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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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란 문학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을 읽는 독자는 그 세계관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때 독자는 비록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라도 문학적 세계관에서는 정의로운 세상이 추구되는 것을 바라게 된다. 이에 부응하여 작가는 문학 내에서 정의를 실현한다. 이때의 정의란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거시적 차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선한 인물의 행복, 정당한 평가, 악인의 몰락 등의 미시적 차원이 될 수도 있다. 아침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너무 착하고 순진해서 멍청하고) 답답함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쉽게 악당이라 하자)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모든 드라마의 결론은 항상 그렇지 않은가. 모든 누명을 벗고(혹은 모든 방해들을 정당하게 물리치고)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찾은 주인공은 행복해지고 이를 방해했던 악당은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되는 결말 말이다. 흔히들 말하는 권선징악 역시도 시적 정의의 일부라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그리고 문학의 사회적 가치를 논한다는 책의 설명을 봤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책을 골랐다. 막연하게 생각하기로는 시적 정의의 가치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이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다.


우리는 왜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가. 근대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이 시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법 철학자로서 그간 강단에서 문학 작품을 통해 법에 관해 강의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법과 어떤 관련이 있는걸까.

지금 시대는 온갖 컨텐츠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 속에서 문학이라는 장르는 과연 존속할 가치가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문학에는 문학만의 가치가 있다. 그 어떤 학문보다도 탁월한 점, 인간의 모든 것을 도표화하고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내고자 하는 경제과학과는 차별화되는 점은 문학적 상상력에 있다. 독자가 지닌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 요소로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걸 객관화하려는 경제과학적 태도에 맞서 문학적 상상력을 옹호할 것임을 예고한다. 아니, 어쩌면 이 작업은 단순한 옹호를 벗어나 경제과학을 향한 맹공이 될 수도 있겠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이러한 주제들에 다가가고자 한다. 소설을 내보이고 이에 대해 분석하며.

나는 대체로 장르 자체가(소설이라는 장르) 그 구조의 일반적인 특성들로 인해 시민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감과 연민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 모든 작품들이 시민의식 형성을 위해 똑같이 의미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 소설의 기여가 정치적으로 결실을 맺으려면, 다른 독자와의 대화가 요구되며, 도덕 및 정치 이론의 여러 입장을 반영한 소통을 통해 소설 자체를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작업 역시 필요하다.” (pp.42-43)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너무 당황해서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저자는 공리주의적이고 경제학적인 사고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문학을 왜 봐야 하며 어떻게 봐야하는가 라는 관점 속에서 글을 전개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유 속에서 문학의 위치 짓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문학에 대해 탐탁치 않아 하는 관점들의 눈총들 속에서 문학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상당히 수세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다음 단락이 저자의 입장을 잘 드러내주리라고 본다.


나의 비판은 경제학적 사유 자체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과학적 형태의 추상적 이론이 공적인 삶의 좋은 결과를 생산하는데 결정적이라는 주장을 향해 있는 것도 아니다. (……) 나의 비판은 경제학 및 경제적 합리성의 대안적 개념과 관련이 있다.(p.60)


풀어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라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의 소품(물론 책에는 문학이 매우 중요한 입장에 놓여 있기는 하다)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문학의 뛰어남이나 역할에 있다기보다는 경제적 사유에 있고, 그것은 불완전성을 문학이 보완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그다지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는다.

저자는 고전적 공리주의 이론과 현대의 합리적 선택 이론을 분석(혹은 소개)하고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을 텍스트 삼아 각 이론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되는지 예시한다.

경제학적 사고에 매몰된 그래드 그라인드와 비쩌의 모습을 통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책은 문학을 위한 책은 아니라 여겨진다. 이 책은 경제학적 사고에 물든 사람들에게 문학을 권하기 위한 책 정도로 보인다.

