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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발명
린 헌트 지음, 전진성 옮김 / 돌베개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8세기 대중문학인 서간소설이 인권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책이 출간될 당시 공통적인 광고 문구였다. 그에 따르는 책의 소개도 대부분 서간소설의 유행과 인권관념에 대한 것이었고. 그러나 그에 대한 내용은 이 책의 첫 부분에서만 다룬다. 책 전체를 파악하려면 그보다 다음의 이 부분을 보는 것이 낫다.
노예제와 대인 종속, 그리고 자연법칙처럼 보이는 굴종에 기반한 사회에 살던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그들과는 다른 인간을-경우에 따라서는 여성마저도-동등한 존재로 상상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권리의 평등이 별 그럴듯하지 않은 장소에서 ‘자명한’ 진리가 되었는가? (p.23)
린 헌트 교수는 자명성의 요구가 인권의 역사에서 핵심이라고 믿고 어떻게 그러한 확신이 18세기에 생겨났는지 설명한다. 그런데 ‘자명성’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인권을 당연시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책을 끝까지 다 읽도록 그 의미가 착 달라붙게 와 닿질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원서를 찾아서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인권이 왜 자명해져야 하는가는 이 책의 서론에서 이미 답이 나왔다.
인권은 개념 정의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이성만큼이나 감성에 의존하고 있다. 인권에 대한 자명성의 요구는 궁극적으로 감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내면을 움직여 확신을 갖게 한다. 인민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그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옮음과 그름을 아는가에 관한 일련의 확신들 말이다. (p.33) 미국의 인권선언, 프랑스 혁명은 18세기에 무르익은 인권사상으로 개인의 내면에 강한 확신이 있었을 때 비로소 가능했으며 그 확신이 약해졌을 때 19세기의 악랄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렸다고 생각된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인권침해로 공포를 느낄 때 비로소 인권이 문제가 되었다. 18세기 인권혁명기에 인권의 요구가 인권감수성을 일깨움으로서 혁명이 시작되었다면 20세기 세계인권선언으로부터 시작된 인권분위기는 세계대전으로 인한 공포로 비롯되었다.
옮긴이의 번역에는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다. 직역이 너무 심해 두어 번 곱씹으며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되는 문장을 서너 번 만났지만 글의 흐름상 대충 넘어갈 수 있었다. 번역에 대한 나의 까탈스러움에 걸린 문장들 중 기억나는 것 몇 가지.
서한소설에서 행위의 밖과 저 위에 있는 권위적인 관점은 없다.(p.50)
‘서한소설에서 전지적 작가시점은 없다’라고 하는 편이 더 간결하고 명료하다. 전지적 작가시점은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국어시간에 시험문제를 풀기위해 누구나 배우는 용어로 어려운 말도 아니다.
‘국부론’(1776)의 저자이자 허치슨의 제자인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를 동정의 문제에 바쳤다(p.77)
자신의 책을 어떤 문제에 바치다니? 조공을 바치는 것도 아니고...한국말에선 이런 표현 안 쓴다. 어떤 영어단어를 이렇게 번역했는지 의심되는 단어가 몇 개 떠오르긴 하지만 이렇게 번역한다고 더 정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에서 동정의 문제를 다뤘다’라고 하는 편이 낫다.
지은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책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다니. 읽는 내내 깜짝깜짝 놀랐다. 생각해보면 세계인권사상사를 쓴 미셸린 이샤이도 여성이었지만 특별히 여성의 문제가 도드라진 부분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인권 침해를 당했던 여러 그룹-흑인 노예, 유대인, 노동자 등등-의 예를 들면서 어떤 순간이든 ‘그러나 여성은’하고 한 번 더 덧붙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억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신교도 남성들은...유대인 남성도...흑인 남성들은...정치적 권리를 얻었다...(중략)..이처럼 이전에 시민권을 박탈당한 집단의 경우에도 정치적 권리가 상상하기 힘들 만큼 확대되었으나 여성은 그 선을 넘을 수 없었다. 여성은 혁명기에 결코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동등한 상속권과 이혼의 권리를 획득했다. (p.171)
이 책에는 ‘상상가능성’이라는 용어도 여러 번 나온다. 예를 들면,
1789년 말까지는 무시할 수 없는 수의 의원들이 배우, 사형집행인, 개신교도, 유대인, 자유 신분의 흑인, 그리고 빈민마저도 시민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상상 가능성 등급을 계속 조정했음에도 여성의 평등한 권리는 남녀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이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았다.(p.195)
거의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로 남았다고 표현해도 될 텐데 상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상황설명을 더 명료하게 하려고 그런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받아들인다’는 표현을 쓰면 더 익숙하고 이해가 빠르긴 하지만 조금 굴욕적(?)인 느낌도 든다. 권리란 누군가가 ‘받아들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나 붓다와 같은 성인군자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타 집단의 권리를 대신 찾아주지 않았다. 붓다조차도 예수에 비해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상상 가능성이라는 용어는 결코 수용 가능성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이라는 바로 그 관념이 부지불식간에 더욱 악의적인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포문을 열었다(p.215)
과연 그럴까? 악의적인 성차별, 인종, 반유대주의의 포문을 연 것은 인권이 아니라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시민들의 관념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인권침해에 짓눌려 있던 인민들의 인권의식이 깨어났던 것처럼 이 같은 인권의식으로 인해 인권침해할 권리가 침해당한 다수의 권력자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인권을 침해당해온 민중들이 아주 작은 인권의 획득으로도 기뻐하고 잠시나마 숨을 돌리는 것처럼 아주 당연하게 인권을 침해해왔던 가진 자들은 조금만 그 편의를 빼앗겨도 크게 분노한다. 자기 재산의 일부를 투자하고 거짓말을 만들어내서라도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지은이의 말처럼 18세기의 서간소설 등으로 인해 시민들의 인권의식은 크게 고양되었고 인권 팜플렛이나 서적들도 많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인권사상의 태동을 그것만으로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그 중 하나를 미시사적 관점으로 바라보았다는 의미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