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평점 :
이 책은 저자 '네주 시노'의 자서전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경험한 성적 학대에 대해 기록한다.
그녀는 강간 생존자다. 그렇다, 나는 ‘생존자’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가해자가 행한 것은 그저 물리적인 폭력뿐이 아니라 정신적인 살인이므로. 그녀는 아마, 살아있는 내내 끊임없이 고통받을 것이므로.
고백건대 나는 이 책이 비유와 은유로 가득한 회고록일 줄 알았다. 아, 어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의 무신경함과 몰이해에 뒤늦은 수치심이 몰려온다.
저자는 담담하게, 아니 담담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건조하게 피해자의 삶을 서술한다. 그의 범행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왜 저항하지 못했는지, 왜 끝내 고소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감정들을 가감없이 서술한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객관화하려는 시도가 강박적일 만큼 절박하여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을 정도다.
하지만 내가 그 고통을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야 그녀의 고통에 ‘괴롭다’라고 언급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세상은 피해자들에게 강요한다.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라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면상에 대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다. 너 같으면 그리 할 수 있겠느냐고, 당신이 눈곱만큼이라도 그 삶을 이해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묻고 싶다.
그녀는 현재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거의 일에서 벗어나 “승리”한 것일까?
그녀가 밤마다 제 딸의 등을 쓸어주면서 ‘이 손이 조금만 더 밑으로 내려간다면, 이 아이의 귀에 대고 이렇게 저렇게 협박한다면’ 손쉽게 제 의붓아버지와 같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매. 순. 간. 의식하는 것이 승리한 삶일까?
가해자의 저열한 충동이 일어나는 그 지점을 그저 “이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통받는 심정을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숨이 막혔다. 몇 번이고 책장을 덮으며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해야 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 걸까. 도대체 왜 그 어린아이들을 보고 짐승 같은 충동을 느끼는 걸까. 어떻게 해야 이 끔찍한 일들을 막을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물음에 ‘메리 게이츠킬’의 단편소설 [딴 곳 The Other Place]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아이의 내면 어딘가에 딴 곳이 있다. 지금은 그곳이 조용하지만, 나는 그곳이 거기에 있음을안다. 나는 아이가 딴 곳에 혼자 있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중략) 하지만 나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이는 딴 곳에 혼자 있지 않을 것이다.”
메리 게이츠킬이 말하는 딴 곳이란 정상 세계가 아닌 곳이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음험한 충동이 있는 곳. 인간은 누구나 그런 경계에 서 있을 수 있고, 그 경계를 넘어서 떨어지지 않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했다.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아마도 죽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는 그 수렁 속에서도, “비밀스러운 호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놀라웠다.
저자는 이 책을 너무 많은 사람이 보는 것도, 그저 가십거리처럼 소비되는 것도 경계했지만. 나는 이 책을 꼭 많은 사람이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두 가슴에 비밀스러운 호의를 품고 서로 경계선 너머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기를 바란다.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료로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