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루거 총은 밀리터리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남자들은 알만한 총이다.
독일군 고급장교가 사용했고 미군에게는 전장에서 최고의 전리품이기도 했다.
독일은 젊은이들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서
군복이나 군용품의 디자인을 중요시 했고
그 중 빼어난 것 하나가 루거
총이다.
소설 속에 할머니가 독일인이 총 하나만큼은 잘 만든다고 칭찬을 하지만
사실은 고장이 잘 나기로도 유명한 총이다.
프랑스 할머니에게 독일나치가 폭력적인 상징이 있지만
그것이 루거 총으로 어떤 특별한 상징으로 보기는 어렵다.
할머니에겐 루거 총 말고도 자신의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장총도 있다.
제목에 루거 총을 넣은 이유는 아는 남성들을 솔깃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총들의 세계에 스포츠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권선징악의 영화나 수사반장 같은 드라마를 통해
범인은 반드시 잡힌다는 두려움(?)을 세뇌 당했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깨지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도 많고
특히 돈 없고 힘 없는 약자들에게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라고
끓는 피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억울한 일이 생기면
법보다 힘으로 단죄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상상을 할 수는 있어도 소설이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저급한 일이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연쇄살인을 하고
그 시체를 자신의 집 지하에 묻어버리는 이야기이다
102살이 될 때까지 많은 사건이 있었고
그때마다 주인공은 총으로
깨끗하게 해결을 한다.
이 완벽한 범죄는 남편을 죽이고 유부녀와 사랑의 도피를 하는
어느 한 쌍의 남녀의 도주를 돕기 위해서 경찰과 총격 대치를
하면서 밝혀진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렇다. 프랑스적 감성의 소설이라 그렇다.
프랑스 영화는 더 심하기도 하다.
프랑스 문학이나 예술이 낭만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것이 프랑스인의 낭만인 것 같다.
주인공의 살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살해당한 사람들은
위선적인
첫 남편부터 주인공을 강간하러 온 나치 등
대부분 그녀가 처해진 상황에 공감을 하고
죽어 마땅한 것처럼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과 대립구도로 심문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수사관도
자신의 말과는 다르게 마음속은 동조하는 분위기이다.
약자를 사회 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면 약자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강자가 되는 길 밖에는 없다.
이야기 중에 시몬 드 보브아르가 나오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패미니즘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 페미니즘의 전개가
무능한 예술가 남편과의 이야기에서 전개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게 보인다.
사랑이 식고 상대가 역겨워 보이면
아름다웠던 그의 예술세계도 마찬가지로 보일 것 이다.
역겹고 무능한 예술가는
무능한 예술가가 우월한 남자 행세를 해서 역겨운 것이다.
실패한 결혼과 실패한 사랑은 페미니즘과 관계없다.
힘의 우월을
가진 자의 폭력으로 쉽게 리셋 한다면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짊어지고 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공평해 보인다.
할머니를 심문하는 수사관도 3번의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그 결혼에
대한 결과를 감내하고 짊어지고 살고 있다.
처음에는 할머니의 살인들이 전쟁 특수성 이나 공소시효, 정당방위 등으로
해결 될것이라 생각했다.
당당하고 자신감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받은 영향 일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느끼게 되는것은 102살의 할머니가 살 만큼 살았으니
자살로 죽어도 자연사 한것과 진배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사랑의 도피를 하는 둘을 돕고 떠나는 것도
멋있다는 그런 메세지가 들린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나면
작가의 은연중에 독자에게 하는 설득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내가 뭘 본 것이지 그런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