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역사 강의 - 유토피아 사회주의에서 아시아 공산주의까지 새움 총서 1
한형식 지음 / 그린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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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이 글은 책 자체에 대한 평이기도 하고, 백승욱 교수의 서평에 대한 단상이기도 하다.


일단 백 교수의 지적에 대해서는 일단 일리있는 지적이란 생각이 든다. 백교수가 지적한 문혁과 관련된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는 것들이긴 하지만) 오류가 있다면 응당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겠고,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당'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재하다는 것도 나도 책을 읽으면서 살짝 그리 느꼈던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는 독자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백 교수가 지적한 얼마간 학술적인(물론 그것이 불가결하게 실천과 연결되는 것이긴 하지만) 지적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그와 전혀 다른 뉘앙스의 언론 서평들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참세상의 최인기, 오마이뉴스의 임승수의 서평만 봐도 책에 대한 호평일색인데, 이게 맑스주의를 바라보는 이들의 관점이 백 교수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좀 다른 문제도 있는 것 같다. 내 관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내용상의 부족함을 살짝 눈감아 준다고 본다면 매우 훌륭한 대학 1-2학년용 세미나 교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책의 서술과 형식이 뛰어나기 때문인데, 부족한 식견이나마 맑스주의 개설서 중에 이렇게 쉽게 쓰여진 책은 사실 잘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맑스주의 입문서로 그나마 대학 저학년 사이에서 많이 읽히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마르크스의 사상]도 이만큼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알렉스의 책이 한형식의 책보다 풍부하고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형식의 책은 (변호론적 입장이긴 하지만) 맑스주의가 남겨놓은 오류에 대한 나름의 해명을 시도하지만, 알렉스의 책은 아예 그 문제를 부정한다. 이렇게 무턱대고 '맑스가 짱이에요!'를 외쳐대는 책이 대학 신입생들에게 먹힐리 없으니 이 책 읽지 말자고 한다해도 딱히 다른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로 맑스를 해석한 온갖 2차 문헌들 또는 알튀세르가 해석한 맑스에 대한 또다른 2차, 3차 문헌들을 짬뽕해서 보는 방식으로 대체 하곤 했는데, 내 경험에 기초해 평가해보자면 그런 식이라면 아예 안하는게 낫다. 세미나 간사를 맡은 사람조차도 제대로 읽어오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요즘 대학생들의 무식함을 비난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도 없다. 최소한 입문서를 표방하고 나오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좀 더 세속의 언어에 가깝게 쓰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굳이 비교하자면 내가 [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읽고 느낀 반가움은 예전에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나다]를 읽고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것이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강신주의 책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알튀세르를 소개하면서 오직 '클리나멘'이라는 소재를 붙들고 '우발성의 유물론'만을 강조하며 에피쿠로스-맑스-니체-들뢰즈 등의 계보에 집어넣는 게 올바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책 후반에 나오는 마음의 수양 등에 관련한 부분은 대체 어떻게 감당해 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약간 뜬금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순도 100%의 책을 찾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처음 접했던 2006년에 여기저기에 세미나 교재로 써먹어 볼 것을 권하고 다녔다.(내가 하도 광고하고 다녀서 실제로 교재를 바꾼 이들도 있었다) 대개 학회에서 철학 세미나 할 때 많이 읽힌다는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보다는 실용성이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앞으로 누군가가 나에게 맑스주의 세미나 교재로 뭐가 좋겠냐고 묻는다면 (약간의 망설임은 있겠지만) 나는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권하겠다. 망설임 속에서도 굳이 이 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자면, 이 책 만큼 맑스주의를 둘러싼 세간의 오해를 성실하게 해명하고 이겨내려는 책이 없기 때문이다. 스탈린에 대한 악마화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세속의 시선과 눈높이를 맞춰가며 그 시선의 맹목을 깨려는 노력을 이 책 만큼 성실하게 하는 경우가 있던가?


굳이 예를 들자면 이런거다. 예전에 학교에서 페미니즘 세미나를 할 때 콜론타이의 <공산주의와 가족>이란 텍스트를 봤다. 그런데 얘들이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해는 제껴두고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갑자기 북한이 어쩌니, 김일성이 어쩌니 이런 얘기를 하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오로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레드 컴플렉스에서 벗어납시다'라는 것 말고 뭐가 있었나? 이 책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의 논박이 가능하다는 거다.


