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 - 지금 준비해야 할 문해력의 미래
김성우 지음 / 유유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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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 읽기와 쓰기의 생성(generation)을 다시 생성(becoming)하다:

《인공지능은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를 읽고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회변화는 물론 경제기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면서 교육분야도 예외없이 배우고 익히는 학습과정을 촉진시키는 교수학습 패러다임을 흔들어놓고 있다. 문제는 인공지능 기술이 가져올 기술결정론적 변화에 주목한 나머지 장밋빛 미래를 예측하거나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적 리터러시를 배울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공지능이 몰고오는 변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영상이나 이미지가 대세인 시대, 텍스트를 읽는 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리터러시의 방향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했던 김성우 저자가 이번에는 《인공지능은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를 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일과 학습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려는 관련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시기에 인공지능과 함께 하는 읽기와 쓰기의 변화, 더 나아가 인공지능이 바꿔나가는 리터러시의 의미를 비판적로 재조명하는 책이라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책과 눈이 맞으면 단순히 읽었다고 하지 않고 읽어버렸거나 읽고말았다는 고백을 망설임없이 하게된다. 인공지능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지금 여기서의 우리들의 삶을 성찰해보고 읽고 쓰는 창작의 본질적 의미가 인공지능이 관여되면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문해력을 개인적인 역량으로 간주하지 않고 관계론적 역량으로 재해석한다. 문해력은 “개인의 머릿속에 쌓여 있는 정적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역동적 실천”(51쪽)이자 “특정 공동체와 조직에 분산되어 있고, 상황에 따라 새롭게 조합되며, 구성원들의 문해력 발달과 전인적 성장을 돕는 집단의 역량”(51쪽)이다. 문해력에 대한 이런 재정의와 재해석은 인공지능을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나 기술을 익혀 일의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제고하는 기능적 리터러시를 넘어 인공지능이 일상적 삶은 물론 사회경제적이고 생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근원적으로 살펴보고 자신을 둘러싼 관계적 변화에 날선 관점으로 바라보는 비판적 리터러시와 성찰적 리터러시로 새롭게 개념변경을 요구한다. 개념이 변경되어 재개념화되면 감춰진 세상이 새롭게 열리고 그 개념이 품고 있는 세계를 이전과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개념은 자기생각과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기도 하다.

 

질문을 바꾸면 관문도 바뀐다

 

저자는 우선 질문부터 바꾸자고 제안한다. 인공지능 시대 어떻게 하면 기술진화 속도를 따라잡으며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부가가치를 드 높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질문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다. 즉 지금 여기서 우리는 읽고 쓰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나 리터러시 생태계의 근본적 변화 속에서 읽고 쓰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어떻게 잘 돌 볼 수 있을까로 바꿔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를 활용하는 접근논리는 혁명적인 전환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내느냐가, 하루를 어떻게 읽어내고 기록하느냐가, 어떤 이야기를 건네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느냐가, 어떤 삶의 가치를 지켜내느냐가 시대를 선언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보다 더욱 긴급하고 중요하다는 사실”(59쪽)을 강조한다. 인공지능의 몰고올 미래에 대한 준비를 강조할수록 과장된 메시지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과거에 대한 암묵적 망각이 은밀하게 강조되는 사이에 현재는 언제나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그럴 때마다 기술적 탁월성이 끌고가는 화려한 변화의 그림자에 파묻혀 기술적 영향력으로 생기는 본질적 변화의 뒤안길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물론 질문이 중요하지만 좋은 질문을 던져놓고도 이에 대한 대답의 질적 속성을 판단하는 심미안적 안목이나 비판적 사유 능력 없이는 좋은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인지를 알 수 없다. 좋은 질문은 자신이 관심을 두는 분야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갖추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는다. 전문지식의 깊이는 물론 배경지식의 넓이가 확보되어야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질문은 일방적이지 않다. 좋은 질문, 날카로운 질문, 뜻밖의 질문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갖추는 독립적인 역량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주변 상황과 만나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며, 전문지식이나 배경지식과의 부단한 대화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정곡을 찌르거나 전반적 상황을 정리하면서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질문을 던질 수 없다. 질문은 탈맥락적 공간에서 단순히 질문 주체의 호기심이나 열정만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 질문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질문하는 방법이나 기법을 가르치는 경우, 생각만큼 개대했던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이유는 질문은 기법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지식과 배경지식의 심오한 깊이와 풍부한 넓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질문은 독립적인 공간에서 외로운 탐색의 결과 생기는 개별적 호기심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적 화두의 태생적인 배경이나 사연을 기반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역동적인 관계망 속에서 잉태되는 사회적 합작품이다. 즉 질문은 개인의 독립적 역량의 산물이 아니라 질문을 장려하고 촉진하는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관계론적 역량의 부산물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현실 속 인간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평균으로 수렴되지 않는 개성과 몸 그 자체이며, 다양한 사회경제적·정치적·기술적 특성을 지닌 구체적인 사람들”(25쪽)이 인공지능과 함께 어떤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미래 사회 변화추세나 기술발전 동향에 비추어 읽기와 쓰기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예단하기보다 “타인에 의해 선언된 시대에 규정당하기보다 우리가 희망하는 시대를 직조하는 읽기와 쓰기의 가능성을 탐구”(65쪽)하고, “저 먼 곳의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 정의하는 인공지능을 고민”(65쪽)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예를 들면 인공지능 시대에 질문이 중요하다는 주장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과연 질문만 잘하면 우리가 원하는 답을 찾아낼 수 있는지를 다시 질문을 던져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프롬프트로 질문을 잘 디자인해서 인공지능에게 요청한 답에 흐뭇해하면서 감탄사만 연발하다가 우리가 잃고 있는 읽기와 쓰기의 진면목은 무엇인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관점의 변화가 도구를 사용하는 습관과 관습도 파괴한다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을 결정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일상적 삶은 물론 사회경제적인 측면과 교육적인 측면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구적 관점에 비추어 본 인공지능은 양날의 칼처럼 사용자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두 얼굴을 지닌 실체로 인식된다. 저자의 인공지능에 대한 관점은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적 변화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다각적인 측면의 긍정적 순기능을 포함 역기능적 폐해나 한계 또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는 시각이다. 비판적 관점에 비추어 본 인공지능은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의 주체와 대상을 매개하는 인공물이나 도구의 중재(mediation) 개념에 주목하게 된다. 작가(subject)가 인공지능이라는 중재도구(mediational tool)를 활용하여 책이라는 대상(object)을 만들어 낸다. 중재도구인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혁신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고, 그걸 어떤 목적으로 누가 사용하는지에 따라 효율적인 창작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관점은 인공지능이 읽기와 쓰기에 미치는 리터러시 전반에 대한 사회문화적이고 교육적인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려는 노력이다.

 

“인공지능이 중재하는 행위·의미·관계가 각자에게 어떻게 이해될지, 나아가 그 사회적 영향이 어떠할지는 예측하거나 일반화하기 힘듭니다”(343쪽). 인공지능이 바꾸는 미래가 독립적 인공지능 기술이 주체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회문화적 관계맺음 방식의 변화이자 경제적 생산양식의 근본적인 전환에서 비롯된다. 교육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교육과 노동의 생태계 속에 새로운 비인간 존재가 자리를 잡아갈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새로운 도구를 얼마나 잘 활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새로운 비인간 존재와 공존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법을 고민하는 일”(393쪽)이다. 인간만 주체적인 학습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발상에서 벗어나 인공지능을 비롯한 수많은 비생명체도 인간 학습자는 물론 다른 비생명와의 관계에 서로 다른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로 파악할 때 인공지능이 포함되는 새로운 학습생태계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 인간 학습주체의 주도적 학습능력은 한 사람의 외로운 노력으로 생성된 산물이 아니라 인간 학습자와 직간접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창발적 상호작용 덕분에 생긴 부산물이다. 인공지능은 물론 주어진 환경이나 맥락적 조건이나 변수들의 우발적 마주침과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예기치 못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계획에 없었던 새로운 의미가 탄생되고 뜻밖의 놀라운 문장이 단어들의 갑작스런 만남으로 건축되기도 한다.

 

사람의 언어는 침묵이자 주저함이고, 끝맺지 못한 문장이자 떨림이며, 푹 숙인 고개다

 

프롬프팅 디자인만 잘 하면 인공지능을 마치 나의 수족처럼 사용하면서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장된 주장을 주변에서 자주 만난다. 프로픔팅 엔지니어링이 앞으로 각광받는 새로운 분야라고 하면서 미래 인재의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으로 손꼽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과연 그럴까”라고 갸우뚱하면서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프롬프팅으로 인공지능을 통해 텍스트를 생성하는 것이 읽기-쓰기의 본령을 저버리는 일은 아닐까요? 우리가 글쓰기에 마음과 정성을 쏟는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뚝딱 던져줄만한 텍스트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신속한 텍스트 생산의 과정에서 종종 잃어버리는 생각의 결·세심한 느낌·새로운 관점을 찾기위해서는 아닌가요?”(267쪽). 텍스트는 한 사람이 몸담고 있는 컨텍스트에서 주체적인 고뇌와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경험과 생각을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는 과정에서 탄생되는 인고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를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효율로 급조할수록 나의 주체적인 생각과 열정적인 문제의식이 담긴 텍스트는 실종되기 시작한다.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던져 얻고 싶은 텍스트를 생성할수록 “인공지능을 통한 ”흐릿한 읽기“나 ”뭉뚱그리는 쓰기“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저자와 자기 사이를 깊게 파고드는 읽기·경험의 박동과 손끝의 떨림을 새기는 불가능”(267쪽)한 까닭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지 않는 다양한 사람은 저마다의 컨텍스트에서 나름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갖고 기대하거나 의도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쟁같은 하루를 보낸다. 신체성이 삶의 현장성을 만나 일어나는 구체성의 글쓰기는 이미 공식화된 프로세스대로 정해진 단어를 배열해서 문장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다. “인간은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자리에 놓기보다 단어들 사이를 유영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끝없이 재정의하며, 그들을 시시각각 재배치”(130쪽)하는 와중에 문장을 건축하는 노동자다. 사람의 글쓰기는 자신이 겪어본 경험을 통해 생긴 감정이나 생각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내는 단어를 고르고 배치한 다음 다시 고민하며 알맞은 단어들이 알맞은 곳에서 자기 본분과 역할을 수행하며 작가가 쓰고 싶은 의도를 반영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한다. 이때 기존 단어가 다른 단어로 바뀌기도 하고 단어의 배열이 바뀌어 이전과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언어는 자신이 겪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단어 선택에 따르는 고뇌나 망설임도 없다. 그저 수학적 알고리듬에 따라 통계적으로 정확한 단어를 선택, 필요한 위치에 처방할 뿐이다. 인공지능의 언어는 정확하고 매끄럽고 깔끔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어떤 단어를 어느 곳에 배치해야 되는지, 그 자리에 그 단어가 적합한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망설이며 주저하는 끈질긴 자기와의 싸움은 생략되어 있다.

