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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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적 정의란 문학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을 읽는 독자는 그 세계관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때 독자는 비록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라도 문학적 세계관에서는 정의로운 세상이 추구되는 것을 바라게 된다. 이에 부응하여 작가는 문학 내에서 정의를 실현한다. 이때의 정의란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거시적 차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선한 인물의 행복, 정당한 평가, 악인의 몰락 등의 미시적 차원이 될 수도 있다. 아침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너무 착하고 순진해서 멍청하고) 답답함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쉽게 악당이라 하자)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모든 드라마의 결론은 항상 그렇지 않은가. 모든 누명을 벗고(혹은 모든 방해들을 정당하게 물리치고)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찾은 주인공은 행복해지고 이를 방해했던 악당은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되는 결말 말이다. 흔히들 말하는 권선징악 역시도 시적 정의의 일부라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그리고 문학의 사회적 가치를 논한다는 책의 설명을 봤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책을 골랐다. 막연하게 생각하기로는 시적 정의의 가치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이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다.


우리는 왜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가. 근대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이 시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법 철학자로서 그간 강단에서 문학 작품을 통해 법에 관해 강의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법과 어떤 관련이 있는걸까.

지금 시대는 온갖 컨텐츠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 속에서 문학이라는 장르는 과연 존속할 가치가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문학에는 문학만의 가치가 있다. 그 어떤 학문보다도 탁월한 점, 인간의 모든 것을 도표화하고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내고자 하는 경제과학과는 차별화되는 점은 문학적 상상력에 있다. 독자가 지닌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 요소로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걸 객관화하려는 경제과학적 태도에 맞서 문학적 상상력을 옹호할 것임을 예고한다. 아니, 어쩌면 이 작업은 단순한 옹호를 벗어나 경제과학을 향한 맹공이 될 수도 있겠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이러한 주제들에 다가가고자 한다. 소설을 내보이고 이에 대해 분석하며.

나는 대체로 장르 자체가(소설이라는 장르) 그 구조의 일반적인 특성들로 인해 시민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감과 연민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 모든 작품들이 시민의식 형성을 위해 똑같이 의미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 소설의 기여가 정치적으로 결실을 맺으려면, 다른 독자와의 대화가 요구되며, 도덕 및 정치 이론의 여러 입장을 반영한 소통을 통해 소설 자체를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작업 역시 필요하다.” (pp.42-43)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너무 당황해서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저자는 공리주의적이고 경제학적인 사고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문학을 왜 봐야 하며 어떻게 봐야하는가 라는 관점 속에서 글을 전개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유 속에서 문학의 위치 짓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문학에 대해 탐탁치 않아 하는 관점들의 눈총들 속에서 문학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상당히 수세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다음 단락이 저자의 입장을 잘 드러내주리라고 본다.


나의 비판은 경제학적 사유 자체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과학적 형태의 추상적 이론이 공적인 삶의 좋은 결과를 생산하는데 결정적이라는 주장을 향해 있는 것도 아니다. (……) 나의 비판은 경제학 및 경제적 합리성의 대안적 개념과 관련이 있다.(p.60)


풀어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라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의 소품(물론 책에는 문학이 매우 중요한 입장에 놓여 있기는 하다)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문학의 뛰어남이나 역할에 있다기보다는 경제적 사유에 있고, 그것은 불완전성을 문학이 보완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그다지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는다.

저자는 고전적 공리주의 이론과 현대의 합리적 선택 이론을 분석(혹은 소개)하고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을 텍스트 삼아 각 이론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되는지 예시한다.

경제학적 사고에 매몰된 그래드 그라인드와 비쩌의 모습을 통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책은 문학을 위한 책은 아니라 여겨진다. 이 책은 경제학적 사고에 물든 사람들에게 문학을 권하기 위한 책 정도로 보인다.

사용된 용어들이 쓸데없이 어렵게 느껴지고 내용조차 쉽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경제학과 그러한 사고 방식들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요소요소 분석하지만 머릿속에 남는 건 그래서 문학이 중요하다는 거냐라는 의문뿐이다.