사용된 용어들이 쓸데없이 어렵게 느껴지고 내용조차 쉽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경제학과 그러한 사고 방식들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요소요소 분석하지만 머릿속에 남는 건 그래서 문학이 중요하다는 거냐라는 의문뿐이다.


내가 그러한 의문을 가진 것과 관계없이 이 책은 자신의 목적에 꽤 충실하다. 그래드그라인드가 가진 사고를 검토하며 경제적 공리주의 사유의 문제점들을 언급한다. 그것은 간단한 계산, 산술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축약한다. , 인간을 개별화된 인간이 아닌 하나의 개체로 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기 세 명의 아이들이 있는데 쟤는 철수고, 쟤는 영희고, 쟤는 영수다. 철수는 공부를 잘하는데 어쩌구 저쩌구, 그리고 영희는영수는식이 아니라, 저기 세 명이 있다. 에서 끝나버리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왔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이런 류의 인식은 자연히 인간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떨어뜨린다. 상황을 보지 않고 결과만 보게 된다. 저자는 문학 작품을 통해 이러한 공감과 이해를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등장인물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계회그 희망, 공포 등을 걱정하고 신경 쓰면서, 삶의 신비와 복잡한 일들을 풀고자 애쓰는 그들의 노력에 함께하도록 만든다. 독자의 이러한 참여는 이야기 흐름의 많은 지점에서 명확해진다. 그리고 이는 설령 독자 자신이 실제로 처한 상황과 많이 다르다 하여도, 그들 스스로 장악해야 하는 인간적 삶과 선택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이야기가 많은 점에서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해석하고 평가하고자 하는 노력은 애정 어리면서도 비판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그들을 당대의 세계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책임을 지닌 사회적 주체들로 그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자 삶에서 노동자 계급 문제와 지배자나 리더의 행동에 대해 반드시 감정적이고 실천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데 소설은 자체로 무용하지 않다. 왜냐하면 소설은 독자들에게 그들의 세계를 인식하게 하고, 그 안에서 보다 성찰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pp.81-82)


이처럼 소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독자를 끌어들이고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상상력을 활용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를 통한 도덕적 경험이 상상력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문학 작품을 통해 얻는 것은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감정적 경험이다. 우리가 내린 판단이 명확한 규범이 있는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에 치우친 판단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감정이라는 것은 때로 충동적이고 맹목적이고 인간 관계나 개인의 신체와 건강 등에 결부되어 완벽히 통제하기 힘들게 한다. 이는 결국 비합리성을 초래할 뿐이다.


감정에 대한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분별 있는 관찰자를 언급한다. 그는 편향성을 갖지 않고 객관성을 지닌 사람이다. 또한 사건의 당사자에게 이입하여 각각의 처지와 느낌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분별 있는 관찰자는 우선 하나의 관찰자이다. , 그는 자신이 목격하는 사건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지는 않지만, 그들을 염려하는 친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개인적 안전과 행복에 관계된 감정을 갖거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편향성을 갖지 않으며, 자기 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 객관성을 지니고 살펴본다. 물론 그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정도들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보들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에 편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여과된 것들이다. 다른 한편 그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감정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그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능력 가운데 하나는 그가 머릿속에서 그리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 각각의 처지와 느낌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힘이다.



이 분별 있는 관찰자로 가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문학 작품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시인의 판단이 내려지는 방식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게 하고, 또 그것이 우리 눈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재판관으로서의 시인이라 명하는데, 문학적 재판관은 다른 류의 재판관보다 분별 있는 관찰자이다. 그의 중립성은 자신 앞에 놓인 사건들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고상한 거리 두기를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풍부한 상상력을 겸비한 구체성과 정서적 응대를 바탕으로 그러한 현실을 철저하게 검토하기에 이른다.


이후 저자는 분별 있는 관찰자가 가져야 하는 덕목에 대해 언급하고 바로 그 분별 있는 관찰자가 지닌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문학적 상상력이란 타인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게 되어 그 속에서 타인이 처한 상황에서의 구체적인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상력이 없다면타인의 상황은 그저 일반적 의미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판례들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이 법에 적용된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다.