 

인공지능의 언어에 고뇌하는 사람의 깊은 심리적 아픔이나 선택적 의사결정에 따르는 사고와 언어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쓴다는 것은 기계적 단어 선택과 통계적 처리의 문제가 아니다. “삶에 뿌리박은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웹상의 방대한 빅데이터가 아니라, 여태껏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지금 자신이 발딛고 있는 자리에 맞는 적확하고도 온기를 담은 언어”(131쪽)다. 이때 인간이 선택하는 언어는 “침묵이고, 주저함이고, 끝맺지 못한 문장이고, 떨림이며, 푹 숙인 고개(132-133쪽)다. 사람이 선택한 단어에는 그 사람이 겪어온 삶의 깊이와 넓이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있고, 결연한 용기와 멈출 수 없는 열정이 숨어 있으며, 통제 불가능한 감정이 단어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더욱이 사람의 글쓰기에는 글을 쓰는 주체는 물론 그 사람이 지향하는 또 다른 사람이나 사물은 물론이고 그 글이 탄생하는 상황적 맥락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담아 표현하려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사고와 언어의 유기적 결합”(135쪽) 또는 “텍스트와 사고가 변증법적으로 엮이는 과정”(136쪽)이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바로 기계적 글쓰기와 인간적 글쓰기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인공지능은 정보처리 기계이자 통계 엔진이다

 

“세계는 인간의 몸으로 끊임없이, 예고없이,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스며들고 침투”(143쪽)하면서 “인간은 세계와 만나면서 몸을 변형시켜 나갑니다. 하지만 기계학습은 이런 몸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습니다”(123쪽). 사람은 몸으로 겪어내며 땀을 흘리지만 인공지능은 자신이 직접 겪어본 경험적 스토리가 없고 자기만의 서사도 없다. 땀을 흘리지 않는 “인공지능은 기계학습을 통해 다양한 데이터를 배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도 느낄 수가 없지요”(123쪽). 몸으로 느끼는 감정의 변화가 없는 인공지능은 자기만의 서사도 없고 언어도 없다. 인공지능의 언어는 주어진 문맥에 따라 몸이 감각하는 대화와 소통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변화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내뱉는 관념적인 머리의 언어다. 100% 다른 사람의 정보를 편집하고 가공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생성해서 보여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인공지능은 통계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개체(145쪽)이자 ”일종의 통계엔진이지 세계에 대한 설명과 논리적 추론을 하지 못한다”(107쪽). 수학적 알고리듬에 따라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나 생산성은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를 정도로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기계 학습을 통해 정보를 대량 생성한다.

 

인공지능은 쑥맥이다. 쑥맥은 눈치를 보지 않는다. 자신이 던진 메시지를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이해하는지를 알아치리지 못하고 사전에 알고리듬으로 짜여진 각본대로 말한다. 대화형 인공지능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인공지능이 수행하는 대화는 발화행위가 아니다. 주어진 맥락에 따라 시시각각 반응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의도나 의미를 주어진 상황적 맥락에 따라 바꿔나가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해나가는 사람이 대화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다. “너 물 먹었니?”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 의미가 목이 말라서 진짜 물을 마셨는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질문인지, 아니면 극심한 경기침체로 회사마다 구조조정을 하면서 인원은 감축할 수밖에 없어서 정리해고당했는지를 물어보는 질문인지를 인간은 알아차린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Did you drink water?”라고 번역해서 말할 뿐이다. “적확한 단어의 선택은 이전 텍스트를 적절히 이해할 때 가능(155쪽)한 까닭이다. 인간의 모든 텍스트는 컨텍스트의 산물이기에 컨텍스트가 달라지면 동일한 텍스트도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된다.

 

“인간은 과거의 데이터가 보여주는 압도적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언어를 새롭게 주조하는 이해”(156쪽)를 보여주면서 타성에 젖은 언어, 점성으로 달라붙은 습관적인 언어 사용 방식에서 벗어나 아직껏 사용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해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시시각각으로 입력되는 외부의 신호나 기호, 사건과 사고의 의미를 보다 적확한 언어로 번역하면서 어제와 다른 문장을 건축하고 의미를 찾아낸다. “기계가 과거의 축적으로 현재를 인식한다면, 인간은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로 가는 자신을 끊임없이 인식하며,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잠재의 세계에 천착하는 경향”(156쪽)을 보이는 이유도 계획된 각본이나 전통적인 매뉴얼에 따르는 습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의 가능성과 능력에 안주하지 않고 어제보다 나아지려는 욕망이 새로운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끌어당긴다. 마치 밀개와 끌개가 서로 밀고 당기면서 인공지능과 다르게 인간은 경험과 언어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면서 삶의 얼룩을 무늬로 변신시키는 부단한 수고와 정성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속도의 생태계가 읽기와 쓰기의 밀도를 잡아 먹는다

 

“인간은 깊이의 존재라면 인공지능은 너비의 존재”(114쪽)다. 수직적 깊이를 추구하는 인간의 사유체계는 수평적 확산 측면에 비추어 보면 인공지능을 능가하기 어렵다. 인공지능은 프롬프트 명령을 받는 순간 수평적으로 데이터를 검색, 선별, 편집, 가공해서 연결성이 높은 단어와 문장을 기계적으로 학습한다. 너비의 존재인 인공지능은 읽기와 쓰기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종래의 글쓰기를 구성하는 ‘읽기→쓰기’의 방향성은 생성형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에서 ‘쓰기→읽기’로 변화”(192쪽)된다. 뭔가를 쓰려면 읽어야 된다는 전통적인 창작의 발상이 인공지능 기반 쓰기에서는 무너진다. 특정 주제와 관련된 글을 쓰려면 글감을 확보하거나 색다른 발상의 전환을 위한 다양한 관련 자료를 읽어야 하지만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에서는 프롬프트로 명령을 주면 입력된 주제와 관련해서 순식간에 글을 써서 보여준다. 그 글을 읽으면서 수정 보완 명령을 입력하는대로 글을 대신 써주는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 방식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면 어떤 문제나 한계가 노정될까. 읽지 않고 대신 인공지능에게 글을 써달라고 명령할수록 “타인의 글을 하나하나 읽고 무엇을 배울지, 저자의 핵심의도가 무엇인지, 자신의 글에 어떻게 녹일지를 궁리하는 동안 우리는 타인의 경험과 지식·생각과 마음을 탐험”(193쪽)하는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또 다른 문제는 긴 글이나 두꺼운 책을 읽고 요약하고 정리하는 능력도 인공지능에게 아웃소싱할수록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을 선별하는 판단능력도 없어질 뿐만 아니라 복잡한 생각의 핵심과 정수를 끄집어 나의 생각과 언어로 정리하고 구조화시키는 사고 능력도 실종될 수 있다.

 

“휘몰아치는 속도를 잠재우고 반짝이는 눈으로 세계와 대면하고 자신을 돌보며 위로하는 읽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199쪽). 미디어가 주도하는 삶의 속도변화를 감당하거나 통제하지 못하고 떠밀려 내려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가공한 정보에 휩쓸려가고, 다른 사람이 요약하고 정리한 결과물에 중독되어 나만의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침묵과 숙성의 시간을 갖기 어렵다. “심장의 울림·마음의 떨림과 텍스트를 읽는 일이 공명할 수 없을 때, 필자가 펼쳐 놓은 복잡다단한 감정의 지형과 미묘한 사건의 전개가 독자가 구획하는 좋아요/싫어요·재미있어요/지루해요의 이분법 속에서 말끔하게 삭제될 때”(199-200쪽) 삶과 교육이 중심을 잡고 만들어가는 리터러시의 진정한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속도의 생태계”가 숙고하면서 사색하는 읽기와 쓰기의 시간을 잡아먹을수록 “각각의 속도는 읽기와 쓰기의 밀도에 어떠한 영향”(201쪽)을 주는지를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생산성이나 속도가 구체적인 삶에 뿌리박고 전개되는 읽기와 쓰기의 밀도를 대체하는 심각한 위험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은 생성(becoming)없이 생성(generation)한다

 

“생성(becoming)없는 생성(generation)의 확산을 경계”(69쪽)하거나 “‘되기’ 없이 ‘만들기’에 골몰하는 사회·체화 없이 외화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사회”(70쪽)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지 않으면 생성형 인공지능이 생산한 텍스트의 의미를 재음미하지 못하고 인공지능의 글쓰기는 글 쓰는 주체와 객체, 사고와 언어,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밀한 상호작용이나 변증법적 교섭을 통한 창발적 생성(becoming)없이 기존의 방대한 빅데이터 언어 창고에서 늘 새롭게 생성(generation)할 뿐이다. “생산성은 과정을 지우고 효율성은 가치를 압도하며 텍스트 생성 ‘마법’에 대한 경탄은 읽고 쓰는 노동의 기쁨과 슬픔(23쪽)이 희석될 수 있다. 과정에 투입되는 고뇌와 몸이 구체적인 현장성과 만나 땀으로 일궈가는 신체적 과정성이 방대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텍스트를 대량 양산하는 생산성을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컨텍스트와 무관한 텍스트의 허망함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본질을 보려는 눈을 가릴 것이다. 진정한 읽기와 쓰기가 이루어지는 경험과 언어의 유기적 순환을 끊어버리고 폐쇄적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된 텍스트를 편집해서 만들어내는 또 다른 텍스트가 글쓰기의 효율성을 대변할 때 느리고 더딘 비효율적 과정을 통해 땀과 눈물에 젖은 문장건축 노동의 진정한 의미는 실종되기 시작한다.

 

“이미 생산되어 있는 단어들의 연쇄가 담아내지 못하는 세계를 탐색하는 일의 가치”(474쪽)를 드높이고 “데이터화되지 않았던 세계를 텍스트화하는 작업, 즉 ‘world’(세계)에서 ‘word’(언어)를 이끌어내는 일의 중요성”(474쪽)을 더욱 강조하고 실천에 옮길 때 생성형 인공지능의 ‘생성(generation)’이 갖는 치명적인 한계나 문제점을 또 다른 ‘생성(becoming)’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릴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생성은 쓰기 전에 더 좋은 텍스트를 깊이 읽으면서 낭독도 하고,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어 노골적으로 다 보여주는 정보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삶으로 앎을 평가하고, 삶에서 몸으로 겪은 경험적 깨우침을 몸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고단하고 지루한 노동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생성(generation)’의 속도가 ‘생성(becoming)’를 압도할 때 우리들의 깊이 읽기와 신체적 신뢰성이 살아숨쉬는 에토스가 살아 숨쉬는 글쓰기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필요하다.

