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가 낯선 나에게 친근한 미소를 보내 준 책.



함의, 압축 등의 특성이 오히려 시어를 내게서 멀어지게 시킨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내가, 중단 없이, 시작할 시집을 찾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엄선한 하이라이트로, 시작의 문을 쉽게 열도록 도와준 책이 신경림의 처음처럼이다. 




비록, 한 번 읽고는 그 만족감에 다시 이 책을 열까, 그 자만이 염려 되기도 하지만, 


시작에 머물지 않고 다음 시집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준 책으로 고이 간직하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신경림은, 이 시들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내가 인생의 시를 만났을 때 


나도 기억하는 시가 있을까 싶지만, 현재로써는, 그런 신경림의 현재가 한없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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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새벽 세시
오지은 지음 / 이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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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사는 리듬과, 내게 다가오는 세상의 리듬은 달랐다.

내게 맞는 것과, 내가 좋아서 선택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컸다.

 

이 차이를 줄이기 위해, 읽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썼다. 그리고 계획을 세웠고, 실천을 했고, 계획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난 나에게 맞지 않는 계획을 세울 수 있지?”

 

네가 나를 몰랐다. 그리고 현실의 나를 거부하고 됐으면 하는 내 모습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하는 것은, 이전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당연히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 아닌가?

 

몇 번의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며 느낀 것은, 계획의 목표가 허황된 것이 아니라, 계획의 출발점에 문제가 있었다. 계획의 출발점은,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의 내 모습에 맞춰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출발점 자체도 이상적인 내 모습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계획은 1주일도 지속되지 못했다.

 

예를 들면, 3~4년 전 15Kg 이상 체중을 줄인 적이 있었다. 1년 정도 걸려서 이룬 목표였다. 그 당시 난 어떻게 하든 오후 10시 취침 새벽 5시 기상을 지켰다. , 내 몸 스스로 자정 작용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준 것이다. ‘내 몸 사용 설명서를 먼저 숙독하고 시작한 것이라, 오후 10시부터 새벽 2시는 인체가 스스로를 돌보고 보정하는 시간이라는 내용을 알고 세워 실천한 계획이었다.

 

오후 10시에 잠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일과를 오후 10시 전에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누어야 했다.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면, 보통 새벽 4시면 눈이 떠졌다. 일정은 새벽 5시부터. 1시간이 나에게 여유 시간으로 주어졌다.

무엇을 해도 나를 자책하지 않는 시간. 가끔은 이 시간에 손을 댄 일로 인해 일과 시간을 어기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새벽 5시에 하루를 시작한다는 계획이, 이상적인 내 모습에 맞춰진, 잘못된 출발점이었을까? 아니면 오후 10시에 잠들겠다는 계획이, 이상적인 내 모습에 맞춰진, 잘못된 출발점이었을까?

 

새벽 5시에 일과의 시작을 맞춘 것은, 남들이 볼 때 이상하게 여길 운동이 짜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용한 시간에 일과를 시작하려 한 것이다. 단전호흡으로 대변되는 운동과, 기체조로 대변되는 운동을 합한 모습의 태극권 같은 운동, 혹은 목검 휘두르기 100회 같은 것은 타인의 눈이 살아 있는 시간에 하기엔 얼굴이 발갛게 되는 동작들이다.

 

지금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할 수 있는 운동으로 변경했다. 팔굽혀펴기(Push-up)와 코어 요가가 그것이다. 매일 하루에 1회씩 팔굽혀펴기 횟수를 늘리는 방식이다. 처음엔 5회로 시작했다. 동작은 원론적 자세를 그대로 지키는 방식이었다. 몸은 곧게 펴고 허리가 내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복근에 힘들 준다. 다리는 곧게 편다. 이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플랭크와 동일한 효과를 준다 생각한다. 그리고 팔은 90도로, 손 위치는 어개 넓이보다 약간 넓게 놓는다. 팔을 굽힐 때 숨을 들이쉬고, 팔을 펼 때 숨을 내쉰다. 호흡 속도는 평소 호흡 속도 혹은 그것보다 천천히.

 

20회쯤 하게 됐을 때, 팔이 무척 힘들었다. 체중 전체를 팔로 들어 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밀어 올리는 것이 이렇게 무거운 일인지는 오래간만에 인식하게 됐다. 그럼 1주일 동안 같은 횟수를 반복한다. 201일차, 2일차... 7일차. 8일째 될 때는 팔에 힘이 올라 21회로 올릴 수 있었다.

