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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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게 된 계기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 거의 잊어버리긴 했지만 별로 대단한 건 없었을 것이다. 나는 폴라니라는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워낙 집중하는 시간도 짧고 두 권짜리 장편소설에도 허덕대는 스타일이라 두꺼운 책은 좀 피해주고 싶었으나...이런, 전문가와 독자들의 평이 너무 좋았다. 다들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대안이라고 하니...(군중심리 발동 -.-;) 게다가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회오리 바람 속의 연인들].

아, 생각났다. 계기.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이다.  
   




이런 내용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거다. 거대한 전환은 시장 자유주의, 즉 나라 단위의 사회들과 지구 경제를 모두 자기조정 시장을 통해 조직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본 것들 중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비판을 제공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문제를 밑바닥부터 다시보게 해주는 게 좋다. 처음 접했을 땐 머릿속에서 에밀레종처럼 아주 큰 종이 '딩~'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폴라니의 인생

188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폴라니는, 1920년대 오스트리아 빈에서 중유럽의 으뜸가는 경제금융주간지인 '오스트리아 경제'의 주요 편집자로 일했다. 이 기간에 그는, 요즈음에는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들로 불리며 당시에는 시장자유주의 이념의 정당성을 복원하려 애쓰던 미제스와 그의 제자 하이에크의 주장을 접하게 되었다.

요즘에야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주장들이 주류 경제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때만해도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사회주의의 호소력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으니, 그들의 주장은 당시엔 별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1920년대에 벌써 폴라니는 미제스의 주장에 직접적으로 도전했으며, 시장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의 중심적, 이론적 관심사로 남게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자 폴라니의 사회주의적인 사상이 문제가 되고, 결국 그는'오스트리아 경제' 의 편집자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옥스포드와 런던의 여러 대학의 학교 외곽 조직이었던 노동자교육협회에서 강의를 준비하다가 그는 영국 사회 경제사의 자료들에 파묻힌다. 본서 '거대한 전환'의 2부 시장경제의 흥망에서 영국산업혁명과 스피넘랜드법, 당시 학자들의 논쟁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거의 그 시기에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런 역사적 자료들을 (오늘날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견해에 대한 자신의 비판과 융합시킨다.

이 책을 실제로 집필하게 된 것은 그가 미국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에 초빙학자로 머물던 1940년대 초의 일이다. 그는 연구 지원비를 받고 집필에만 몰두할수 있는 환경 속에서  여러 다른 흐름으로 펼쳐져 있었던 자신의 주장들을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

2차대전 후에는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직을 갖고 학생들과 함께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의 화폐, 교역, 시장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 몰두했다. '거대한 전환' 2부 시장경제의 흥망에서 3장-삶의 터전이냐 경제개발이냐, 4장-사회와 경제체제의 다양성, 5장-시장패턴의 진화 부분은 이 시기에 얻은 지식들이 상당부분 녹아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고향 헝가리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부다페스트에서 빈과 영국으로, 미국으로 망명하는 가운데 학자로서의 도덕적 책임의식을 잃지 않았다. 덕분에 유럽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의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기에 그의 여러 차례의 망명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일지언정 학자로서는 풍부한 사유의 틀을 제공해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과 노후의 폴라니 사진 


거대한 전환은 어떤 책인가?

칼 폴라니의 첫 저술이자 대표작인 '거대한 전환'은 1944년, 그의 나이 57세에 출간되었다. 이런 걸 대기만성이라 해야할까. 이 책은 그의 일생에 걸친 고민과 연구와 사색이 어우러져 나온 것이며 향후 20년간 정력적으로 몰두했던 '실체 경제학'이라는 혁신적이고 지적인 프로젝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p.605)

이 책은 시장경제라는 거대한 전환을 함께 겪은 '동시대'의 '서구인'들을 위해 쓴 것으로 거의 70년이 지난 후의 한국인이 읽기엔 매우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요즘은 한두달 겨우 서점에서 버티다 사라지는 책들도 부지기수이니까. 그런데 이런 70년 '묵은' 이런 두꺼운 하드커버 경제학술서가 이토록 생생하고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출간 직후엔 생생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냐