이 책은 어차피 '맑스주의의 쇄신'을 염두해 두고 쓰여진 책이 아닌 것 같다. 그걸 감안하고 보면 책의 의도는 성공한 거다. 여전히 맑스주의는 현실 비판에 있어서 가장 유효한 도구이지만 그 도구를 사용함에 있어 오직 '본연의 맑스로 돌아가자'는 선언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맑스주의는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모습을 변모시켜 왔음을 확인했다는 선에서 보자면 충분히 성공이라는 거다. 사실 이 정도 노력을 했는데도 백 교수의 호된 비판을 받는 것은 저자로서는 좀 억울한 면이 있을 것 같다. 백 교수는 그린비 출판사와의 문제 때문에 이 책을 비판한 듯 한데, 내가 볼 땐 출판사 문제만 아니라면 비판의 화살은 원숭이 따위를 끌어들여 맑스를 설명하려는 임승수에게 맞춰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 책이 미흡한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니 나중에 개정판이 나올 경우를 대비해 몇 가지 독자로서 부탁만 하고 끝내보련다. 첫째, 책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아시아 공산주의 얘기는 차라리 빼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책의 분량 때문에 소략하는 방식으로 줄인 것 같은데, 좀 억지스럽게 동남아 지역의 공산당 문제를 하나하나 다 설명하려다 보니 전체적인 균형만 어지럽힌 느낌이다. 그냥 아시아 공산주의 문제 자체가 아직 해명되지 못한 부분이 많고, 더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새움의 다음 세미나에서 더 자세히 얘기하겠다 정도만 얘기하고 끝내는게 낫지 않았나 싶다.

둘째, 내가 봐도 제2인터 논쟁에 대한 서술은 진부한 감이 있다. 그 뒷부분의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서 재밌게 읽긴 했는데, 그나마 좀 아는 사람이 읽으면 진부하게 느낄 것 같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이 진부함이라는 게 단지 내용의 진부함이라기 보다는 해석의 진부함이기 때문에 보완이 시급한 것 같다. 제2인터에서 개량이냐 혁명이냐 하는 논쟁을 소개하는 부분에 할애된 분량에 비해서 충실도는 좀 떨어지는 것 같다.

셋째, 책의 뒷날개를 보면 새움총서를 소개하면서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쓸데없고 사실과도 맞지 않는 것 같다. 책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저자는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군데군데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 기초한 해석이 보인다. 맑스주의 자체가 원래 당파적인 입장에 기초한 것이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아니 당연한 거라 생각한다. 이 당연한 것을 굳이 중립적인 입장에 선 것 같은 포지션을 취하며 숨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입문서의 형식을 띄면서 갖는 이 책의 장점은 알겠는데, '국정 교과서'를 쓸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노력은 안 하는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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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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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도 어느샌가 80년대를 배경으로한 소설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진한 회한이나 상처들이 있어서 그 상처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소설들에 환멸을 느낄만한 처지는 아니지만, 그런 소설을 읽을 때면 그 시대를 모사(模寫)하려고 아둥바둥 거렸던 나의 20대 초반의 시절이 너무 우습게만 보여서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었다. 요즘은 잘 안 읽지만 공지영의 소설이 좀 그랬고, 작년 쯤에 읽었던 임철우의 [봄날]도 그랬다. 한참을 읽다가 너무 몰입하다 보면, '이거 너무 자기애에 빠지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떨치려다보면 너무 냉정하게 거리를 두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80년대를 살아냈던 이들이 느꼈을 비장함, 숭고 등등의 것들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쿨하게 내 자신을 포장하기에 바쁜 21세기형 인간일 뿐인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런 이야기들과 마주친 상황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난처함일 것이다. 결국 이런 난처함의 결론은 당장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과 나를 이런 죄책감으로 인도했던 어떤 당위에 대한 인정 뿐이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내 분수를 따져볼 기회같은 건 당분간 유보되는 것이다.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일단 나에게 그런 초월적 죄책감을 짊어지게 하지 않아서 참, 고마웠다. 요즘들어 내 '그릇'이 아주 형편없이 작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만약 이런 80년대 후일담 소설이 나에게 뭔가 '역사의 무게' 같은 것을 짊어지게 하려 나섰다면 난 분명 절반도 읽지 않고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건 내가 실제로 그런 무게를 거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그럴 수도 있지만), 내 그릇이 그걸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아 금방 넘쳐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광주가 고향인 동갑내기 스물살배기들이 서로의 삶을 어르고 달래고 보듬고 안아주는 '예쁜 이야기'이다. 거기엔 의도적인 비장함이나 숭고미가 없다. '혁명적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공장으로 들어간 영금이가 있긴 하지만, 그의 이야기도 그리 호들갑스럽진 않고 담담하다. 비장함이 없는 대신, 아픔이 있다. 그런데 이 아픔은 나 자신의 고통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 때문에 아프다. 광주시내에 군인들이 들어온 날,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섰다가 군인들의 손에 친구 경애를 잃은 수경이는 몇날 며칠을 방안에 홀로 앉아 가슴앓이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