 

오후 10시에 잠들기에 가장 큰 허들은, 일을 다 못 마치는 것이다. 일의 분량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모를까, 남의 돈을 받는 위치에 있을 경우엔, 일의 분량은 남이 결정한다. 내 생산력은 빨리 늘지 않는다. 하니, 오후 10시에 잠자리에 들기는 녹녹한 실천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후 10시에 잠들기 위해, 회사에서 오후 6시 전후엔 나서야 한다. 눈치도 보이지만, 이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집중력 있게 일과 내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했다.

 

그러나 집중력은 원하는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하는 일 외에도 가정의 일, 대인관계의 일 등 영향력의 원 밖에서 가해지는 압력들이 많다. 이런 원인으로 집중력이 흩어지면, 자는 시간이 늦어지고,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진다. 계획서는 완료 체크를 할 수 없는 수준이 이른다. 결국 익숙한 나의 새벽 세 시가 열린다. 오늘도 새벽 3시를 어제 마무리 못한 일로 채우면 난 내일 어렵게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몸은 엉망이 된다. 정신도 엉망이 된다.

 

번역자 중에, 조용한 시간, 즉 가족의 일과가 끝난 후 일을 시작해서 아침 출근까지 챙기고 휴식에 들어갔다가, 저녁 식사 등을 마무리 하고 다시 조용한 시간에 일을 한다는 분의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읽었다.

 

내 계획대로 라면, 몸이 자기 정리 작용을 할 시간에 깨어 있다는 이야기라 수용하기 어려운 스타일의 일과이지만, 부러운 것은 항상성과 지속가능성을 갖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습관을 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여 앞으로는 익숙한 내 새벽 세 시가, 오후 10시에 잠든 후 새벽에 일어나 만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어제 못한 일을 새벽에 일어나 할 수 있다는 배포를 갖고 싶다. 그렇게 자기 제어가 가능한 나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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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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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190 p)

 

이젠 과거의 울림일 수 있는 이런 말들. 아직도 이러나 싶기도 한 이 말. 예능으로 강연으로 세상 사람들이 정말 옳은 행동과 마음을 조금씩 가지게 됐다는 의심. 여전히 이런 말이 떠돌고 있다고 믿는 그 작은 상처들.

 

경험이 주는 어처구니없음은, “이런 현상은 이렇게 처리하면 돼라는 처리 방식. 그러나 그런 과거의 금언이 틀리는 경우는 생략된 부분 때문이다. ‘이런 원인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 이렇게 처리한다.”

 

세상 사람들은 편리하게 사는 법은 그 동안 생존을 이어오며 체내에 축적한 것 같다. 첫 번째는 분류하기. 이런 특징은 A 그룹, 저런 특징은 B 그룹. 해서 만나는 존재나 현상이 이런 특징을 가지면 A 그룹으로 인식하고 이렇게 처리하고는 잊는다. 저런 특징을 가지면 B 그룹으로 인식하고 그에 맞는 처리를 한 후 잊는다. 빠르게 변화하고, 밀려는 수많은 일을 제시간에 처리하고자 할 때 삶의 능률을 올리는 방법 중 하나가 분류 및 대응이다.

 

여기에 후속되는 작업은 이름 붙이기. A 그룹에 속하는 저 존재 혹은 저 현상은 a1으로 이름을 붙이고, a2로 이름을 붙이고, an으로 이름을 붙인다. 그럼 다른 현상이나 속성을 확실히보여 주기 전에는 그는 그 현상은 a1이다.

 

이런 분류와 명명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변하기 때문에 무수한 그룹과 무수한 이름들이 만들어진다. 사실 따지면 몇 개 안되는 그룹과 이름의 반복이지만, 그런 건 관심을 갖게 된 학자나 할 일이다. 내가 분류한 혹은 남이 분류한 것을 인정한 존재 혹은 현상은 쉽게 잊는다. 그러니 더욱더 많은 그룹과 명칭이 생겨난다.

 

하지만, 나름대로 불변의 기준도 있다. 내 주위 100명 중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기준은 꽤 오랜 생명력을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존재 혹은 이 현상을 C 그룹 c15라고 인식한다. 오호 그럼 나도.