 

   
  이 저술이 처음 출간된 1944년 직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격화되면서  
폴라니의 기여가 갖는 의미가 흐려지고 말았다. 자본주의 옹호자들과  

소련식 사회주의 옹호자들 사이의 지극히 양극화된 논쟁에서는 폴라니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논리의 주장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p.32, 프레드 블록의 해제)
 
   


칼 폴라니의 연구 스타일과 후대 학자들에게 끼친 영향

이  책이 복잡하다, 섬세하다, 때로는 난해하다는 오해까지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그가 행한  

연구방식이 다른 학자들과 달랐기 때문인 것 같다.  

(번역이 잘 되어서인지 나는 경제지식이 바닥인데도 생각보단 어렵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경제사는 경제+역사 분야를 참조하고,  

정치경제는 기껏해야 정치+경제+역사 분야 정도를 참조하며 연구를 진행하는데  

이 사람은 이 책을 쓰면서 경제, 정치 뿐 아니라 역사, 사회, 인류 등 경제학자로서는  

흔치 않은 분야의 지식을 끌어모아 자신만의 이론을 재구성하였다. 국제/국내법이나  

행정 등의 역사적 변화를 주로 보면서 연구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그가 인간과 그가 가진 사상 사이의 중요성의 비중을 새롭게 평가( 

p12, 로버트 매키버의 발문에서)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독특한 사유방식을 설명해주는  

'묻어 들어 있음'(embeddedness)의 개념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란 경제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 종교, 사회 관계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용어다.

   
  [거대한 전환]은 15세기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동안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중요한 언급을 담고 있다.  또 이 저서는 전근대 사회에서 상호성(reciprocity)과  

재분배(redistribution)의 역할, 고전파 경제사상의 한계들, 자연을 상품화 하는 것의 

여러 위험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독창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수많은 현대의 사회과학자들-인류학자들, 정치학자들, 사회학자들, 경제학자들-이  

폴라니의 주장으로부터 이론적 영감을 얻어왔다. 오늘날 이 [거대한 전환]에서의  

핵심 인용구들에 따라 틀이 잡혀 있는 책과 논문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p.37-38, 프레드 블록의 해제) 
 
   


해제만 거의 100페이지 이상이라, 아직도 그 많은 해제와 발문들 중 일부는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남아 있지만, 그 내용들은 여러모로 21세기를 사는 동양인 독자의 입장에선 매우 쓸모가  

많았다.  1940년대에 출간된 책이 현재를 고민하는데 훌륭한 디딤돌이 되어주었으니.  

 1944년 출간 당시 원서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독서후기'라 하였지만 사실상 '해제후기'라 해도 될만큼,  

조지프 스티글리츠, 프레드블록, 루이뒤몽, 홍기빈 등의 발문이나 해제들은  

모두 뛰어나다. 자신들의 경제학적 성취를 바탕으로 폴라니를 이해하는 것이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폭넓은 시각으로 이책을 보도록 도왔고,

경제관련 지식에선 완전히 문외한인 내게 하나같이 이 책이 현재성을 가지고  

미래를 구상하게 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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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발명
린 헌트 지음, 전진성 옮김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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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대중문학인 서간소설이 인권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책이 출간될 당시 공통적인 광고 문구였다. 그에 따르는 책의 소개도 대부분 서간소설의 유행과 인권관념에 대한 것이었고. 그러나 그에 대한 내용은 이 책의 첫 부분에서만 다룬다. 책 전체를 파악하려면 그보다 다음의 이 부분을 보는 것이 낫다.

