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실로 본다면 바퀴벌레의 생명도 바퀴벌레로서는 절대 소중하다. 생명의 허무로 본다면 사람이나 바퀴벌레가 다 같이 영원 속에서는 마찬가지로 허무하다.

결국 인간은 개인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아니라 인류의 성장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인간의가치를 올리는 일이다.

인간의 가치는 나를 위한 장수(長壽), 나를위한 권력, 나를 위한 돈보다는 자기와타인의 생활은 위하여 보탬이 되는 일에서 더 발휘된다.

인간의 생명을 의의 있게(有意義)하며, 서로 느끼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돈의 가치도, 권력의 가치도, 생명의 가치도 새로운 의미를 낳게 된다.

시간으로나 공간으로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가치가 세로(시간)로 이어지고 가로(공간)로 연결된다면, 눈 깜짝할사이가 이어져서 영원을 이룬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가치를 어떤 사람처럼 한 잎의 꽃으로 비유한다면 모든 시간과 공간의 사이(間)가 그런 꽃으로 연결될 수 있다. 환한 아침 햇빛이 드는 사랑방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의 최선의 길, 가치를 공간의 ‘사랑방’을 위하여 잠깐 생각해 본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의 사무실을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너무 많은 사람을 쓰면, 정말로 친밀하고 본질적인 자기 일은 되지 않을뿐더러, 조직에 압도당해버리니까, 나는 많은 인원으로는 하지 않지.‘ 라는 식의이야기를 했더니, 한국으로 돌아간 그가 자신이 만든 몇백명의 큰 조직을 파산하고, 작은 조직을 만들어 단순하게 건축을 하기 시작한 의외의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건축가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구체적으로 해결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만, 김수근에게는 일본 건축가가 가지고 있지 않은 엄청난 활력, 저력을 느낄니다. 그것은 그의 성장 과정, 한국이라는 배경에서부터시작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은 섬나라인 일본과는 달리, 마치 폴란드처럼 주변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침략에 위협당하거나, 긴 시간 식민지로 괴로운 시대를 보낸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과 그가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품행과 한국의 가정적인 전통을 지키는 것이 그의 따뜻한인간미와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꼬르뷔제의 영향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축을만들었던 모양입니다만, 그 후에 소위 말하는 바우하우스적인 근대건축으로, 최근에는 자신의 느낌으로부터 출발하는 디자인으로 변하게 된 듯합니다. 그는 좋은 것을 흡수해서, 그것을 점점 자신의 것으로 전환해 가는 능력이있습니다.

전쟁 후, 한국에는 김수근이 있었기에 세 번 정도 갔었습니다만, 그의 오피스 <공간사옥>은 꽤 재밌는 건축이라고생각합니다. 현재는 단순한 디자인이 건축이 된다는 풍조가 있어서 건축에서 <인간의 정신>이라는 문제가 비교적소홀하게 여겨져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건축의 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한국의 문화에는 매우 독특한 세계가 있고 유니크하고 귀중한 것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없는 상당히 날카로운, 샤프한 면이 있는데, 그것을 제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말한다면 탁․탁 냉엄한 음색을 가지고 있는 장구라는 북입니다.

조선 시대의 것에는 세계에서도 대단히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는 독특한 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기 (사기그릇/도자기)는 물론이고 우리 건축가에게 있어서 좀더 관계가 깊고 흥미 있는 것은 조선의 목공예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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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한 종의 어느 구조 부분이 다른 종의 이익을 위해서만 형성되었음이 증명된다면, 내 이론은 완전히 박살날 것이다. 그러한 일은 자연 선택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은 오로지 그 개체의 이익에 의해서만, 또 이익을 위해서만 작용하므로 절대로 그 개체에게 해로운 것은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다.

