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에게 기회의 평등이란 곧 운 좋은 사람에게 상을 주고 운이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에게는 계층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본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인간 본성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가장 절실한 필요를 가진 사람보다는 타고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능력은 상당 부분 운에 따른 것이므로 운이 없는 사람들에게 재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싱어의 이론은 이렇게 재분배를 주장하면서도 진화에 따른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다윈주의적 좌파’라고 부른다.

개괄적인 지젝 입문서인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쓴 토니 마이어스에 따르면 지젝의 사상은 다섯 가지의 핵심 이슈로 갈무리된다. 첫째, 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둘째, 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셋째,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넷째,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다섯째, 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샌델의 문제의식은 자유주의 시대 현안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출발한다. 그는 사변을 위한 사변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철학적 태도를 강조한다.

현대 사회에는 상대주의가 만연되어 있다. 샌델은 상대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공공선의 정치 철학을 제시한다.

전통에 대한 비판적인 작업 없이는 현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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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의 모델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 있는 알자스 지방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제작으로 지친 미야 감독이 휴식을 취하러 간 곳이기도 하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로도 알려져 있는데, 전쟁이 있을 때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영유권이 왔다 갔다 하면서 양국 문화가 뒤섞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미야가 좋아한 곳은 리크비르라는 오래된 도시였다. 그는 그곳을 하울의 무대로 하기로 마음먹고, 작품 안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여러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엉클어져서 곤경에 처했을 때, 사람들을 모두 등장시켜서 흐지부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제작은 참 신기해서, 처음부터 명장면을 만들려고 하면 대부분 실패한다.

그 대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명장면이 탄생하기도 한다.

특히 훌륭한 애니메이터와 작업하다 보면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미야 감독의 작품에서 남녀의 만남은 항상 그렇게 스킨십으로 시작된다.

흉내를 내려면 원래를 알 수 없도록 해!

미야도 옛날 만화나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작품에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인용만 해서는 안 된다. 옛날 작품을 충분히 이해한 뒤에 더 재미있는 장면, 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으로 완성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끝낸 뒤 완전히 탈진한 미야를 보고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낯선 곳에서 에너지를 흡수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스토리를 짜내려고 노력한 결과, "용케 그런 걸 생각해냈군" 하는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태어나는 것이다. 짜맞추기의 천재라고나 할까? 언제든 원하는 대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사람으로, 늘 있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도 미야는 파도를 거의 혼자 그렸다. 파도의 새로운 표현에 집착한 것이다.

애초에 지금 일본 애니메이터의 파도 그리는 방법은 「미래소년 코난」에서 그가 개발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어린아이를 위한 것일까?"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 파도에서는 일종의 광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야 씨 말이 계속 바뀌는데, 자네는 괜찮나?"
"괜찮아요. 천재의 사고 과정인걸요. 재미있어요."
얼마 후에 도중까지 완성된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미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스즈키 씨, 시나리오가 아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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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영화의 ‘미숙함’이 오히려 매력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모노노케 히메」에는 신인감독의 작품에서나 볼 수 있는 난폭하기까지 한 싱싱함과 거친 기운이 담겨 있다.

정의의 사도는 항상 나쁜 녀석들을 혼내주고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히어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다카하타는 그것에 의문을 가졌다

다카하타는 옛날부터 새로운 기술에 대해 굉장히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면이 있었다. 미야가 그런 그를 보면서 "일본의 셀 애니메이션 기술은 대부분 다카하타 씨가 발명했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부모를 대신해 치아키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제시한다……. 오지랖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미야다운 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무대는 ‘에도 도쿄 건물원’이라고 한다. 에도 도쿄 건물원은 에도시대江戸時代31 이후의 역사적 건물을 보존해둔 야외 박물관으로, 나는 수십 번이나 다닐 만큼 이곳을 좋아했다.

미야는 어떤 경우에도 구체적인 이미지부터 들어가는 사람이다. 아마 머릿속에서 「고향의 전승」에 나온 신과 에도 도쿄 건물원에 있는 목욕탕, 그리고 어린 시절 대중목욕탕을 찾았던 기억이 하나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목욕탕 이미지가 단숨에 꽃을 피웠다.

