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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예찬 - 야생의 숲, 문명의 영혼
김창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아, 졸립다’하고 나는 낮잠을 잤다. 이 책을 옆에 끼고서.
꿈 없는 잠이었다. 나는 혹시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을 헤메는 꿈을 꾸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그 땅은 나의 꿈에 나타나기에는 아직 너무 멀었나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시베리아를 보고 느꼈지만 집에서 관악산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있는 나에게 그곳은 여전히 아득하게 멀다.
7000원만 지불하면 손쉽게 두 시간의 ‘다른 세계’를 제공해주는 영화관의 영화들과는 달리 도시인에게 시베리아라는 ‘다른 세계’는 그 감정적인 거리는 물론 너무나 불친절한 교통시스템 때문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요구한다. 어머니 자연이 태초의 비밀과 원초적인 푸근함을 가지고 인간을 맞이하는 그곳은 안타깝게도 저자와 같은 관련 학자나 쓰고 남을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 외에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곳이다.
나는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지 못 했는가 다각도로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도 도시인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간으로만 비쳐졌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종종 친숙하면서도 색다른 것, 깊이가 있으면서도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유용성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이중적인 기준은 책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사실상 한국과 같은 종자인 시베리아 호랑이, 러시아 땅에 살고 있지만 한국 사람인 고려인, 평화롭고 고요한 삼림지대는 이미 도시인인 나의 기억과 경험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제대로 된 무당을 보는 일조차 쉽지 않은데 그들이 가진 사상인 샤머니즘의 원조가 시베리아에서 나왔다니. 나는 텔레비전에서조차 호랑이나 고려인을 손에 꼽을 정도로 보았을 뿐이다. 갑갑한 도시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면서도 신혼여행으로 갈만한 동남아시아나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이 잘 되어있는 서유럽이 아닌 동토(凍土)의 땅 시베리아는 ‘꿈꿀만한 다른 세계’라기보다는 ‘남의 얘기’같다.
그러나 그곳이 너무 멀고, 평생 ‘나의 이야기’는 될 수 없다 하여 시베리아라는 지구상의 한 공간을 ‘예찬’한 이 책이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인문학적, 지리, 생태적 지식과 시베리아를 이야기하고 묘사했던 작가의 작품들, 저자 자신만의 문장력을 동원해 도시인에게는 아직 안개 속에 가려있는 시베리아라는 공간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해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시베리아의 자연과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며 생태적인 관점에서 그곳을 예찬하고 후반부에서는 그 공간을 둘러싼 문학과 예술, 사상을 다루었는데, 곳곳마다 놀라운 정보력이 일단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내가 집 안에서 한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인터넷 서핑을 하는 수고만 감수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책이 그 이상인 것은 끊임없이 ‘왜 시베리아인가?’ 묻고 있기 때문이다. 역동적이지만 성급하고 비인간화 되어가는 한국사회에서 ‘다른 세계’로서의 시베리아, 근원적으로는 누구에게도 영구히 귀속될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땅, 야생과 문명이 공존하는 우리들의 본향으로서의 시베리아(p.11), 조선 말기 먹을 것을 찾아 인적 없는 그곳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되풀이된 이주의 고달픔을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시베리아, 황량하고 가혹하기 그지없는 동토, 사람이 아닌 죄수의 신분만 허락되면서도(p.129) 존재의 운명과 그 창조자로서 신의 영역에 복종하게 되는 도덕적 정신적 정화의 공간이라는 이중적 감정을 안겨주는 시베리아, 그러한 감정들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나 크로포트킨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러시아 작가와 사상가들의 문학적 영감이 되었던 땅, 시베리아.
도대체 러시아 예술가들의 독특하고 강렬한 감수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중국은 러시아와 같이 광대한 토지와 개발이 거의 안 된 자연을 가지고 있지만 문학적, 사상적인 느낌은 상당히 다른 것을 보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들을 때면 나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회오리를 타고 구름 속을 여기저기 떠돌다가는 어느덧 별천지 같은 세상, 혹은 내면의 깊은 호수에 다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러한 감성은 작가가 소개한 문학작품들 안에도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이 책의 작가는 책의 후반부에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등 유명한 작가들은 물론 라스푸틴이나 마야코프스키와 같은 생소한 작가들의 작품도 중간 중간 인용하는데 그것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실 전반부에서 시베리아를 이야기할 때는 민주화 이전 지식인 세대 특유의 먹물 냄새가 너무 짙은 것 아닌가 싶었다. 나는 요즘 지식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서인지 모든 종류의 ‘먹 향’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나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님의 추천사와 같이 애정은 ‘인식의 최고 형태’이다. 때문에 진심과 열정과 정성을 다하여 시베리아를 인식한 그의 글은 종종 특정 계층만이 해독할 수 있는 언어들이 발견되지만 결코 거북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예찬한 그의 열정에서 자연을 경외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