문학적 상상력 없이는 당사자들을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게 된다. 법의 집행이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법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무자비한 폭력이 될 것이다.

저자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재판관은 그 스스로 문학적 상상력을 배양하여 엄격한 헌법적 제약에 따라 심판하는 자인 듯하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어려웠다. 법에 대한 내용과 공리주의적 내용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기에어려움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아마도 저자는 예상 독자층을 법학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설마 문학도가 읽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는지 주를 이루는 내용들이 어떤 재판관이 좋은 재판관인가. 그런 재판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였다.



썩 기분 좋은 독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보다 1년 쯤 전에 읽었던 책이다. 기억이 나지 않아 책을 뒤적이면서 느낀 건 당시에 내가 느꼈던 어떤 난해함? 문장들이 만들어냈던 미로 속에서 걸핏하면 빠졌던 것 같다. 특히 공리주의, 경제학적 공리주의 등을 나눠 설명할 때 그런 기분을 많이 느꼈다. 요점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을 사고, 또 읽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책의 내용을 떠나서(내용은 분명 좋은 것 같다) 내가 원했던 책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그렇다.

혹시 읽으실 분들은 참고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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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연애 문학동네 시인선 67
김윤이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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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의 좁힐 수 없는 간극으로 인해 시인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두서 없이 내뱉는 듯한 말들이 그런 느낌을 자아낸다.
시인이 생각하는 시인이란 상실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이별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이미 입혀진 것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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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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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사라짐을 담보한다. 사람도, 짐승도, 사물도. 결국 사라질 것이라면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라짐 이후에 무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알 수 없기에 대부분의 존재는 사라짐에서 끝난다. 왕후장상도 별 수 없고, 노력해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역사는 이 지점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사라지고 나서도 존재를 남기는 것이 무덤이라면 역사는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역사에는 사라짐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죽을 뿐이고, 그 죽음은 끝을 고하지 않는다. 다만 한 생의 완결을 의미한다. 사라짐에 대한 저항, 소멸에 대한 불멸의 기록이 바로 역사의 실체가 아닐까.

현의 노래는 왕들의 상여와 순장의 광경을 통해 사라짐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순장자들은 묵묵히 자신의 무덤으로 들어간다. 때로 저항하고, 도망치기는 이들도 있지만 결국 다시 잡혀 순장된다. 묵묵히 받아들이든 저항하든, 혹은 도망치든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는 못하는 모습은 운명의 가혹함이나 그에 따른 슬픔을 유도하기보다는 운명에 대해 체념적이게 만든다. 살아있다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죽으면 끝인 것을. 쓸쓸하고 허무하다.

이 쓸쓸함과 허무함은 현의 노래의 지배적 정서이다. 무너지는 나라 가야와 병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왕과 태자,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무수히 많은 병사들, 고을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백성들까지 온통 저물어가는 것들이 삶을 쓸쓸하게 만든다면 전쟁터를 돌며 병장기를 수집하는 우륵의 모습은 허무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 야로의 군사들은 창으로 시체를 뒤적이며 죽은 자들이 놓친 병장기들을 거두었다. 쇠도끼와 창은 자루를 빼버리고 쇠덩이만을 챙겨서 한곳에 모았다. 도끼에 맞아 우그러진 방패들도 거두었다. 썩어서 흐물거리는 사체의 팔다리를 칼로 쳐내고 갑옷과 투구를 벗겼다. 갑옷에 묻어나는 살점들을 흙으로 비벼서 떨어냈다. 죽은 말을 뒤집어놓고 안장을 벗기고 재갈, 등자, 말방울, 말 얼굴가리개, 말 가슴가리개들을 떼어냈다. 날이 저물자, 군사들은 벌판 여기저기 횃불을 세웠다. 어둠 속에서 불빛에 너훌거리는 그림자들이 밤새도록 시체를 뒤지며 쇠붙이를 수거했다. (p.31)