노예제와 대인 종속, 그리고 자연법칙처럼 보이는 굴종에 기반한 사회에 살던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그들과는 다른 인간을-경우에 따라서는 여성마저도-동등한 존재로 상상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권리의 평등이 별 그럴듯하지 않은 장소에서 ‘자명한’ 진리가 되었는가? (p.23)

린 헌트 교수는 자명성의 요구가 인권의 역사에서 핵심이라고 믿고 어떻게 그러한 확신이 18세기에 생겨났는지 설명한다. 그런데 ‘자명성’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인권을 당연시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책을 끝까지 다 읽도록 그 의미가 착 달라붙게 와 닿질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원서를 찾아서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인권이 왜 자명해져야 하는가는 이 책의 서론에서 이미 답이 나왔다.

인권은 개념 정의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이성만큼이나 감성에 의존하고 있다. 인권에 대한 자명성의 요구는 궁극적으로 감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내면을 움직여 확신을 갖게 한다. 인민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그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옮음과 그름을 아는가에 관한 일련의 확신들 말이다. (p.33) 미국의 인권선언, 프랑스 혁명은 18세기에 무르익은 인권사상으로 개인의 내면에 강한 확신이 있었을 때 비로소 가능했으며 그 확신이 약해졌을 때 19세기의 악랄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렸다고 생각된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인권침해로 공포를 느낄 때 비로소 인권이 문제가 되었다. 18세기 인권혁명기에 인권의 요구가 인권감수성을 일깨움으로서 혁명이 시작되었다면 20세기 세계인권선언으로부터 시작된 인권분위기는 세계대전으로 인한 공포로 비롯되었다.

옮긴이의 번역에는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다. 직역이 너무 심해 두어 번 곱씹으며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되는 문장을 서너 번 만났지만 글의 흐름상 대충 넘어갈 수 있었다. 번역에 대한 나의 까탈스러움에 걸린 문장들 중 기억나는 것 몇 가지.

서한소설에서 행위의 밖과 저 위에 있는 권위적인 관점은 없다.(p.50)

‘서한소설에서 전지적 작가시점은 없다’라고 하는 편이 더 간결하고 명료하다. 전지적 작가시점은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국어시간에 시험문제를 풀기위해 누구나 배우는 용어로 어려운 말도 아니다.

‘국부론’(1776)의 저자이자 허치슨의 제자인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를 동정의 문제에 바쳤다(p.77)

자신의 책을 어떤 문제에 바치다니? 조공을 바치는 것도 아니고...한국말에선 이런 표현 안 쓴다. 어떤 영어단어를 이렇게 번역했는지 의심되는 단어가 몇 개 떠오르긴 하지만 이렇게 번역한다고 더 정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에서 동정의 문제를 다뤘다’라고 하는 편이 낫다.  

지은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책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다니. 읽는 내내 깜짝깜짝 놀랐다. 생각해보면 세계인권사상사를 쓴 미셸린 이샤이도 여성이었지만 특별히 여성의 문제가 도드라진 부분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인권 침해를 당했던 여러 그룹-흑인 노예, 유대인, 노동자 등등-의 예를 들면서 어떤 순간이든 ‘그러나 여성은’하고 한 번 더 덧붙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억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신교도 남성들은...유대인 남성도...흑인 남성들은...정치적 권리를 얻었다...(중략)..이처럼 이전에 시민권을 박탈당한 집단의 경우에도 정치적 권리가 상상하기 힘들 만큼 확대되었으나 여성은 그 선을 넘을 수 없었다. 여성은 혁명기에 결코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동등한 상속권과 이혼의 권리를 획득했다. (p.171)

이 책에는 ‘상상가능성’이라는 용어도 여러 번 나온다. 예를 들면,

1789년 말까지는 무시할 수 없는 수의 의원들이 배우, 사형집행인, 개신교도, 유대인, 자유 신분의 흑인, 그리고 빈민마저도 시민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상상 가능성 등급을 계속 조정했음에도 여성의 평등한 권리는 남녀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이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았다.(p.195)