 

그러다 보니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과정도 순식간에 일어난다. 가족도 이 분류와 명명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녁이면 피곤한 몸에 대화도 귀찮은 하루하루. 아니, 귀찮음을 느끼기도 전에 남자든 여자든 자신만의 휴식용 굴로 들어가는 요즘, 문제아 A가 오늘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길, 퇴근하며 들어온 현관에서 느낀 아우라로 판단하고 (씻고) 잔다.

 

얼마 전 아내와 아이 교육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사실 교육이란 적분 공식이나 은유법 혹은 가정법이나 to부정사, 민주주의나 우리나라 근대사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생각되고 있는 교육은, 파티에 참석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 파티에 참석해서 대화의 대상을 선택하고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 학교에서 친구들로 인해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 슬기롭게 처리하는 방법, 어른에게 제대로 이야기하고 인사하는 방법일까?

 

그것보다 우리 부부가 주목한 것은, 생각하는 습관, 깨달았을 때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 이런 것들이었다. 우리 부부가 지금껏 홀로 익혀서 겨우 몸속에 집어넣은 그것 말이다. 현상을 제대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제대로가 무엇인지, 제대로 봤으면 그것을 익힐 것인지 말 것인지, 익혔다면 혹은 깨달았다면 그것대로 행동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능력이 교육에서 생략되어온 내용이다. 더구나 거창한 부모라는 명찰은 단 우리들이 평생 동안 배우고 실수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깨달은 것만이라도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고 한 동안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했다. 16년간 교육 시스템 속에서, 혹은 18년간 교육 시스템 속에서 우왕좌왕을 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이런 교육을 받은 경우는 몇 번이나 있나? 그 횟수나 내용이 적고 많음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알려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10대 아이를 둔 부모로써 가지게 된 걱정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은 커다란 사건을 겪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과, 깨닫기 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이리저리 짜 맞춰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왜 갑자기 진저리를 치도록 고기가 싫어졌는지 가장 먼저 본 가족이 물어보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혼자서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그 많다는 박사들과 같이 상의를 했다면, 과연 성질이 불같은 아버지에 뺨을 맞고 고기가 입에 쑤셔 넣어지고 결국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정신 병원으로 향하게 되지는 않았지 않았을까?

 

고기가 몸에 좋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왜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는지 이해해 보려했나, 이 가족들아!? 성격이 급한 가장은 그렇게 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된다고 누가 그랬나? 그 성숙되지 못한 현실 대응을 하는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과 그 부인, 그 틈에 예술혼을 불태운 형부와 나무 같은 언니, 그리고 내가 편해서 결혼한 남편으로 인해 순식간에 찰나의 순간에 비정상 인간이 되어 어린 시절처럼 맞은 것이다.

 

소설의 육체적 제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항상 겪고 있는 언어폭력이다. 휘두르는 사람이 자기 할 말을 한 것이고, 뭐가 잘못 된 곳이 있냐?’는 그 말의 폭력성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언니 같고 엄마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더 단단하고 여기저기 찍긴 후 굳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어렵다는 그 선순환적 세상 대응 자세를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그 분들 말이다.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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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오브 원더 Spirit of Wonder 세미콜론 코믹스
츠루타 겐지 지음,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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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Spirit of Wonder’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번역한 분은 이 제목을 영어로 놓아두었을까? 


의미 전달을 위해, 굳이 번역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 번역자분에게 할 말은 없다. 대신, 스스로가 제목이 가진 의미를 찾아 보려 한다.


사전적 의미로 ‘Spirit’은 ‘정신, 영혼, 기분, 마음, 특정 유형의 사람, 기백, 기상, 활기, 공동체 정신, 진정한 의미, 참뜻, 혼령, 정령, 증류주/화주’ 이다. ‘증류주, 화주’에 이르러서는 조금 놀랐지만,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Wonder’는 어떠한가? ‘경탄, 경이, 기적, 불가사의’가 사전에 나온다. 동사가 아닌 명사의 의미가 그렇게 나열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은 후, 이 여러 의미들 중 필자가 선택한 것은 무엇일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이 혹은 기적’ 이다.