 

생성 속도가 이해 노동을 대체한다

 

“인공지능을 사용해 빠르게 글을 생성한다고 해서 해당 글의 내용을 우리가 체화”(341쪽)하지 않으면 나의 신념과 철학이 담긴 텍스트로 탄생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진공관에서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직조되는 논리적 사고과정의 산물이 아니다. 텍스트는 텍스트 생성에 관여되는 다양한 조건과 환경을 배경으로 도구나 기술이 매개되거나 사회적 관계 맺음 속에서 몸과 마음이 주어진 컨텍스트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체화 속에서 탄생되는 마주침의 산물이다. “텍스트를 벼리는 일은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고, 타인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자, 글을 읽고 써내는 일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고민”(418쪽)하는 의미를 띄는 까닭이다. “인간의 언어학습은 경험의 총체와 연관을 맺고 진행”(118쪽)되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의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거대언어모델은 텍스트, 즉 글을 통해 언어”를 배우기 때문에 “거대언어모델이 학습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경험 즉, 시간·공간·관계·주변환경과 물건, 온도·조명·소음·음악·상대의표정·말하는 사람간의 거리·제스처·몸의자세·이동·목소리의 질감과 크기·말의속도·키나 덩치등 대화 참여자의 신체적 특성 등을 포함하는 상호작용의 총체와는 거리”(119쪽)가 멀게 느껴지는 이유다.

 

“생성속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기술이 있더라도 이해를 위한 노동이 없다면 좋은 글을 탄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206쪽).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할수록 텍스트를 생성하는 속도가 빨라져도 생성하기 위한 읽기나 생성된 텍스트를 읽기의 속도를 기술로 가속화시킬 수 없다. 특히 저자가 숨겨놓은 의미의 껍질이 두꺼울수록 단숨에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곱씹어먹으면서 소화시키는 일정한 시간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주어진 텍스트는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심장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특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생성하는 인공지능의 노동 강도는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그 글의 의미와 가치는 물론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어진 데이터를 수평적으로 검색, 편집한 결과에 대해서도 윤리적 책임감도 없는 인공지능의 텍스트 생성은 과연 누구를 위한 생성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청산유수의 텍스트는 분명 인간의 언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없습니다”(418쪽). 텍스트 생성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지만 텍스트에 담긴 인간적 고뇌의 밀도나 강도는 점차 줄어들고, 텍스트 생성 기술이 발전할수록 텍스트에 담기는 컨텍스트의 복잡성이나 애매성은 거세된다.

 

인공지능의 텍스트는 결과(생산성)가 과정(성)을 삭제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작가되기의 조건, 즉 “작가의 형식적 정체성은 문법적 규준과 스타일적 상수들이 가진 굳건함의 밖에서만 진정으로 성립”(414쪽)한다는 말은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의 작가되기는 결격사유가 될 수밖에 없다. 문법에 맞는 스타일과 형식을 갖춘 문장을 무한 생성하는 인공지능의 텍스트에는 가장 중요한 에토스가 빠져 있다. 에토스는 작가가 살아오면서 몸으로 겪어낸 내공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고유한 품성이나 겉으로 봐도 믿음직스러운 신뢰성을 말한다. 즉 에토스는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냉철한 판단력을 지칭하는 신언서판(身言書判)과 비슷한 맥락을 품고 있다. 에토스는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생기지 않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나 미덕을 갖춘 최고 경지의 전문성을 지칭하는 아레테(arete)를 기반으로 발휘되는 선의(eunoia)가 만드는 합작품이다. 에토스가 살아 숨쉬는 텍스트에는 기존 텍스트를 모아 다른 텍스트로 편집하거나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나오지 않고, “쓰기를 언어와 세계를 씨줄과 날줄로 엮는 연대의 과정으로 볼 때라야 글은 삶이 되고 삶은 글”(435쪽)이 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나오는 윤리적 판단력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에토스가 살아 숨쉬는 텍스트가 생성되려면 기존 텍스트를 재구성하거나 분해 또는 조립하는 과정보다 “날 것 그대로의 삶을 텍스트로 ‘번역’해보는 작업”(436쪽)이나 “텍스트에서 텍스트를 낳는 기호적 전환이 아니라 비-텍스트에서 텍스트로 변신하는 존재론적 변환의 경험”(436쪽)이 축적되어야 한다. 자신의 일상이 살아 숨쉬는 텍스트의 텃밭에서 일어나는 우발적 마주침을 적확한 언어로 벼리는 과정에서 “기존의 노동을 삭제하고 경험의 체화를 축소하는 인공지능의 사용”에 반하는 저자의 집념과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드는 텍스트가 탄생된다. “결과가 과정을 삭제하는 경향 나아가 과정을 귀히 여기는 관점을 무시하는 습속의 강화”(453-454쪽)와 ‘생산성(productivity)’에 몰두하는 결과 중심 리터러시에서 벗어나 ‘과정성(processibvity)’을 강조하는 리터러시로 거듭날 때, 조금 부족하고 틀리더라도, 조금 느리고 답답해도 자세를 낮추고 사람과 삶이 말하고 싶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고단한 아름다움의 꽃이 필 수 있다.

 

“생성된 텍스트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해당 텍스트와 독자,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는다면 글이 우리 몸과 마음에 스미도록 하는 정성과 노동이 반드시 필요”(341쪽)하다. 몸과 마음에 스미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는 정보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파편화된 관념의 부산물일수 있다. “기본적으로 쓰기는 단어를 하나하나 고르고 세심하게 배치하는 일”(342쪽)이라면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텍스트는 글쓰는 주체의 고뇌에찬 결단과 결정이 만들어가는 배치의 산물이라기보다 거대한 언어모델이 논리적으로 조합해서 배열하는 자동화의 산물이다. 깊은 고심 끝에 단어의 배치를 순간적으로 바꾸면 생각지도 못한 의미의 연쇄가 갑자기 급습하면서 새로운 생각의 지도를 그리는 문장이 건축된다. 글쓰는 주체가 어떤 도구나 장비의 도움을 받아 어떤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창발적 상호작용을 거듭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텍스트가 얼마든지 탄생된다. 그 텍스트에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익숙한 단어의 낯선 조합으로 의미심장한 문장이 직조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연쇄가 언어적 점성과 관성을 깨뜨리고 또 다른 문장으로 건축되기도 한다.

 

 

인공지능의 텍스트는 결과(생산성)가 과정(성)을 삭제한다

 

지금 여기서 인공지능의 기술적 가능성과 도구적 효용성이 지향하는 생산성 담론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물론 한 개인의 독립적 역량으로 바라봤던 전통적인 리터러시 개념을 재개념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critical meta-literacy)를 제안한다. 전통적인 리터러시 관점의 관행적 사유를 되돌아보고, 속도의 생태계에 매몰되어 결과가 과정을 대체하는 생산성 담론을 비판적으로 탐색하며, 앎과 삶이 분리되어 따로 노는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 삶으로 앎을 생성하고, 살기와 읽기와 쓰기가 하나로 맞물려돌아가는 생태학적 리터러시로 나아가자는 주장이 바로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한 개인의 독립적 노고의 산물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공동으로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인공지능이 품고 있는 방대한 데이터는 수많은 개인과 조직이 오랫동안 축적한 수고의 댓가로 누리는 기술적 산물이자 다른 사람의 데이터를 일방적으로 탈취하여 독점 제품화시킨 자본화된 지식의 축적이다. 인공지능이 발휘하는 기술적 탁월성에 감탄한 나머지 인공지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태학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발전하는 기술적 정교함에 인간은 언제나 압도당하기 일쑤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광물과 에너지를 재료로 다종다양한 노동을 투입하여 만든 노동지능이며, 그런 노동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정성·궁리와 피땀·때로는 차별과 착취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식”(403-404쪽)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가 활성화될 때 리터러시를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다양한 조직과 자원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적 역량이자 관계적 행위로 재개념화시킬 수 있으며, 개별적 경쟁력을 표준화된 점수로 측정하고 평가하는 인간 중심적 담론에서 벗어나 윤리적이고 생태학적인 성찰을 기반으로 다양성을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비인간도 포함되는 행위자 네트워크 개념으로 재정립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는 “우리 몸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다른 몸과 동식물 그리고 대지와 바다를 어떻게 대하는가·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변화하는가로 증명”(498쪽)된다.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는 기술발전의 속도와 능률복음이 전하는 달콤한 미래의 손짓에 몸을 맡기지 않고, 인공지능 기술이 매개하는 구체적인 일상적 삶의 방식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읽기와 쓰기의 본령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 역사적 경각심의 발현이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려는 자본의 유혹적 메시지가 담고 있는 권력의 원형을 비판적으로 조명해보고, 지금 여기서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변화 양상의 근본적인 동인을 파헤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일상의 작은 변화에 주목하며, 몸으로 읽고 쓰며 나누는 생명의 연대망을 구축하자는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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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4-08-08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럽게 써주신 리뷰를 읽고 도서 구매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청년 택배 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김희우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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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덕분에 누리는 인생의 ‘축배’, 그 고마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진정한 ‘대인배’다

《청년 택배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를 읽고

 

“모든 삶은 물류다. 오늘도 배송 완료.”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택배는 아무래도 주문한 책을 집으로 배송받는 서비스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면 빠르면 그 다음 날 새벽에 택배로 받을 수 있고 늦어도 2-3일 이내에는 원하는 책을 받아보는 순간의 기쁨도 누군가 대신 책을 배송해준 덕분에 누리는 일상의 작은 행복이다. 택배가 도착한 문 앞의 그 책과의 첫 만남은 언제나 설레는 가장 심장 뛰는 순간 중의 하나다. 만약 물류가 없다면 세상은 하루 아침에 정체된 상태로 주어진 장소에서 자가생산과 소비를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근본적인 경제체제를 전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상이 펼쳐질 것이다. 배송 완료된 그 택배 덕분에 나는 그걸 기반으로 내 삶의 또 다른 일상을 누리는 행복을 만끽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금까지는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다.

