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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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처음 마주한 죽음은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그 때 난 엄마 뱃속에 있었고, 물론 아무 것도 몰랐겠지만, 내 안에는 어쩌면 그 때 무언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그 때 난 겨우 세 살이었고 역시나 무슨 일인지 잘 몰랐겠지만, 또 다른 어둠이 생겼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죽음은 고모의 죽음이었다. 병약했던 고모는 제대로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고 약국만을 전전하다가 젊은 나이에 어린 사촌 동생을 남겨두고 떠났다. 초등학생 때여서 기억이 나는데, 고모를 무덤에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어른들이 슬픔을 이기려는 듯 일부러 우스운 이야기들을 하며 우는 듯 웃었다.
내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였다. 어린 시절 외가에서 종종 지냈던 나는 아기 때 외할아버지가 안고 우유를 먹이기도 했다. 그랬던 외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난 고민이 많아지고 죽음이 무서워졌다.
가벼운 필치의 만화 작품으로 유명한 마스다 미리의 <영원한 외출>은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기 조금 전부터 다시 일상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한 어조로 그렸다. 그의 유명한 만화와는 결이 다른 에세이이다.
어린 시절의 가족과 친척들의 죽음이 내게 어느 정도의 어둠을 드리운 반면, 마스다 미리는 일상 속에 은근히 스며드는 가슴 속 구멍을 이야기한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마트에서 발견할 때. 아버지가 언제 한 번 가보자고 했던 여행지가 생각날 때. 엄마와 TV를 보고 있으면 이런 저런 음식을 드시고 싶다고 하며 엄마를 주방으로 이끌던 아버지의 방해 공작이 없는 명절을 보낼 때.

한동안은 그 구멍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슬펐다. 그것은 추억의 구멍이었다. 구멍 주위에 침입방지 철책이 있어서 안으로는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얼마간 서 있다가 침입방지책을 넘어서 구멍 속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런 일도 있었지, 저런 일도 있었지. 한 칸 한 칸 내려가면서 그리워하고, 후회한다.
눈물이 끓러오르기 전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움과 후회를 반복하며 조금씩 깊이 내려가면 한동안 구멍 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게 된다.
(p. 155)


마스다 미리의 아버지는 암을 발견하고도 병원 입원을 거부하고 집에서 치료했다. 그는 종종 본가에 들렀고, 아버지에게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다. 같이 어묵을 사러 가서 아버지가 사 준 어묵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마스다 미리에게 사 준 것이 되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나 마지막 추억은 살아가는 내내 뇌리에 남는 것 같다.
집에서 치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잠에 들듯 숨을 거두었다. 서둘러 본가에 내려간 마스다 미리는 아버지와 단둘이 방에 남아 손을 포개고 한참을 울었다. 애도의 시간이 지나간 후 장례라는 큰 일을 마주했고, 유품 정리가 남았다. 마스다 미리는 아버지가 어묵을 사 줄 때 가져갔던 동전 지갑을 기념으로 챙겼다. 나머지는 모두 처분했다. 그러나 추억을 잃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 경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외가집이 없어졌다. 그 작은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서글펐지만, 내 마음 안에는 거기서 보냈던 유년시절의 기억이 살아있다. 지금도 지하수를 끌어올려 받아놓던 그 집의 뒷마당이며, 불을 피우던 부뚜막이 있는 흙으로 지은 작은 부억이 선명히 떠오른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죽음을 마주해야 했던 내게는 앞으로도 또 다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 수록 내가 알았던, 그러나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만 간다. 지금까지보다 더 두려운 죽음들이 남아있지만, 그 때가 된다면 마스다 미리처럼 마음껏 애도의 시간을 갖고, 그 죽음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일상 속에서 담담히 마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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