거의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로 남았다고 표현해도 될 텐데 상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상황설명을 더 명료하게 하려고 그런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받아들인다’는 표현을 쓰면 더 익숙하고 이해가 빠르긴 하지만 조금 굴욕적(?)인 느낌도 든다. 권리란 누군가가 ‘받아들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나 붓다와 같은 성인군자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타 집단의 권리를 대신 찾아주지 않았다. 붓다조차도 예수에 비해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상상 가능성이라는 용어는 결코 수용 가능성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이라는 바로 그 관념이 부지불식간에 더욱 악의적인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포문을 열었다(p.215)

과연 그럴까? 악의적인 성차별, 인종, 반유대주의의 포문을 연 것은 인권이 아니라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시민들의 관념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인권침해에 짓눌려 있던 인민들의 인권의식이 깨어났던 것처럼 이 같은 인권의식으로 인해 인권침해할 권리가 침해당한 다수의 권력자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인권을 침해당해온 민중들이 아주 작은 인권의 획득으로도 기뻐하고 잠시나마 숨을 돌리는 것처럼 아주 당연하게 인권을 침해해왔던 가진 자들은 조금만 그 편의를 빼앗겨도 크게 분노한다. 자기 재산의 일부를 투자하고 거짓말을 만들어내서라도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지은이의 말처럼 18세기의 서간소설 등으로 인해 시민들의 인권의식은 크게 고양되었고 인권 팜플렛이나 서적들도 많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인권사상의 태동을 그것만으로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그 중 하나를 미시사적 관점으로 바라보았다는 의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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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당비의생각 3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지음 / 산책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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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은 유난히 죽음과 관련한 사건이 많았다. 용산참사로 사람‘들’이 죽었고 세 명의 지도자들(김수환, 노무현, 김대중)이 연달아 타계했다. 나 역시 올 한해는 혹독했다. 개인적인 건강문제로 거의 죽을 뻔하다 살아났고 비슷한 시기에 가까이 사시던 작은 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어떤 사람의 죽음에도 찾아가서 애도하지 못했지만 이 모든 경험은 내가 생각보다 죽음과 가깝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책은 최근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삶과 죽음, 생명에 대한 문제를 사회적 의미로 설명한다. 그들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대중들의 이상하도록 조용하거나 열광적인 반응에는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을 산 것은 인권운동의 대안을 모색하는 논문을 계획하기 위해 한국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책의 저자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죽는 가운데 대중이 보였던 기이한 외면과 열광적 애도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외면했는지, 왜 열광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사실 그것만 해도 큰 소득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대중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건 독자에게 맡겨진 몫이다.

이 책은 크게 ‘애도’에 대한 질문과 ‘기억’에 대한 성찰로 나뉜다.

정치’적 죽음, ‘역사’적 죽음, 정치의 죽음(엄기호)에서 그 죽음들의 의미는 순서대로 노무현, 김대중, 용산참사를 의미한다. ‘노무현의 죽음이 소요로 이어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면 김대중의 죽음은 결코 논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p.32) 용산은 전혀 다르다. 사실 모든 죽음들 중 가장 이상한 것이 용산에 대한 대중의 기이한 침묵인데 엄기호는 이를 ‘삶에 앞선 개발’에서 찾는다. 그것은 가장 신성한 질서이다. 이 사회 질서가 가진 도착의 핵심은 삶이 개발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삶조차 지킬 수 없다는 데 있다. (p.38)

나 역시 용산의 침묵은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생존본능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는 개발논리에 도착된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돌아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데 반해 엄기호는 정치적 질서에 대해서는 마음껏 떠들어도 되지만 (개발 욕구가 삶의 터전을 압도하는) 재산에 대한 질서는 결코 건드릴 수 없다는 불문율에서 원인을 찾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진 않다. 우리 삶은 진정 누군가를 파괴하지 않고는 지킬 수 없는 것인가.

‘더 이상 아름다운 순교자는 없다: 우리는 노무현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야 하나?’(김원)에서는 노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대중의 담론 분석을 시도한다. 노무현을 희생양, 타살, 순교자 등으로 생각하는 개인/집단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지속가능한 승자독식 사회를 상상하던 이들이 만든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기획’(p.49)은 실패했다는 평가에는 나 역시 동감한다.