 

전사자들은 죽은 인간이 아니라 사체에 불과하다. 죽은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에 망자에 대한 예의나 망설임 따위는 없다. 군사들의 모습은 다분히 기계적이다. 수거된 쇠붙이들은 야로에 의해 새로운 병장기가 된다. 도끼가 되고, 창이 되고, 투구가 되고, 갑옷이 된다. 망가지고 녹이 슬어도 쇠는 다시 쇠로 고쳐 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망가지면 고쳐 쓸 수가 없다. 몸져누운 왕이, 태자가 결국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듯, 다리를 절던 우륵이 결국 걸을 수도 없게 되듯.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팔다리가 잘린 사람은 팔다리가 없이 살아야 한다. 쇠와 달리 망가지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미약한가. 존재했던 흔적마저 남김없이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닐까. 신라가, 가야가, 백제가 그토록 싸우고 뺏고 뺏기며 확장하는 영토란 것들도 결국엔 무의미하지 않을까. 어차피 얻어 봐야 모두 잃을 것들.

우륵은 말한다. “니문아, 강이란 참 좋구나.” “살아 있는 것들로 더불어 살아 있으되 더 이상 그것들을 어찌해볼 수 없는 체념이나 단절의 신음같은 그 말은 사실 그 자체로서 긍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륵은 소리에 마음을 의탁하려하지 않고 그저 소리로서 들으려 한다. 그래서 그에게 소리는 곱거나 추하지 않다. 소리는 그저 덧없는 한순간의 떨림일뿐이다.

야로의 쇠 역시 마찬가지이다. 쇠에는 주인이 없고 그저 흐를 뿐이다. 쇠의 흐름을 위해 야로는 가야의 야장이면서 백제와 신라로 쇠를 보낸다. 그리고 전장의 흔적들을 통해 다시 쇠를 연구한다. 그렇게 쇠붙이는 싸움터에서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쇠붙이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야로가 추구하는 것은 쇠의 극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륵이 세상을 담을 금을 만들어 소리의 극을 추구하고자 했듯이.

그러나 우륵은 신라에 귀순되었지만 야로는 죽임을 당했다. 주인 없는 쇠를 자신의 것인양 착각한 이사부에 의해. 이사부에게는 피 흘리는 세상을 가지런히 정돈해주는 하나의 질서가 필요했다. 이사부가 가고자 하는 길은 바로 그 질서를 향해 나 있다. 이사부는 질서를 명목으로 수많은 고을들을 부수고 뺏고 뺏기었다. 그렇게 전쟁을 통해 갈기갈기 찢어진 세상을 이어 붙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런 세상에는 질서를 세우고 다스릴 주인이 필요하게 마련이고, 그 주인은 다름 아닌 왕일 것이다. 주인이 있는 세상에서 주인이 없는 쇠는 위험하다. 언제 주인의 목을 노릴지 모른다. 그러나 소리는 주인이 없을지언정 주인의 목을 노리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야로는 죽을 수밖에 없고, 우륵은 살 수도 있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평생 동안 질서를 세우기 위해 내달렸으나 이사부에게 남은 것은 낯섦과 회한뿐이다.

 

다시 젊은 날의 영일만이 이사부의 눈앞에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아수라를 건너가야 이 세상은 하나의 정돈된 질서로 아늑할 수 있으랴. 아아, 나는 너무 늙었구나…… (P.172)

 

…… 땅 위에 이런 나라가 있는가. 이런 나라가 가능한가. 여기가 나의 나라였던가. 나는 어디에 와 있는가…… (P.182)

 

이사부의 대척점에 야로와 우륵이 있다.

