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려운 우정은 자기 자신과의 우정일지도 모른다. - P82

몸의감각에 대한 글쓰기는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노력 중 하나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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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 주택은 독특한 겉모습 덕에 채석장이라는뜻의 ‘라 페드레라 a Pedrera‘라는 별명을 얻었고, 완성되기 전부터 수많은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그라시아 대로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떠올랐다. - P147

다락을 둔 이유는 태양열의 직접적인 전달을 막고, 비가 샐 때에도수리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 P152

밀라 주택의 경우에는 독특한 형태덕에 공간의 폭과 높이가 제각각이라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고, 가우디는 270개의 카테너리 아치를 활용하여 이를 해결했다. - P152

옥상은 역동적인 형태를 자랑하는 6개의 계단실, 지하까지 연결된 2개의 환기구, 부엌과 지하층의 보일러 등에 연결된30개의 굴뚝이 한데 어우러져 어디서도 보지 못한 조각적인 풍경을이룬다. - P152

밀라 주택은 완성되자마자 부르주아들이 탐내는 주택으로떠올랐지만 독특한 겉모습 탓에 종종 신랄한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되곤했고 온갖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 P153

이어진 평가에서 "이 건물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룬 것이 아니라 내외부 간에 상당한 독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부 장식을 면밀하게 관찰하지 않고 단지 겉모습만 가지고 존재 이유를 논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 P154

심사위원들은 내부 장식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해 심사를 유보했지만 이듬해 다시 후보에 올리지 않았고, 그해 바르셀로나건축상은 결국 주셉 푸츠 이 카다팔크가 지은 카사라모나 공장에돌아갔다. - P157

합벽 주택은 양옆이 이웃 건물로 막혀 앞뒤로만 열리는 길쭉한집이다. 채광 환기가 가능한 부분은 바깥으로 창이 난 전면과 후면뿐이라둘 사이에 끼인 건물 중앙 부분은 직접적인 채광 환기를 할 수 없는구조다. - P157

침실과 거실은 직접 채광 환기가 가능한 바깥으로배치했고, 부엌과 화장실 등은 가운데 부분에 배치되어 계단실이나 별도의 환기 통로를 통해 최소한의 빛과 공기를 제공받았다. 그나마건물의 높이가 낮았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던 구조였다. - P157

결과적으로 에이샴플라 주택은 블록의 밀도가 높아짐에 따라 처음 계획된 모습과는 다른 방향으로 개발되었다. - P158

에이샴플라구의 인구밀도(2016년 현재 35,330명/km)는 오늘날 서울 강남구에서도수치가 가장 높은 도곡2동의 인구밀도(2016년 기준 34,249명/km²)를 웃돈다. - P158

바르셀로나의 공공 공간은 옆으로 창을 내지 않는다는사회적 합의를 통해 얻은 결과다. 양 옆을 막았으니 앞뒤로 열 수밖에없었고 이러한 주택이 합벽주거블록의 기본 유형이 되었다. - P158

탁 트인 남향집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사람에게 이런 집은 어둡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스페인처럼태양이 뜨거운 나라, 특히 바다와 인접해 습도까지 높은 바르셀로나는밝고 더운 집보다는 조금 답답해도 서늘한 집을 더 선호했다. - P159

이상적인 환경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 아침저녁으로 살짝 볕이 드는 집, 늘 바람이 통해 덥혀진 집안의 열기를 식혀주는 집이다. - P159

하지만 이 같은 합벽주거블록에는 몇 가지 태생적 문제가 존재한다. 밀라 주택과도 관련된 두 가지 문제는 대지의 ‘방향‘과 ‘모양‘에 기인한다. - P159

에이샴플라에서는 같은 동네라하더라도 블록 내 위치에 따라 집의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 - P159

가장 선호되는 주택지는 블록의 동쪽, 즉 남북방향으로 길게 이어진면이다. 이곳은 동쪽과 서쪽으로 열려 채광 환기가 가능하고, 남쪽은다른 건물에 가려 아침저녁 적당히 햇빛이 들고 대낮에 집 안이 더워지지 않는 이상적인 위치다. - P159

