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읽는 묘미는 작가가 고안한 트릭이 풀릴 때,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빈틈없이 맞춰지는 그 쾌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마술처럼 트릭도 진화하지 않으면 트릭만으로 독자들을 오래동안 사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치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들에게도 용의자 X의 헌신 같은 초절정의 트릭을 맛 본 다음에야 어지간한 트릭은 놀랍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의 책이 매 작품마다 매력을, 아니 마력을 잃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에 감싸져 있는 살인의 동기에 대한 탐구 때문일 것이다. 매 작품 마다 종장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범행의 동기와 그 이면의 심리적 배경이 마음을 울리며, 다음 작품을 읽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준다. 이러한 점이 그의 후반부 작품들을 단지 추리소설 작가의 작품으로만 구분지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숙명은 그의 필력이 한창이던 시절의 작품인데, 이후 쓰여진 라플라스의 마녀나 악의에서 엿볼 수 있는 과학적 소재와 심리묘사로 유명한 명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추리소설의 대가인 그에게 끊임없이 진화하는건 트릭이 아니라 소재의 폭과 더욱 진해지는 인간내면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