만화 ‘Spirit of Wonder’는 전문 만화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유는, 적어도 일반 대중에게 있어서, 알려지지 않은 과학적 완료품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A 지점의 물질을 B 지점으로 옮기는 순간 물질 이동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다가올 시간으로 가는 타임머신, 우주에 가득한 에테르의 기류를 타고 거대한 비행선으로 화성에 가는 이야기 등이 이야기 속에 나온다(에테르는 주석이 붙은 것으로 봐서 실제 이론인 듯하다). 나름 원리를 이야기하는 대목도 있지만, 전문 만화란, 현실 속 기술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는 만화라는, 필자만의 정의에 따라, 이 만화를 전문 만화로 분류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상상 속의 혹은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봤던 과학적 완료품(완성이라는 말은 맞지 않아 보임)이 인간을 위해 사용되어 삶 속의 작은 기적 혹은 경이를 일으킨다.


신이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기적이나 경이는 과학이 이루어내고 있다. 아니, 우리 눈앞에 벌어진 기적이나 경이로 분류되는 일들을 신이 한 일이라 모두 생각하지 않는 시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까?

인간이 하늘을 날아 유학을 가고 여행을 하며, 적어도 100년 전보다는 예방 혹은 치유할 수 있는 질병이 늘었으며, 내가 쓴 글을 불특정 다수에게 방 안에 앉아 공개할 수 있고, 미국에 가지 않아도 원하는 상품을 내 집 현관으로 배송 시킬 수 있는 이런 작거나 큰 기적 혹은 경이(적어도 100년 전 기준으로)는 과학이 이루어낸 산물들이다. 결코 신의 손짓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대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경이 혹은 기적’이란, 과학자들의 선의의 노력으로 인해 소수 혹은 다수가 행복을 느끼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모든 경이로운 존재들은 양날의 검과 같다. 옳게 사용되면 한 명 이상의 인간들이 편익을 얻을 수 있고, 그릇되게 사용되면,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불행하거나 불편해지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노고와 업적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을 신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언제나 그렇게 되는 이성적, 이론적, 실제적 근거를 함께 이야기하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이 아닌 인간이 이루어 낸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류 전체에 공헌한 과학자들에게 노벨상이란 영광을 제공하기도 하지만(노벨상을 받은 결과가 인간을 해하는 무기로 사용되는 경우는 제외하고 싶다).

신이 무엇을 만들었을 때, 우리는 노벨상을 주지 않았다. 물론 줄 수도 없겠지만. 감사할 뿐이었다. 과학자들이 무엇을 만들었을 때는 혹은 발견해 냈을 때는 대등하게 치하한다. 이것이 과학자를 신이라 부르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과연 현실적인 경이 혹은 기적은 과학자들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이 글에서 사용되는 ‘과학자’라는 단어는 수학자, 의학자, 화학자, 지구과학자, 물리학자 등등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는 대명사이다. 매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정한 의미의 경이나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것일까?


치밀하게 따져 들어간다면, 내가 오늘 회계 결산을 마무리하지 않았다면, 우리 회사 2,000여 명의 직원들 업무에 크고 작은 부정적 영향을 끼쳤을 거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기적이다. 물론 평소보다 빨리, 정확히 이 일을 완료했을 때 ‘경이로운 일’이란 치하가 따라붙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게 하는 것만이 경이나 기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회계부서 직원은 과학자와 같다. 즉, 특정 기술을 가진 자이다. 다시 질문을 상기해 보면, 평범한 우리들은 ‘진정한 의미의 경이나 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을까?


‘경이 혹은 기적’을 ‘일상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무엇’이라고 정의한다면,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경이나 기적’은 선한 마음을 행동으로 구현한 것이 아닐까? 뭔가 대단한 명제라도 기대했다면 실망했겠다.


우리는 ‘봉사’라는 감투를 만들었다. 그만큼 타인에게 베풀거나 기여하는 일이 일상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개개인이 아닌 기준에 따라, 선의를 가지고 타인을 대한다. 여기에 지금까지 익숙해진 감정 표현을 덧대어.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독 차갑게 대한다거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찼지만 표현을 잘 못해 망설이다가 그만 상대에게 실망을 주었다거나, 잘 하려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만 상태의 눈물샘을 터뜨려 버렸다든가, 사기를 독려하려 폭탄주를 탔는데 다음 날 모든 이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거나 등등.


