웩스너센터의 내부는 아이젠만이 추상적 요소인 그리드, 판, 각 기둥 등의 형태적 조작을 얼마나 쉽고 자연스럽게 수행하였는지를명백하게 보여주는데 이러한 추상적 요소들은 실체화될 때 추상성을 잃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자체의 추상적 조건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이젠만은 이것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몇 개의 기둥은 바닥에 이르지않고 매달려 있다. - P224

아이젠만이 문학 비평에 사용되는 해체의 개념을 건축에 적용하려고시도했다는 점에서, 1985년 베로나Verona 소재 로미오와 줄리엣 프로젝트The Romeo and Juliet project는 가장 흥미롭다. - P224

텍스트의 독해에서 창조적 행위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문학비평가들의 견해에 따라, 아이젠만은 ‘건축적텍스트‘ 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지어진 것의 현실성을 이용하는 텍스트 쓰기라는 의미를 넘어서 텍스트의 지적인 창안물로서의 건축이며, 건축가는 읽을 때마다 생동감을 갖는 건축적 텍스트를 제공하는 사람이 된다. - P224

이때 건축적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건축의 현실은 독자에 의해 좌우된다. 독자가 주도적 역할을 하며 텍스트인 건축작업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독자의 견해에 따라 많은 수의 건축적 현실이 나타난다. - P224

아이젠만은 ‘건축적 구축‘ 의 분야에 이러한 생각을 이식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모델과 드로잉이 문자 그대로 일치하는 서로 다른 스케일의 세 가지디자인을 제안했다. 세 가지 프로젝트는 상대적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함 없이 또한 결과적으로 고정관념 없이 대상물들이 필수적으로 자체의 의미를 갖도록 중첩되어 있다. - P226

본질적으로 다른 카테고리를 동시에 공존시키고자, 아이젠만은 ‘스케일링 ‘scaling‘ 의 용어를 도입했다. 이 개념은 명료함을 위한 애매한 갈망을 나타낸것이다. 용어를 만들어냄에 있어서 아이젠만은 건축역사 속의 특정 이야기, 즉 단일 건물에 서로 다른 스케일의 요소를 자주 사용한 매너리즘을 염두에둔 듯하다. - P226

건축 외부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계기의 탐색과 그러한 탐색의 영역이 현대 세계임을 원하는 희망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소재괴테대학교 생물학센터J. W. Goethe-Universitat Biocentrum이다. - P226

게리와 아이젠만의 컴퓨터 사용이 매우 다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게리에게 컴퓨터는 형태를 그려내고 표현하는 도구이자 조각가의 자유처럼형태를 만들어낸다. 아이젠만에게 컴퓨터는 프로젝트의 ‘구축‘을 도와주는장치이다. - P229

아이젠만의 건축적 재능은 자신의 건축을 정당화하기 위한 극도의 규율적인 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형태조작의 능숙함에 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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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전체 주택건설 총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단독주택을 앞서기 시작한 시점은 1981년이다.

주거유형 선호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융통할 수 있는 자금 범위 안에서 거주할 주택의 생활 환경 조건에 대한 비교이며,

다른 하나는 향후 주택 가격의 추이, 환금성의 정도 등에 대한 고려이다.

단독주택 거주자도 1993년을 기점으로 아파트 선호로 돌아섰고, 매일매일의 일상을 통해 소위 아파트의 편리함과 쾌적함을 경험한 아파트 거주자들은 이미 1987년부터 강한 아파트 선호 경향을 보였다.

1980년에 열세를 보인 초등학교도 도시의 고층화・고밀화가 진행되면서 아파트단지에서의 접근성이 뚜렷하게 나아졌다

서울시의 경우, 2010년 말 기준으로 승용차는 228만 3,000여 대, 인구 4명 당 1대 꼴이고 주거 지역의 주차장 확보율은 96.6%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파트를 제외한 다가구주택 밀집 지역 등의 주차장 수급비율은 60% 이하로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아파트단지의 경우 전체 주민의 50%가 동시에 외부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반면, 단독주택은 전체 주민의 고작 25%만이 동일한 시간에 외부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한국주택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1978년을 기점으로 단독주택 입주금액이 아파트를 상회하기 시작

19세대 이하의 아파트 혹은 29세대 이하의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을 건설할 경우에는 소규모 대지에 건축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업계획 승인절차를 피하면서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 분양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제도상의 빈틈을 파고든 것이다. 강남의 고급 빌라들이 한결같이 19세대 이하인 까닭이다

영구임대주택은 우리나라의 전체 주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5% 내외에 불과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구임대주택 역시 아파트라는 주택유형에 집중되어 있다.