 

쇠는 날에서 완성되는 것이오. 그것은 병장기와 연장이 매한가지요. 날은 한없이 얇아져서, 없음을 지향하는 것이오. 날은 빈 것이오. 그러나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서 가장 확실히 있는 것이오. 또 그 위태로운 선 위에서 한없이 단단해야 하는 것이오. 날은 쇠의 혼이라 할 수 있소. 그러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소. (p.197)

 

…… 소리는 본래 살아 있는 동안만의 소리이고,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인 것이오. …… 집사장께서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헤아리지 못하시는구려. …… 살아 있는 동안의 이 덧없는 떨림이 어찌 능침을 평안케 하고 북두를 진정시킬 수가 있겠소. 소리가 고을마다 다르다 해도 쇠붙이가 고을들을 부수고 녹여서 가지런히 다듬어내는 세상에서 고을이 무너진 연후에 소리가 홀로 살아남아 세상의 허공을 울릴 수가 있을 것이겠소? 모를 일이오. 모를 일이로되, 소리는 본래 소리마다 제가끔의 울림일 뿐이고 또 태어나는 순간 스스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어서, 쇠붙이가 소리를 죽일 수는 없을 것 아니겠소? 죽일 도리가 없을 것이고, 죽여질 리가 없지 않겠소? 그 또한 모를 일이로되, 아마도 그러하지 않겠소…… (p. 93-94)

 

이사부가 고을을 얻기 위해 애쓰며 전쟁을 했다면, 우륵과 야로는 그 극을 추구했지만 애써 만든 금과 병장기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소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었다. 현의 그 덧없는 떨림의 순간이 중요하고,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가장 확실히 있는 것이 중요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한다는 것.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망가진 병장기가 다시 새로운 병장기로 태어나듯, 현의 떨림을 물고 새로운 소리가 태어나듯. 만약에 앞선 것의 사라짐이 없다면 새로운 병장기가 없을 것이고, 사라지지 않는 소리들로 인해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소음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 역시도 우륵과 야로의 그 사라짐이 아니었다면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 본문의 페이지 수는 절판된 '생각의 나무' 출판사 판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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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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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주저리주저리 

 

학부생 때의 일이다.
문학도였던 나는 꽤나 열성적으로 철학 서적 및 각종 사상서들을 읽어 댔다. 당시로서는 꽤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슬라보예 지젝, 장 뤽 낭시, 웬디 브라운,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부터 장 보드리야르, 조르주 바타이유, 미셸 푸코, 자크 라캉, 프로이트까지 한 번쯤 들어봤겠다 싶은 학자들의 글은 꼬박 한 권 이상씩은 읽었다(아, 자크 랑시에르와 자크 데리다, 니체는 읽지 않았다. 혹시 또 모른다. 그 외에도 더 많은 학자들을 빠뜨렸는지..)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가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는 내용은 쥐꼬리만큼도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한 시간 동안 열 페이지에서 스무 페이지 남짓한 분량을 갖고 머리 싸매면서 끙끙댔으니 본인의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할 터이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읽었다. 이거 끝나면 다음 거로, 그 다음 거로 꾸준히 넘어가면서.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근성 하나는 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에는 교수님에게 하소연을 했다. 아무래도 이해도 되지 않는 글들을 읽고 있느라 좀 지쳤었나 보다. 그러자 교수님 왈, 다른 사람들은 이 책들을 완벽하게 이해했을 거 같아? 못 해~.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이 책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것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끝까지 다 읽었으면 된 거라고. 전체 내용 중 일부분이라도 이해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라고. 어차피 전공자도 아니니 너무 이해하려 애쓰지 말라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 말은 이후에 내가 학술서들을 읽는데 있어서 꽤나 큰 지침 역할을 해왔다. 책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결국 끝까지 읽어냈고, ‘와, 나 이거 읽었다’라는 만족감을 느꼈다.
이번 책 『젠더 트러블』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엄청 어렵다. 뭔 소리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혹여나 깊이 있는 감상평을 원하시는 분들은 지금이라도 이 글을 그만 읽어주시기 바란다. 더불어 어렵고 딱딱한 내용이라면 질색을 하시는 분들, 학술서라면 치가 떨리는 분들, 그리고 엄청 대단한 사람들만 이런 책 읽는 줄 아시는 분들도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자신감을 가져 이런 책들에 도전해 주시길 바란다. 도무지 내용이 이해가 안 돼서 인터넷이라도 찾아볼라 치면 당최 찾아볼 수가 없다. 다 같이 읽고 다 같이 감상평을 남겨 서로서로 공유해주셨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이다.