자연 선택은 동일한 지역에서 서식하면서 서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할 다른 개체들만큼 혹은 그보다 조금 더 각각의 개체들을 완전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나의 이론에서 유형의 통일성은 유래의 동일성으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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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백Frédéric Back17이라는 캐나다의 애니메이션 감독을 지브리 미술관에서 스튜디오까지 모실 때 여기저기를 보여주면서 돌아다녔다. 그랬더니 그도 "도쿄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습니까!"라며 좋아했다.

미야가 얼굴을 내밀면 모두 마음 편하게 작업할 수 없다. 미야가 원하는 것은 상대방 안에서 장점을 찾아내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분신’일 뿐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긴 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덕분에 좋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어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어려운 문제다.

"투자가 정해졌다고 해서 곧바로 닛폰 TV의 전원이 협조해주는 건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각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와 연출가에게 굿즈를 나눠주면서 인사하러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쿠타와 같이 굿즈를 들고 닛폰 TV 안을 돌아다녔다.
‘아하! 홍보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군.’
홍보가 얼마나 힘든지 절실하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 제작에 전념하고 싶은데 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느냐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홍보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사이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면 다음에는 미리 계획을 짜서 확실하게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미야는 성실함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한 걸음씩 내딛으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타입이다. 반면에 다카하타는 하루 종일 빈둥거려도 행복하게만 살면 된다는 사람으로, 그 연장선에서 영화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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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을 로고스를 생생하게 구현해 주는 본래적인 매체로 특권화하고 대신 문자나 기록 일반은 이러한 음성을 보조하는 부차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이론에서는 어디서든 로고스 중심주의와 음성 중심주의가 나타난다.

이 때문에 데리다는 초기 저작에서 서양의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하면서 문자 기록을 복권하고 텍스트의 복잡성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데리다 사상은 처음부터 기술에 대한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자 기록은 음성이라는 자연적 매체를 통한 현존의 생생한 전유가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꿈이라는 것을 보여 주며, 차연(差延)은 시간과 공간의 질서가 항상 이미 지연과 차이화의 작용 결과라는 점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기술론은 구성적 기술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자연적 시공간 자체가 항상 이미 기술에 의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기술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인가? 여기에서 데리다의 ‘탈전유(exappropriation)’라는 신조어가 중요해진다.

기술을 원칙적으로 거부하고 무소유를 주장하는 비전유(exppropriation)와 기술의 도구적 효용만을 중시하는 전유(appropriation) 사이에서 유한한 전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이 개념이다.

데리다는 자기 면역 개념을 이중적인 의미로 탈구축한다. 이는 먼저 외부(이슬람 세력 같은)의 침입에 맞서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민주주의를 지연시키려는 서양 민주주의의 경향을 가리킨다.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폐쇄적인 일자로 고착되지 않고 무한정한 개선을 이룩할 수 있다.

국내 독자들의 불운은, 세 권의 책 가운데 한글로 읽을 만한 책은 『목소리와 현상』 정도라는 점이다.

세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국역본으로는 독서가 불가능할 만큼 심각한 번역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며, 『글쓰기와 차이』의 경우 그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래도 이 번역본으로는 데리다의 논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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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의 핵심적 주장은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인식이란 없으며 오직 각각의 시대마다 새로운 인식이 새롭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두 번의 단절로 이루어지는 세 개의 시기는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이나 푸코의 궁극적 주장은 이 두 번의 단절에 이어지는 세 번째 단절, 곧 네 번째 시기가 와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역사적 공헌은 그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록 시리즈에서 개진하고 있는 통치성의 관념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버마스 사상의 핵심을 찾는다면, 그것은 이성적 대화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합리적 대화를 통한 해방과 화해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모색해 왔고, 이러한 근본 직관에 의거하여 자신의 사회 이론은 물론 민주주의 이론 또한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철학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는 주체와 주체 사이의 의사소통에 주목하여 근대 의식 철학이 전제해 온 고립된 주체와 그로부터 귀결되는 이성의 도구화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니체를 탈근대의 전환점으로 규정하면서, 하이데거와 데리다로 대변되는 형이상학 비판의 흐름과 바타유와 푸코로 대변되는 권력 비판의 흐름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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