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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랑한 것 - 지금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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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에게 물들어 사랑이 되고, 너는 나에게 물들어 시가 된다

 

작가가 쓴 모든 문장은 당연한 것,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에 시비를 걸고 질문을 던지며 한눈 팔다가 한 눈에 반한 오늘 사랑한 것에 대한 감각적 언어의 향연이자 의미의 식탁이다. 확정된 의미로 문장을 건축하지 않고 기존 단어의 의미와 결별을 선언하고 낯선 의미를 잉태시켜 기정사실에서 불편한 현실을 만나고 숨어있는 진실을 캐낸다. 그래서 작가가 쓴 행간에는 언제나 기존 사유체계를 전복하고 낯선 생각을 잉태시키는 혼란의 격전장이 펼쳐지고 오늘 사랑한 것이 안타까움과 처절할 정도로 간절한 사연을 품고 헤아릴 수 없는 사유의 깊이로 파고든다.

 

작가는 뜨거운 문제의식보다 뜨거운 문제를 만나 자기 몸이 온통 화상을 입을 때까지 세상과의 불화를 의도적으로 시작, 그 불화에서 불협화음(不協和音)을 일으키며, 작가가 포승으로 묶인 기존 앎의 암()’을 치료하기 위해 항암치료도 거부한 채 햇빛에 털어 말리고 흩날리는 바람에 일부러 휘둘리며 구름 속으로 끌려간다. 기존 이 걸린 에 회생 불가능한 사망선고를 내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앎의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진통을 하루 일과로 지부하지만 진지한 반복을 통해 의미의 반전을 꿈꾼다.

 

작가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언제나 낯선 비유를 사용한다. 비유가 달라지면 사유의 관문은 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하고 새롭게 열린다. 작가는 언어를 불에 달구고 정념의 모루에 얹어 두드리고 식히고를 반복”(245)하며 타성에 젖은 고루한 관념의 파편을 담금질한다. 행간과 행간의 사이는 단어가 단어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쑤셔넣고, “뒤따라 온 문장이 앞 문장의 몸통에 뿔을 박아넣어 생사를 넘나드는 축축한 긴장과 대치, 그 압축된 메타포(245)가 예고 없이 곳곳에서 격발되는 개념의 전쟁터이자 느닷없는 사랑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어찌할 수 없는 해일에 가깝다. ”그리움은 수증기 같아서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지만, 외로움은 갈증 같아서 삶의 수분을 빼앗아 말라 죽게 만든다“(258)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비틀리고 엇갈리다 평정을 찾아가는 안간힘의 글쓰기 향연이 펼쳐진다.

 

나는 너에게 물들어 사랑이 되고, 너는 나에게 물들어 시가 된다”(112). 이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단어가 다른 단어를 붙잡고 애정하는 장면이 느닷없이 급습해서 맨정신으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기 어렵다. “가을의 우울은 생리통”(78) 같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이곳에 안개가 다녀가면 담쟁이 덩굴이나 화살나무 잎들에서 푸른 웃음기가 빠져나가고 갱년기 같은 불그레한 반점이 번집니다. 푸름을 탐하는 안개의 욕망은 추하고 노골적이어서 앞산의 상수리 나무들이 밤바다 문단속을 심하게 합니다”(78)라며 가을의 낭만에 취하며 그리움의 감도”(78)를 한껏 드높인다. “찰나의 감탄이 아니라 육중한 감동의 서사”(121)는 사계절을 시인의 서가에서 육신을 헐어가며 썼고, 시간을 긁어가며 더디게 썼다는 몸부림의 흔적이자 고뇌의 얼룩이다. 모든 단어에 서린 사연의 무게와 깊이사유의 무게와 깊이를 결정한다.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고 멈춤의 시간적 여유 없이 읽고 말았다. 가을 서녂하늘에 걸려 있는 노을에 그을린 그리움이 온몸으로 스며들며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는 공감의 파장이 일어나고, 작가가 품은 오늘 사랑한 것들의 색감으로 내 몸은 심하게 물들어버렸다. 오이가 피클로 바뀌며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났다. 육신의 고통으로 건져올린 단어들의 꽃이 나에게도 꽃이되어 꽂혀버렸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평범하지만 비범하고 비장한 한 문장을 남긴다. “내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다는 뜻이어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네가 살아가는 일에 기여하는 것(307)임을 잊지 말자는 먹먹하고 엄숙한 선언과 주장이 의미를 심장에 꽂아 묵직한 감동으로 살아 움직인다.

