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체제하에서 긍정에 대한 요구는 거의총체적으로 이뤄졌고, 오늘날에는 대학과 미술관에도 비판critique을 위한 공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 P187
한때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중적 수용에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던비판적 토론을 더 이상 장려하지 않는다. 실제로 예술계에서 비평 criticism은 철저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을 덜 받는 상황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 P187
탈-비판적 조건은 우리를(역사적, 이론적, 정치적) 구속에서 해방시켜줄 것처럼 간주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다원주의와 무관한 상대주의를 겨사해왔다. - P187
처음에는 판단judgment’에 대한 거부가 있었다. - P188
비판적 평가가 이뤄질 때 당연시되는 도덕적 권리에 대한거부가 있었던 것이다. - P188
그 다음엔 권위authority’에 대한 거부, 말하자면 비평가가 타인을 대신해 추상적으로 말할 수 있게해주는 정치적 특권에 대한 거부가 있었다. - P188
마지막으로는‘거리distance’에 대한 회의가, 즉 비평가가 심사하고자 하는 조건 자체와 문화적으로 분리되는 것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 P188
‘비판(critique)’과‘비평(criticism)’, ‘비판이론(critical theory)‘, ‘비판적 예술(criticalart)‘ 사이의 미끄러짐이 일어난다. 이 글에서 나는 마지막 두 개념에초 점을 맞출 것이다. - P188
건축 논쟁에서 ‘탈-비판‘이란 말은다른 가치를 갖는다. 건축 논쟁에서 이 말은 피터 아이젠만 같은 건축가들이 행한 건축의 재귀성에 대한 이론적 탐구 이후 이와 선 긋기를 하며 ‘디자인 지능 (design intelligence)‘이라는 갱신된 실용주의를 선언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하지만 그 효과는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 P188
보다 최근의 공격들, 특히 재현 비판과 주체 비판에 대한공격은 연좌제의 성격으로 행해져 왔다. - P190
재현 비판은 그것의 진리를 지나치게 확신하기보다 진리-가치 자체를 약화시킴으로써 도덕적 무관심과 정치적 허무주의를 키운다고 얘기되었다. - P190
주체 비판 또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그것이 정체성의 구성적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이 주체적 위치에서의 소비주의 (‘베네통 The United Colors of Benetton’으로 재포장된 다문화주의 사례처럼)를 교사한다고 얘기되었다. - P190
비판에 대한 더욱 예리한 질문들은 과학 연구 분야에 집중하는 브뤼노 라투르와 현대 미술을 주요 화두로 삼는자크 랑시에르에게서 나왔다. - P191
라투르에게 비평가란 순진한 타인들이 갖는 페티시즘적 신념의 신비감을 깰 수 있게-이런 신념이 어떻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물체에 자신의 소망을 투영" 하는지를 드러낼 수 있게-해주는 계몽된 인식을 가장하는 자다. - P192
비평가의 치명적인 실수는 이러한 반 페티시즘적 시선을 자기만의 신념, 즉 자기만의 신비감 깨기demystification라는 페티시를 향해서는 적용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자신을 가장 순진한 존재로 만드는 실수다. - P192
랑시에르에게도 비판은 신비감 깨기에 의존하면서순수성을 잃는다. - P193
"현대인들은 자기들이 계몽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현대인은 원시인만큼이나 페티시스트다-상품에 사로잡힌페티시스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부적절하게 욕망하는 모든사물에 사로잡힌 페티시스트다." 이런 논리적 뒤집기에라투르는 이제 자신만의 뒤집기를 시도한다. - P194
라투르도 그가 절단 내고 싶어하는 비평 자체의 수사학적 고리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다. - P194
랑시에르는 비판에서 작동하는 의심의 해석학에 대한 이러한 도전에 프랑크푸르트학파 식으로 끼어든다. 하지만 이런 도전은 비판이론 내에서 친숙한 것일 뿐만 아니라, 숨겨진 의미의 탐색에서 (푸코에게서 볼 수 있는) 담론적 "가능성의 조건 theconditions of possibility"과 (바르트에게서 볼 수 있는) 텍스트의 표층적 의미 등에 대한 고려로 옮겨가는 비판이론의 변화에도 근본적이었다. - P194
결국 그는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를 하나의 만병통치약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사물을 기호로 바꿔버리는 변화"에 맞서 겨뤄야 할 때 그러한 약은 거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 좌파 예술계의 새로운 아편일 뿐이다. - P195
최근의 미술사도 거의 그와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경향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이미지들은 ‘힘’이나 작용인을 갖고 있다고 얘기되고, 그림들은 ‘필요’나 욕망을 갖고 있다고 얘기되는 식이다. 이는 최근의 미술과 건축에서 주체성의 관점에서 작품을 제시하는 비슷한 경향과도 일치한다. - P196
이런 식으로 ‘자신이 뭔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기‘라는 현상학적 재귀성이 그 반대 효과에, 말하자면 우리를 인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설치물이나 건물에 접근하는 것이다. 이는 사유와 감정을 가져와 이미지와 효과로 가공한다음 다시 우리에게 전달해 우리의 놀라운 감상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역시 페티시화의 일종이다. - P198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냉소적 이성cynical reason’의 경우도마찬가지다. 우리의 문화생활에서도 정치생활에서도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없애버리는, 다 알면서도 무시하는 태도말이다. - P199
문제는 진실이 늘 가려져 있다는 게 아니라 (이 점에서라투르와 랑시에르는 옳다) 많은 게 너무 지나치게 명백하다는 데있다—다만 어떻게든 반응을 차단하는 투명성을 갖춘 채말이다. - P199
"대형 미술관은 대중문화보다 금융자본과 더 관계가 깊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와 같은 태도가 그렇다. 냉소적이성은 인정과 부인이 결합한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식의) 페티시즘적 작용이기에 반페티시즘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P199
주어진 것에 개입해 어떻게든 그걸 전환하고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전환의 시작점이 되는 게 바로 비판이다. - P200
‘사회실천 예술‘에 대해 말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런 이름은 예술이 일상생활과 얼마나 분리돼 있는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러한 간극을 메우고자 한다. - P200
드보르는-변증법을 상호확증파괴MAD2의 방식으로이해하면서-한때 이렇게 썼다. "다다이즘은 예술을 실현하지않고 폐지하려 했으며, 초현실주의는 예술을 폐지하지 않고실현하려 했다." - P201
경제적으로 호황과 불황이 오가고, 정치적으로는 비상사태가 예외적이기보다 정상적인 상태가 되며, 예술적으로는 일부 실천가들이 경제위기와 정치적 비상사태를 연출(다다)하거나 이런 혼란을 딛고 건설(구성주의)하거나 그 혼란에서 도망치며 질서로 회귀하는시대 말이다(1920년대에 신고전주의 전통의 퇴락한 버전들로 회귀하던 경향은 오늘날 모더니즘 회화와 조각의 오래된 작품으로 회귀하는 경향과 유사할 것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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