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시에르 철학의 두 축은 ‘정치의 미학’과 ‘미학의 정치’다.

정치는 권력을 위한 투쟁이나 권력 행사가 아니다.

정치란 각자에게 자리를 할당하고 그 자리에 맞게 감각하고 사유하고 존재하게 만드는 나눔의 방식(치안)에 맞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미학/감성학적이다.

미학은 예술 이론 일반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 방식들을 분류하고 장르들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재현적 체제와 달리 주제, 장르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예술의 종별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예술 식별 체제를 가리킨다.

예술은 예술로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개입함으로써 나름의 정치를 갖는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은 정치의 미학과 미학의 정치의 경첩에 해당한다.

『합의의 시대를 평론하다』에 수록된 글들은 랑시에르의 스타일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분량이 짧아 그의 글에 적응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설명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 어떤 의미에서 학생들의 앎의 원인이 되는지,

이 논리가 지적 능력의 평등 혹은 불평등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학생 스스로 지적 해방을 이룰 수 있다면 스승의 역할은 무엇인지,

사회적 차원에서 제도를 통해 지적 해방이나 평등을 이루는 프로그램이 가능한지 등이 『무지한 스승』의 물음이다.

랑시에르의 독특성은 전통적인 정치 철학 개념들, 예컨대 정치와 정치적인 것, 평등, 민주주의 등을 전혀 다르게 사유한 데 있다.

민주주의적 삶이라 불리는 이 습속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 참여도 안 하다가(공공선의 구축을 방해하다가) 개인의 욕망과 관련된 일에는 너도나도 나서는 인간(탐욕적 소비자)의 모양새를 가리킨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인민의 습속과 연결시켜 비판하는 전범을 플라톤에게서 찾는다.

이 흐름에 맞서 랑시에르는 플라톤의 말마따나 민주주의란 ‘통치할 어떤 자격도 갖지 않은 아무나의 통치’라고 응수한다.

아감벤은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칼 슈미트)"라는 구절의 의미를 고찰한다.

또 한 편의 중요 논문인 「시간과 역사」에서 아감벤은 진정한 혁명의 본래적 과제가 세계를 변화시키기에 앞서 시간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오늘날의 세계를 관통하는 계급 투쟁을 분석하기 위해 여전히 현재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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