두 번째 ‘모양’의 문제는 에이샴플라 블록을 합벽 주택으로 분할하며 생긴 삼각형 자투리 땅, 즉 ‘샴프라‘라고 불리는 블록의 네 모퉁이에서발생한다. - P160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샴프라는 주거지로서 가치가 현저히 떨어지기때문에 이를 해결하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건축가의 숙제로 남아있다. 샴프라를 둘러싼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우디는 새로운 유형의 건물을 제안한다. - P161

기존 유형으로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한 가우디는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건축적 장치로 ‘원형 파티오‘와 ‘너울대는 입면‘을 제안했다. - P162

앞뒤로 열린 주택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던 가우디는 주택의전면(84.5m)과 후면(25m)을 공평하게 분할하여 어떻게든 모든 집을 앞뒤 양편으로 열고자 했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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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에서 ‘전후’라는 개념은 단순히 1945년 이후를 지칭하는 시간적 의미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전(戰前)의 군국주의와 차별된 민주주의, 평화주의, 경제성장을 특징으로 한 일종의 가치 공간을 일컫는다.

‘전쟁’과 ‘전후’, 그리고 ‘탈(脫)전후’의 개념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잘 드러내는 일종의 메타포이자 이데올로기로서 역할한다.

이 책은 일본사의 일반적인 시대 구분을 따라 1950년대 전후 재건기부터 1960년대의 고도 성장기,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침체기와 1980년대 경제 호황기, 이후 1990년대부터의 장기 불황기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에 대한 작가론을 개진한다.

전후 재건기의 ‘국가 건축가’ 단게 겐조, 고도 성장기의 대표 주자인 메타볼리즘 그룹,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경향을 보여주는 이소자키 아라타와 이토 도요, 1990년대 이후의 탈전후 건축의 비전을 대변하는 구마 겐고, SANAA, 아틀리에 바우와우가 이들에 해당한다. 이 구성은 일본 건축가에 대한 세대론적 접근을 보여준다.

1913년생인 단게 겐조(1913-2005)가 전후 건축가 1세대를 대표

기쿠타케 기요노리(1928-2011), 마키 후미히코(b. 1928), 구로카와 기쇼(1934-2007) 등 메타볼리즘 건축운동의 멤버들과 이소자키 아라타(b. 1931) 등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에 출생한 건축가들이 2세대에 해당한다.

3세대 건축가로는 전후 민주주의 교육의 최초 수혜자에 해당하는 1940년대 초반 출생인 안도 다다오(b. 1941)와 이토 도요(b. 1941)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인 구마 겐고(b. 1954), 반 시게루(b. 1957), 세지마 가즈요(b. 1956) 등 1950년대 생들이 4세대

마지막으로 1960년대 이후 출생한 아틀리에 바우와우, 니시자와 류에(b. 1966), 후지모토 소우(b. 1971) 등이 5세대 건축가에 해당한다.

구마 겐고의 신국립경기장은 민족주의의 발흥 속에서 일본 건축이 다시 ‘일본’이라는 대타자와 결합하는 양상을 다룬다.

서구 모더니즘의 공세로부터 일본 건축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당시 건축계에 유행했던 ‘일본 취미’ 감수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취미’는 모더니즘 공법과 재료로 지은 건물에 전통적인 목조 건축의 지붕 형태를 얹은 일종의 혼성양식인 제관양식(帝冠様式)으로 구현되었다.

우리는 앵글로 아메리카 문화와 기존의 동남아시아 문화 양자 모두를 무시해야만 한다. 앙코르와트를 경배하는 것은 아마추어라는 증거이다.

단절이냐 연속이냐에 대한 본원적이고 이분법적인 논의보다 중요한 것은, 단게가 자신의 형성기에 해당하는 전쟁 시기 동안 확립한 건축 언어를 때로는 배제하기도 하고 때로는 재도입하기도 하면서 전후 일본 건축의 적법한 양식을 확립해가는 과정이다.

원폭이 초래한 비극적 상황을 세계 평화라는 미사여구로 대체하고, 히로시마를 평화의 성지로 내세우는 것은 미일 양국의 이해관계와 절묘하게 부합했다.