그 얘길 듣고 있던 해금이는 화내서 미안하고, 웃어서 미안하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더 할 수 없이 예쁘고 또 그래서 슬픈, 날 것 그대로의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우리 식구'들은 그들의 그런 마음을 이상하다고 한다. 이틀동안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이(利)유(由)'없이 사랑하고, 이유없이 아껴주고, 이유없이 웃어주고, 이유없이 슬퍼하는 이들의 예쁜 마음을 꼭 안아주고 싶었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만영은 가출해서 만난 남자와의 하룻밤으로 애를 가지게 된 승희를 이유없이 사랑한다. 고속버스 안내양을 하는 승희를 대신해 아동 보호소에 맡긴 아이를 자기가 아빠인양 돌봐주기도 한다. 고모부의 목재소에서 일하는 '환'이라는 아이를 아픔을 알게 되면서 해금은 밑도 끝도 없이 그를 보듬어 주려 한다. 그들의 이런 '이유없음'은 어떤 관계에서든 그 관계의 이(利)유(由)를 만들어야만 하는 나와 우리시대의 사랑과 우정을 초라하게 만든다.

나의 삶과 운동이 이들의 사랑을 닮아갈 수 있을까? 이들의 사랑을 닮아가는 일은 비장함으로 무장하여 어떤 초월적 숭고에 다다르려 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나에겐 그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 가슴도 아직은 뜨겁고 나에게도 그들처럼 '예뻤던 때'가 있었기에, 이미 나는 그들을 조금은 닮아있다고, 감히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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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2
조향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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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만 골라서 옮겨적으려고 목차에 체크했는데, 전부 다 옮겨 적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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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사색하다
주대환 지음 / 산책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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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평.... 이라기보다는 몇 가지 코멘트를 달을 수 있을 만한 책을 읽었다. 주대환의 글은 예전에 그가 우파 잡지 <시대정신>에 기고했다고 하여 논란이 된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좌파는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유명한...)를 대충 보고, "이건 뭥미?" 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어제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심심하던 차에 읽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을 예전에 서점에서 대충 본 적이 있긴 한데,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제는 그냥 훑어보던 중에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만 부르자>(131쪽)라는 아주 도발적인 제목을 발견하고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실 나도 요즘 비슷한 고민으로, 어지간하면 앞으로 '동지'나 '민중'같은 단어는 쓰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의 말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하 임진곡)과 같은 민가나 '동지', '민중'하는 단어들은 "그 곡조와 가사의 지나친 비장함은 일상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아 어색하고, 그 정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고 닫혀 있다는 느낌을"(132쪽) 주기 때문이다. 이제 껍데기만 남은 '운동권 하위문화'와는 단절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좀 하고 있던 터였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부분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이 꽤 있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1.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말자?

그에 따르면 우리가 80년대적 운동권 동창회 정서를 버리지 못하면 이른바 '토종좌파'(그는 칸트적인 합리주의적 사고를 버리고 경험주의와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토종좌파'라는 말로 개념화한다. 그가 대표적 토종좌파로 칭찬하는 사람이 제주대 이상이 교수다.)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토종좌파라는 말이 한국적인 정세와 조건에 맞는 운동을 하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을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의 말에 백번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임진곡'을 버려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는 노무현 정부때 이 노래가 청와대에서 불려졌다는 말을 듣고, 이런 자유주의자들과 같은 부류로 엮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임진곡'을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나는 더 열심히 임진곡을 부를 것이다. 그가 그렇게 애타게 찾는 한국적 '토종좌파'는 단순히 맑스-레닌의 교조주의에 빠져있지 않다고해서, 외국이론에 심취해서 현실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하는 먹물적 근성을 버린다고만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게 아니다. 철저하게 우리의 지난 저항운동의 역사에 근거해야만 한다. 그 스스로가 그것으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았을, 518을 잊고서는 우리는 앞으로 어떤 진정한 의미의 저항운동도 시작할 수 없다. 518에 대한 해석이야 다를 수 있지만, 그 저항현장의 상징인 노래를 폐기하자고 하는 것은 감정적인 대응일 뿐이다. 물론 나도 그로부터 연유한 운동권 하위문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운동 전반의 개방성과 유연성을 질식시켰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저항운동이 앙상한 운동권 하위문화로 귀결된 것이 유일하거나 필연적인 경로는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는 이미 그렇게 형성되어져 버린 조건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조건들 속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조건들 속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악몽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2. 토지개혁 때문에 대한민국의 출발은 진보적이었다?
 

