀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것 때문에 지은이가 그토록 매섭게 이 거리에 독설을 퍼부었던 것 같다. 지은이는 이 거리 자체가 아닌 거기에 담긴 형식주의, 허례허식, 권위주의와 암울한 역사, 압축성장의 그늘에 침을 뱉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의 분노는 이해가 간다. 그러한 분노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우리 나라에 없을 것이다.
'21세기는 그렇게 분노로 시작되어야 한다. 거리를 걸으며 분노하라.'( 301p~302p )
맘껏 분노하자. 그리고 침을 뱉자. 그래서 우리의 거리에 스며든 온갖 나쁜 것들을 다 쫓아내자. 하지만, 지은이의 말대로 21세기를 분노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분노가 아닌 애정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패'했을지 모르지만 이 거리에서 '희망'을 낚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이 거리를 외면하지 않고 애정을 가지고 돌볼 수 있다. 분노는 좌절과 무관심을 낳을 뿐이다. 애정을 가져야만 저자와 모든 사람이 희망하는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이렇게 삭막한 거리를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