평화기념관 건물군으로 이어지는 축선 배치는 파괴에서 부흥으로 이루는 전후사의 연대기적 진행과 상통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관람객들이 미래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끔 동선이 짜였다는 점이다.

전후 건축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평화공원 설계에 르 코르뷔지에 풍의 국제주의 모더니즘 양식을 전략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자신의 전쟁 시기 건축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전후 일본의 공식 건축가로 새 출발을 도모할 수 있었다.

역사적이고 지역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한 모더니즘의 승리는 단게의 평화공원뿐만 아니라 전후 재건기 일본 건축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단게는 획일화된 모더니즘 양식의 무비판적 수용을 경계하며, 국제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정신성을 결여한 백색의 "위생도기"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단게는 일본의 지역적 특수성, 즉 고유의 풍토와 전통, 물적, 경제적, 기술적 상황을 반영할 건축이야말로 진정한 모더니즘 건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통 건축과의 단순한 형태상의 유사성을 강조하거나 특정 모티브를 기계적으로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추상화되고 개념적인 차원에서 전통을 참조하고자 했다.

건축 평론가 가와조에 노보루는 전통 건축의 모티브를 전후 건축에 도입할 때 봉착하게 되는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세는 일본의 위대하고 오랜 문화유산인 동시에 천황제와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이기도 하다. 단게는 이세가 상기시키는 제국주의 유산에 저항해야 했으며, 동시에 이세로 대표되는 일본의 기상을 표현해야 했다.

문제는 어떻게 일본 전통의 함의를 한때 그것과 긴밀하게 결부되었던 천황제와 제국주의와 분리시켜 전후 일본 건축의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재정의할 것인가 였다.

일본적인 것의 실체가 존재하는가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

전후 일본이 계승해야 할 정당한 전통이 있는가, 있다면 이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관한 전략적인 문제

그는 역동적인 생명감으로 가득한, 기괴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조몬의 원시성에서 일본의 문화와 예술, 나아가 현대 문명이 봉착한 교착상태를 타개할 돌파구를 찾았다.

조몬에 대한 오카모토의 관심은 소르본 대학 시절 은사인 마르셀 모스로부터 배웠던 민속학 연구, 그리고 원시주의에 매료된 조르주 바타유나 앙드레 브레통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몬론은 일본 전통의 정당성을 권위적인 봉건 체제가 아닌 피지배층에게서 찾는다는 점에서 전후의 급진적인 민중 담론의 영향을 보여준다.

조너선 레이놀즈가 지적했듯이, 전통논쟁과 민중론의 만남은 계급투쟁의 주체인 ‘민중’을 역사와 전통을 공유한 일본 ‘민족’으로 치환시킴으로써, 패전 직후의 민중 담론이 가졌던 정치적 급진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

일반적으로 일본 전통을 대표하는 "섬약하고, 평면적이며, 정서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미감은 야요이적 계보를 따르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카모토는 서구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 전통을 "골동품화"시키는 전통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조몬적인 것을 회복함으로써 왜곡된 전통 의식을 타개하고자 했다.

한국 여행에서 오카모토는 장승이나 솟대, 탈춤 같은 민속예술이 뿜어내는 소박하지만 강렬한 생명력, 규격화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미에 매료되었다.

대칭미를 특징으로 하는 일본과는 대조적인, 비대칭적이고 역동적인 한국의 민속 전통에서 그는 광활한 북유라시아 대륙을 활보하던 사라진 고대 스키타이 문명의 흔적을 떠올렸다.

전시 일본의 제국주의자들과 달리 오카모토는 일본이라는 경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된 공간 속에서 비(非)위계적이고 보편적인 조몬의 원시성을 추구한다.

시라이는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카를 야스퍼스에게 철학을 공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답게 조몬과 야요이의 이분법을 니체 식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변증법적인 투쟁으로 이해했다.

단게는 조몬 이후에 도래한 농경문화인 야요이의 조형미와 질서를 배척하지 않았다.

민중과의 밀착이나 동일시만을 강조해서는 새로운 창조가 불가능

건축가는 특유의 구상력을 발휘해 민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과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몬과 야요이라는 두 대립적인 요소의 공존과 통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단게는 건축의 재현 수단으로서 사진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 인물이다.