 

 

2. 주디스 버틀러와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자가 여자고, 동성애자라는 사실 역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 책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사실 또한.
흔히들 주디스 버틀러를 퀴어 이론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또한 20세기 페미니즘 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녀를 이런 입지에 올려놓은 것은 그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여성이 사회적 약자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동성애자는 어떤가?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이종(異種) 취급을 받으며 온갖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그 시선이 많이 누그러졌다 하더라도 그들을 위한 법적·사회적 안전망은 전무하다시피하며, 오히려 사회 내 이질적 존재로 구분하여 낙인찍고 처단하려는 것이 보다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은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녀는 사회적 약자이자 사회적 일탈자로서의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3.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부터 본론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책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본론은 서두보다 짧아질지도 모른다. 더구나 4~5개월에 걸쳐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해했던 내용마저 까먹는 불상사가 일어났다.(이래서 메모가 중요하다) 그러니 여기서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보다는 인상 깊었던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의 내용이 전개되는 방식은 이렇다.
1. 지금까지 꽤나 타당하다고 생각되어온 특정 이론가의 이론을 소개한다.
2. 저자가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의문점을 제시한다.
3. 비슷한 주제의 다른 이론가의 이론을 소개한다.
4. 역시 저자가 의문점을 제시한다.

 

이렇게 1~4가 끝없이 반복되면서 내용이 전개된다. 각종 이론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저자의 의견을 뒷받침할 수 있고 저자가 지닌 사고의 깊이를 알 수 있다는 데서 꽤나 좋은 방식임에 틀림없지만, 여차하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놓치게 된다는 데서 꽤나 독자의 신경을 쓰이게 하는 방식이다.
특히나 이 책처럼 보부아르, 위티르, 이리가레, 크리스테바, 라캉, 프로이트, 푸코, 데리다, 마르크스, 레비-스트로스 등 각 분야에서 한 가닥쯤 한다는 사람들의 이론을 끌어오면 더욱 난해해진다. 가뜩이나 주디스 버틀러 자신 역시도 상당히 난해하게 글을 쓰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난독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저자는 먼저 성별 주체를 섹스와 젠더로 나누는 구분법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섹스는 생물학적 성이고, 젠더는 문화적 성인가? 저자는 이에 반박한다.

 

아마도 ‘섹스’라 불리는 이 문화적인 구성물은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섹스와 젠더는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p.97)

 

그렇기 때문에 섹스와 젠더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저자는 ‘여성’ 자체를 담론으로 끌어온다. 이유는 생물학적 차이가 어째서 문화적 차이를 수반해야만 하는가. 라는 관점의 논의는 결국 동음이의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담론은 성립되지를 않는다. 이후 보부아르와 이리가레의 이론을 거쳐 위티그의 이론에 이르러 이러한 이분법의 책략을 드러낸다. 남/녀의 구분을 통해 강제적 이성애 제도를 구성하며, 또한 남자를 ‘보편적 인간’으로 여자를 ‘젠더’로 만든다는 것이다. 즉 남성이 지배적인 장에서 여성은 그저 하나의 차이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남성은 딱히 구분해 줄 필요가 없지만 여성은 구분해줘야 했다.
저자는 여기서 위티그를 인용하며 이런 여성 억압적 구조가 레즈비언에 의해 붕괴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레즈비언은 성을 갖지 않고 성의 범주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남/녀의 구분 자체가 강제적 이성애 제도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는 레즈비언은 성의 범주를 초월한다고 보는 듯하다)