 

택배 기사 덕분에 내 삶에 경배하는 삶을 살다

 

《청년 택배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는 한 젊은 친구가 우여곡절 끝에 택배 기사를 하면서 겪어낸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고뇌로 풀어낸 택배 기사 사투기다. 누군가에게 택배는 부르면 앉아서 편하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배송 시스템의 한 부분이지만 그걸 직접 수행하는 택배 관련 관계자들에게는 땀으로 얼룩진 고된 육체노동을 대가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먹고 사는 고귀한 실천이다. 그들에게 택배라는 단어는 일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고, 인간사의 음양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면서 엮여나가는 자기 삶의 내러티브다. 택배를 직접 몸으로 수행하는 택배 기사와 택배 기사의 고된 노동 덕분에 소소한 행복감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택배라는 단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강도와 의미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배송완료 메시지 뒤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땀이 흐른다.” 배송이 완료되기 까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에게까지 도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와 정성이 담겨 있는지를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자본주의의 속성상 많이 생산해서 소비자의 구매욕구와 소비 욕망을 자극, 보다 많이 팔면 되는 경제논리에 매몰된 나머지 내가 먹고 사는 과정에 관여되는 수많은 노동의 대가가 과연 얼마나 깊은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모두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중심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의 속도와 효율, 목표와 성과를 비롯 능률복음에 물들어 살면서 내가 누리는 지금 이 순간의 작은 행복을 만들어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와 노동의 대가를 잊어버리고 산다.

 

복잡성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마트에 가서 쇼핑을 하기 위해 입구에 정렬된 카트를 끌고 쇼핑을 한다. 쇼핑을 마치면 주차장에 카트를 버리고 가거나 일정한 장소에 놓고 간다. 거기에 아무렇게나 놓인 카트는 다시 아르바이트생이나 해당 직원들이 다시 마트 입구에 가지런히 정렬해놓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편리하게 쇼핑을 하는 과정에는 내 대신 누군가가 힘들고 복잡한 노동을 대신해주는 수많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스며들어 있다. 내가 경험하는 단순함이나 편리함은 나 이전에 누군가 복잡하거나 불편한 고된 노동 덕분에 누리는 행복이라는 점을 알면 사회는 더욱 인간적인 정이 오고가는 따듯한 공동체의 연대가 생길 것이다. 택배를 거의 매일 같이 이용하면서도 그 택배로 인해 내가 느끼는 일상의 작은 행복이 누구 덕분인지를 잠시라도 생각해본다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흔적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기적의 감동적인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단어에는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실려있다

 

나에게는 ‘용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수많은 감정의 기복이 희로애락의 곡선을 타고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 단어에 담긴 내 삶의 흔적과 얼룩이 의미를 머금고 무겁게 짓누르는 단어가 바로 용접이다. 단어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향기를 머금고 있다. 용접으로 회색빛 청춘을 보내고 용접으로 일생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운명과도 같은 단어였기에 용접이라는 단어를 저울에 달아보면 내 몸 속에 잠복근무하고 있는 단어 중에 가장 무거운 중력을 지닌 단어다. 그만큼 회색빛 청춘을 용접과 함께 보내면서 용접이라는 개념은 관념의 파편으로 떠돌아다니지 않고 고달픔 속에서 내 삶의 신념을 잉태한 아픔의 단어였다. 폭염을 능가하는 전기용접의 불꽃 온도를 몸으로 겪어냈던 한 여름의 용접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등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고 가슴팍을 휘저으며 끝없이 흐르는 땀의 정체는 내가 느끼는 용접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적어도 나에게 용접은 용접봉으로 철판을 녹여 붙이는 접합 행위를 넘어선다. 나에게 용접은 젊은 날의 방황과 고뇌가 목적지를 상실하고 뜨거운 쇳물 속에서 하염없이 녹아내리는 혼절(昏絶)에 가깝다.

 

고된 택배 노동을 통해 하루치 삶을 견뎌내고 그것으로 젊음의 낭만과 청춘을 상쇄시켜 비루한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택배 기사의 책에서 택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택배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실감(實感)으로 다가오지 않고 체감(體感)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저마다 다른 택배의 무게를 고스란히 자신의 몸으로 나르면서 흘리는 눈물과 땀의 얼룩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역시 택배를 평소에 많이 활용하는 한 사람으로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을 때 무턱대로 택배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이야기 했던 순간이 떠올라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다. 한 사람에게 택배는 내가 겪어낸 용접만큼이나 인생에서 고단함의 무게가 고스란히 박혀버린 가장 무거운 의미로 온 몸에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다

 

택배가 오늘 몇 시쯤 도착할 예정이니 배송 장소를 저장해달라는 메시지가 올 때 언제나 나는 문앞이라고 저장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택배기사 입장에서는 문앞보다 경비실이나 1층 택배 보관 장소로 저장을 해야 택배 기사는 보다 많은 택배물건을 배송할 수 있고, 그 결과로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겠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뒤늦은 후회를 한다. 수백개의 택배를 주어진 시간 안에 배송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에는 언제나 심리적 압박감과 가중되어서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를 앞두고 발걸음은 언제나 더욱더 무거워질 수 있다. 오늘부터라도 택배 기사의 무거운 배송 노동의 일부라도 절감해주기 위해 문앞이 아니라 1층 경비실에 저장하는 문자로 답신을 보내면서 부가적인 메시지로 “오늘도 당신들 덕분에 행복합니다”라고 써놓고 싶어졌다.

 

《청년 택배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를 쓴 육체노동자 택배기사의 삶은 몸이 중심을 잡고 배송 서비스를 담당하는 기사지만 사실 그에 못지않게 정신노동의 비중도 생각보다 크게 차지하는 일상이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러니까 택배 기사 따위나 하지”라고 심한 갑질 발언을 한 어느 대학교수의 이야기를 들고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같은 대학교수지만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사람이 택배 기사의 고된 노동을 인정해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해도 되는지 한참 동안이나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새로 옮긴 주소로 쓰지 않고 예전 연구실 주소를 입력해놓고 왜 자기 택배가 안 오느냐고 정말 상식이하의 발언을 하는 갑집 고객 중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설을 퍼붓는 사람이 대학에 있다는 건 국가적 낭비이자 부끄러움이다. 그럼에도 측은지심으로 감싸안고 심하게 손상된 감정의 뒤안길을 어루만져 다시 힘을 회복한다. 그렇게 내면으로 그리고 밑으로 축적된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새로운 지혜가 싹튼다

 

웨이터 법칙이라고 있다. 웨이터가 와인을 따르다 실수로 고객의 옷에 와인을 흘렸을 때 두 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한 고객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매니저 나오라고 해, 너 해고될 수도 있다”는 폭언으로 웨이터의 실수를 꾸짖는 경우다. 또 다른 고객은 전혀 다른 반응으로 웨이터의 실수를 인정하고 오히려 자기 잘 못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제가 오늘 샤워를 안 하고 나와서 다행이다. 집에 가서 옷을 바꿔 있고 세탁한 다음 샤워도 같이 하면 더욱 상쾌해질 것이다.” 이런 말을 들은 웨이터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말을 듣고 얼마나 감사하면서 미안해할까. 자기보다 더 힘든 처지에서 일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는 비즈니스를 하지 말라는 게 웨이터 법칙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누리는 모든 경우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모든 경우 다른 사람의 힘든 노동 덕분에 우리가 누리는 행복한 순간의 연속이다.

 

《청년 택배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를 쓴 김희우 작가는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습관적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고객에게 불평불만의 소리를 들으면 잘못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찾는다. 내가 잘 못했으니 거울을 바라보면 반성하고 성찰하며 더 좋은 서비스를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작은 일의 성과나 실수도 늘 기록하고 반성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심판자의 질문을 던져 상대를 야단치거나 나무라지 않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이전과 다른 관문을 찾아 나선다. 대학교 총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기숙사에 배달되는 택배 분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CCTV를 설치해달라고 부탁, 분실사고를 혁신적으로 줄이거나 없앤 일이나 코로나가 한참 창궐할 때 비대면 서비스를 위해 1층에 택배를 배송하는 서비스를 설득 끝에 실현, 서비스의 질은 물로 효율도 함께 올리는 혁신적 사고를 몸으로 실천한다. 꾸준한 기록과 성찰이 기적을 부르고 통찰을 일으킨다는 점을 몸으로 보여주는 일상의 혁명가가 바로 김희우 작가다. 역지사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이처럼 세상을 움직이는 새로운 지혜가 싹튼다.

 

특별하지 않아도 대체불가능하게 특별하다

 

내가 잘 못했든 고객이 잘 못했든 항상 생각대로 풀리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고객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그 대안을 모색한다. 어제와 다른 시행착오를 해봐야 어제와 질적으로 다른 판단착오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의 관문을 열수 있음을 몸으로 실천하며 삶의 가치를 두 배로 올리며 다른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계영배(戒盈杯)다. 김희우 택배기사가 삶의 실천 덕목으로 몸에 배게 반복하는 미덕이 바로 계영배의 가치다. 계영배란 "잔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욕심과 탐욕이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이 가지고 있었다던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은 전체 술잔의 7할 이상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버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가득 채우려는 욕심을 포기하고, 즉 100%를 다 가지려는 탐욕을 내려놓고 최소한 30%는 나에게 도움을 제공헤준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라는의미다. 혼자 독차지하려다 가진 것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고, 술잔이 가득차는 지도 모르고 계속 술을 따르다 술이 흘러 방바닥을 채우는지도 모를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택배로 더 많은 돈을 벌수록 그걸 모두 자기 노력의 산물로 생각, 다 차지하려는 욕심보다, 내가 이렇게 돈을 벌 수 있게 만들어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공을 돌리는 미덕이 계영배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만족을 얻고 안주하는 방법도 인생을 살아가는 한 가지 대안이지만, 지금 여기서의 삶에 안주하는 순간, 더 이상의 성장과 발전은 없다. 지금 하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내 일을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질문도 많아지고 더 좋은 가능성의 관문도 열린다. 세상은 택배 기사가 매일 경험하는 것과 같이 생각보다 생각만큼 세상은 바뀌지 않고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 때 사람은 이전과 더 낮은 자세로 배우고 익히는 기회를 잡고,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할 수 있다.

