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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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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19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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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과거의 울림일 수 있는 이런 말들. 아직도 이러나 싶기도 한 이 말. 예능으로 강연으로 세상 사람들이 정말 옳은 행동과 마음을 조금씩 가지게 됐다는 의심. 여전히 이런 말이 떠돌고 있다고 믿는 그 작은 상처들.
경험이 주는 어처구니없음은, “이런 현상은 이렇게 처리하면 돼”라는 처리 방식. 그러나 그런 과거의 금언이 틀리는 경우는 생략된 부분 때문이다. ‘이런 원인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 이렇게 처리한다.”
세상 사람들은 편리하게 사는 법은 그 동안 생존을 이어오며 체내에 축적한 것 같다. 첫 번째는 분류하기. 이런 특징은 A 그룹, 저런 특징은 B 그룹. 해서 만나는 존재나 현상이 이런 특징을 가지면 A 그룹으로 인식하고 이렇게 처리하고는 잊는다. 저런 특징을 가지면 B 그룹으로 인식하고 그에 맞는 처리를 한 후 잊는다. 빠르게 변화하고, 밀려는 수많은 일을 제시간에 처리하고자 할 때 삶의 능률을 올리는 방법 중 하나가 분류 및 대응이다.
여기에 후속되는 작업은 이름 붙이기. A 그룹에 속하는 저 존재 혹은 저 현상은 a1으로 이름을 붙이고, a2로 이름을 붙이고, an으로 이름을 붙인다. 그럼 다른 현상이나 속성을 ‘확실히’ 보여 주기 전에는 그는 그 현상은 a1이다.
이런 분류와 명명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변하기 때문에 무수한 그룹과 무수한 이름들이 만들어진다. 사실 따지면 몇 개 안되는 그룹과 이름의 반복이지만, 그런 건 관심을 갖게 된 학자나 할 일이다. 내가 분류한 혹은 남이 분류한 것을 인정한 존재 혹은 현상은 쉽게 잊는다. 그러니 더욱더 많은 그룹과 명칭이 생겨난다.
하지만, 나름대로 ‘불변의 기준’도 있다. 내 주위 100명 중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기준은 꽤 오랜 생명력을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존재 혹은 이 현상을 C 그룹 c15라고 인식한다. 오호 그럼 나도.
그러다 보니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과정도 순식간에 일어난다. 가족도 이 분류와 명명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녁이면 피곤한 몸에 대화도 귀찮은 하루하루. 아니, 귀찮음을 느끼기도 전에 남자든 여자든 자신만의 휴식용 굴로 들어가는 요즘, 문제아 A가 오늘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길, 퇴근하며 들어온 현관에서 느낀 아우라로 판단하고 (씻고) 잔다.
얼마 전 아내와 아이 교육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사실 교육이란 적분 공식이나 은유법 혹은 가정법이나 to부정사, 민주주의나 우리나라 근대사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생각되고 있는 교육은, 파티에 참석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 파티에 참석해서 대화의 대상을 선택하고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 학교에서 친구들로 인해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 슬기롭게 처리하는 방법, 어른에게 제대로 이야기하고 인사하는 방법일까?
그것보다 우리 부부가 주목한 것은, 생각하는 습관, 깨달았을 때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 이런 것들이었다. 우리 부부가 지금껏 홀로 익혀서 겨우 몸속에 집어넣은 그것 말이다. 현상을 제대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제대로가 무엇인지, 제대로 봤으면 그것을 익힐 것인지 말 것인지, 익혔다면 혹은 깨달았다면 그것대로 행동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능력이 교육에서 생략되어온 내용이다. 더구나 거창한 부모라는 명찰은 단 우리들이 평생 동안 배우고 실수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깨달은 것만이라도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고 한 동안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했다. 16년간 교육 시스템 속에서, 혹은 18년간 교육 시스템 속에서 우왕좌왕을 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이런 교육을 받은 경우는 몇 번이나 있나? 그 횟수나 내용이 적고 많음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알려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10대 아이를 둔 부모로써 가지게 된 걱정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은 커다란 사건을 겪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과, 깨닫기 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이리저리 짜 맞춰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왜 갑자기 진저리를 치도록 고기가 싫어졌는지 가장 먼저 본 ‘가족’이 물어보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혼자서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그 많다는 박사들과 같이 상의를 했다면, 과연 성질이 불같은 아버지에 뺨을 맞고 고기가 입에 쑤셔 넣어지고 결국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정신 병원으로 향하게 되지는 않았지 않았을까?
고기가 몸에 좋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왜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는지 이해해 보려했나, 이 가족들아!? 성격이 급한 ‘가장’은 그렇게 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된다고 누가 그랬나? 그 성숙되지 못한 현실 대응을 하는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과 그 부인, 그 틈에 예술혼을 불태운 형부와 나무 같은 언니, 그리고 내가 편해서 결혼한 남편으로 인해 순식간에 찰나의 순간에 비정상 인간이 되어 어린 시절처럼 맞은 것이다.
소설의 육체적 제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항상 겪고 있는 언어폭력이다. 휘두르는 사람이 ‘자기 할 말을 한 것이고, 뭐가 잘못 된 곳이 있냐?’는 그 말의 폭력성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언니 같고 엄마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더 단단하고 여기저기 찍긴 후 굳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어렵다는 그 선순환적 세상 대응 자세를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그 분들 말이다.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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