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털어내지 못하는 일요일

 

 

속살이라고 드러내었던가

삭히지도 못했다는 말인가

젖빛 막걸리에 벌건 얼굴은

철지난 단풍처럼 흉했었던가

의미란 사족에 불과했었던가

 

늦가을 햇살이 등을 감싸던 날

찻집에서 바라보는 호수 위로

눈 온 뒤 햇살처럼 반짝이는데

아메리카노의 쓴 맛만이 남아

다음날 증명되는 과음처럼 피로해

 

달큰한 짜장은 입에는 부드럽지만

속까지 어루만지지는 못하는데

무가 언다고 밭에 가는 길

그새 무를 뽑는 남편은 덥다며

시든 토마토 그늘이라도 찾아가고

나는 따스한 등으로 쑥갓을 다듬는다

 

일요일에도 공부하려 집에 머무는

아이들을 불러내 해 다 진 저녁에

찾아가는 산 속 산책길의 단풍나무

어느새 발목까지 덮은 나뭇잎들이

늦은 방문을 말없이 받아주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오는구나.

 

 

 

 

 

        11. 10  토요일 저녁을 먹다 딸아이와 말다툼, 서운함에 못마땅함에 나는 관계를 부러  벌리고 있다. 내 정신이 약골일 때 아이의 말을 과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 탓만 하는나. 가끔 싸우지만 아이도 나도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힘이 되어야 하는 거다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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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이지 못하던 마음

 

 

아주 오랫동안 나는 혼자였다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내가 혼자인 때도

마음은 내 안에 붙어있지 못했다

너를 향해 가고 있거나

너에게로 가고 싶어 안달을 했다

마음은 늘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동분서주했다

 

오래된 일과처럼 여전히 혼자인 때

마음이 한 자리에 붙어 있다

한 번도 혼자이지 못하던 마음이

잠잠해진 파도처럼 출렁거림을

멈추고 기웃거리지 않고

수심을 들여다보듯이

마음이 내 안에서 무언가를 했다

 

작고 보잘것 없는 나뭇가지로도

어엿한 둥지를 짓는 대견한 새처럼

나 또한 나의 집을 짓는다

그 집에 온전히 깃들 때쯤엔 

혼자라도 넉넉할 날이 있으리라 

 

 

 

    8.27. 여름, 시를 쓸 수 있게 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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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화해

 

 

조잘거리던 시냇물은

불어난 강처럼 오도 가도 못하는

끊어진 흐름

 

금기가 되어버린 이야기

침묵 속에

참회의 기회를 잃어버린 공범자

 

속으로 가라앉는 무거운 진실

대낮을 견디지 못하는 사랑처럼

불연속적인 공존

 

어둑한 하늘 아래

비를 머금은 땅의 잦아드는 소리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 거리만큼

먼 하늘과 땅처럼

낯익지만 낯선 진실

 

 

 

 

       2014. 9. 3 어제 오후부터 간간히 뿌리던 비가 밤새 내려 아침까지 시끄러웠던 빗소리

                     그쳤지만 하늘은 어둑하니 다 그친 것 같지는 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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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고한 일상

 

 

그녀의 일상은 왠지 나와 다른 것 같아

타인의 삶에 침 흘릴 일이 없을 것 같아

특히나 그녀의 일이 그녀를 빛나게 한다고

생각하면 내 삶은 구멍이 숭숭 난 양말처럼

찬바람이 들어오고 한기가 느껴지곤 해

 

 

나의 일상은 견고하지 못하고 들쭉날쭉해

기웃거림은 재발이 빈번한 암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이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렇게

품질이 균일한 제품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녀에게 정복당한 것 같은 하루가 가고나면

 

 

나에게도 견고한 일상이 주어질지 몰라

허나 기다림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상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도착할 수 없는 곳

나의 일상은 무얼 팔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어느 가게처럼

 

 

아직도 메뉴판을 구성중인지도 몰라

 

 

 

 

   11.19 수요일, 쓰다가 만 것을 이어 쓰다. 시인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고치는 사람이라던데

           그래서 나는 시인이 못 되나 보다. 끄적거리고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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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씁쓸한 관계

 

 

애쓰지 않기 위해

카놀라유 두 병과 참치캔이 세 개 든

동원 선물세트를 들고 가는데

가벼운 선물만큼 준비가 필요해

 

우리들의 만남은 명절과 같아서

때가 되면 만나고

때가 지나면 그뿐인걸

연례행사의 자연스러움이라니

 

추억이란 한낱 껍데기 같고

세월은 그저 먼지처럼

구석으로 찾아 숨어들고

 

돌아와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온종일 추적자처럼 따라 붙어

나이어야 할 나를 방해하는데

 

오도 가도 못하게 갇힌 것이라면

껍데기 같은 추억도

먼지 같은 세월도

등 돌리지는 말자

 

 

     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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