 

“땀을 흘린 만큼 돈이 들어오는 정직하고 투명한 일, 나쁜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이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228쪽)이 택배라고 고백하면서 저자는 누구나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는 소중한 일의 의미를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택배는 인생 밑바닥을 기는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세상에서 자기 삶의 보배를 택배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는 저자의 겪어본 경험담이 몸을 파고드는 신체성의 메시지로 들린다. 생각만 해본 사람은 당해본 사람을 못 당한다. 직접 겪어본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등불을 밝혀주는 경전이다. 당해본 사람의 육체적 담론, 겪어본 사람의 신체성의 언어가 정처없이 표류하는 관념의 파편과 머리의 언어를 이긴다. 오늘도 택배를 통해서 인생의 축배를 들고 있는 김희우 작가가 고백하는 말, “나는 남들처럼 특별하지 않아도 특별”(228쪽)하는 수준을 넘어 대체불가능한 김희우의 원본대로 살아가면서 오늘보다 명랑하고 행복한 코나투스를 따라가는 멋진 도전 여정이 무한대로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땀을 흘린 만큼 돈이 들어오는 정직하고 투명한 일, 나쁜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이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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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예수 -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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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로 삶을 ‘증명’하기보다 삶으로 교리를 ‘증거’하다

《철학자 예수: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를 읽고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마음부터 불편한 경우가 많다. 내가 말하는 모든 주장이나 의견을 기독교라는 종교적 교리에 비추어 해석을 하고 평가하면 판단당하는 경험을 여러번 해본 당사자로서 기독교가 추구하는 진리관이 시공을 초월해서 올바른 삶의 원리로 작용하는지는 언제나 의문이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프레임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현 듯 느껴질 때마다 불편한 감정은 숨기기 어렵다. 진리에 이르는 단 한 가지 길만 존재하지 않듯이 저마다 믿고 따르는 신에게 이르는 길도 사람마다 다른 방법과 노선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획일화시켜 구원받기 어려운 존재로 해석하고 상대를 평가하는 시선이 이미 평범한 사람들의 사선을 넘은지 오래다. 사람은 뭔가 자신도 모르게 끌림이 생길 때 이성적 판단 이전에 끌림이 이끄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강남순 교수님의 이번 책, 《철학자 예수》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끌림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쉬지 않고 단숨에 빠져 읽어버렸다. 종교적 구원자나 메시아로서의 예수라고 했으면 끌리지 않았을 텐데, 예수가 철학자로 변신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상상하면서 책장을 넘기시 시작했다.

 

성서는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실천을 촉발하는 초대장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냥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책을 읽어버렸다”거나 “읽고 말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아타루는 자신의 책에서 책을 읽어버렸고 읽고 말은 이상 읽은 대로 생각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삶을 변혁하는 수단과 촉발점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책은 이처럼 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키는 수준을 넘어서 삶의 혁명을 이끄는 실천으로 이끄는 혁명의 촉발점으로 다가온다. Deleuze & Guattari(1980)가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는 책의 의미가 이 시점에서 의미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책은 일정한 의미를 품고 역사적으로 정체된 상태로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외부의 누구와 만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역동적으로 달라지는 배치다. 책과 배치가 바뀌면서 텍스트는 컨텍스트에 따라 부단히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의미의 생성체다. 책은 과거를 품고 있는 역사적 교과서가 아니라 미래의 누구와 어떤 배치를 만드느냐에 따라 가변적으로 의미가 바뀌는 잠재적 가능성이다.

 

책은 저자의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이 고스란히 내부적으로 간직된 폐쇄적 의미의 결정체가 아니라 저자가 어떤 생각과 의도로 썼더라고 하더라도 그걸 해석하는 사람의 문제의식에 따라 부단히 재탄생하는 생성적 의미의 잉태실이다. 책은 저자의 의미와 의도가 수많은 곁가지로 뻗어가면서 수직적 위계를 띄는 수직적 계통구조로 짜여진 통일된 집합체가 아니라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언제나 중간지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잉태하고 다른 사상적 뿌리와 우발적으로 만나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리좀형 의미의 발산체다. 따라서 책은 저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역사적 문맥에서 파고들어 따져보는 해석이 중요하기보다 언제 누가 어디서 그 책과 만나는지에 따라 배치가 바뀜으로써 의미대로 삶을 살아야 하는 실천의 문제가 중요한 매개체다. 책은 누군가의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배치를 달리 함으로써 색다른 의미를 현실에 구현하는 실천의 촉발물이다. 마찬가지로 성서도 예수의 가르침이 시공을 초월해서 절대 진리로 간직된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달라지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앎의 경로를 의심할 때 앎의 결과에도 의문이 든다

 

《철학자 예수》도 오랜 역사를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되어온 성서와 만나는 배치를 바꿔서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 위해 한글 성서보다 영어 성서를 참고했고, 성서에 사용되는 언어적이고 성적인 편견과 종교적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평등언어와 포괄적 언어를 사용하고 나아가 일상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동안의 성서와 만났던 사람들과 배치를 바꿔서 전혀 다른 방식의 마주침을 통해 색다른 깨우침의 선물을 선사해주고 있다. 이를 위해서 성서와 기존 종교나 교회가 만나서 이룩한 기존의 배치 구도가 낳은 타성과 통념에 젖은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 중심부에 동조(同朝)하거나 동화(同化)시키는 주류담론에서 벗어나 변방에서 예수의 ‘뿌리뽑힌 삶(uprooted life)’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주류 담론의 의사결정 근거는 언제나 중심부에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변화는 엄격한 의미로 변화라기보다 ‘동화’다. 동화는 중심부에 얼마나 가깝게 따라가느냐가 변화의 판단 척도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중심부에서 일어나지 않고 주변부나 변방에서 일어난다. 그 동안 주류 담론으로 해석되어 이해되었던 기독교와 교회 중심의 예수를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거두도 교회와 기독교 밖에서 예수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중심부 시선이 얼마나 예수의 본질적 가르침이라는 사선을 넘나들며 왜곡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해석하는 ‘이중보기 방식이나 시선(double mode of seeing)이 지금 필요한 까닭이다.

 

《철학자 예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기존에 알고 있었던 기독교적 예수나 교회의 교리로 포장 또는 위장된 예수를 버려야 한다. 진정한 앎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서 생기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버리는 가운데 시작된다는게 바로 비학습 또는 창조적 파괴를 통한 버림학습(unlearning)이나 탈학습(delearning) 아니던가. 배움이라는 탐구 여정을 떠나 기전에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가정을 버리고 나는 모른다고 시작해야 새로운 앎이 삶을 통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자가 던지는 질문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36쪽).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물어보지 않는다. 앎의 경로에서 심각한 오염과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갖고 이전과 다른 앎을 향한 여정을 시작할 때 전혀 다른 낯선 가능성 앞에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했듯이 “‘여정’이란 출발점은 있지만, 최종적인 ‘도착점’은 없다”(35쪽). 그 여정에는 기존 가정을 의문에 붙여 놓고 부단히 탐구하는 열정만 있을 뿐이다. 호기심의 물음표가 품은 의문의 화살은 끝도 없이 앎으로 밝혀보고 싶은 과녁을 향해 쉼 없이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예수에 대한 단편적인 앎은 전부 교회 다니는 기독교 신자들을 통해 듣고 보고 느낀 지극히 편향적인 의견(疑見)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저자도 교회와 교리안에 갇힌 예수를 탈절대화-탈교리화-탈종교화시켜 길들여진 예수의 장막을 걷어내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몸으로 만나 건져올린 신체성의 가르침으로 정체성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본 축적으로 건축하거나 증축한 화려한 교회나 성당의 높은 제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설법을 전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낮은 곳, 헐벗고 힘든 사람들이 매일 매일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가르침을 대신했다. 예수는 철학을 관념의 파편과 공허한 논리로 설파하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적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아픈 현실을 만나며 진실을 캐내고 그 속에서 진리를 꽃피우려고 몸을 던졌던 거리의 철학자이자 삶의 스승이다.

 

예수는 저 세상을 꿈꾸지 않고 이 세상 한 가운데 ‘함께-잘-살아감’을 실천했다

 

철학자 “예수는 인간의 육체성-너머의 세계에 대한 영성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50쪽). 충격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간다. 기도만 열심히 해도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진다는 기독교적 주장에 늘 의문이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가 타인의 시선을 넘어섰다. “예수의 가르침 핵심은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우리의 현실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관한 것이다”(53쪽). 예수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봐도 고진감래(苦盡甘來)는 도래할 미래가 아니다. 지금 하기 싫어도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은 인생을 살다가 오히려 통증만 생기는 고진통래(苦盡痛來)만 올 뿐이다. 우리는 천당에 가기 위해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가 온몬으로 실천하면서 가르친 사랑, 용서, 환대, 연민과 책임, 평등과 정의를 지금 여기서 어떻게 실천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나갈 것인지의 시제는 지금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에게 배우는 사랑과 용서, 환대, 연민과 책임, 평등과 정의는 모두 추상명사가 아니라 매일 일상에서 실천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를 구현하는 동사다. 추상명사의 동사화가 바로 예수가 꿈꾸는 거리의 철학자로서의 삶이 아닐까. 한 마디로 예수는 “‘저 세상(other world)’이 아니라 ‘이 세상(this world)’ 한 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삶”(58-59쪽)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제도화된 기독교와 그 기독교의 박물관에 박제되어 버렸다”(238). 저자의 주장은 한곁같다. 예수와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동일하지 않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인지를 몸소 밝히며 세상 사람들을 가르쳤던 예수의 가르침은 기도하면 다 이루어지고,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 신자에게만 미래로 향하는 빛을 밝혀 마침내 천당에 간다는 주장으로 왜곡되고 곡해되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비방하는 수준까지 치닫고 있다. “예수는 종교적 교리의 토대를 구성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다”(100쪽). 그걸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회나 성당에 모여 교리화된 믿음의 문장을 낭송하고 기억에 각인시키기보다 삶의 현장으로 몸을 던져 몸으로 앎을 증명해보였다. “반면 기독교는 ‘무엇’이라는 교리적 전통을 구축하면서 그 존재의미를 이어왔다”(100쪽). 우리는 그 동안 기독교 교리 속에 화석화된 상태로 고정된 절대적 신이라는 존재로 예수를 신성시해왔다. 실제로 예수는 꿈도 꾸지 않았던 영적 세계, 신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의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저세상으로 향하는 비현실적 꿈을 꾸기 위해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은 마땅히 참고 하느님을 위해 봉사해야한다는 억지논리도 위장된 교리다.

 

기독교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종교다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종교가 기독교이고 그걸 배우는 장소가 교회라고 알고 있었다. 철학자 예수를 읽고 크게 깨달았다. 기독교로 성문화된 교리에는 무리한 예수의 가르침이 잘 못 해석되어 있고, 교회는 박제화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가르치는 자본주의적 학교였다. 한 마디로 기독교와 교회는 예수를 절대적 진리의 성전으로 믿고 가르치지만 믿고 가르칠수록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292쪽)하는 종교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제도화된 종교가 있지 않다”(292쪽). 예수는 호화 건축물 속의 화려한 교단에서 설교하지 않았고,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기 위해 헌금을 모으지 않았다. 예수는 헌금을 모아 현금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새벽에 모여 통성 기도를 하지 않았다. 예수는 가르침을 종교적 교리로 정리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암송하는 시간을 갖는 대신에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오로지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가르침을 대신하였다. 입이 아니라 몸으로 증거하는 삶을 통해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계”(아모스 5:24)에서 다양한 생명이 “함께-잘-살아감”(294쪽)의 길을 온몸으로 모색한 산증인이다. 예수는 중심부를 기웃거리며 동화되는 삶보다 변방의 소외된 곳을 찾아다니며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한 체인지 에이전트(Change Agent)의 전형이다.