우리는 지난 저항운동의 역사가 남겨놓은 한계와 가능성을 명확히 하고, 그 가능성을 중심으로 계승해 나가야 겠지만, 그렇다고 맘에드는 것만 골라서 이어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면에서 여운형과 조봉암을 치켜세우며 "대한민국은 진보적인 시대에 건국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찍이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역사에 대한 '편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두 명의 훌륭한 정치인이 해방을 전후하여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었고, 시대를 앞서나간 인물이란 점에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실제 이들이 현재의 대한민국 '체제'를 긍정적으로 형성하는데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느냐 하는 문제로 오면 그리 대답할 만한 게 없다. 실로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포부를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타살되었고, 그러니 그들이 역사에 남긴 것은 말과 글, 즉 '사상'뿐이다.

주대환의 말대로 해방 직후 유력한 정치인(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김규식, 김구, 이승만) 중에 좌우 양극단의 두 사람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타살되면서, 한반도는 사실상 극우와 극좌의 나라가 되었다. 적어도 50년대 남한은 '이승만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텐데, 토지개혁 하나만 가지고 이 나라가 조봉암의 업적 위에 세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해도 비약이 너무 심하다. 이에 더해 (그것이 북한과의 체제경쟁 과정에서 출현한 정책이었다는 점을 제외한다해도) 토지개혁을 현재 대한민국 체제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논의는 문제가 많다. 이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주대환은 자신이 아무리 신좌파를 외치고 다녀도 구좌파적 사고방식, 즉 단계론적/진화론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그는 남한의 토지개혁을 치켜세우면서, 그것은 집단농장으로 전락한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이 아니라 79년 덩샤오핑 체제 하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이 남한의 그것과 견줄만 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농민들에게 자기 소유의 땅을 쥐어주고 "모두 부자가 되라!"라는, 우리나라 모CF의 "부자 되세요~"와 견줄만한 지상명령을 제시한다. 이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으로 잘 드러나는데, 이것을 보통 중국의 자본주의로의 전환에 있어 첫 기점으로 삼는다. 주대환에게 이것은 한국의 토지개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하자면 건국 당시 대한민국은 소농의 나라였습니다. 토지 개혁으로 조그만 땅뙈기를 갖게 된 수많은 자영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그 말릴 수 없는 교육열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입니다."(226쪽)

정리하자면 중국이나 한국이나 모두 토지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로의 발전과 번영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고, 대한민국은 이런 '위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낡은 NL과 PD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보면 제2인터내셔널 당시 자본주의의 성숙이 자동적인 사회주의로의 진화로 나아가게 한다고 말한 일부 '정통 맑스주의자'(주대환이 따르는 베른슈타인류나 그가 반대하는 스탈린류나 모두 여기에 속한다)들의 사고방식과 뭐가 그리 다른지 궁금하다. 게다가 '자발적 중노동'이라니!! 이런 식이라면 인클로저 운동 당시 도시로 내몰린 빈민들의 노동도 '자발적'이었고, 먼지 소굴 평화시장에서 어린 여공들의 일을 대신해주기도 했던 전태일의 노동도 자발적인 것이다. 어쩌면 주대환의 생각은 작년에 광주항쟁에 대해 '선진국에서도 다 그런 과정을 겪더라'라며 통과의례쯤으로 발언했던 황석영의 관점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월러스틴이 말했듯이, 서양의 부르주아 혁명은 신흥 자본가계급의 출현이 아니라 기존 귀족계급의 '환상변신'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근대로의 진화'라고 보는 관점은 옳지 않다. 한국의 50년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조선 말기와 일제 식민지 시기에 봉건 지주였던 놈들이 반민특위를 짓밟고 자본가계급으로 '환상변신'을 했다는 것은 굳이 월러스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상식이 아니던가?
 

 

3. 전쟁은 '평등주의'다!?

나아가 내가 주대환을 다음의 인용문을 근거로 '주전론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억지일까?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두어 차례 전선이 밀려 내려오고 밀고 올라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다니고, 월남 또는 월북함으로써 뒤섞이는 사이에 신분 질서와 귀족의 생활양식, 전통문화는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고급문화를 대중이 따라하여 전반적으로 문화적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거꾸로 모두가 어떤 가식도 핑계도 없이 노골적으로 돈과 힘을 추구하는 천민이 된, 위대한 천민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 ...)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평등하기 때문에 위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천민자본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이 평등하다니요? 그렇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건국 당시 대한민국은 평등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물의 평가는 상대적입니다. 건국 당시의 대한민국이 평등하다는 것은 절대적인 평가가 아니라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222-3쪽)

한국전쟁이 기존의 신분관계를 청소해서 대한민국은 모두가 천민인 나라, 평등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원래 자본주의 자체가 천한 것이니 한국식 천민자본주의가 부끄러울 이유도 없고, 지금의 대한민국 발전을 이끌어 온 엄청난 교육열도 이 '천민적 평등주의'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위대하신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팔할이 전쟁이었다. 오 전쟁이시여~ 뭐 이런건가?