 

#오늘사랑한것 #행성B #림태주작가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나는 너에게 물들어 사랑이 되고, 너는 나에게 물들어 시가 된다"(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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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김영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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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명령(命令)하는 사람입니까명명(命名)하는 사람입니까?

김영희의 식물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를 읽고


《식물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를 쓴 김영희 작가는 이름 없던 한 들꽃을 최초로 발견하고 ‘쇠뿔현호색’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명명자이다. “처음 씨앗에서 발아한 1년생  쇠뿔현호색은 잎이 하나입니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하는 어린 식물의 경우, 잎은 끝이 뾰족한 타원형의 모양을 가집니다. 꽤 동글동글하다는 이야기지요. 하나이던 동그란 잎은 해를 거듭하면서 셋이 되고, 나중에는 원줄기에서 다시 셋으로 깊게 갈라진 솔잎처럼 가늘고 긴 잎들이 달리게 됩니다(78-79쪽).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잡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잡초는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대체불가능한 생명체가 된다. 현호색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생식물이 우리나라에만 20종이 넘는다고 한다. 현호색이라는 성씨를 따라 저자가 최초로 이름을 붙여준 ‘쇠뿔현호색’은 저자의 오랜 관심과 관찰, 주도면밀한 가설을 검증하며 드디어 자기 이름을 갖게 된 식물로서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서식하는 한국특산식물이라고 한다. 그렇게 작가의 친구이자 연인이 된 ‘쇠뿔현호색’은 자기 이름에 새겨진 숱한 사연을 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태계의 한 구성원이 된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이름에는 주름과 시름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철학자 들뢰즈는 다중체 또는 다양체(multiplicity)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다중체는 말 그대로 다양한(multiple) 주름(pli)이 축적되어서 생긴 한 사람의 정체성(multiplicity)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름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직간접적인 경험의 흔적들이다. 내가 겪으면서 내 몸에 남긴 얼룩과 무늬가 다양한 주름으로 축적되면서 나의 정체성이 생성되고 형성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담긴 사연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만큼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만큼 살아오면서 겪어낸 몸부림과 안간힘의 흔적으로 생기는 주름과 맥을 같이한다. ‘이름’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어낸 ‘주름’과 시름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생긴 사연의 다른 이름이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함께 이름에 담긴 아픈 사연도 사랑한다는 의미다. 작가로부터 처음 자기 이름을 갖게 된 ‘쇠뿔현호색’을 비롯, 며느니밑씻개나 큰개불알풀처럼 입에 오르내리기 거북할 정도로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는 식물도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식물이다.


“식물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며, 곧 그들과 사랑과 빠지겠다는 열린 마음입니다. 이름을 알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은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11쪽). 사랑하면 질문이 쏟아진다. 이 식물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식물 이름에 담긴 독특한 사연이나 있는 것일까? 그 이름에 담긴 역사적 의미가 있거나 지역적 고유함을 담아내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갖가지 궁리를 하면서 관심의 눈길은 급기야 손길을 부른다. 가만히 앉아서 식물의 이름을 관념적으로 연구하기보다 그 식물이 자생하는 곳으로 직접 가서 감각적 눈과 오감을 열고 관찰해 본다. “책 속에서 식물을 깊이 있게 공부했다 하더라도 직접 보는 느낌은 다를 수 있거든요. 꼭 현장에서 식물을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느끼고 사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사람 잡는 선무당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길입니다”(51쪽). 저자는 식물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이름의 사연의 뒤꼍 기를 파고들어 가 학명과 속명은 물론 정식 이름 이외에 다르게 불리는 이명이나 민간에서 오랫동안 불려 오는 지방명인 향명과 우리나라에서만 고유하게 불리는 국명까지도 파고들어 그 어원과 사연을 조사하고 직접 그 식물이 자행하는 현장으로 뛰어들어 샅샅이 확인하고 살펴보며 궁리를 멈추지 않는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비슷한 이름이지만 전혀 다른 사연을 품고 있다