그는 ‘노무현 개인과 노무현의 정책을 분리하는 것이 대중 정서 속에서 매우 어렵다는 점을 발견’(p54)했다고 고백하지만 그의 죽음에 얽힌 대중의 이상한 정서를 읽어나간 것은 나로서는 매우 속 시원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의 친구가 되고자 했고 탈권위적 모습을 가졌던 노무현은 기억하면서, 그의 집권 5년은 또 ‘기묘하게’ 잊었다.‘(p.48)

이 현상을 어찌 보아야 하나. 대중을 힐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대안 없이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한 선택지였다. 대안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자가 아닌,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이다.’(p.67) 아름다운 순교자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죽음과 생존을 묻다-애도, 우정, 공동체’(권명아)는 2009년 베스트셀러인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윤제균 감독의 영화 ‘해운대’의 이례적인 성공은 부당한 죽음을 애도하는 정치적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죽음의 책임이라는 모티프는 촛불과 광장과 조문행렬에서 극장과 서점가로 이동하였다. 왜 우리는 용산참사와 노무현의 죽음에서는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고 다른 자리에서 애도에 열중하는가. 권명아는 그 답을 찾기보다 애도하지 못하는 개인의 심리를 이야기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 아닌 문학비평가라서 그런 것 같다.

‘지금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슬픔의 양식이 실은 열전과 냉전의 도가니에서 구성된 폭력적인 것이라는 점을 환기하고자’(p.80) 박완서의 ‘부처님 근처’(1973)를 통해 애도가 금지된 자들의 심리분석을 시도한다. 소설 속에서 두 모녀는 반동, 욕된 죽음으로 간주된 아들과 남편, 오빠와 아비의 죽음에 공적인 애도를 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죽음들을 ‘꼴깍 삼켜버렸다.’

삼켜버린 죽음은 그들을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삶의 불안감을 낳고, 그녀(주인공)의 삶은 집요할 정도로 생존과 자기보존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 간다.(p.82) 사람의 죽음에 마음껏 슬퍼하고 죽은 자가 떠난 후 남아있는 사람들끼리의 삶의 관계가 제대로 재구성되어야 온전히 삶이 지속될 수 있을 터인데 용산에선 지금 그러질 못하고 있다.

‘무덤은 언제나 핑계였다: 원한과 연민의 정치에 대한 명상’(김성태) 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앞의 엄기호, 김원과 비슷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87년 이래의 민주화’기획이 실패했음에 대한 (재)확인이자,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민주화 이후 ‘20년’ 역사의 과정이 누구도 원치 않았던 방식으로 종막‘(p.131)을 맞은 것이라고 말한다.

용산참사와 쌍용차의 경과와 의미를 뒤늦게나마 짚어보려 한다면 ‘무수한 죽음들의 동일함에 대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송경동)를 보는 것이 좋다. 그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본’이라고 하며 김대중과 노무현의 죽음에 국화꽃을 놓아줄 수 없었던 것은 그 대통령들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구하며 많은 이들이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두 대통령을 모두 비판하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더 크다. 송경동에 따르면, 그(노무현)의 패배 때문에 이명박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가 깔아준 탄탄대로를 따라 이명박이 손쉽게 입성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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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장난 마음이 자라는 나무 22
브리기테 블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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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에 있는 창살을 보면 무척 마음이 놓인다. 창문을 열고 자도 괜찮다. 창살이 없다면 누군가 기어 올라올까봐 무서울 것 같다. 설령 누군가 창에 얼굴을 대고 찡그린다거나 혀만 쑥 내민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환자가 창문 너머로 뛰어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워있는 곳은 삼층이다. 이곳에서 뛰어내린다고 정말 죽을까?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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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총서 WHAT 박스세트 - 전5권 - 한정판 개념어총서 WHAT
김영진 외 지음 / 그린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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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계열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봐야하는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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