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하루
다이라 아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다.  거기다 항상 하하-하고 웃고 있다면 배로 싫어진다. (현재로서는 그렇다. 몇 년 뒤엔 또 변하겠지? 제발 그러길 바란다.) 비비꼬인 못된 성정을 가졌대도 상관없다. 힘들면 힘든 티도 내고 짜증도 팍팍 내는 것으로 화를 풀어가는 나로서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은 결국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 라는 소리는 그야말로 ‘뭐 같은’ 소리인 거다. 멀리 있어 보이지도 않는 행복보다는, 눈앞에 있는 화내야 하는 일엔 화를 내야 하는 거다. 거스름돈 200원을 주지 않는 불친절한 택시기사 아저씨에게도, 그 나이 되도록 애인도 없냐는 친척의 농담에도, 눈가 주름이 더 는 것 같다는 후배의 장난에도, 일단 터트리고 보는 거다. 내가 왜 참아야 하는데? 날 얼마나 우습게보면 저런 소리를 하겠어? 다시는 날 우습게 못 보도록, 따끔하게 화를 내주겠어! 하고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나이 먹더니 성질만 늘었다-라는 평가를 받기가 일수지만. 

 

다이라 아스코의 단편집인 ‘멋진 하루’에서는 내가 앞에서 열거한 그런 경우보다 열 배는 더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전 애인의 돈을 갚지 못해서 자신의 또 다른 전 애인들을 찾아서 돈을 빌리는 남자, 자신의 가족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결혼한, 그러나 몇 개월 단위로 바람을 피우는 남편과 살아가는 여자, 호스티스에 성형수술까지 몇 번 한 현재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아련한 옛사랑을 만난 여자, 기껏 일탈을 해보려다가 듣도 보도 못한 가출한 딸을 닮았다는 이유로 임종을 앞둔 그 딸의 아버지를 만나야 했던 여자. 

 

 ‘ 오늘의 황당 뉴스’ 중 베스트로 꼽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 뉴스였다면 댓글도 줄줄 달리겠지. ‘헐- 님 미친 거 아니셈? 부모자식 간에도 돈 거래는 하는 게 아님-’ ‘바람피우는 남자는 거기를 잘라야 함!(헉-)’ ‘그런 상황에서 짝사랑을 만나다니- 열라 쪽팔렸겠다! ㅠㅠ’ 정도? 누군가의 삶을 타인들은 가볍게 평가하고 때로는 동조해주며 스쳐지나간다. 결국 내 일은 아니니까. 알게 뭐야? 안 그래? 

 

그렇지만 다이라 아스코의 인물들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긍정적이다. 첫 번째 단편인 ‘멋진 하루’에서, 결혼을 하고서도 다른 여자를 만나는 전 남자친구에게, 불륜을 저지르지 않으면 협박도 안 당할 거 아니냐고 비난하는 여자주인공에게 전 남자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라도 잠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가 있잖아. 결혼을 해도 그건 마찬가지야. 그게 정상이라구.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것만으로 행복해져서 힘이 생기잖아. 하지만 행복이란 건 이내 사라져버리지. 그러니까 힘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 있어. 결혼했으니 이제 평생 다른 누구도 좋아하지 말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돼.”

 

만약 내 친구가 저런 말을 했다면, 아마 앞에서는 “어어 그래~” 하며 웃어주고 그 다음부터는 만나지 않을 거다. 속으로는 엄청 욕했을 거고. 그럴 거면 결혼을 하지 말지. 게다가 지가 저런 말 할 처지야? 남의 돈도 못 갚고 빌리는 주제에. 그러니까 네가 인생을 그딴 식으로 살게 된 거야~ 하고 말이다. 

 

이런 짜증들은 글을 읽을수록 점점 증폭되고 있었다. 바람피운 주제에 처제의 상견례에 가서 넉살 좋게 떠들어대는 남자(제발 입 다물고 있으라고 그렇게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와 기둥서방까지 있다는 걸 들켜놓고서는 옛날의 내 얼굴을 이쁘다고 해준 옛사랑에게 기부금을 안겨주는 여자(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다시 보지도 못했을 거다.) 어디서 이런 인간들이 기어 나와서 살고 있는 건가?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생각도 안 하는 건가? 이런 뻔뻔스런 인간들은 한 일주일 굶겨놔도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올까?  



도대체 그 긍정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삶을 살아가는, 징그럽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긍정. 이런 게 행복일까? 아무도 이들을 절망시키지는 못할 거다. 넘어져도 그들은 다시 일어날 거다. 그들에게 났던 짜증은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왔다. 넌 뭘 그렇게 열 내고 있니? 그렇게 일일이 화내고 대응할 필요가 있는 거야? 독을 품고 있는 항아리는 결국 깨져버린다는 거 몰라? 
 


그들은 결국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하진 않았던 거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에 대한 믿음만큼은 1% 정도 남겨두는 사람들인 것이다. 화를 낼수록, 절망이 늘어날수록, 댐의 모래구멍처럼 언젠가는 나라는 존재가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걸 알고있었던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들. 온전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때,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내가 졌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단연컨대, 이렇게 살지는 못 하겠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문제로 소중한 사람들을 열 받게 하지 않았는가. 이건 분명히 뻔뻔한 거다. 다만 새로운 하루는 언제나 시작된다는 것은 믿을 거다. 그 하루는 적당히 뻔뻔하고, 어제보다는 1% 긍정적인 나로 살아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다이라 아즈코, 이 바닥에서 마구 설칠 예정이오니, 오래오래 사랑해주세요.”라는 넉살좋은 후기를 남긴 작가처럼 말이다. 고마워요, 다이라 아즈코님. 이건 100%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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