정부나 지자체 등 공공 부문에서 책임지고 가꾸어야 할 도시 공공공간이 취약한 가운데, 내 집 마련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개인은 기반시설과 녹지환경을 사적으로 구입할 수밖에 없는 실정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응한 것이 단지이다

전국적으로 본다면 경기도가 전국 아파트단지의 26.6%를 점유하고 있으며, 서울이 17.3%로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을 대상으로 한 국토해양부 자료에 따르면 1,000세대 이상의 소위 대단지가 전체 아파트단지의 60%를 넘는다.

단지란 모양도 제각각인 자잘한 필지가 어떤 압력에 의해 모여 덩어리로 변한 것이다.

이 원리는 규모(sizes), 외곽(boundaries), 공지(open spaces), 편의시설(institution sites), 상가(local shops), 단지 내 도로 체계(internal street System) 등 6가지 항목으로 요약되는데, 이것이 소위 우리나라의 ‘단지 만들기 전략’의 구체적 수단이자 도구로 자리잡은 근린주구이론(近隣住區理論)의 핵심이다.

‘단지’란 공공재의 투자 없이 취약한 도시기반시설을 확보하기 위한 공간기획이자 공간정치학이다.

서울시 뉴타운 사업이 한창이던 2009년과 2010년의 경우, 각각 3만 1,061채와 4만 8,689채의 주택이 사라졌다. 반면에 새롭게 공급된 아파트는 2009년이 3만 1,917호, 2010년이 3만 2,016호로 사라진 단독주택이나 다세대, 다가구주택의 총량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공공의 재원으로 충당되어야 할 취약한 도시기반시설의 확충 책임을 사적 비용을 전제하는 아파트단지 만들기 방식으로 해소한 셈

단지 만들기 전략이 야기하는 더 심각한 문제는 개별 토지와 건축이 도시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력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아파트단지에는 가역성(可逆性)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 아파트단지면 영원히 아파트단지로 굳어, 도시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당한다.

단지로 이루어진 "아파트는 개인이 공공 서비스에 대한 책임은 별로 없이 지원만 받는 일방향 관계에 있는데 반해 단독주택은 공공 서비스와 개인이 직접 접속하며 서비스를 받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자신의 책임으로 부담해야 한다."

"이상적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개인들이 소외되거나 고립되지 않고 결합과 연대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사회다. 건강한 개인주의는 건강하고 정의로운 공동체의 구성과 유지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주체적 개인을 옹호한다"

아파트가 많은 것이 문제라면 전 국민의 87% 이상이 정부기관(HDB, Housing Developmenet Board)이 공급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싱가포르가 우리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일 것이다. 문제는 ‘아파트’가 아니라 ‘단지’이다.

시민사회의 본질이자 핵심은 시민이 공공 서비스와 접속하는 방식이며, 작은 필지를 중심으로 한 자율조정 능력 확보가 관건이다.

결국 필요한 덕목은 작은 필지의 보전과 지혜로운 활용이다. 이런 이유에서 도시계획은 소단위 개발 원칙을 지켜야 한다.

공간구조 측면에서 타운하우스나 블록형 단독주택은 아파트와 아무런 차이도 없다. 모두 ‘단지’라는 점에서 한 치의 진전도 이루지 못한 형국이다.

비판의 핵심은 부족한 도시기반시설을 과점(寡占)하면서 주변에 부하를 준다는 것인데, 이는 사적 비용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편의시설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파리의 도시풍경을 대표하는 나지막한 도시주택들은 모두 나홀로 아파트이며, 번화가의 주택 역시 대부분이 나홀로 주상복합아파트이다.

바르셀로나의 도시주택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주택은 스스로의 비용으로 단지 내 편의시설을 구입하지 않으며, 공공 서비스와 직접 만나는 공간구조를 취하고 있다.

모델하우스는 가짜 집을 구경하면서 진짜 들어가 살 집으로 착각하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견본주택이 일시적으로 만들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관행에서 벗어난 최초의 사례는 1987년에 선보인 ㈜한신공영의 모델하우스이다.

한신공영 견본주택은 영업부서와 샘플하우스를 함께 둔 기존의 견본주택과 다르지 않으나, 해당 샘플하우스의 분양이 끝나면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다른 샘플하우스로 재활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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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자신이 공언한 바 있지만 그는 ‘계몽주의자’이다. 계몽주의에 대한 백과사전의 정의는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으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시대적인 사조"인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둔 사조’ 정도로 재정의하면 그의 사상에도 부합한다. 이때 현존 질서란 현재의 지배적 질서인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다.

공산주의, 흔히 말하는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래서 결론은 자본주의다’가 아니라 ‘다시 시도하라’이다. 왜 굳이 다시 시도해야 하는가? ‘자본주의’가 재난적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택지는 종말론적이다.

종교는 미국의 탄생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이해하는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러시아와 한국의 역사적 운명이 서로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각각 몽골과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장기적인 지배를 받았다는 이유에서다. 스케일은 물론 다르다. 한쪽은 13세기 중반부터 240년간 지배받았고, 다른 한쪽은 20세기 초반에 36년간 지배받았으니까

지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국 땅에 있으면서 또한 고국에 있다는 야릇한 이 동시적인 체험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오래된 물음과 부딪쳐야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첫 번째는 유럽 문학에서 진정한 전쟁 체험으로 치켜세워진다는 참호전에서의 조우다.