 

하여 위티그에게 우리는 여성(female)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좀더 과격하게 말해서, 우리는 선택만 하면 여자도 남자도 아닌 것으로, 또 여성도 남성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사실상 레즈비언은 세 번째 젠더로 나타나거나, 혹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기술이라는 안정된 정치적 범주로서의 섹스와 젠더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는 범주로 나타난다. (p.296)

 

성의 범주와 당연시된 이성애 제도야말로 구성물이며,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규정된 환영물이거나 ‘페티시’이다. 이들은 자연스러운 범주가 아니라 정치적인 범주이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에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이라고 입증된 범주이다. (p.323)

 

보부아르뿐 아니라 위티그에게도 여성이 된다는 것은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만, 이 과정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남자로도 여자로도 진실하게 묘사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어떤 가설적인 ‘제3의 성’도 아니며, 이분법을 초월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대신 그것은 더 이상 이분법이란 의미가 통하지 않는 지점까지 전제되고 확산되는, 어떤 내적 전복력이다. (p.324)

 

 


4. 끝내며

 

전체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읽었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 책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글을 적는다고 몇 차례나 뒤적이다보니 나름의 관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참 적기를 잘 했네요.
제가 읽은 바로 주디스 버틀러는 먼저 남성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보편적 인간이 되었고, 또한 어떻게 여성을 구분시켰는지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오독일 수 있겠습니다마는...
버틀러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여성적 주체’ 자체가 페미니즘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남성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스스로가 ‘여성’임을 내세운다는 것은 스스로 약자임을 내거는 행위니까요. 일전에 읽은 웬디 브라운의 『관용』에서 이 비슷한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읽은 지가 좀 오래되어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성이 권리를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남성들이 자신들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아닐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페미니즘이 나왔는데, 페미니즘은 관용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내용이었던 것도 같고... 정 반대되는 뜻일 수도 있지만 우선 글 내용과는 관계가 있어서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아니라 남/녀를 초월하는 어떤 주체가 필요하다는 얘기 같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전복이 일어나고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참 온당한 지적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형 페미니즘(저는 여성가족부에서 시행하는 여권 신장 제도들을 이렇게 부릅니다)을 싫어하는데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의무와 책임도지지 않으려 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만 챙겨 먹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남성이라서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구요.
하지만 분명히 잘못 됐다고 느끼는 것은 생리 휴가 같은 참신한 발상을 하기 전에 먼저 육아 휴직이나, 출산 휴가가 제대로 지켜지는 근무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휴직을 못하거나 휴직 후 해고 당하는 사태가 빈번한데 지켜지지도 못한 생리 휴가를 만드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 이전에 먼저 이전의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물론 남성들 역시도 근무 여건이 좋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여성의 휴가, 휴직을 지키도록 엄중히 규제한다면 역으로 남성들의 근무 여건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외려 정착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제도를 만드니 남성들의 반발만 사고 역효과가 나는 것 같아요. 요즘도 취업할 때 남녀 차별이 존재하는 상황인데 이런 제도들이 오히려 여성의 발목을 붙잡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여가부에서 시행해왔던 제도들은 전부 엘리트 여성(위 제도들이 지켜질 수밖에 없는 곳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그 부처의 존재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 대우의 양극화가 생긴다면 여권 신장의 의미도 퇴색하겠죠.
이런 책을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저의 성향이 이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저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워낙 어려웠던 책이라 제가 오독을 했을 가능성 또한 있습니다만, 나름대로 얻은 것 또한 있는 것 같습니다. 덧붙여 페미니즘 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여성가족부)
부디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이 아닌 인간을 위한 페미니즘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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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비교당하며 힘겹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혼자인 편이 더 행복할수도....
모든 것에서 떠나 후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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