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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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주저리주저리 

 

학부생 때의 일이다.
문학도였던 나는 꽤나 열성적으로 철학 서적 및 각종 사상서들을 읽어 댔다. 당시로서는 꽤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슬라보예 지젝, 장 뤽 낭시, 웬디 브라운,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부터 장 보드리야르, 조르주 바타이유, 미셸 푸코, 자크 라캉, 프로이트까지 한 번쯤 들어봤겠다 싶은 학자들의 글은 꼬박 한 권 이상씩은 읽었다(아, 자크 랑시에르와 자크 데리다, 니체는 읽지 않았다. 혹시 또 모른다. 그 외에도 더 많은 학자들을 빠뜨렸는지..)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가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는 내용은 쥐꼬리만큼도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한 시간 동안 열 페이지에서 스무 페이지 남짓한 분량을 갖고 머리 싸매면서 끙끙댔으니 본인의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할 터이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읽었다. 이거 끝나면 다음 거로, 그 다음 거로 꾸준히 넘어가면서.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근성 하나는 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에는 교수님에게 하소연을 했다. 아무래도 이해도 되지 않는 글들을 읽고 있느라 좀 지쳤었나 보다. 그러자 교수님 왈, 다른 사람들은 이 책들을 완벽하게 이해했을 거 같아? 못 해~.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이 책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것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끝까지 다 읽었으면 된 거라고. 전체 내용 중 일부분이라도 이해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라고. 어차피 전공자도 아니니 너무 이해하려 애쓰지 말라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 말은 이후에 내가 학술서들을 읽는데 있어서 꽤나 큰 지침 역할을 해왔다. 책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결국 끝까지 읽어냈고, ‘와, 나 이거 읽었다’라는 만족감을 느꼈다.
이번 책 『젠더 트러블』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엄청 어렵다. 뭔 소리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혹여나 깊이 있는 감상평을 원하시는 분들은 지금이라도 이 글을 그만 읽어주시기 바란다. 더불어 어렵고 딱딱한 내용이라면 질색을 하시는 분들, 학술서라면 치가 떨리는 분들, 그리고 엄청 대단한 사람들만 이런 책 읽는 줄 아시는 분들도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자신감을 가져 이런 책들에 도전해 주시길 바란다. 도무지 내용이 이해가 안 돼서 인터넷이라도 찾아볼라 치면 당최 찾아볼 수가 없다. 다 같이 읽고 다 같이 감상평을 남겨 서로서로 공유해주셨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이다.

 

 

2. 주디스 버틀러와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자가 여자고, 동성애자라는 사실 역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 책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사실 또한.
흔히들 주디스 버틀러를 퀴어 이론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또한 20세기 페미니즘 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녀를 이런 입지에 올려놓은 것은 그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여성이 사회적 약자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동성애자는 어떤가?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이종(異種) 취급을 받으며 온갖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그 시선이 많이 누그러졌다 하더라도 그들을 위한 법적·사회적 안전망은 전무하다시피하며, 오히려 사회 내 이질적 존재로 구분하여 낙인찍고 처단하려는 것이 보다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은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녀는 사회적 약자이자 사회적 일탈자로서의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3.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부터 본론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책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본론은 서두보다 짧아질지도 모른다. 더구나 4~5개월에 걸쳐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해했던 내용마저 까먹는 불상사가 일어났다.(이래서 메모가 중요하다) 그러니 여기서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보다는 인상 깊었던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의 내용이 전개되는 방식은 이렇다.
1. 지금까지 꽤나 타당하다고 생각되어온 특정 이론가의 이론을 소개한다.
2. 저자가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의문점을 제시한다.
3. 비슷한 주제의 다른 이론가의 이론을 소개한다.
4. 역시 저자가 의문점을 제시한다.

 

이렇게 1~4가 끝없이 반복되면서 내용이 전개된다. 각종 이론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저자의 의견을 뒷받침할 수 있고 저자가 지닌 사고의 깊이를 알 수 있다는 데서 꽤나 좋은 방식임에 틀림없지만, 여차하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놓치게 된다는 데서 꽤나 독자의 신경을 쓰이게 하는 방식이다.
특히나 이 책처럼 보부아르, 위티르, 이리가레, 크리스테바, 라캉, 프로이트, 푸코, 데리다, 마르크스, 레비-스트로스 등 각 분야에서 한 가닥쯤 한다는 사람들의 이론을 끌어오면 더욱 난해해진다. 가뜩이나 주디스 버틀러 자신 역시도 상당히 난해하게 글을 쓰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난독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저자는 먼저 성별 주체를 섹스와 젠더로 나누는 구분법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섹스는 생물학적 성이고, 젠더는 문화적 성인가? 저자는 이에 반박한다.