저자는 더불어서 식물의 이름만 기억하지 말고 식물의 형태와 생태를 중심으로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함께 기억할 때, 식물이 품고 있는 이름의 본질과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까치밥나무와 까마귀밥나무는 각각 까치와 까마귀에게 먹이가 되는 나무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깊은 산속에서 드물게 자라는 까치밥나무가 마을 주변에서 자라는 까치를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낮은 산지 숲 속에서 자라는 까마귀밥나무는 까마귀 눈에 뜨일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까마귀 밥으로 사용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저자의 추측에 따르면 맛있는 열매인 까치밥나무와 맛없는 열매인 까마귀밥나무에 각각 우리 정서에 맞게 은유한 이름일 것이라고. 관심을 갖고 관찰하다 보면 뜻밖의 통찰에 이르기도 하고 관찰한 결과를 세심히 고찰하며 상상력을 발동시키면 뜻밖의 또 다른 깨달음의 물꼬가 트이는 경우도 있다.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저의 취미이자 특기”(115쪽)라고 생각하는 작가는 큰개불알풀을 보고도 개불알모양으로 보이지 않고 설익은 풋사랑 모습을 띠면서 “뾰족한 아랫부분은 꽃받침 아래에 깊이 감추고, 둥글고 부드러운 부분만을 드러낸 모양”(115쪽)에서 하트모양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이 책의 곳곳에는 사진 없이 식물들의 다양한 사실적 모습을 묘사하고 기술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해당 식물의 양태를 상상하게 만든다. “연영초 잎은 화려한 파티드레스입니다. 허리에서부터 넓게 세장의 잎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잎의 형태를 따라 곡선을 그리며 끝까지 쭉 뻗어 내린 잎맥은 뾰족하게 흐른 날카로운 잎 끝에 닿습니다. 그 큰 잎맥과 잎맥 사이에 사선으로 연결된 작은 맥들이 치맛자락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합니다”(122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 스칼렛 오하라의 드레스에 연영초를 비유하면서 “유혹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는 있으나 쉽게 보이고 싶지는 않은 이중적인 마음”(123쪽)을 드러낸다. “매실과 살구가 그렇고 자두와 복숭아 역시 봄에 꽃을 피웁니다. 뒤이어 배와 사과꽃이 핍니다. 이 중에서 매실, 살구, 자두, 복숭아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고 배와 사과는 잎과 꽃이 함께 나옵니다. 결국 잎과 함께 꽃잎 피는 배나무와 사과나무는 같은 봄이라도 좀 더 늦게 꽃이 피는 셈입니다”(224쪽). 관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세밀한 차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대자연의 위대한 교향곡을 연주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단어에는 그 사람이나 식물이 고유한 향기가 스며들어 있다


늘 만나는 식물이지만 호기심이나 관심을 갖고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저 바람에 흔들리고 비바람과 천둥 번개 맞고 사계절을 따라 새싹과 잎을 만들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가시연꽃과 연꽃은 같은 연꽃 같은데 같은 연못에서도 앙숙으로 살아가는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밀이다. 한해에는 연꽃이 연못을 지배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다 다른 해에는 가시연꽃의 위세에 눌려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경우가 있다. “눈을 뚫고 피는 꽃을 뜻하는 눈색이 꽃이나 얼음 사이에서도 핀다고 해서 얼음새꽃”(116쪽)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복수초(福壽草)는 원수를 갚는 복수(復讐)와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때로는 한눈을 팔아야 두 눈으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모습 속에 담긴 생명체의 생존 방식과 원리를 간파할 수 있으며 종종 한눈에 반하는 식물의 기이한 모습을 보고 경탄에 마지않는 감탄사를 자기도 모르게 연발하는 경우를 만난다. 한눈을 팔지 않으면 한눈에 반하는 식물의 경이로운 모습을 포착하기도 쉽지 않다.


백리향과 천리향 그리고 만리향은 진짜 향기가 백리, 천리, 만리를 가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직감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다 갑자기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에 더 비중을 두고 알아본다. “백리향은 꿀풀과 이고, 천리향(서향)과 만리향(백서향)은 팥꽃나무과로 과(科)부터 완전히 다릅니다”(27쪽).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향기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생김새나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서 유사한 친척은 아니라고 한다. 백리향은 실제로 향기가 100리(40Km)까지 가지 못하지만, 향기를 100리까지 데려다는 방법은 향수나 화장품 같은 인위적으로 만든 향기를 제거하고 백리향으로 온몸에 스며들게 하고 차를 타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고유한 그 사람 특유의 향기가 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떤 단어를 떠올리면 그 단어와 내 삶의 희로애락이 겹쳐지면서 단어에 담긴 내 삶의 무게감이 묵직하게 다가오면서 특유의 진한 향기가 배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향기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사람은 인간적 신뢰가 없거나 타인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자기 이익에만 함몰된 경우가 많다.