두 번째로 지젝이 드는 사례는 살인의 체험을 숭고한 경험담으로 고양시키는 몽매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금 고상한 쪽이다.

이 연주가 궁극적으로 양측의 사격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젝은 그 연주가 너무 고상하고 심오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왜 그런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2010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져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magic encounter’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그것은 실제 현실이면서 동시에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라기보다는 ‘라캉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고, 이 점은 영화평론가의 ‘발견’이 아니라 지젝의 직접적인 ‘고백’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지젝에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의 분석이지 ‘영화’가 아니다.

상징계란 체스 혹은 장기의 규칙 같은 것이다.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는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기사’가 ‘메신저’로 불릴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상적 게임의 세계다. 규칙을 떠나서, 혹은 규칙을 무시하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 따위는 상상계에 속한다.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이가 다가와 판을 뒤엎는다든가 하는 ‘예기치 못한 침범’이 바로 실재다.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실재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다.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법 규칙을 공유해야 하고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즉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이란 건 없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도 섹스는 언제나 ‘전시적’이며 다른 사람의 응시에 의존한다

대타자는 무인도에 난파당한 농부가 신디의 분장을 통해 불러낸 친구처럼 ‘주관적 전제subjective presupposition’ 혹은 ‘주관적 가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비실체적이며 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

우리 안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불렀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

우리는 출생과 더불어 욕망 속으로 내던져진다

‘신체 없이도 존속하는 신비로운 자동성을 지닌 기이한 기관’이 부분대상이다. 젖먹이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공갈 젖꼭지’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라캉의 라멜라는 존재하지는exist 않지만 고집스럽게 존속하는insist 어떤 것이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몸속의 과잉excess에 직면할 때다. 이 장면에서 부끄러움의 원천이 소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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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이들이 (그들 중 대다수는 내 옆에서 죽었지만) 증오와 분노, 살육과 말살 등은 대상들과는 관계가 없음을 예리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아니, 목적이든 대상이든 철저하게 우연이었다.

가장 원초적이고 과격한 감정들조차 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행위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미쳐 날뛰고 죽이고 말살하고 스스로 죽어 버리려는, 분열된 한쪽 영혼에서 발산되는 것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대열이 커다란 동굴로 들어가듯 여신에게 집어삼켜졌다.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여신의 이마에서 표식이 빛났다. 여신은 어떤 꿈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처럼, 두 눈을 감았고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갑자기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이마에서 별들이, 수많은 반짝이는 별들이 튀어나와서 멋진 활모양과 반원을 그리며 검은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그 별들 가운데 하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곧장 나를 향해 날아왔다. 마치 나를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굉음을 내며 수천 조각의 불꽃으로 쪼개져서, 나를 솟구쳐 올렸다가 땅으로 내동댕이쳤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세계가 내 위에 무너져 내렸다.

깊이 잠들면 잠들수록 무엇인가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으며, 내가 그 힘을 따라가고 있음이 격렬하게 느껴졌다.

붕대를 감는 것은 몹시 아팠다. 그 이후에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아팠다.

가끔 열쇠를 발견해서 내 자신의 깊은 곳으로,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형상들이 졸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 어두운 거울 위로 몸을 굽혀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이젠 완전히 내 친구, 나의 인도자인 그와 똑같이 닮은 모습이다.

지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자아가 끊임없이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방법뿐이다.

내 세계에 조금만 위협이 와도 금방 죽을 것처럼 공포에 질리는 게 아니라,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사력을 다해 껍질을 부수고자 해서 극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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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라는 용어는 프랑스 도시주택을 동경한 미국의 건축가들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 의해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내진·내화 성능을 갖춘 구조형식과 재료

3층 이상의 층수, 독립적 생활이 가능한 단위주택 확보

모던한 디자인, 다양한 도시민을 위한 임대계약 방식의 도시주택

평면구성의 다양성 확보, 근대식 설비와 편의시설

공동세탁장이나 건조장 확보,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로(街路)체계에 대응한 건축물의 연도형(沿道型)배치 등이 아파트의 특징이다.

충정로 유림아파트를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로 볼 수 있다.

1956년에 지금의 을지로4가와 청계천4가 사이에 있는 주교동(舟橋洞, 요즘의 배다리길) 230번지에 세워진 중앙아파트라는 입장

1958년 서울 성북구 종암1동 소재 시유지에 건설된 종암아파트라는 입장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의 경성고공 졸업작품전에 이미 아파트먼트 하우스라는 용어가 사용

아파트에 대한 용어가 1973년 9월 건축법 시행령 개정 제조 ‘용어의 정의’를 통해 처음으로 공식 규정된 까닭에, 당시까지 통일된 개념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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