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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 ㅣ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평점 :
깊은 여운이 남는 장편만화.
정원, 「올해의 미숙」
오랜만에 참 좋은 작품을 만났다.
그동안 읽었던 책이 별로라는 것이 아니라, 뭐랄까, 그냥 이 책이 주는 여운이 너무 깊어서 마음에 쑥, 들어왔달까.
만화,라는 장르로 분류되었지만 어쩐지 소설을 한 권 읽은 것만 같은.
그림보다는 사실 글에 더 마음을 빼앗겼던 정원 님의 올해의 미숙」
주인공 장미숙은 이름 때문에 늘 학교에서 '미숙아'라고 놀림 받는다.
그리고 집에는 매일같이 가시 돋힌 말을 내뱉으며 싸우는 부모가 있다.
미숙의 아버지는 밖에서는 명망 있는 시인이지만, 집에서는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무능력한 사람이다.
한 때 미숙의 우상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미숙의 언니는 아버지에게 상처받고 점차 무너져간다.
그렇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살던 미숙에게 어느날 재이가 나타난다.
매일같이 재이를 만났다.
안해본 걸 하는 게 좋았고,
해본 걸 같이 하는 게 좋았다.
학교가 더는 무섭지 않았다.
- 정원, <올해의 미숙> 중에서 -
재이의 등장으로 그녀의 삶은 조금 더 안정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재이가 청소년 문학상을 타게 되고,
미숙은 그 글이 자신의 가족에 대한 것임을 알게 된다.
둘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나고,
미숙은 학교를 그만둔다.
미숙은, 검정고시라도 봐서 고등학교는 졸업하라는 엄마의 말에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겸재를 만난다.
늘 기죽어있고, 놀림을 받아도 아무 말도 못하던 미숙에게 있어서
모르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다가선다는 건 큰 변화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재이로 인한 성장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 언젠가 재이가 하고 싶다고 했던 것들을 겸재에게 이야기하는 미숙에게서
좋건 싫건 재이의 기억을 지울 수 없음이 보여진다.
재이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살았다.
딱 그 상태가 적당했다.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상태
너무나도 적절해서 내 마음을 옮겨다 놓은 것만 같았던 대사.
미숙의 모습이 그 언젠가의 내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서 금세 몰입이 되었고, 같이 상처받았고, 같이 성장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숙에게 있어서 재이는 분명 상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재이가 있었기에 그녀 또한 성장할 수 있었고, 탄탄해질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바야흐로, 홀로 설 수 있었을 테니까.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재이 같은 상대가 있을 것이다.
한 때 내게 힘이 되주었고 나를 성장시켜주었으나, 또 한편으론 깊은 상처가 된 사람.
여전히 가끔씩, 짙은 그리움이 일지만 딱히 찾아보아 지지 않는.
그저 그 어딘가에서 따로, 또 같이 이 생을 잘 살아내고 있기를 바라게 되는 사람.
그러다 좀 더 나이가 들고, 많은 것에 유연해졌을 때 한번쯤 마주치면 진심으로 웃을 수 있을까?싶은.
「올해의 미숙」은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추억, 혹은 기억을 건드린다.
일반 책 한권 정도의 두께지만 한시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고, 여운은 그보다 훨씬 더 길다.
상처받은 오래 전의 나에게 담담한 위로가 되어 줄,
정원, 「올해의 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