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 자신이 공언한 바 있지만 그는 ‘계몽주의자’이다. 계몽주의에 대한 백과사전의 정의는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으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시대적인 사조"인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둔 사조’ 정도로 재정의하면 그의 사상에도 부합한다. 이때 현존 질서란 현재의 지배적 질서인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다.
공산주의, 흔히 말하는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래서 결론은 자본주의다’가 아니라 ‘다시 시도하라’이다. 왜 굳이 다시 시도해야 하는가? ‘자본주의’가 재난적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택지는 종말론적이다.
종교는 미국의 탄생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이해하는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러시아와 한국의 역사적 운명이 서로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각각 몽골과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장기적인 지배를 받았다는 이유에서다. 스케일은 물론 다르다. 한쪽은 13세기 중반부터 240년간 지배받았고, 다른 한쪽은 20세기 초반에 36년간 지배받았으니까
지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국 땅에 있으면서 또한 고국에 있다는 야릇한 이 동시적인 체험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오래된 물음과 부딪쳐야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첫 번째는 유럽 문학에서 진정한 전쟁 체험으로 치켜세워진다는 참호전에서의 조우다.
두 번째로 지젝이 드는 사례는 살인의 체험을 숭고한 경험담으로 고양시키는 몽매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금 고상한 쪽이다.
이 연주가 궁극적으로 양측의 사격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젝은 그 연주가 너무 고상하고 심오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왜 그런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2010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져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magic encounter’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그것은 실제 현실이면서 동시에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라기보다는 ‘라캉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고, 이 점은 영화평론가의 ‘발견’이 아니라 지젝의 직접적인 ‘고백’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지젝에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의 분석이지 ‘영화’가 아니다.
상징계란 체스 혹은 장기의 규칙 같은 것이다.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는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기사’가 ‘메신저’로 불릴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상적 게임의 세계다. 규칙을 떠나서, 혹은 규칙을 무시하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 따위는 상상계에 속한다.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이가 다가와 판을 뒤엎는다든가 하는 ‘예기치 못한 침범’이 바로 실재다.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실재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다.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법 규칙을 공유해야 하고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즉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이란 건 없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도 섹스는 언제나 ‘전시적’이며 다른 사람의 응시에 의존한다
대타자는 무인도에 난파당한 농부가 신디의 분장을 통해 불러낸 친구처럼 ‘주관적 전제subjective presupposition’ 혹은 ‘주관적 가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비실체적이며 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
우리 안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불렀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
‘신체 없이도 존속하는 신비로운 자동성을 지닌 기이한 기관’이 부분대상이다. 젖먹이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공갈 젖꼭지’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라캉의 라멜라는 존재하지는exist 않지만 고집스럽게 존속하는insist 어떤 것이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몸속의 과잉excess에 직면할 때다. 이 장면에서 부끄러움의 원천이 소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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