‘일본적이면서 동시에 모던한’ 또는 ‘전통적이면서 동시대적’은 단게가 일본 전통을 이해하는 관점일 뿐 아니라, 그가 전후 일본 건축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택한 전략이다.

노출 콘크리트를 마감 없이 드러낸 거친 표면 처리는 조몬적인 것의 현대적 계승으로 강조

전통 목조 건축의 공간 분할 체계인 기와리(木割り) 시스템을 입면 디자인에 활용한 것이 특징적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이노쿠마의 도안적인 벽화와 비교해볼 때, 사각의 프레임을 뚫고 나가려는 듯한 오카모토의 카오스적인 이미지는 노출 콘크리트 벽의 기하학적인 추상 공간과 팽팽하게 대결한다.

건축과 예술의 본질적인 협력은 건축의 그 투명하고 견고한 차가움에 대해 열기를 머금은 인간적인 것, 비합리적 신비함, 전율적인 정열을 대결시키는 것이며, 건축의 물러설 수 없는 목적성에 대해 예술의 무(無)목적성을 대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두 극이 되어 긴장하고 대항한다.

예술의 종합을 향한 열망은 유럽은 물론 남미와 일본을 거쳐, 한국 건축계에도 상륙했다. 일본과 유럽 건축의 최신 동향에 밝았던 김중업과 김수근이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단게 연구실은 감상적인 휴머니즘적 접근보다 도시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움직임과 활동에 관한 실증적인 조사와 분석을 강조했다.

일본의 고도성장기는 전문적인 국가관료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에서 이룩된 ‘엘리트 관료의 시대’였다.

〈도쿄계획〉의 핵심은 바로 자동차가 가져올 새로운 모빌리티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시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하는 것

니시야마는 민중의 주거환경 개선에 몰두해온 사회주의 계열의 건축가로 도쿄대학의 단게와는 오랜 경쟁 관계에 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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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부르주아를대표하는 구엘과 새로운 건축을 대표하는 가우디의 만남은 우연이아니었다. - P139

비센스 주택과 구엘 저택, 칼벳 주택과 바트요 주택, 밀라 주택에 이르기까지 가우디의 주된 의뢰인은 부르주아, 그 중에서도기계식 공장을 소유한 산업자본가들이었다. - P139

에우세비 구엘 같이 유복하게 자란 2세대 산업자본가들의 등장, 전기와 철도, 자동차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명, 오랫동안 도시 확장을가로막아온 성벽의 철거, 그리고 근대적인 삶의 모습을 고민하게 한 ‘새로운 도시의 건설. 19세기말 카탈루냐에는 수백 년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일들이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주체할 수 없는 변화의 열기는곧 예술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 P139

지역의색채가 유럽 아르누보 유행과 결합하며 독특한 예술 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 P140

카탈루냐에서는 자연물을 소재로 삼아 건물을 화려하고경쾌하게 장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스페인 본토와 확연히 구분되는이 새로운 흐름을 ‘모데르니스마 카탈라 Modernisme catala‘ 라고 부른다. - P140

건축도 예술 전반에 걸친 민족적 분위기에 동참하여 지역 산야에서흔히 볼 수 있는 풀과 꽃을 장식 소재로 사용하는 등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 P140

가우디는 "우리에겐 (북쪽 나라에 차고 넘치는 큰 나무들이별로 없기 때문에 꽃과 덤불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수풀이라 할 수 있다. 농작물과 야채, 아몬드, 과실수, 그리고 온갖 꽃들이 만개한 오솔길, 손이 닿을만한 높이의 나무 그늘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 P140

반짝이는 재료로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장식물은얼핏 공예적이고 장인적인 작업처럼 보이지만 조형적, 역학적으로중요한 부분에 집중되어 돌 건축물의 육중함과 힘의 흐름을 시각적으로끊어내며,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화사한 색채는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에어울리는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P140

사실 가우디 건축의 특징으로 알려진 다채색 타일과 자연물 장식은동시대 건축의 일반적 경향으로 이 세 건축가 모두 공유하고 있으며, 그중 가우디는 오히려 장식을 절제한 편이었다. - P143

