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첫날에

 

 

가을은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영화의 예고편처럼 짧고 강렬한 것

이불을 바꾸고 화분을 들여놓으며

새 영화를 기대하듯

새 계절을 기다려야 한다

 

그 날 오후 찾아간 온라인 쇼핑몰

딸아이 방에 밋밋한 묵은 커튼을 떼고

핑크색 나는 따뜻한 것을 달고 싶어

커튼으로 시작해 침대커버에서 이불로

쇼핑이란 떠돌아다니는 욕구의 향연

 

오늘 하루 목적지 잃고 잘도 헤맸구나

동대문부터 남대문까지 쭉 훑었구나

같은 가게를 몇 번이고 들락날락하고

같은 물건을 몇 번이고 들었다 놨다

주인 눈치 보지 않고 실컷 보았구나

 

그렇게 보고 또 보아도

있으면 좋겠으나 없어도 되는 것을

사기가 힘들어 있는 대로 살자고

생각하며 마치는 온라인 쇼핑.

 

 

    시월 첫날에 쓰다가 만 것을 11.29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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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박 덩굴의 힘

 

 

호박덩굴이 담장을 뒤덮은 뒤꼍

유난히 큰 호박 하나

매달려 있는 모습이 불가사의하다

칡덩굴처럼 질긴 것도 아닌데

그 큰 호박을 지탱하는 호박덩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자세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담장에 매달린 호박을 보다

호박을 매단 호박덩굴을 생각하다

 

 

애초 작은 씨앗이었을 것이

담장을 뒤덮도록 자라

다시 씨앗을 품은 제 열매를

넉넉히 감당하는 덩굴이 있어

호박은 우리에게 오는 것이리라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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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삶은 주름과 같아서           

 

 

나의 삶은 주름과 같아서

한 일주일은 규칙적으로

모양도 일정하게 접히어 있다가

어느 날엔가 접힌 면이 펼쳐져

그 갑갑함을 털어내는 것이다

 

 

나의 삶은 주름과 같아서

반듯하게 잡혀 있는 주름을

보여지는 만큼을 생각하다가

어느 날엔가 보여지지 않는 면을

뒤집어 혁명과 같은 날을 꿈꿔보는 것이다

 

 

 

       11.24. 아침에 걸어가다 주름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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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은 우연과 필연의 산물

 

 

드문 만남은

혼자를 고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쓸쓸하게 침흘리는 것일뿐

 

나의 슬리퍼와 양치통을 찾아

불청객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락스와 꿀과 우유를 사서 나오다

맞닥뜨린 사람

 

조절된 만남은

보류되거나 혹은 연기되거나

무기력해질 뿐

그래서 더 빛나는 우연

약속보다 더 빛나는 우연

 

우리는

필연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대낮의 빈 의자와 테이블 곁에서

 

당신의 모색은 절대진리와 맞닿아있군요

주체성을 잃지 않았어요

저는 상대적인 것만 바라보았네요

필요한 것만을 구해 왔네요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희미한 소리를 들으며

돌아오는데

 

절대진리도

오늘 받은 수박만큼 달고 시원할까요

 

 

      팔월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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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토끼처럼 돌아오고 싶었다

 

   

칠월 어느 아침에 나는 버스를 타고

박물관에 가고 있었다

나는 박물관에 일하러 간다는

감각적이고 가벼운 제목을 부치며

 

보름이 지날 무렵 나는

환불받기 위해 가고 있었다

구매자의 변심에 의한 환불이라고

우기는 이들에게

자라의 말잔치에

환상을 입히며 스스로

헛된 길로 들어섰던 토끼처럼

용궁이란 용왕에게나 좋은 곳

이라는 진실을

용궁에 와서야 깨닫다니

 

그러나

간을 잃지 않기 위해

귀가한 토끼처럼

나는 그렇게 귀가하진 못했다

용궁에 미련이 없다고 말했지만

약속만큼 머물러야 떠날 수 있다는

용왕의 강요된 제안은

무리한 탈출을 낳았다

 

또 한 번 보름이 지났다

깨달은 토끼는

간을 두드리며 학교로 갔다

용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번의 수문을 통과해야 했다

수문지기의 검문 앞에서

당당하게 간을 지켰다고 믿었을 때

한낱 토끼 주제에 오만하였노라는

자라의 달콤한 경고가

애써 지킨 간을 무색하게 했다

 

토끼는 사지에서도 갈 때가 더 빛났거늘

나는 유유히 왔다 표표히 가고 있구나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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