 

삶의 철학자 예수가 실천한 사랑도 한 마디로 확정해서 정의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니다. 데리다의 철학에 비추어 예수의 사랑을 해석하면 ‘무엇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더 중요하고, ‘누구를’ 조건없이 사랑하기보다 ‘무엇을’ 어떤 조건에 비추어 사랑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대표적으로 결혼정보회사가 제공하는 사랑의 등급은 숭고한 사랑을 주고받는 누구를 무엇으로 대체해서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사랑을 전락시켰다. 사랑에서 ‘누구를’이 차지하는 의미는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단독적인 고유함을 지닌 작품이다. 반면에 사랑에서 ‘무엇을’이 차지하는 의미는 금전적 가치로 대체가 가능한 자본증식용 상품이다.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작품으로 다가가는 사랑과 돈만 있으면 어떤 상품으로도 대체가 가능한 상품에 접근하는 사랑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사랑은 삶의 의미를 창출하게 하는 언제나 새로운 원리”(124쪽)라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있는 삶인지는 결국 우리들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랑의 강도와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대부분의 삶의 철학을 보면 일상적 삶과 분리되어 믿음과 사랑이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교리로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환대’는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다

 

사랑은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탄생성(natality)’과 예수가 실천적 덕목으로 강조하는 용서라는 미덕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새로운 탄생 가능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새롭게 태어남의 가능성은 언제나 과거에 범했던 실수나 죄과를 사랑으로 감싸안아줄 때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관문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용서는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는 전제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 용서이자 불가능성도 뛰어넘은 용서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말하는 용서는 한 번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 의미와 깊이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면서 어제와 다른 자세와 태도로 용서하는 ‘도래할 용서(forgiveness to-com)’다. 도래할 용서 속에서 “당신의 죄들이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수동태로 표현하면서 주어와 목적어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능동태형 용서에 잠재된 용서하는 주체와 받는 객체의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종속관계도 무너뜨리는 것이다. 언제나 예수의 가르침은 ‘어느 종교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따져 물은 다음 해당 종파가 어떤 교리를 추종하는지를 생각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어울려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하다.

 

사랑과 용서로 새로운 탄생가능성을 높여나가는 구체적인 노력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환대로 예수가 실천하는 또 다른 삶의 미덕과 맞닿는다.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는 나와 인식과 관심이 다른 전문분야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경계성의 환대이자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갖고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조건없이 초대하는 무조건적 다름의 환대다. 아무리 많은 환대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수행해도 여전히 환대는 인간적 노력으로 완결할 수 없는 영원한 불가능성으로 다가오는 ‘도래할 환대(hospitality to-come)’다. 지금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환대를 열어놓고 지금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불가능성의 환대로 한 걸음 내딛을 때 오늘보다 나은 환대의 향연이 펼쳐지면서 인간적 연민과 공감의 연대가 이전보다 더욱 공고하게 건축될 것이다. 예수의 관심은 종교적 교리로 만들어 교회에서 그걸 가르치는데 있지 않고, 언제나 ‘함께-잘-살아감’에 있어서 다름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넘나들며 무조건적 사랑과 용서를 나누며 ‘도래할 환대’의 연대망을 구축하는 데 있다.

 

예수는 ‘지행일치’보다 ‘지행합일’을 추구한 삶의 철학자다

 

종교적 교리로 박제된 예수의 가르침은 푸코가 말하는 《권력/지식(Power/Knowledge)》의 논리로 해체되어야 한다. 푸코에 따르면 지식이 권력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권력이 지식의 여부를 결정한다. 오늘날의 종교와 교회는 교리로 통용될 예수의 가르침을 선별해서 결정할 권력을 갖고 있다. 교리에 포함되는 진리는 종파마다 천차만별이다.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예수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따져묻는 방식은 물론 그걸로 인해 얻는 해답도 다르다. 종파가 다르면 예수의 가르침도 전혀 다른 논리로 포장되면서 권력을 갖게 되고 강제적 구속력을 띤다. 문제는 교리가 맥락성을 띤 상태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는 탈맥락적인 경우가 많다. 네 이웃을 사랑하하고 하지만 이웃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다를 것이고, 여기서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를 구체적인 동사로 실천하는 신체성도 다르다. 똑 같은 교리도 그것이 적용되는 상황적 맥락에 따라 일리 있는 교리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무리가 따르는 교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 니체가 말했듯이 “사실이란 없다.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와는 상반되게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는 책에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을 넘어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고 했다. 예술작품을 창작의도와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작품성을 자의적으로 해독하는 행위의 역기능과 폐해를 지적하는 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예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가르친 사랑과 용서, 환대와 용서, 정의와 평등을 예수의 본래 의도나 의지와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원래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눈앞의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가 몸으로 가르친 덕목을 삶의 실천 철학을 구현함으로써 함께 살아감을 일상적 삶으로 만드는 노력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곧 교회를 다니는 것이고, 교회를 다니는 길만이 예수가 말한 예수가 말한 “나는 길입니다. 나는 진리입니다”의 길이자 진리가 아니다.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는 길은 예수를 믿는 길로 향하는 한 가지 일리는 될 수 있지만 그 길만이 예수의 가르친 삶을 실천하는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는 아니지 않은가.

 

예수는 이런 정황이 비추어 볼 때 추상화된 교리를 관념적 철학으로 정립해서 전파하며 일상적 삶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리와 괴리된 진리를 옹호하는 강단 설교자가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과 분리된 이론적 입장을 따로 정립, 무지몽매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강권하는 강단철학자는 더욱 더 아니다. “예수의 철학에서 앎(knowing)과 실천(doing)은 분리되지 않는다”(47쪽). 이런 점에서 예수는 알고 난 다음 행동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관념적 철학자가 아니라 앎과 삶이 일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적 철학자였다. 예수는 오로지 “어떻게 의미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46쪽)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는 삶의 현장에서 직접 몸을 던져 실천해보지 않으면 구체적인 방법을 알 수 없다. 방법은 언제나 책상머리에서 요리조리 잔머리 굴린 관념적 파편의 조합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리저리 몸을 던져 겪어보는 시행착오가 낳은 판단착오의 산물이다. 어제와 다른 시행착오만이 어제와 질적으로 다른 판단착오를 줄이는 삶의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를 사랑했던 예수는 누군가 개발한 지혜를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격전의 현장에서 건져올린 삶의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다.

 

예수는 질환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질병을 치유하는 돌봄의 전형이다

 

예수는 앎으로 삶을 증명하지 않고 삶으로 앎을 증거했다. 예수는 입을 통해 가르치는 설교로 끝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사랑과 용서, 연민과 환대를 실천함으로서 가르쳤다. 무엇이 인간을 넘어 인류를 사랑하는 삶인지, 관념적 주장을 설교로만 전하지 않고 온갖 문제가 펼쳐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몸을 던져 실천하면서 가르친 산 증인이다. 사실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은 가르침이라기보다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정문일침(頂門一針)에 가깝다. 당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스스로전하고 싶은 메시지였으며, 헐벗고 가난한 사람, 힘들과 고달픈 사람들에게 발벗고 나서서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준 일상의 수호신이었다. 예수는 아픈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라기보다 그들이 힘든 삶의 현장에서 겪고 있는 아픔을 같이 아파하며 살피고 보살피는 돌봄의 전형이다. 아서 프랭크가 《아픈 몸을 살다》에서 구분한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 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의학적으로 위암이라는 질환은 한 가지 용어로 지칭할 수 있지만 위암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나 병력,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환자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주관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환자가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 걱정과 불안감은 다른 환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해당 환자가 주어진 환경에서 느끼는 특수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같은 범주로 일반화시켜 같은 환자로 취급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의 효율성과 관리의 편리함을 제고시킬 수 있지만 환자를 돌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예수가 교회나 성당에서 수많은 성도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아픔을 치료하는 의사였다면 각각의 구성원들이 겪는 개별적 고통을 일반화시켜 하나의 질환으로 규정한 다음 그걸 치료하는 일반적인 약을 처방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저마다 사람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의 감각적 차이는 그 사람이 지금 놓여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가보지 않으면 그들의 아픔을 몸으로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의 무대는 언제나 교회나 성당과 같은 화려한 건물의 제단이나 성전이 아니라 매일 매일 사람들이 살아내는 일상적 삶의 터전이다.

 

기도(祈禱)만 하면 기도(氣道)가 막힌다

 

기독교를 비롯 대부분의 종교는 기도를 통해 갈구하는 신과의 만남을 추구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기도가 자신의 안위와 행복, 성공과 성취를 위한 조건적 기도에 있다. 수험생의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 투자한 건물이나 대상이 망하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 먼 길을 떠나는 자식이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비는 기도, 사업적 성공을 기원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올리는 각종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수록 기도만 막힐 뿐이다. 내가 목격한 가장 믿을 수 없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말은 기도가 부족해서 꿈꾸던 목적이나 기대했던 성공이 물건너갔다는 말이다. 기도를 더 열심히 하면 당신이 원하는 꿈도 하느님께서 다 들어준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갖는 기도의 의미는 실천 없이 기도만 열심히 해서 정말 기도가 막힐 수 있는 기도다. 기도는 나만 잘 되라고 신에게 부탁하는 간절한 기원이 아니라 ‘함께-잘-살아감’의 연대에서 벗어나 힘든 삶을 매일 겪어내는 사람들과 연민과 그들을 향한 책임성으로서의 기도가 함께 이루어질 때, 기도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나 자신으로부터 물러나서, ‘나-너머의 존재’와 대화하는 의도적 고독의 시간에 벌어지는 사건”(323쪽)이다. 들뢰즈 입장에서 볼 때 사건은 대체 불가능하고 반복 불가능한 비가역적 의미를 지닌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에 나에게 다가오는 변화의 조짐이 다양한 기호로 해석될 때, 현재 몸담고 살아가는 ‘지금의 세계(the world of already)’와 내가 갈망하는 ‘도래할 세계(the world-to-come, the world of not yet)’의 간극을 성찰하고 그 사이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는 용기와 결단이 생긴다. 기도는 나 자신을 깊이 사유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교를 놓는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꼭 기독교 신자가 교회에서만 하는 성스러운 독백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도래할 세계를 맞이하는 자세를 가다듬고 불가능성 속에서도 가능성의 관문이 열리기를 갈구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시행착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담대하게 몸을 던질 때, 기도는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달라는 기원이 아니라 함께-잘-살아감을 실천하는 사람으로서의 성찰적 자기반성이다.

