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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대전환 - 인권 공화국을 위한 법과 국가의 역할
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조효제 옮김 / 교양인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는 항상 번역서의 첫 머리에 깊이 있는 옮긴이 해설을 쓰는데 이번 번역서 역시 그렇다. 분량만 40페이지 정도 되는데 내용은 이 책의 요점정리, 한국사회와 현대 인권사상에서의 의미, 원저자에 대한 정보 등이다. (샌드라 프레드먼의 머리말은 다섯 페이지임)
물론 그분은 요점정리라고 하면 매우 서운해 하시겠다. 전작들에서부터 번역자는 항상 옮긴이 해설이 요약, 압축 정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 해 왔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는데 필요한 일종의 로드맵’(p.27)이다.
그의 옮긴이 해설은 하나의 완결된 해설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것인데, 부작용도 있다. 나처럼 게으른 독자는 이 부분만 읽으면 마치 이 책을 다 읽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예고편에서 이미 다 보여줬는데 굳이 영화까지 볼 거 있나. 나중에 추석특집으로 나오든가 하면 그 때 보자’ 이런 심리가 살살 발동하려 한다. 사실 이 부분만 읽어도 어디 나가서 아는 체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위에 상품소개 부분에서 저자의 해설을 너무 자세하게 실어놓았는데 나 같은 독자가 많다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고편은 예고편일 뿐’ 다 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단 그것만 보면 책값이 좀 아깝잖나.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뭐야 , 예고편에서 다 보여줬던거 재탕이냐’하면서 ‘에잇, 시간낭비, 돈낭비’ 타령을 할 일은 없으니 반드시 끝까지 읽을 일이다.
책에는 일단 추석이나 설날에 볼 법한 올스타 특집전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한나 아렌트, 아마르티아 센 등 학계의 스타들이 대거 등장하신다. (종종 사진까지...) 저자는 ‘법철학과 사회과학 이론의 양대분야 최고봉들의 사상을 새로운 인권론의 주춧돌 삼아’(p24) 새로운 인권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개인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를 합친 ‘권무(rights-duty)'라는 통합개념(p.20)이라고 한다.
물론 ‘권무’라는 한국말은 조효제 교수가 번역을 하며 만든 신조어이다. 일견 무슨 춤의 일종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굳이 홍학들이 추는 군무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왜 인권이 권무가 되어야 하는가. 인권은 규범력이라는 ‘뼈’에다 구체적 실현방안이라는 ‘살’을 입혀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개념(p.21)이기 때문에 의무주체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인권의 대전환’인 것은 이렇게 기존 인권의 개념을 새롭게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인권에 대한 오해는 대체로 두 가지다. 모든 권리를 인권으로 오해하거나, 국제사회의 합의된 약속 또는 국제조약법의 의무사항 정도로 파악하거나.
샌드라 프레드먼이 주창한 새로운 인권이란 국가정치공동체의 핵심구성원리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정치공동체의 체제는 역사상 가장 우월하다고 알려진 민주주의이고. (얼마나 좋으면 어떤 나라는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보급한다). 이 책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에서 국가의 목적은 인권을 중심으로 하여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를 강화하고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인권을 옹호한다는 말은 제대로 된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한다는 말‘(p.23)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는 여러모로 새로운 것 투성이지만 요즈음의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권의 상승작용적 접근(synergistic approach)이었다. 나는 요즘 인권의식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서 ‘2부 법의 지배와 사법부의 역할’에서 부록처럼 딸린 ‘6장 법을 넘어선 적극적 의무’만 열심히 읽었다. 누가 내 책을 본다면 그 부분만 들췄음 좋겠다. 밑줄 열심히 쳤다.
상승작용적 접근은 저자가 여러 견해와 경험을 종합해 제안한 것으로, ‘개별 요소들이 잠재적으로 협력하여 각 요소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전체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효제 교수는 이를 ‘사법적-비사법적 메커니즘을 모두 합친 최종완결판 비슷한 것’이라고 하였다. 국가, 사법부, 시민사회, 국가인권위가 다함께 힘을 합치면 강력한 태권브이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아무나 논증할 수 있는 이론은 아니다. 음...어쨌든 참 원대한 포부다. 난 일단 이런 시원시원한 접근법이 좋다.
아쉬운 점이라면 국가의 의무이행을 위해 끊임없이 소송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스스로 알아서 참여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은 없을까? WTO체제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짜여진 국제적 규제 시스템이라고 한다. 원활한 자유 무역을 위해 그 정도로 고도의 규제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처럼 국가가 그러한 자체적인 추동력을 가지도록 할 수는 없을까? 휴. 대전환은 좋았는데 그걸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래도 뭐...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들도 많으니까 이 정도로 진전된 이론이 나왔으면 조만간 더욱 진보한 이론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빈곤한 상상력을 가진 독자 입장에서 이 책의 장점은 실제 사례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 자신의 새로운 인권이론을 뒷받침할 수많은 이론들이 나오는데 그것만으로는 실효성이 있을지, 실제 정책에 대입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는데 다음 부분에서는 현실에서 사용되었던 사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정부 관계자들이 아니라면) 저자의 새로운 인권이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잘 하겠다고 하는 일인데 딱히 반대할 구석도 없고.
아무튼 이걸 읽기만 한다면 정가 29000원은 절대 비싸지 않다. 이 정도 되는 내용을 강의로 들으려면 아무리 압축해도 한 학기는 들어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