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볼품없는 화분 이야기

 

   

거실 창가를 점령한 큰 화분들

넓은 잎의 키 큰 고무나무들

좁고 긴 잎의 키 큰 행운목

그 사이에 끼지 못한 화분 하나

 

조심성 없이 스칠 때마다

막 틔운 싹이 떨어지기를 몇 번

마침내 한 잎도 남지 않았을 때 

나는 기꺼이 베란다로 내놓았지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무심함을 나무라는 듯  

화분을 들여놓았지

나는 은밀하게 숨겨두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잎 두 잎 새 잎을 내다가 

이전보다 풍성한 잎들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네

 

기다림 없는 인색함

따뜻함 없는 옹색함이

머물던 자리에

인고의 시간이 빛나고 있었네

 

짧은 생각의 날에 잘렸을 것들이여

굳은 생각의 담에 부딪혔을 것들이여

바라노라

오늘처럼만 나를 비웃어주기를

 

 

 

 

        2. 5. 목요일.   

        2.11 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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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세 시가 넘어도 오지 않았네

그조차도 되지 않는다고

그나마도 되지 않는다고

메마른 땅에서 하늘만 보았네

시간은 흘러만 가고

그조차도 상처가 되는 것을

기다리며 나는 알았네

 

어제도 나는 꿈을 꾸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세차게 흔들어 깨우는 손길

손을 뻗었지만 닿을 수 없었네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지만

꿈이란 지독한 중독처럼

끊을 수가 없었네

 

그러나

헤프게 꿈꿔온 그대여,

아직도 꿈꾸고 있다고

서러워 하지 말게나

삶도 꿈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끝내지만 마시게나 

 

 

 

        1. 29. 온종일 흐린 하늘에서 눈이 날리는 듯하더니 그마저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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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깊어가는 중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첫눈을 그리다

겨울을 맞이하더니

추위와 사귀다 보니

그새 해가 바뀌고

잠시 해에 마음 빼앗기니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네

 

방학이 반나마 지나가고

아이들의 한 시기도 가네

봄부터 겨울까지 소리없이

야금야금 커 왔을 아이들

이 겨울이 지나면

이 겨울의 노고가 나이테처럼

너희의 몸 속에 새겨지리라

 

 

 

     1. 21. 겨울이 깊어가고 우리들도 따라가고 있다

             겨울이 지나가는 것처럼 우리도 흔적을 남기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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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후에에서

 

 

내나라 궁궐도 본 적 없는데

남의 나라 궁궐을 구경했네

고도 후에에서 나는 보았네

궁을 에워싼 검은빛 이끼

차라리 초록빛이 나았을까

그보다 더 예스러운 것은 없었네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

우리는 검은 세상에 갇혀

왕의 화려함 따위는 잊었네

 

지나고 나면 왕의 시절도

검은빛 이끼로 남을 뿐

제 빛깔을 잃은 채

이름도 권위도 위엄도

말없이는 느낄 수 없었네

우리는 검은빛으로 물들어

장례식 하객처럼 침잠해

왕의 영화 따위는 잊었네

 

 

 

 

1. 21. 짧은 베트남 여행 일정에 잡혀있던 후에의 고궁들을 돌아본 후에.

       고도 경주에 비유했지만 여러모로 궁 같지 않던 궁.

       높은 습도에 그나마 남은 궁도 검은 이끼에 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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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란 때론 안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꿈속에서 만나는 것처럼

두서없이 불쑥 찾아오는

염려로 속을 태우는 오후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처럼

속으로 안절부절하며

혼자서 마음이 닳는다

 

나는 어느새 별일 없다는

인사를 덕담이라 여기는

사십대 중반을 지나고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며

겨울 한나절을 보낸다

 

낡은 소반 위에 물 한 그릇

올리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던

어린 시절 그 어머니처럼,

나도 이제 그 무엇이 되어

바람을 멈출 수가 없는데

해는 어제처럼 저물고 있다

 

 

 

1. 20. 대한이란다. 절기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처럼, 절기가 무슨 기념일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아 닌가 생뚱맞은 생각이 든다. 절기란 옛사람들의 흔적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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