 

예수는 현장에서 ‘수고’하면서 삶의 철학을 실천한 ‘고수’다

 

예수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미덕, 사랑, 용서, 환대, 평등과 정의를 화력하고 웅장한 교회당이나 성전, 대학원과 같은 현실과 분리된 별도의 공간에서 삶과 격리된 상태로 말과 글로 전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가르쳤다”(239쪽). 예를 들면 “자기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십시오”라고 성경에 나오지만 교회다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 사랑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나와 인식과 관심이 동질적인 이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일상세계의 모든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다니지 못하는 사람의 속 깊은 마음을 사랑할 때 교회는 기독교인만이 머무는 특권적 장소가 아니라 예수가 평생을 통해 강조한 이웃사랑을 전파하는 만인의 학교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속깊은 마음은 과학기술로 측량이 불가능하다. 그들이 오늘도 내일도 뒹굴며 살아가는 격전의 현장으로 내려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밑으로부터의 철학”(145쪽)을 구현해야 한다. 속세를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잘-살아봄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아랫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철학을 예수는 몸소 구현하면서 언제나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마주침의 깨우침을 건져올렸다.

 

예수는 철저하게 머리의 언어, 말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로 평등의 철학을 보여준 산 증인이다. 고립된 삶을 죄인으로 살아가는 삭개오에게도 고귀한 한 인간으로 지극한 사랑으로 그를 환대하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초대하였다. 당시에 예수가 사용하는 언어는 지식인이 사용하는 관념과 권위적 책상 언어가 아니라 진심으로 타자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스며들어가는 체중이 실린 진심의 언어를 사용했다. 머리의 언어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관계 없이 즉흥적으로 ‘반응’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말을 쏟아내지만 몸의 언어는 상대방이 처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감각적으로 조응하고 상호작용하고 협력하면서 말을 만들어 낸다. 머리의 언어는 나오자마자 상대를 무시하거나 탈맥락적이라서 맴돌면서 문맥이 막히고 주변을 배회하지만 몸의 언어는 상대방의 의중에 꽂히면서 맥락적 감수성에 조응하면서 상대의 의중을 파고들어 꽂힌다. 예수는 이런 점에서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면서 삶의 철학을 실천한 진정한 ‘고수’다. 고수가 살아가는 터전은 강단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터전이다.

 

예수는 밑으로부터 철학을 구현한 역경 극복의 명수다

 

《철학자 예수》는 저자도 말한 바와 같이 “펜으로 저항하기(Fighting with a pen)” 또는 “펜으로 변혁하기(Transforming with a pen)”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해서 오류를 범하고 있거나 오용되어 심각한 폐해와 역기능을 양산하는 시대에 책임감으로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닫으면서 “도래할 또 다른 철학자 예수”를 기다린다. 해석은 언제나 주어진 상황을 나의 맥락적 의미로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상황(situation)이 바뀌면 맥락적(contextual) 의미도 더불어 변화되고 진화된다고 생각하면 《철학자 예수》는 무한 도래하는 영원한 미완성 철학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데리다가 말한 “신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화두를 염두에 두고 볼 때, 예수야 말로 불가능성을 좌절과 절망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가능성의 텃밭을 일궈낸 역경극복의 명수다. 쉽게 달성 가능하다면 우리는 굳이 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한 한계가 경계를 가리고 장벽으로 앞을 가로막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성을 극복하고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가려는 열정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라고 해석한 의미이자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환대로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는 책임성이기도 하다.

 

시공을 초월해서 종교적 독단의 논리로 포장된 교리에 함몰되어 구체적인 실천현장과 괴리된 상태에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위반하고 배반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충격적으로 울려퍼지는 ‘경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자기 편의주의적으로 해석한 예수의 교리를 교회에서 가르칠수록 예수가 실천을 통해 구현하려는 이상적 현실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현대 교회는 과연,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 낯선 사람들, 헐벗고 아픈 사람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처럼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손내밀어 힘을 주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데리다 말한 “종교란 책임성”의 철학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구현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봐야 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책임지지 않는 종교는 아무것도 아니다. 타자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환대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한 탄생이 거듭나는 세계에 예수가 몸을 던져 가르친 것처럼 기독교와 교회 속에 박제된 예수를 구해서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현장’에 가야 ‘현실’을 만날 수 있고, ‘현실’ 속에 우리가 찾는 ‘진실’이 숨어 있다. 이 책은 나처럼 왜곡된 정보로 예수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의 앞날을 밝혀줄 진정한 삶의 철학자는 바로 《철학자 예수》임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진리의 등불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의 가르침은 제도화된 기독교와 그 기독교의 박물관에 박제되어 버렸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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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ㅣ 시인수첩 시인선 85
고두현 지음 / 여우난골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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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에서 ‘도래(到來)할 길’을 상상하며

 

그리움의 이불 속에서

야밤을 지새운 채

깨어지기 전 새벽 이슬 녹을까봐

성급하게 달려나온 먹구름 속 마음이

남해산 유자와 죽방멸치의 언어로 번역된 채

삭풍을 타고 떨어지는 사선의 떨림을 전한다.

 

어두울수록 빛을 발하며 읽히는

고대의 심연에 갖힌 무수한 심정들,

그대의 창연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허공을 날으며 시행간마다 시인의 우주가 읽힌다.

 

치열한 앎보다 낭창한 앓음을 사랑하다

현실의 질곡에서 숨죽이며 기다리는

진실의 곡절이 들려주는 울림이

짙은 잔향으로 며칠 째 남아있다.

 

사회에서 만난 가장 앓음다운 친구이자

언제나 시심과 시상으로 세상에서

뜻밖의 상상의 배움을

감당치 못할 화두로 던져주는 스승이기도 하면서

《곡선으로 승부하라》 공저자이기도 한 고두현 시인의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를 읽는다.

 

언제나 변방에서 변화의 길을 모색하고,

비켜간 시선에서 사고의 사선을 넘으며

메마른 가슴에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선사해주는 시는

이번 시집에서도 변함없이 곳곳에 숨어 있다.

 

한 때 남해 문학기행을 함께 다니며

시인의 탄생지를 순례했던 기억,

한 남해 횟집에서 시인의 작은 배려 덕분에

‘남해는 야해’를 주제로

상상력 강의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이 몸속을 빠져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남해로 떠나는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고 싶다.

해마다
목련이 북향으로 피는 것은
햇살 잘 받는
남쪽 잎부터 자라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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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장석주 지음 / 나무생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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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로움의 촉수를 한 편의 시로 번역하는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장석주(2023).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서울: 나무생각.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건축하다

 

글을 쓰기 위해 새로운 영감이 필요할 때, 타성에 젖은 언어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발상을 뒤흔드는 언어가 필요할 때 시집을 꺼내든다. 시인들의 언어 사용 방식을 배우기 위해서다. “시인들은 항상 다르게 보고, 다른 것들을 들으라는 정언적 명령의 세계에 속한다. 그리하여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시각으로 보고, 같은 것을 들으면서 다른 귀로 들으며, 같은 목소리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는다”(146쪽).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은 29명의 시인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듣고 느끼며 관성의 늪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촉수”(257쪽)를 뻗어 건져올린 풋것들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풋것들은 에두르는 법 없이 사물의 핵심으로 직진한다. 풋것은 무지와 무감각으로,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만들고 눌리고 찌든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한다”(163쪽). 절제와 압축미로 담아낸 시어는 몸을 관통한 흔적을 얼룩에서 무늬로 바꾸어 언어로 번역해내는 시심의 산물이다.

 

시인은 절망이 오면 절망의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 또는 희망의 언어로 얼룩진 행간에서 의미를 채굴하고, 낙엽에 쌓인 그리움이 추위에 떨어도 추억으로 한 동안을 버티며 살아가는 주어진 현상의 이면을 파고든다. 폭설에 새겨진 아쉬운 발자국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지워져도 새벽 찬이슬 맞으며 땅바닥에 엎드려 그 자리를 지키는 족적도 시인에게는 시심을 자극하는 위대한 족적이다. 누가 입을 지도 모르는 생각의 옷을 입은 언어들이 동맥을 타고 흐를 때 시인의 촉수는 피로써 울분을 토하며 얼룩을 무늬로 만드는 언어적 기적을 선물한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에 바람을 타고 지나가던 서글픈 소식들이 가지가지 사연으로 매달려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시심은 언제나 심심하지 않다. 얼마나 외로운 사연 많이 품었으면 무거움을 참지 못하고 구름은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비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는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다

 

“우리가 기다리는 시는 불행과 격투를 마다하지 않는 시, 낡은 사물이나 생각을 바꾸는 상상력으로 가득한 시, 청춘의 착란 속에서 빛나는 미래 비전을 담은 시다”(5쪽). 누구나 시인이 되면 강물이 훑고 지나간 모래알의 그리움을 긁어내 어루만져줄 비법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나이가 들어 시심이 무르익으면 새벽이 찬이슬 앞에 머뭇거리다 먼동이 터옴을 시로 번역해내는 경이로운 작법을 구름에 달가듯 자연스럽게 포착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또 한 번 착각했다. 쟁반에 맴돌던 달밤의 낭만이 소나무 가지가 속삭이는 연서와 만나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싹을 틔우는 순간에도 싯구가 폭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도 하늘이 품고 있는 변덕스러운 생각에 조응하는 명령을 따를 수 있을 정도의 혜안과 안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늘도 시인은 쓰다 남은 메모장에 적힌 그리움 한 조각과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를 붙잡고 새벽으로 향하는 밤의 적막속에서 끝을 모르는 유영중이다.

 

“시는 개별자에게 발화하는 슬픔의 결, 실패의 광휘, 패자의 심오한 승리 등을 포함한 경험에 주목한다. 그것은 시가 고백의 건축술이기 때문이다. 시는 과거의 멜랑콜리를 소환하고, 한심한 영혼의 낡은 미래를 노래한다. 고백의 언어를 펼치는 가운데 잔혹한 존재의 내출혈, 독백의 만다라, 팬터마임을 시연(試演)하기도 한다”(5쪽).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시인에게는 정답도 없고 다양한 가능성을 잉태한 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해답만 존재할 뿐이다. 해석이 바뀌면 지금껏 골머리를 앓던 문제도 해결되는 삶의 지혜가 든든한 위로로 엄습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걸어가는 길은 아직 가보지 않은 위험한 미지의 길이며, 읽히지 않은 소설속에 잠복근무하고 있는 갈등과 절정의 어느 순간이다. 시인은 어떤 풍경으로 그려내도 화폭에 담을 수 없는 그림이며, 여전히 어제와 다른 영감을 기다리며 그리움에 젖어 사람이 지금 이 순간도 시어를 기다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

 

“모든 참다운 시는 그 불행의 참상을 낱낱이 고지하여 기소하고 동시에 사면한다. 그게 시의 숭공한 소명이라는 걸 되새기며, 여기 숭고한 소명을 향해 나아간 시인들과 시들을 불러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12-13쪽). 지금까지의 생이 아픔과 슬픔이 씨줄로 날줄로 직조된 얼룩과 무늬라면 그런 생에게 따듯한 입맞춤해주며 헐벗은 옷 갈아입혀 따듯한 온돌방에 잠재우고 싶은 마음을 견디다 못해 몇 줄 쓴 시가 이 책 곳곳에서 긴 한 숨을 쉬며 독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소리 없는 아우성이 저마다 시인이 겪어내는 삶의 절규였음을 증명해주고 싶은 것이다. 비바람을 등지고 안간힘을 써가며 간신히 켜진 성냥불에 주변이 잠시 밝아진 틈을 타서 돌아온 지난 생의 어둠을 잠시 잊고 싶은 게 이책에 등장하는 시인들의 작은 소망이다. 그럼에도 시인의 주변에는 희망보다 절망의 늪으로 점철되어 있다.

