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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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사라짐을 담보한다. 사람도, 짐승도, 사물도. 결국 사라질 것이라면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라짐 이후에 무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알 수 없기에 대부분의 존재는 사라짐에서 끝난다. 왕후장상도 별 수 없고, 노력해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역사는 이 지점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사라지고 나서도 존재를 남기는 것이 무덤이라면 역사는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역사에는 사라짐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죽을 뿐이고, 그 죽음은 끝을 고하지 않는다. 다만 한 생의 완결을 의미한다. 사라짐에 대한 저항, 소멸에 대한 불멸의 기록이 바로 역사의 실체가 아닐까.

현의 노래는 왕들의 상여와 순장의 광경을 통해 사라짐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순장자들은 묵묵히 자신의 무덤으로 들어간다. 때로 저항하고, 도망치기는 이들도 있지만 결국 다시 잡혀 순장된다. 묵묵히 받아들이든 저항하든, 혹은 도망치든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는 못하는 모습은 운명의 가혹함이나 그에 따른 슬픔을 유도하기보다는 운명에 대해 체념적이게 만든다. 살아있다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죽으면 끝인 것을. 쓸쓸하고 허무하다.

이 쓸쓸함과 허무함은 현의 노래의 지배적 정서이다. 무너지는 나라 가야와 병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왕과 태자,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무수히 많은 병사들, 고을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백성들까지 온통 저물어가는 것들이 삶을 쓸쓸하게 만든다면 전쟁터를 돌며 병장기를 수집하는 우륵의 모습은 허무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 야로의 군사들은 창으로 시체를 뒤적이며 죽은 자들이 놓친 병장기들을 거두었다. 쇠도끼와 창은 자루를 빼버리고 쇠덩이만을 챙겨서 한곳에 모았다. 도끼에 맞아 우그러진 방패들도 거두었다. 썩어서 흐물거리는 사체의 팔다리를 칼로 쳐내고 갑옷과 투구를 벗겼다. 갑옷에 묻어나는 살점들을 흙으로 비벼서 떨어냈다. 죽은 말을 뒤집어놓고 안장을 벗기고 재갈, 등자, 말방울, 말 얼굴가리개, 말 가슴가리개들을 떼어냈다. 날이 저물자, 군사들은 벌판 여기저기 횃불을 세웠다. 어둠 속에서 불빛에 너훌거리는 그림자들이 밤새도록 시체를 뒤지며 쇠붙이를 수거했다. (p.31)

 

전사자들은 죽은 인간이 아니라 사체에 불과하다. 죽은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에 망자에 대한 예의나 망설임 따위는 없다. 군사들의 모습은 다분히 기계적이다. 수거된 쇠붙이들은 야로에 의해 새로운 병장기가 된다. 도끼가 되고, 창이 되고, 투구가 되고, 갑옷이 된다. 망가지고 녹이 슬어도 쇠는 다시 쇠로 고쳐 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망가지면 고쳐 쓸 수가 없다. 몸져누운 왕이, 태자가 결국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듯, 다리를 절던 우륵이 결국 걸을 수도 없게 되듯.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팔다리가 잘린 사람은 팔다리가 없이 살아야 한다. 쇠와 달리 망가지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미약한가. 존재했던 흔적마저 남김없이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닐까. 신라가, 가야가, 백제가 그토록 싸우고 뺏고 뺏기며 확장하는 영토란 것들도 결국엔 무의미하지 않을까. 어차피 얻어 봐야 모두 잃을 것들.

우륵은 말한다. “니문아, 강이란 참 좋구나.” “살아 있는 것들로 더불어 살아 있으되 더 이상 그것들을 어찌해볼 수 없는 체념이나 단절의 신음같은 그 말은 사실 그 자체로서 긍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륵은 소리에 마음을 의탁하려하지 않고 그저 소리로서 들으려 한다. 그래서 그에게 소리는 곱거나 추하지 않다. 소리는 그저 덧없는 한순간의 떨림일뿐이다.