선한 마음을 선하게 표현하는 것은 결코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선한 마음을 선하게 표현하도록 훈련받아 오질 못 했다. 맞벌이나 누군가 집에 있어도 그런 것을 실천해 보여주거나 알아듣게 알려 준 사람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했다 했을 때는, '이 선생, 상당히 시니컬한 견해를 가진 분이네' 라고 생각했지만, 교육받지 못하고 훈련되지 않은 사람만큼 야생동물도 없다.


더구나, 타고난, 아니 부모들이 물려준 성격이라는 것이, 스스로가 차분히 그런 것들을 잘 찾아 익히도록 태어난 사람이 1만 명 중 하나가 될까 말까 한 확률 속에서, 교육 훈련 없이 스스로가 통찰을 얻고 깨달아 선한 마음을 선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런 것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거나, 선한 행동의 대상이 나일 때는 더욱더, 경이롭고 기적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기술을 가지지 않은, 주목받지 못하는 회사원 포함,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경이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를 훈련 시키고 습관화하여, 내가 선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행할 때 선한 방법을 선택해서 행함으로써, 대상이 되는 한 명 이상의 타인들이 편익이나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반인들이 신기원을 만들거나 발견한 과학자 수준으로 훈련을 쌓아야 될 것처럼 거대하여 달성할 수 없어 보이겠다. 바로 당신 눈앞에 떨어진 휴지라도 줍는다면 이면 어떨까? 아니면, 더운 여름 혹은 장마철 비 내리는 횡단보도에서 유모차를 보도 블럭 위로 올리지 못하는 여인을 도와준다면 어떨까? 나를 기억할 정도는 아닐 수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기대할 수 없는 기적이나 경이를 맛보게 될 것이다.


자녀가 내가 바쁜 와중에서도 열심히 고른 재료로 씻지도 못한 저녁 상에서 반찬 투정을 할 때, 오히려 아이와 함께 마트에 가서, 그 아이가 이것저것 고르게 하고 그것을 맛 보이는 쪽으로, 그래서 그런 식습관을 천천히 좋은 쪽으로 돌리는 쪽으로 나의 노력 방향을 바꾼다면, 비록 손이 좀 더 가긴 하겠지만, 아이의 엄지 척이 나를 향하는 기적이나 경이는 일어나지 않을까?


1년여 카페로, 술집으로, 유원지로, 해변가로 줄기차게 붙어 다녔는데,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행복이 아님을 알았을 때, 진지하게 상대를 살펴보고 이곳저곳을 푹푹 찔러 보고 '니가 진정 행복해지는 순간은 뭐야' 라고 알아보고, 그렇게 했을 때, 상대의 나를 향한 눈빛이 반짝이며, 좀 더 그윽한 스킨십이 이루어지진 않을까?


이 이상의 일반인들이 일으킬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경이나 기적은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에 맞게 찾아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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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잉 위치 1
이시즈카 치히로 지음, 문기업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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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마녀가 있다면 어떨까? 
‘마녀‘라는 단어는 ’유럽 등지의 민간 전설에 나오는 요녀. 주문과 마술을 써서 사람에게 불행이나 해악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혹은 ’악마처럼 성질이 악한 여자‘ 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네이버 국어사전). 그러나 이 마녀는 초급 마녀이고, 극에 등장하는 마녀는 아직은 인간과 어울려 사는, 친해지고픈 사람들로 나온다. 극중 마녀들도 나쁜 마녀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지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느끼는 많은 한계점들이, 극에 등장하는 히어로나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존재로 해소되는 느낌이 있다. 이런 특별한 존재들과 어울려 살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신나는 일일 수 있다.


애니메이션 혹은 만화 ‘플라잉 위치’는 얼마간의 수련을 쌓고, 세상에 나와 경험을 쌓기 시작한 초급 마녀의 일상을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녀 배달부 키키’를 기억한다. 키키도 얼마간의 수련을 쌓은 후 성장을 위해 독립해서 살아가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은 20살이 넘도록 부모와 함께 살며, 부모의 슬하에서 그 은혜라는 울타리 안에서 장기간 보호받으며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야기처럼, 세상에 홀로 서는 연습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그럼 부족 혹은 경험의 결핍은, 불안감에 싸인 부모들 역시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녀 배달부 키키’와 ‘플라잉 위치’는 공통된 부분과,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
초급 마녀의 홀로 세상 익히기, 능숙한 재주는 빗자루로 나는 능력 정도. 물론 그 능력은 조금 차이가 난다. 재주의 운용에 미숙하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플라잉 위치의 초급 마녀는 빗자루를 타고 나는 원리를 다시 언니에게 배울 만큼 깊지 않다. 마녀 배달부 키키는 생계를 위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능력을 활용할 정도는 되는데.
그리고, 홀로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독립을 했다는 것과, 새로 살아가기 시작한 마을에서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는 점. 또, 친교를 맺는 인간들이 마녀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듣는다거나 많은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존재 자체는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겠다.