 

김승희 시인의 희망이 외롭다에 나오는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희망과 나/희망은 종신형이다”는 구절은 절망과 희망을 다르게 해석하는 시인의 역발상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절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희망이 우리를 자주 속인다. 희망이 절망보다 더 가혹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의 종신형을 선도받은 채 그 가느다란 끝을 붙잡고 있는 죄수들이다”(24-25쪽). 절망의 종신형이 아니라 ‘희망의 종신형’이라는 시어 앞에 절망과 희망의 의미를 타성에 젖은 의미로 해석했던 나의 언어사용 방식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의 종신형 앞에서 나의 관념적 언어는 바닷가에 객사(客死)한 모래알이고, 땡 빛에 힘없이 죽어가는 들국화의 쪼그라듦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전히 구체적 맥락성을 품지 못하고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허공을 넘다는 관념의 파편임을 알아차렸을 때, 장석주 시인의 언어는 현실 속에서 진실과 진심을 건져올리는 서광이나 다름없었다. 시인은 그래서 “알은 어둠 속에서 절망에 복무하며 기다려야”(32쪽)하고, “머뭇거림과 숙고, 무작정과 막무가내의 기다림”(33쪽) 속에서 더 적확한 언어를 벼리고 별러서 적확한 한 문장을 완성한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39쪽). 시은은 오르락 내리락 우여곡절의 전반전을 뛰고 나서 한눈팔고 딴 짓 하다 바라본 구름 한 점도 섣불리 흘려보내지 않는다. 거기에는 기꺼이 기록을 거부하는 비애 한 권의 서글픔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모든 시간과 그 시간이 머물렀다 떠나는 공간은 서성거림의 방황과 배회가 남긴 시 한편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내는 모든 순간은 한 두 문장으로 압축되거나 요약되지 않고 양극단의 스펙트럼에서 언제나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린 상식과 신념의 종합선물 세트다. 처절함과 처연함 사이에서 처참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어딘지 모르는 중간 간이역에서 시인의 발걸음은 잠시 쉬고 있다. 그 순간에도 우리에게 던져주는 삶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파고들어 의미의 지층을 깨부수는 언어광부가 시인인지도 모른다.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시가 타오른다

 

“연애는 상대를 낳는 산파술이다”(64쪽). 비단 연애 뿐만 아니라 시인이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대상이 품고 있는 의미의 뒤안길을 추적해서 잠복중인 새로운 깨달음을 출산하는 산파술의 터전이다. “우리는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타오른다. 이 타오름의 중심에 욕망이 있다. 이 타오름에서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실감한다”(67쪽). 시인은 바라보되 그냥 바라보지 않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뭔지도 모르는 숙제를 끌어안고 해결을 위한 단초나 단서를 잡아보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 만난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다. ‘목소리들’을 쓴 이원 시인의 상상력 촉수는 한 글자로 된 단어의 숨겨진 아픔과 몰래 꿈꾸는 이상 세계의 한 단면을 포착한다.

 

돌,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

빛,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벌리며

벽,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

길,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

창, 닿지 않을 때까지

겉, 치밀어 오를 때까지

안, 떨어질 곳이 없을 때까지

피, 뒤엉킨 것

귀, 기어 나온 것

등, 세계가 놓친 것

색, 파헤쳐진 것, 헤집어놓은 것

나,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늪에는 의외로 묻을 게 많더군

너,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허공에도 의외로 묻힌 게 많군

눈, 깨진 것, 산산조각 난 것

별, 찢어진 것

꿈, 피로 적신 것

씨, 가장 어두운 것

알,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

뼈, 거기에서도 혼자 남은 것

손, 거기에서도 갈라지는

입, 거기에서도 붙잡힌

문, 성급한, 뒤늦은, 때늦은

몸,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

신, 손가락 끝에 딸려 오는 것

꽃, 토사물

물, 끓어오르는

칼, 목구멍까지 차오른

흰, 퍼드덕거리는

 

한 많은 세월의 얼룩이 서글픈 사연을 머금다 목구멍 사이로 터져 나온다. 차갑게 식은 냉가슴을 달구는 한 잔 술이 온몸을 휘감을 때 시인은 텅 빈 종이를 바라보다 어둠을 밝히는 밤하늘의 등불로 번역한다. 하루 종일 수영 하다 지쳐가는 몸을 가누며 물고기가 하품을 하는 순간 숱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물가의 갈대가 온몸을 떨고 있을 때 시인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빛나는 배경의 안간힘을 포착한다. 긴 밤을 뒤척이다 깨어도 여전히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다가도 문득 스쳐지나는 영감을 포착했을 시인은 그것이 내가 찾는 정답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을 반복하다 새벽을 맞이한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는 순간 고속으로 질주하던 자동차의 경적이 세월의 흐름을 추월할 때에도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어슬렁거리며 유유자적하는 산책자다.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에는 장석주 시인이 다른 시인의 삶의 내면과 이면을 파고드는 의미의 산책자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는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다

 

이원 시인의 ‘목소리들’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쓴 진은영 시인도 타성에 젖은 교과서적 정의에서 탈피, 언어적 의미를 재정의하는 짧은 사전을 보여준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언제나 주소 불명의 곳곳에서 날아든다. 정처도 없고 장기간 머물로 살아가는 터전도 없다. 순식간에 날아들다 기분이 내키면 잠시 머무를 뿐이다. “시인은 만물이 내는 목소리를 경청하며 동시에 이것을 세계에 중계한다”(147쪽). 시인은 언제나 삼라만상을 경험하면서도 다른 감촉으로 상상력을 잉태한 다음 아무도 모르는 시기에 어제와 다른 문장을 아무때나 출산한다. 시인의 삶은 하루도 마음 편안하지 않다. 오히려 시인은 불편함과 불안감이 창작의 꽃을 피우는 앙스트불뷔테의 전형이다. “시인은 모든 도약에 실패한 호랑이들로, 날마다 포효를 하며 제 존재의 벽을 할퀴어댄다”(162쪽). 자기 몸에 새겨진 상처 위에 또 다른 앎의 상처로 덧씌우며 탄생하는 쓰라림으로 애쓰며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나는 이런 고통의 무한 반복이 자신이 없어 시인(詩人)이 될 수 없음을 시인(是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를 읽어야 되는 이유는 시 한 편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소우주가 들어 있고 자연의 위대한 법칙과 원리가 숨어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순간에 무릎을 치는 통렬한 깨담음의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새해 첫 기적’을 쓴 반칠환 시인은 한 해를 정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서늘한 뜨거움을 전해준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저 너머에 가장 아름다운 시와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항해해야 할 가장 넓은 바다와 추지 않은 불멸의 춤이 있다.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날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263쪽).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저마다의 사유로 작별을 고하고 이별을 경험한 씁쓸한 시인은 새벽이 다가와도 잠이 오지 않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에 시름을 희석시켜 새벽별을 위한 아침을 준비하는 시인은 그럼에도 숱한 작별과 이별에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는다. 작별이나 이별보다 더 슬픈 결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 속에 간직한 사전을 펼쳐놓고 단어들이 품은 의미를 선별하며 문장을 건축해보지만 여전히 언어는 하늘을 날며 허공에 펀치를 날릴 뿐이다. 어두워야 읽히는 시인의 문장들, 여전히 난해한 상형문자로 건축되어 있는 해독의 대상이라 스스로 좌절을 밥먹듯이 한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이 축조한 지혜의 보고에서 며칠 밤 지새우면 세상의 언어로 옷을 갈아입을 것이라는 어설픈 희망을 가져본다. 그때는 어둠의 이불을 박차고 나와 하늘의 명령에도 불복하지 않고 구름이 안내하는 길로 총총 걸음 내딛으며 또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용기로 두려운 불확실성 앞에 도전하는 한 줄기 싯구절을 상상해본다. 장석주 시인의 시와 시를 해설하는 언어에는 저마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머물렀던 공간의 기억을 되살려 번역해낸 체중이 실려 있다. 살갗을 파고들고 전두엽을 자극하는 전광석화의 깨달음이 스며드는 이유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11쪽). 지층을 뚫고 나오는 글을 쓰기 위해 어제와 다른 삶의 차이를 반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2분의 1: 인생반전을 일으키는 절반의 철학》 책을 내면서 저자 소개에 나의 인생이력을 짧게 써 봤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다는 신념에서다. 20대는 뒷굽이 다 닳은 서글픈 신발을 신고 갈 길이 먼 다급한 마음 억누르며 그래도 분발하려는 대책없는 방랑자였다. 30대는 바람타고 쓸려간 상처 속의 신음도 찬란한 슬픔의 화음으로 재생하는 어설픈 작곡가였다. 나에게 사십은 상처입은 짐승이 내면의 아픈 기억을 어루만지다 몸부림치며 행간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섣부른 저자였다. 나에게 오십은 새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 타고 밀려오는 파도에게 술 한 잔 사주고 싶은 철부지 예술가다. 60대에는 몸에 외로움의 촉수로 박혀 있어도 건드리면 아무데서나 한 편의 시로 승화되는 시인의 삶을 살고 싶다. 걸어가는 족적마다 다 음악이며, 달빛에 그을려진 서글픔도 그림이 되는 아슬아슬한 기적을 쓰고 싶다. 나에게 육십은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도 유유자적하며 삶의 순간을 만끽하는 산책자이고 싶다. 언제나 신인의 자세로 애쓰며 상상력의 텃밭에서 비상하는 글을 써야 작가로서의 본분과 작은 사명을 다할 수 있음을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을 읽으며 깊은 깨달음의 선물을 받았다. 깊어가는 가을, 겨울 추위가 다가오기 전에 서늘한 따듯함으로 삶의 고단함을 위로받고 싶은 분들에 일독을 권하고 싶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절반의 기쁨을 발견하라.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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