야로의 쇠 역시 마찬가지이다. 쇠에는 주인이 없고 그저 흐를 뿐이다. 쇠의 흐름을 위해 야로는 가야의 야장이면서 백제와 신라로 쇠를 보낸다. 그리고 전장의 흔적들을 통해 다시 쇠를 연구한다. 그렇게 쇠붙이는 싸움터에서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쇠붙이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야로가 추구하는 것은 쇠의 극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륵이 세상을 담을 금을 만들어 소리의 극을 추구하고자 했듯이.

그러나 우륵은 신라에 귀순되었지만 야로는 죽임을 당했다. 주인 없는 쇠를 자신의 것인양 착각한 이사부에 의해. 이사부에게는 피 흘리는 세상을 가지런히 정돈해주는 하나의 질서가 필요했다. 이사부가 가고자 하는 길은 바로 그 질서를 향해 나 있다. 이사부는 질서를 명목으로 수많은 고을들을 부수고 뺏고 뺏기었다. 그렇게 전쟁을 통해 갈기갈기 찢어진 세상을 이어 붙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런 세상에는 질서를 세우고 다스릴 주인이 필요하게 마련이고, 그 주인은 다름 아닌 왕일 것이다. 주인이 있는 세상에서 주인이 없는 쇠는 위험하다. 언제 주인의 목을 노릴지 모른다. 그러나 소리는 주인이 없을지언정 주인의 목을 노리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야로는 죽을 수밖에 없고, 우륵은 살 수도 있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평생 동안 질서를 세우기 위해 내달렸으나 이사부에게 남은 것은 낯섦과 회한뿐이다.

 

다시 젊은 날의 영일만이 이사부의 눈앞에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아수라를 건너가야 이 세상은 하나의 정돈된 질서로 아늑할 수 있으랴. 아아, 나는 너무 늙었구나…… (P.172)

 

…… 땅 위에 이런 나라가 있는가. 이런 나라가 가능한가. 여기가 나의 나라였던가. 나는 어디에 와 있는가…… (P.182)

 

이사부의 대척점에 야로와 우륵이 있다.

 

쇠는 날에서 완성되는 것이오. 그것은 병장기와 연장이 매한가지요. 날은 한없이 얇아져서, 없음을 지향하는 것이오. 날은 빈 것이오. 그러나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서 가장 확실히 있는 것이오. 또 그 위태로운 선 위에서 한없이 단단해야 하는 것이오. 날은 쇠의 혼이라 할 수 있소. 그러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소. (p.197)

 

…… 소리는 본래 살아 있는 동안만의 소리이고,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인 것이오. …… 집사장께서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헤아리지 못하시는구려. …… 살아 있는 동안의 이 덧없는 떨림이 어찌 능침을 평안케 하고 북두를 진정시킬 수가 있겠소. 소리가 고을마다 다르다 해도 쇠붙이가 고을들을 부수고 녹여서 가지런히 다듬어내는 세상에서 고을이 무너진 연후에 소리가 홀로 살아남아 세상의 허공을 울릴 수가 있을 것이겠소? 모를 일이오. 모를 일이로되, 소리는 본래 소리마다 제가끔의 울림일 뿐이고 또 태어나는 순간 스스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어서, 쇠붙이가 소리를 죽일 수는 없을 것 아니겠소? 죽일 도리가 없을 것이고, 죽여질 리가 없지 않겠소? 그 또한 모를 일이로되, 아마도 그러하지 않겠소…… (p. 93-94)

 

이사부가 고을을 얻기 위해 애쓰며 전쟁을 했다면, 우륵과 야로는 그 극을 추구했지만 애써 만든 금과 병장기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소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었다. 현의 그 덧없는 떨림의 순간이 중요하고,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가장 확실히 있는 것이 중요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한다는 것.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망가진 병장기가 다시 새로운 병장기로 태어나듯, 현의 떨림을 물고 새로운 소리가 태어나듯. 만약에 앞선 것의 사라짐이 없다면 새로운 병장기가 없을 것이고, 사라지지 않는 소리들로 인해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소음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 역시도 우륵과 야로의 그 사라짐이 아니었다면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 본문의 페이지 수는 절판된 '생각의 나무' 출판사 판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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