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 - 탁재형 여행 산문집
탁재형 지음 / 김영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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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50개의 나라를 찾아 다녔지만, 저자 스스로가 원한 여행이기보다는 다큐멘터리 PD라는 직업에 얽매여 다닌 여행이었다. 자신을 위한 여행이기보다는 다큐멘터리 작품을 보게 될 시청자들을 위한 여행이었지만, 저자는 비자발적인 여행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저자만의 여행 철학을 책의 곳곳에 담아내고 있다.

누구나가 쉽고 편하게 다닌 여행지가 아니고, 힘들고 어려움을 감내하며 찾아 다닌 여행지에서 저자가 느낀 감정들을 솔직하고 꾸밈없이 기록해 놓은 여행 일기장을 엿본 것 같다.

일상 밖으로 탈출할 것을 권유하는 일상을 살았다.
정작 자신은 어디에 있든 일상의 무게를 모두 짊어진 채였다.
떠나보아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아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짜릿함과 두려움과 궁금함을 모두 지닌 채. - 표지 저자 소개 글

저자는 <세계테마기행> PD이자 오지 전문 여행자이며, <PD의 여행수다> 진행자로 세계 술 예찬서 스피릿 로드, 여행 충동을 강력하게 부추긴 PD의 여행수다에 이은 세 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삶의 모든 순간을 그러쥐려 애쓰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도 없다. 잊을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때로 잊힌다는 것은 축복이다. - P. 038

 

기록되지 않은 여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같은 나이의 두 사람 중 더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은 누구일까.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기억이 사라진 사람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억에 없는 여행이, 거기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첩을 덮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가봤지만 기억나지 않는 장소들을 떠올린다.
만났지만 희미해져버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기록되지 않아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 P. 041

 

사람들은 도약을 꿈꾼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더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올라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래를 향한 도약이다. - P. 094

 

나와 생긴 것이 다르고 하는 말이 다르다고 해서 거리낌 없이 '짱깨' '깜씨' '연탄' '쪽발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 여행을 권해주고 싶다. 여행이야말로 '안전하게' 약자가 되어볼 수 있는 최고의 시뮬레이션 게임이니까. '나그네'라는 천하에 다시없는 눈칫밥 캐릭터가 되었다가, 원래의 ''로 돌아올 수 있는 구운몽이자 크리스마스 캐롤이니까. - P. 218

 

흰 모니터 앞에 앉은 사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어느 방향으로 가도 된다는 가능성의 무한함이다. 아무런 바퀴자국이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막막함. 벽이 없지만, 길도 없다. 360˚중에서 어느 방향을 택하든 그것은 나의 자유다. 하지만 그 방향으로 사흘을 갔을 때,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어 모래 위에 쓰러져 죽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자유라는 것은 때로 이토록 썸뜩하다. - P. 250

 

소년은 나이를 먹었다.
더 이상 추억이라는 것이 물건에 깃드는 것이 아니라
기록과 생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중이다.
빛나는 것을 모으고 또 모으고 까마귀의 유희를 그만둘 만큼,
존재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주변을 채우고 있는 물건의 가짓수가 줄어들면
더 쉽게 떠나고 더 쉽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만큼,
소년은 자랐다. - P.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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