가우디 역시 한때장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긴 했지만 그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과도한장식보다는 ‘좋은 구조를 가진 단순한 양식‘을 추구했다. - P143

가우디를 비롯한 동시대 건축가들이 자연을 그들의 공통된 주제로 삼아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노력한 까닭은 자연이야 말로무비판적으로 반복 생산되는 신고전주의와 절충주의를 극복할새로운 원천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 P143

가우디는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색채와운동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자연에 충만한 ‘색채‘와 ‘운동감’이야말로 건축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속성 즉, 자연과 건축을 구분하는경계라는 판단을 드러낸 것이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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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계획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길은 50m 폭을 가진 주요 도로들vias transcendentales 이다. - P130

그란비아는 수평으로, 파세츠 다 산 주안은 수직으로, 디아고날과 메리디아나, 파라렐은 대각선 방향으로 도시를 가로지른다. - P130

에이샴플라 이후 바르셀로나는 완전히 새로운 도시 경관을 갖게되었다. 도로 폭이 4m에 불과하여 조망은 고사하고 맞은편 건물조차제대로 볼 수 없었던 중세 도시 바르셀로나가 끝없이 연장된 길을 따라무한히 반복 확장되는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로써 주거환경도비할 수 없이 좋아졌다. - P130

에이샴플라 내 모든 주택은 입사각45도의 직사광선을 받을 수 있도록 계획되었고, 앞으로 너비 20m 도로, 뒤로 폭 60m에 이르는 거대한 파티오를 마주하고 있어 채광과환기, 사생활 등 시대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주거환경을 만족시켰다. - P130

다른 도시계획안들이 고전적 방식을 따라 여러 길 사이에 명확한 위계차이를 둔 것과 달리 세르다 계획안은 모든 길의 위계가 동일하기때문에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어떤 사회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 P130

이후 에이샴플라는 ‘내부 파티오가사유화되고, 블록은 사방으로 막히고, 용적률이 점차 증가하고, 격자 도로망에 시설들을 균일하게 배치하는 원칙이 깨지고, 공원으로예정되어 있던 거의 모든 영역이 사라지는 등‘ 애초의 계획과는 다른방향으로 전개되었다. - P132

실제로 1859년 계획안을 보면 그는 건물을 ‘11‘자나 ‘ㄱ’자, ‘ㄷ’자형태로 배치하여 ‘길 사이 공간‘이 닫히지 않도록 했고, 사방이 막힌경우에도 모퉁이 뒤편을 비워 적절한 채광과 환기가 가능하도록 승배려했다. 그러나 이후 점차 밀도가 높아지면서 네 모퉁이가 모두 막힌하나의 닫힌 블록으로 변형되었다. - P132

애초에 열려있던 세르다의 ‘길 사이 공간‘이 꽉 닫힌 블록이 되고 높이가 높아지면서주거환경의 질은 급격히 나빠졌다. - P132

당시 그라시아 대로 건축물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는 건축 요소가바로 주인집 발코니다. - P136

‘트리부나 tribuna‘라고 불리는 본층 발코니는안팎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는데 이는 그라시아 대로가 내려다보이는이 발코니가 사교 공간의 중심이자 집주인의 사회적 지위와 성격을드러내는 상징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 P136

화려하게 장식된 부르주아 주택들은 기존 구도심 귀족 저택과거주방식이 전혀 달랐다. - P136

전통적으로 귀족은 독립된 건물에서가족구성원들만 모여 살았다. 성 안에 큰 저택을 지을 만한 넓은 땅이없기도 했거니와, 사생활이나 안전 문제 때문이라도 신분이 다른 이웃과한 공간에 사는 것을 기피했을 것이다. - P136

구도심의 귀족 저택은 일반적으로길 쪽으로는 닫고 안뜰을 향해서만 열린 내향적 구조를 가졌고, 공간이 수직적으로 전개되어 바닥부터 지붕까지 모든 층을 한 가족이이용했다. - P136

반면 실리적인 부르주아들은 아래층에 상점, 위층에 임대주택을 배치한 집합 주택을 더 선호했다. - P136

이 같은 요구에 따라 가게와 주인집, 세입자들의 출입이 분리된 새로운 주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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