 

아마도 ‘섹스’라 불리는 이 문화적인 구성물은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섹스와 젠더는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p.97)

 

그렇기 때문에 섹스와 젠더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저자는 ‘여성’ 자체를 담론으로 끌어온다. 이유는 생물학적 차이가 어째서 문화적 차이를 수반해야만 하는가. 라는 관점의 논의는 결국 동음이의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담론은 성립되지를 않는다. 이후 보부아르와 이리가레의 이론을 거쳐 위티그의 이론에 이르러 이러한 이분법의 책략을 드러낸다. 남/녀의 구분을 통해 강제적 이성애 제도를 구성하며, 또한 남자를 ‘보편적 인간’으로 여자를 ‘젠더’로 만든다는 것이다. 즉 남성이 지배적인 장에서 여성은 그저 하나의 차이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남성은 딱히 구분해 줄 필요가 없지만 여성은 구분해줘야 했다.
저자는 여기서 위티그를 인용하며 이런 여성 억압적 구조가 레즈비언에 의해 붕괴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레즈비언은 성을 갖지 않고 성의 범주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남/녀의 구분 자체가 강제적 이성애 제도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는 레즈비언은 성의 범주를 초월한다고 보는 듯하다)

 

하여 위티그에게 우리는 여성(female)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좀더 과격하게 말해서, 우리는 선택만 하면 여자도 남자도 아닌 것으로, 또 여성도 남성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사실상 레즈비언은 세 번째 젠더로 나타나거나, 혹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기술이라는 안정된 정치적 범주로서의 섹스와 젠더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는 범주로 나타난다. (p.296)

 

성의 범주와 당연시된 이성애 제도야말로 구성물이며,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규정된 환영물이거나 ‘페티시’이다. 이들은 자연스러운 범주가 아니라 정치적인 범주이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에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이라고 입증된 범주이다. (p.323)

 

보부아르뿐 아니라 위티그에게도 여성이 된다는 것은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만, 이 과정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남자로도 여자로도 진실하게 묘사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어떤 가설적인 ‘제3의 성’도 아니며, 이분법을 초월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대신 그것은 더 이상 이분법이란 의미가 통하지 않는 지점까지 전제되고 확산되는, 어떤 내적 전복력이다. (p.324)

 

 


4. 끝내며

 

전체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읽었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 책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글을 적는다고 몇 차례나 뒤적이다보니 나름의 관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참 적기를 잘 했네요.
제가 읽은 바로 주디스 버틀러는 먼저 남성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보편적 인간이 되었고, 또한 어떻게 여성을 구분시켰는지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오독일 수 있겠습니다마는...
버틀러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여성적 주체’ 자체가 페미니즘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남성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스스로가 ‘여성’임을 내세운다는 것은 스스로 약자임을 내거는 행위니까요. 일전에 읽은 웬디 브라운의 『관용』에서 이 비슷한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읽은 지가 좀 오래되어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성이 권리를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남성들이 자신들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아닐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페미니즘이 나왔는데, 페미니즘은 관용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내용이었던 것도 같고... 정 반대되는 뜻일 수도 있지만 우선 글 내용과는 관계가 있어서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아니라 남/녀를 초월하는 어떤 주체가 필요하다는 얘기 같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전복이 일어나고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참 온당한 지적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형 페미니즘(저는 여성가족부에서 시행하는 여권 신장 제도들을 이렇게 부릅니다)을 싫어하는데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의무와 책임도지지 않으려 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만 챙겨 먹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남성이라서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구요.
하지만 분명히 잘못 됐다고 느끼는 것은 생리 휴가 같은 참신한 발상을 하기 전에 먼저 육아 휴직이나, 출산 휴가가 제대로 지켜지는 근무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휴직을 못하거나 휴직 후 해고 당하는 사태가 빈번한데 지켜지지도 못한 생리 휴가를 만드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 이전에 먼저 이전의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물론 남성들 역시도 근무 여건이 좋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여성의 휴가, 휴직을 지키도록 엄중히 규제한다면 역으로 남성들의 근무 여건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외려 정착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제도를 만드니 남성들의 반발만 사고 역효과가 나는 것 같아요. 요즘도 취업할 때 남녀 차별이 존재하는 상황인데 이런 제도들이 오히려 여성의 발목을 붙잡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여가부에서 시행해왔던 제도들은 전부 엘리트 여성(위 제도들이 지켜질 수밖에 없는 곳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그 부처의 존재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 대우의 양극화가 생긴다면 여권 신장의 의미도 퇴색하겠죠.
이런 책을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저의 성향이 이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저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워낙 어려웠던 책이라 제가 오독을 했을 가능성 또한 있습니다만, 나름대로 얻은 것 또한 있는 것 같습니다. 덧붙여 페미니즘 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여성가족부)
부디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이 아닌 인간을 위한 페미니즘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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