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에서 ‘전후’라는 개념은 단순히 1945년 이후를 지칭하는 시간적 의미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전(戰前)의 군국주의와 차별된 민주주의, 평화주의, 경제성장을 특징으로 한 일종의 가치 공간을 일컫는다.

‘전쟁’과 ‘전후’, 그리고 ‘탈(脫)전후’의 개념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잘 드러내는 일종의 메타포이자 이데올로기로서 역할한다.

이 책은 일본사의 일반적인 시대 구분을 따라 1950년대 전후 재건기부터 1960년대의 고도 성장기,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침체기와 1980년대 경제 호황기, 이후 1990년대부터의 장기 불황기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에 대한 작가론을 개진한다.

전후 재건기의 ‘국가 건축가’ 단게 겐조, 고도 성장기의 대표 주자인 메타볼리즘 그룹,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경향을 보여주는 이소자키 아라타와 이토 도요, 1990년대 이후의 탈전후 건축의 비전을 대변하는 구마 겐고, SANAA, 아틀리에 바우와우가 이들에 해당한다. 이 구성은 일본 건축가에 대한 세대론적 접근을 보여준다.

1913년생인 단게 겐조(1913-2005)가 전후 건축가 1세대를 대표

기쿠타케 기요노리(1928-2011), 마키 후미히코(b. 1928), 구로카와 기쇼(1934-2007) 등 메타볼리즘 건축운동의 멤버들과 이소자키 아라타(b. 1931) 등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에 출생한 건축가들이 2세대에 해당한다.

3세대 건축가로는 전후 민주주의 교육의 최초 수혜자에 해당하는 1940년대 초반 출생인 안도 다다오(b. 1941)와 이토 도요(b. 1941)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인 구마 겐고(b. 1954), 반 시게루(b. 1957), 세지마 가즈요(b. 1956) 등 1950년대 생들이 4세대

마지막으로 1960년대 이후 출생한 아틀리에 바우와우, 니시자와 류에(b. 1966), 후지모토 소우(b. 1971) 등이 5세대 건축가에 해당한다.

구마 겐고의 신국립경기장은 민족주의의 발흥 속에서 일본 건축이 다시 ‘일본’이라는 대타자와 결합하는 양상을 다룬다.

서구 모더니즘의 공세로부터 일본 건축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당시 건축계에 유행했던 ‘일본 취미’ 감수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취미’는 모더니즘 공법과 재료로 지은 건물에 전통적인 목조 건축의 지붕 형태를 얹은 일종의 혼성양식인 제관양식(帝冠様式)으로 구현되었다.

우리는 앵글로 아메리카 문화와 기존의 동남아시아 문화 양자 모두를 무시해야만 한다. 앙코르와트를 경배하는 것은 아마추어라는 증거이다.

단절이냐 연속이냐에 대한 본원적이고 이분법적인 논의보다 중요한 것은, 단게가 자신의 형성기에 해당하는 전쟁 시기 동안 확립한 건축 언어를 때로는 배제하기도 하고 때로는 재도입하기도 하면서 전후 일본 건축의 적법한 양식을 확립해가는 과정이다.

원폭이 초래한 비극적 상황을 세계 평화라는 미사여구로 대체하고, 히로시마를 평화의 성지로 내세우는 것은 미일 양국의 이해관계와 절묘하게 부합했다.

평화기념관 건물군으로 이어지는 축선 배치는 파괴에서 부흥으로 이루는 전후사의 연대기적 진행과 상통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관람객들이 미래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끔 동선이 짜였다는 점이다.

전후 건축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평화공원 설계에 르 코르뷔지에 풍의 국제주의 모더니즘 양식을 전략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자신의 전쟁 시기 건축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전후 일본의 공식 건축가로 새 출발을 도모할 수 있었다.

역사적이고 지역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한 모더니즘의 승리는 단게의 평화공원뿐만 아니라 전후 재건기 일본 건축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단게는 획일화된 모더니즘 양식의 무비판적 수용을 경계하며, 국제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정신성을 결여한 백색의 "위생도기"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단게는 일본의 지역적 특수성, 즉 고유의 풍토와 전통, 물적, 경제적, 기술적 상황을 반영할 건축이야말로 진정한 모더니즘 건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통 건축과의 단순한 형태상의 유사성을 강조하거나 특정 모티브를 기계적으로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추상화되고 개념적인 차원에서 전통을 참조하고자 했다.

건축 평론가 가와조에 노보루는 전통 건축의 모티브를 전후 건축에 도입할 때 봉착하게 되는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세는 일본의 위대하고 오랜 문화유산인 동시에 천황제와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이기도 하다. 단게는 이세가 상기시키는 제국주의 유산에 저항해야 했으며, 동시에 이세로 대표되는 일본의 기상을 표현해야 했다.

