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대연쇄는 상식적인 틀의 세계관을 던진채 들어가야할 작품집이다. 역사 종교적 관점과 소설밖의 현실을 컴퓨터 운용시스템을 베이스로 깔아버린다. 인간과 사물은 그래픽으로 존재하는건가 싶다. 이진법으로 작동하는 시스템 안에서 "낙원"의 유효기간에 대한 한줄에 웃음이 터졌다. 여러 층위의 세계들이 존재, 아담과 이브의 낙원이 약속의 파기로 종결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던것처럼. 종교의 얼굴을 한 새로운 지배체계에 대한 흐름이 또 흥미로웠다. 단요작가의 세계관에 쉽게 녹기란 힘든 부분이 있지만 이 소설집을 읽어가매 설득되어 갔다는 것도 함께 남긴다. 빛과 신호에 대한 통일된 상상력이 작가의 세계관을 끌고 컴퓨터시작과 발전에 현실의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움직였다. 우리의 낙원은 시작된 적도 없는것 같은데 세상은 자꾸 종말되고 있다. 종말 다음날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그들에게 홀가분이라든가 괴로움의 끝은 몇번의 종말과 창조 후에 오는 걸까.
보고 듣는 것만으로 인생을 경험하는 아이, 14살이 된 아이, 그런 아이를 둔 부모와 가족의 이야기. 작가 테리 트루먼은 작중의 '숀'과 같은 자녀를 키우는 아빠라고 한다. 어렴풋이 혹은 건너건너 관객인양보는 사람들과는 다른 온도를 가진 사람. 상상으로는 알 수 없는 통점을 가진 사람이 쓴 글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숀'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제시를 하는거라 생각한다. 작가의 마지막 말처럼 그건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모른단는 것은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모른다고 해서 생각하지 말자고 털어낼 수도 없는 일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p67. 아빠가 무슨 권리로 나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단 말인가? 대체 아빠가 무슨 권리로 내 고통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품는단 말인가?p72. 그이는 어쩌면 숀이 자신 안에 갖혀 있을지도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 했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장애아에 대한 안락사 문제를 접근한다고 했을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우리에게도 안락사, 조력존엄사,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법적인 장치까지 고려되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 이 분야도 아직 알아가는 단계이다. - 알고 싶었지만 제목이 주는 하드코어에 쉽지않긴 했다. 뉴스에서 심심치않게 보는 내용중 가족의 동반자살이 있다. 아이들을 생과 사까지 책임지겠다는 부모의 선택을 볼때 외부인들의 의견은 첨예하게 나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누구라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야하는게 아닐까. 란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만 꼬리에 꼬리다 달린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이야기를 서로 해보자는 숀의 아버지가 던지는 메시지란 생각이 들었다.
혼불문학상을 받은 우신영작가의 신작 <죽음과 크림빵>은 세명의 화자가 조망하는 현재를 보여준다. 그들은 같은 사람들을 보고 같은 사건을 겪지만 그 흐름과 결과는 다르다. 작가는 독자에게 머뭇거림없이 '경악'을 선물한다. 자생하다시피한 허기와 허무를 무엇으로 채울수 있을까. 그 욕망의 허기를 무엇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인생의 절반쯤을 우리는 대학을 가기 위해 연소한다. 대학에 골인한 후 자기안의 공허를 채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바꿔말하면 충만해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라고 해야 할것 같다. 육체적 공허와 심리적 구멍, 그 이상의 구멍을 만들어내는 만남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과 사건들에서 공허에도 힘이 있음을 느꼈다. 구멍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구나. 채우려는 것도 비워내려 작용하고 있음을 나의 공허에 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을 묻는 작품이었다.
세상의 문법을 자기해석대로 하는 아이 '비올라', 주변에 이런 아이가 있다면, 내가 낳은 아이가 이렇다면. 나는 어떤 양육자로서의 태도를 갖게 될까.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이런 질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p8. 까다롭다는 건 여러분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제멋대로 정해둔 색깔의 옷을 입으라고 요구할 때 따르지 않는다면 까다로운 아이가 되는 것이랍니다. p8. 이름과는 달리 비올라는 파란색을 아주 좋아해요.. 비올라는 색깔 이름을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로 써요. 사람이름처럼 말이에요. 색깔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니까요.p9. "파란색은 남자애들 색이야 넌 여자애니까 분홍색을 좋아해야지!"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정말 그렇게 생각해? 비올라를 위해 파란 글씨로 인쇄된 책이 깜찍하다. "익숙한 태도를" "우리가 항상 옳다고 생각했던 태도들" "규칙을 새롭게 만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논다는 걸 "두려워하는" 어른들의 "시절의 편견"을 이야기한다. 실상 우리에게 이런 편견의 차는 언어유희적으로 먼저 유야무야해진 면이 있는 것 같다. "테토녀", "에겐남" 이건 성인에 한한것 같고 아이들의 세계에선 어느 정도의 단차가 있는지 알 수 없긴 하다. 첫아이 성별을 유난히 가르쳐주지 않았던 산부인과원장님 덕분에? 큰딸아이의 아가복은 노랑색과 연두색이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분홍인지 파랑인지로 선택할 수 없었던 최선의 선택이 노랑과 연두 흰색이었지 싶다. 확실한 구분이 살아가는데 편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본의아니게 성별에 대한 나의 색관념학습은 약간 "시절의 편견"에 비껴진 길을 탔던 것 같다. 그로 인해 큰딸은 사내아이로 오인받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p56. "비뚤어진 사람을 제일 좋아하거든"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이 책은 동화를 가장하고 부모에게 묻는다.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갈수 있는 아이로 키우는 중인지. 아이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걸 어떤 눈으로 볼건지.당신과 나는 어쩌면 "스테레오타입"의 부모일지도 모른다. 너자신 얼마나 경직된 상태니?란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지. 나의 탄력지수는 어느정도인가를 가늠해 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p102. 난 아무것도 반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나로만 있고 싶어요.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렌 네미롭스키의 "제자벨"에서 엄마에 대한 미움을 보았다면 이번 책에서는 아빠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약간의 엘렉트라콤플렉스로 오히려 엄마에 대한 미움과의 균형감을 유지하는 한 아이를 만났다. 극의 전반에 흐르는 제1차세계대전의 분위기, 정치와 경제를 아우르는 흐름을 읽는 재미가 플러스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왜 선집의 7번을 가졌을까, 그리고 여전히 독자는 마지막에 읽는게 나은걸까란 의문이 들었으나 - 편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 이 책은 이렌 네미롭스키의 작품 중 마지막에 읽는게 나을 것 같다는 정리를 했다. 누구나 자신의 잔을 들고 있듯 엘렌도 그 잔을 채우고 마시는 여정을 담았다. 거듭 되새기는 이 애증의 토로를 작품으로 담는 과정이 이렌 네미롭스키에게는 혹시 치유였을까. 누군가를 향한 한없는 애와 증이 살아가는동안 어떻게 숙성되는가 얼마나 숙성되는가를 결국은 나의 잔에 채워지리라는 것을. 이번 선집의 엘렌의 와인은 이제 막 숙성을 시작한 프라이머리에서 디벨롭핑으로 넘어가는 단계 아닐까. 내 안에서 숙성 중인 애와 증은 종래에 어떤 무엇일까를 생각케 했다. 작가의 다음 책으로 6월의 폭풍을 읽으려고 한다. 다음 작품은 어떤 맛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