어쩌면, 플라잉 위치는 마녀 배달부 키키와 비교해, 주인공의 연령을 10대 소녀로 끌어올렸다는 점부터 차이가 난다. 마코토는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덜렁이 10대 소녀다. 그림 상으로는 20대 초반이라 할 만큼의 성숙함도 갖추고 있다. 그리고 키키에 비해 마코토는 마법진을 조금 사용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의 모습을 나타나게 한다든가, 기본적인 마법진을 그릴 줄 안다거나하는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플라잉 위치는 여성이 되기 전의, 젊어서 예뻐 보이는 모습을 한 주인공과, 역마살이 잔뜩 낀, 성숙한 언니, 더부살이하는 집의 동갑내기 케이. 케이는 안정되어 있고 꼼꼼하지만 유령은 무서워하는 남자. 마코토와 성격 상으론 어울려 나중엔 둘의 애정 관계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이 된다. 그리고 마녀가 되고 싶어 수습 마녀가 되는 케이의 동생, 그리고 마녀의 존재나 그들의 생활에 전혀 놀라지 않는 케이의 부모님. 그리고 등장하자마자 친구가 된 케이의 학급 동료. 이렇게 7명이 주축이 되어, 마코토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들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 ‘플라잉 위치’이다.


책으로도 나와 있지만, 책의 그림체보다 좀 더 정련되어 있고, 실제 움직이기 때문에 더 실감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성 그대로, 원작의 이야기를 거의 빼지 않고 극화한 형태라 굳이 만화책을 보지 않아도 되는 애니메이션의 구성. 그래서 이전과는 다르게, 원본을 보기 전에 현재 VOD로 올라온 애니메이션을 먼저 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책을 약간 본 결과, 원작은 처음부터 찬찬히 볼 필요를 느끼고 있다. 애니메이션과의 비교라는 측면도 있지만, 아무래도, 책이란 것은 동작이 눈에 보이지 않는 대신, 상상력을 자극해서(만화는 그보다는 상상의 폭이 적지만) 머릿속에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나만의 묘사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려, 마코토 같은 마녀와 매일 이야기하고 같이 사건 사고를 겪는다면 어떨까? 혹시 한계 많은 인간 생활(마녀와 구분하기 위해 구분자 ‘인간’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서 벗어나 ‘나도 마녀가 되면...’ 혹은 ‘나도 마남이 되면..’이란 생각을 하게 될까? 


인간 세상에 한계를 느낀다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그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더, 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한 재주 혹은 능력을 갖춰 원하는 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서 이지 않을까?


이런 욕심을 버린다면, 느끼는 한계도 적을 것이고, 한계가 적어지면, 인간 세상이라는 것을 좀 더 살만한 세상으로 느끼게 되진 않을까? 사실 이런 수준의 정신세계를 갖추려면 역시 인생 경험을 통해, 이만큼은 괜찮고 이만큼은 과하다는 기준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태어날 때, 적어도 자연계에서 가장 약한 신체적 조건을 타고나는 인간에게, 태생부터 탄탄한 지력이 활성화된 채로 주어져 있다면, 현재까지 반만년이 넘는 인간의 역사가 조금은 순탄하지 않았을까? 아! 그럼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이런 것이 없이 고조선이 지금도 이어져 내려왔을까? 갈등 없는 세상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태생적 무기로서 지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더라도, 갈등과 그것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을까? 더구나 탄탄한 지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욕심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해를 입었다 생각된 사람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여전히 투쟁을 계속해 왔을까?


플라잉 위치는 마녀 배달부 키키의 모티브에, 일상의 드라마가 강하게 뒤섞인 작품이라 나름 분류하고 있다. 덕분에, 일본어 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회화 교본이 될 수 있겠다란 생각도 든다.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누는 대화, 어딘가 방문했을 때, 혹은 유원지에 놀러 갔을 때, 집에서의 식사 등 일상의 대화가 넉넉히 나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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