문제는 어떻게 일본 전통의 함의를 한때 그것과 긴밀하게 결부되었던 천황제와 제국주의와 분리시켜 전후 일본 건축의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재정의할 것인가 였다.

일본적인 것의 실체가 존재하는가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

전후 일본이 계승해야 할 정당한 전통이 있는가, 있다면 이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관한 전략적인 문제

그는 역동적인 생명감으로 가득한, 기괴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조몬의 원시성에서 일본의 문화와 예술, 나아가 현대 문명이 봉착한 교착상태를 타개할 돌파구를 찾았다.

조몬에 대한 오카모토의 관심은 소르본 대학 시절 은사인 마르셀 모스로부터 배웠던 민속학 연구, 그리고 원시주의에 매료된 조르주 바타유나 앙드레 브레통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몬론은 일본 전통의 정당성을 권위적인 봉건 체제가 아닌 피지배층에게서 찾는다는 점에서 전후의 급진적인 민중 담론의 영향을 보여준다.

조너선 레이놀즈가 지적했듯이, 전통논쟁과 민중론의 만남은 계급투쟁의 주체인 ‘민중’을 역사와 전통을 공유한 일본 ‘민족’으로 치환시킴으로써, 패전 직후의 민중 담론이 가졌던 정치적 급진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

일반적으로 일본 전통을 대표하는 "섬약하고, 평면적이며, 정서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미감은 야요이적 계보를 따르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카모토는 서구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 전통을 "골동품화"시키는 전통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조몬적인 것을 회복함으로써 왜곡된 전통 의식을 타개하고자 했다.

한국 여행에서 오카모토는 장승이나 솟대, 탈춤 같은 민속예술이 뿜어내는 소박하지만 강렬한 생명력, 규격화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미에 매료되었다.

대칭미를 특징으로 하는 일본과는 대조적인, 비대칭적이고 역동적인 한국의 민속 전통에서 그는 광활한 북유라시아 대륙을 활보하던 사라진 고대 스키타이 문명의 흔적을 떠올렸다.

전시 일본의 제국주의자들과 달리 오카모토는 일본이라는 경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된 공간 속에서 비(非)위계적이고 보편적인 조몬의 원시성을 추구한다.

시라이는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카를 야스퍼스에게 철학을 공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답게 조몬과 야요이의 이분법을 니체 식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변증법적인 투쟁으로 이해했다.

단게는 조몬 이후에 도래한 농경문화인 야요이의 조형미와 질서를 배척하지 않았다.

민중과의 밀착이나 동일시만을 강조해서는 새로운 창조가 불가능

건축가는 특유의 구상력을 발휘해 민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과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몬과 야요이라는 두 대립적인 요소의 공존과 통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단게는 건축의 재현 수단으로서 사진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 인물이다.

‘일본적이면서 동시에 모던한’ 또는 ‘전통적이면서 동시대적’은 단게가 일본 전통을 이해하는 관점일 뿐 아니라, 그가 전후 일본 건축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택한 전략이다.

노출 콘크리트를 마감 없이 드러낸 거친 표면 처리는 조몬적인 것의 현대적 계승으로 강조

전통 목조 건축의 공간 분할 체계인 기와리(木割り) 시스템을 입면 디자인에 활용한 것이 특징적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이노쿠마의 도안적인 벽화와 비교해볼 때, 사각의 프레임을 뚫고 나가려는 듯한 오카모토의 카오스적인 이미지는 노출 콘크리트 벽의 기하학적인 추상 공간과 팽팽하게 대결한다.

건축과 예술의 본질적인 협력은 건축의 그 투명하고 견고한 차가움에 대해 열기를 머금은 인간적인 것, 비합리적 신비함, 전율적인 정열을 대결시키는 것이며, 건축의 물러설 수 없는 목적성에 대해 예술의 무(無)목적성을 대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두 극이 되어 긴장하고 대항한다.

예술의 종합을 향한 열망은 유럽은 물론 남미와 일본을 거쳐, 한국 건축계에도 상륙했다. 일본과 유럽 건축의 최신 동향에 밝았던 김중업과 김수근이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단게 연구실은 감상적인 휴머니즘적 접근보다 도시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움직임과 활동에 관한 실증적인 조사와 분석을 강조했다.

일본의 고도성장기는 전문적인 국가관료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에서 이룩된 ‘엘리트 관료의 시대’였다.

〈도쿄계획〉의 핵심은 바로 자동차가 가져올 새로운 모빌리티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시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하는 것

니시야마는 민중의 주거환경 개선에 몰두해온 사회주의 계열의 건축가로 도쿄대학의 단게와는 오랜 경쟁 관계에 있던 인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