이런 식의 주장은 사실상 종말론적으로 읽힌다. 모든 것이 파괴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새로 지을 수 없다는...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대전이 전지구적 경제성장의 기회를 가져왔다고 말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것을 앞에서 지적한 그의 '자발적 중노동'이란 표현과 연결해 생각해 보면, 전쟁으로 피폐화된 상황 속에서 한국은 근대적 평등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얻었고, 이로써 근대화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세계대전 참전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식이라면 현재 전쟁을 겪고 있는 중동지역 시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축복의 폭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4. 여전한 남의 것에 대한 맹목적 추종

이에 대해 나의 과잉해석이라고 말한다면 인정하겠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일때 한 쪽 눈엔 블라인드를 쳐버리는 습관은 여기서 그치는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마찬가지로 뒤집어 보면, 한국이 OECD에 가입했다는 사실 역시 때로는 고맙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충분한 준비 없이 졸속하게 OECD에 가입해서 구제금융을 받아야만 하는 외환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과연 OECD가 한국의 가입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 엄두를 내었겠습니까?"(230쪽) 같은 구절 말이다.

한국 정부가 언제부터 그렇게 국제기구의 말을 잘 들었다고 공무원노조 탄생의 공을 OECD로 넘기는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주대환은 자기가 그렇게 부르짖는 '토종 좌파'로서의 자질이 매우 부족하다. 그는 대한민국을 긍정하자고 말하면서도 그 근거를 대한민국 내부가 아니라 항상 외부에서 찾는다. 대한민국 최초 헌법이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도 사실상 서구문물에 대한 찬양이다. 그가 여운형, 조봉암을 존경하는 이유도 그들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을 좋아하는 것도 그들이 '서구적' 국가관료제도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는 식민지 시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저항운동의 역사 속에서 피어난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모조품으로서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것이다.

진보신당 상상연구소의 장석준은 주대환의 이런 주장을 두고 역사 속에서 어떤 기원적 사건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정통성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자학자들의 역사관인데, 주대환의 주장이 딱 그 꼴이라고 비판했다. (장석준, <진보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시민과세계 2008 하반기호) 여기에 덧붙이자면 주대환은 한국 땅에서 한 번도 자리를 잡은 적 없는 서구형 민주주의/복지국가를 대한민국 정통성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면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대중들의 저항행동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긍정해야 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장석준이 말하듯이 "민주공화국을 위해서 대한민국을 넘어서야"한다. 그런 방향으로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다시 써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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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런 글을 읽는 것은 나로서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앞서서 운동했던 대표적인 분이 이렇게 매력없는 글로서 사람을 실망시키니 후배의 마음은 찢어진다. 한 논평자의 말처럼 주대환의 이런 선회는 이미 90년대초 '신노선'을 선언할 당시의 선택이 "주어진 선택지들 중에서 선택한 무엇이 아니라 '더는 이대로 돌파할 수 없는 한계선'을 맞닥드리며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며 좌파에게 남은 기획을 '새로운 기획'이라 믿고 또 다시 헌신해온, 좌파의 총체적 위기와 기획의 빈곤 위에서 싸워온 우리 운동과 우리 자신의 현실적 자화상"(최윤식, "사민주의가 대안일 수 없는 이유", 레디앙, 08.09.08)인 것처럼 예정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어차피 좋든 싫든 주대환류의 역사적 효과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미래도 이렇게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운동의 혁신'이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난 운동의 결과들과 단절을 선언하는 것 밖엔 길이 없지 않는가?

부탁드린다. 어린 놈이 더 이상 이런 절망스러운 결론에 다다르지 않도록 선배님들이 지난 운동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좀 더 성실하게 해 주시기를... 그래서 그것이 '대안사회'로 불리든 '진보한국'으로 불리든, 그것을 이뤄나가는데 미력한 지성을 보태는데 망설일 이유를 만들지 않게 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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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심성보 옮김 / 미토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다른 건 둘째치고 번역이 엉망이네요. 영어식 문법이 그대로 드러나는 번역, 쩔어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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