내가 그러한 의문을 가진 것과 관계없이 이 책은 자신의 목적에 꽤 충실하다. 그래드그라인드가 가진 사고를 검토하며 경제적 공리주의 사유의 문제점들을 언급한다. 그것은 간단한 계산, 산술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축약한다. , 인간을 개별화된 인간이 아닌 하나의 개체로 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기 세 명의 아이들이 있는데 쟤는 철수고, 쟤는 영희고, 쟤는 영수다. 철수는 공부를 잘하는데 어쩌구 저쩌구, 그리고 영희는영수는식이 아니라, 저기 세 명이 있다. 에서 끝나버리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왔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이런 류의 인식은 자연히 인간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떨어뜨린다. 상황을 보지 않고 결과만 보게 된다. 저자는 문학 작품을 통해 이러한 공감과 이해를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등장인물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계회그 희망, 공포 등을 걱정하고 신경 쓰면서, 삶의 신비와 복잡한 일들을 풀고자 애쓰는 그들의 노력에 함께하도록 만든다. 독자의 이러한 참여는 이야기 흐름의 많은 지점에서 명확해진다. 그리고 이는 설령 독자 자신이 실제로 처한 상황과 많이 다르다 하여도, 그들 스스로 장악해야 하는 인간적 삶과 선택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이야기가 많은 점에서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해석하고 평가하고자 하는 노력은 애정 어리면서도 비판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그들을 당대의 세계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책임을 지닌 사회적 주체들로 그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자 삶에서 노동자 계급 문제와 지배자나 리더의 행동에 대해 반드시 감정적이고 실천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데 소설은 자체로 무용하지 않다. 왜냐하면 소설은 독자들에게 그들의 세계를 인식하게 하고, 그 안에서 보다 성찰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pp.81-82)


이처럼 소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독자를 끌어들이고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상상력을 활용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를 통한 도덕적 경험이 상상력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문학 작품을 통해 얻는 것은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감정적 경험이다. 우리가 내린 판단이 명확한 규범이 있는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에 치우친 판단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감정이라는 것은 때로 충동적이고 맹목적이고 인간 관계나 개인의 신체와 건강 등에 결부되어 완벽히 통제하기 힘들게 한다. 이는 결국 비합리성을 초래할 뿐이다.


감정에 대한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분별 있는 관찰자를 언급한다. 그는 편향성을 갖지 않고 객관성을 지닌 사람이다. 또한 사건의 당사자에게 이입하여 각각의 처지와 느낌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분별 있는 관찰자는 우선 하나의 관찰자이다. , 그는 자신이 목격하는 사건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지는 않지만, 그들을 염려하는 친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개인적 안전과 행복에 관계된 감정을 갖거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편향성을 갖지 않으며, 자기 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 객관성을 지니고 살펴본다. 물론 그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정도들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보들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에 편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여과된 것들이다. 다른 한편 그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감정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그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능력 가운데 하나는 그가 머릿속에서 그리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 각각의 처지와 느낌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힘이다.



이 분별 있는 관찰자로 가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문학 작품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시인의 판단이 내려지는 방식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게 하고, 또 그것이 우리 눈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재판관으로서의 시인이라 명하는데, 문학적 재판관은 다른 류의 재판관보다 분별 있는 관찰자이다. 그의 중립성은 자신 앞에 놓인 사건들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고상한 거리 두기를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풍부한 상상력을 겸비한 구체성과 정서적 응대를 바탕으로 그러한 현실을 철저하게 검토하기에 이른다.


이후 저자는 분별 있는 관찰자가 가져야 하는 덕목에 대해 언급하고 바로 그 분별 있는 관찰자가 지닌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문학적 상상력이란 타인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게 되어 그 속에서 타인이 처한 상황에서의 구체적인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상력이 없다면타인의 상황은 그저 일반적 의미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판례들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이 법에 적용된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다.

문학적 상상력 없이는 당사자들을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게 된다. 법의 집행이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법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무자비한 폭력이 될 것이다.

저자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재판관은 그 스스로 문학적 상상력을 배양하여 엄격한 헌법적 제약에 따라 심판하는 자인 듯하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어려웠다. 법에 대한 내용과 공리주의적 내용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기에어려움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아마도 저자는 예상 독자층을 법학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설마 문학도가 읽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는지 주를 이루는 내용들이 어떤 재판관이 좋은 재판관인가. 그런 재판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였다.



썩 기분 좋은 독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보다 1년 쯤 전에 읽었던 책이다. 기억이 나지 않아 책을 뒤적이면서 느낀 건 당시에 내가 느꼈던 어떤 난해함? 문장들이 만들어냈던 미로 속에서 걸핏하면 빠졌던 것 같다. 특히 공리주의, 경제학적 공리주의 등을 나눠 설명할 때 그런 기분을 많이 느꼈다. 요점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을 사고, 또 읽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책의 내용을 떠나서(내용은 분명 좋은 것 같다) 내가 원했던 책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그렇다.

혹시 읽으실 분들은 참고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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