훌륭한 영화감독은 모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미야 감독도 무의식중에 시대의 심층을 느끼는 면이 있다. 그래서 마음의 어둠을 상징하는 가오나시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가오나시에게 정신없이 빠졌다. 아마 의식의 밑바닥에서 가오나시와 이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미야의 대단한 점 중 하나는 건전함과 불건전함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금곰상을 받았을 때도, 아카데미상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했을 때도 기쁘다기보다 순전히 깜짝 놀랐다.

그는 혼자 공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흥행 기록이나 수상을 알려줄 때마다 "어떡하지?" 하고 당황하지만, 그로 인해 들뜨거나 머리가 어떻게 되는 일은 없었다. 생각할수록 대단한 사람이다.

우리는 종종 ‘기획은 반경 3미터 안에서 태어난다’고 말하는데, 영화의 소재도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굴러다니는 법이다.

언젠가 오두막집 근처의 강에서 놀았을 때, 강물에 떠내려가는 치아키의 운동화를 다 같이 따라가는 사건이 있었다. 미야는 그 사건을 영화에 담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치아키는 금세 그때의 일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다만 신발의 무늬가 달랐던 것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즐기느냐, 장인으로서 철저하게 대치하느냐!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특이한 천재와 일을 하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는 회의를 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낙서를 하는 습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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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 철학의 두 축은 ‘정치의 미학’과 ‘미학의 정치’다.

정치는 권력을 위한 투쟁이나 권력 행사가 아니다.

정치란 각자에게 자리를 할당하고 그 자리에 맞게 감각하고 사유하고 존재하게 만드는 나눔의 방식(치안)에 맞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미학/감성학적이다.

미학은 예술 이론 일반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 방식들을 분류하고 장르들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재현적 체제와 달리 주제, 장르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예술의 종별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예술 식별 체제를 가리킨다.

예술은 예술로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개입함으로써 나름의 정치를 갖는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은 정치의 미학과 미학의 정치의 경첩에 해당한다.

『합의의 시대를 평론하다』에 수록된 글들은 랑시에르의 스타일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분량이 짧아 그의 글에 적응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설명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 어떤 의미에서 학생들의 앎의 원인이 되는지,

이 논리가 지적 능력의 평등 혹은 불평등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학생 스스로 지적 해방을 이룰 수 있다면 스승의 역할은 무엇인지,

사회적 차원에서 제도를 통해 지적 해방이나 평등을 이루는 프로그램이 가능한지 등이 『무지한 스승』의 물음이다.

랑시에르의 독특성은 전통적인 정치 철학 개념들, 예컨대 정치와 정치적인 것, 평등, 민주주의 등을 전혀 다르게 사유한 데 있다.

민주주의적 삶이라 불리는 이 습속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 참여도 안 하다가(공공선의 구축을 방해하다가) 개인의 욕망과 관련된 일에는 너도나도 나서는 인간(탐욕적 소비자)의 모양새를 가리킨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인민의 습속과 연결시켜 비판하는 전범을 플라톤에게서 찾는다.

이 흐름에 맞서 랑시에르는 플라톤의 말마따나 민주주의란 ‘통치할 어떤 자격도 갖지 않은 아무나의 통치’라고 응수한다.

아감벤은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칼 슈미트)"라는 구절의 의미를 고찰한다.

또 한 편의 중요 논문인 「시간과 역사」에서 아감벤은 진정한 혁명의 본래적 과제가 세계를 변화시키기에 앞서 시간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오늘날의 세계를 관통하는 계급 투쟁을 분석하기 위해 여전히 현재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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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 또한 사유이자 진리의 생산이다.

오늘날 서로 손을 굳게 맞잡은 의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오로지 다수결로만 나아가는 견해들의 잔치에 불과한 길, 그리하여 실재적 해방을 위한 결심의 과정 또는 진리의 과정이 전무한 길

모든 특수주의와 추상적인 일반성을 거부하고 진정한 보편성을 위해 싸운 사건의 주체, 바로 이것이 바디우가 오늘날 새로운 투사의 전형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바울이다.

모든 특수주의와 추상적인 일반성을 거부하고 진정한 보편성을 위해 싸운 사건의 주체, 바로 이것이 바디우가 오늘날 새로운 투사의 전형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바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진리에 충실한 사건의 주체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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