이름은 심층적 의미나 의도를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에 따르면 너도밤나무나 나도밤나무는 모두 밤나무를 닮았지만 이들은 가깝지도 않고 친척관계는 아니다. 둘 다 밤나무니까 가까운 친척사이로 차이점보다 닮은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경우가 식물 이름에는 비일비재하다. 마찬가지로 바람꽃이 있는가 하면 나도바람꽃과 너도바람꽃도 존재한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자기 이름을 가진 식물은 자기 이름값을 하면서 식물 생태계에서 자기 방식으로 살아간다. 고마리라는 풀은 수질 정화에 탁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가축의 먹이가 되어준다는 이유로 ‘고마운 이구나’라는 이유로 고마운 풀이라고 불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걸리적거리나 그만 자라거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받는 풀로도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자연의 모든 식물은 저마다의 존재이유가 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험난한 세상을 원리나 노하우가 있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창포와 꽃창포 역시 소속이 완전히 다른 식물이다. 식물의 이름만 보고 섣불리 사람의 입장에서 재단하고 평가하지 말라는 의중과 의도도 숨어 있다. 예를 들면 수술이 검은색인 다래와 노락색인 개다래와 쥐다래는 열등의 표식으로 사용되는 ‘개’와 ‘쥐’라는 접두어의 의미와 관계없이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인간의 상상력을 능가할 정도로 자기만의 재능과 적성을 자신감 있게 표현하며 살아간다. 이름에 담긴 표면적인 의미는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심층적인 의중이나 의도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 책의 특징 중의 하나는 식물이름과 관련된 사진이 한 장도 없어 저자의 설명이나 해설을 따라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사진을 보면 이미지로 식물의 모습을 쉽게 짐작하고 더 이상 생각의 날개를 펼치지 않지만 사진이 없어서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저자의 설명이나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뇌리 속을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꽃 필 때의 모습이 고봉으로 담은 쌀밥 같아서 붙여진 이팝나무와 좁쌀로 밥을 지어놓은 것과 비슷한 조팝나무를 설명한 부분에서는 시종일관 쌀밥과 조밥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비교하고 비유하면서 두 나무의 차이를 상상하게 된다. 가시가 있어서 찔리는 꽃이서 조심스럽게 꺾을 수 있는 꽃이라는 들장미 찔레꽃과 손으로는 절대 꺾을 수 없는 바다장미 해당화(海棠花) 역시 각각의 장미에 박힌 가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꺾을 수 있는 꽃과 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시가 박힌 해당화를 구분하고 그 차이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 놓으며 읽기를 멈추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장미는 꽃집에 입성하지만 들장미 찔레꽃과 바다장미 해당화는 왜 꽃집에 아직도 입성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찔레꽃과 해당화에게 물어봐야 될지 꽃집 주인에게 물어봐야 될지는 누가 알려주는지 궁금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오감을 열고 미묘한 차이를 체감하지 않고는 미묘한 차이를 알 길이 없다


그냥 주마간산(走馬看山) 방식으로 주변의 식물을 보면 그게 그거 같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식물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차이를 구분하고 구별해 내기는 쉽지 않다. 진달래, 철쭉, 산철쭉의 차이점을 구분해서 설명하는 챕터 글을 몇 번 읽어도 아리송하다. 진달래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고, 철쭉이나 산철쭉은 잎과 함께 꽃이 핀다고 한다. 색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진달래는 진한 색이고 철쭉은 그보다 연한 색, 즉 빨강 물감에 흰색 물감을 섞었을 때 나오는 분홍색이라고 한다. 또한 철쭉은 잎이 산철쭉보다 크고 잎끝이 둥글고 산철쭉은 잎이 작고 끝이 뾰족하다는 설명을 반복해서 읽어도 관념적으로 조금 이해될 뿐, 내가 직접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산철쭉 앞에 직면하면 뭐가 뭔지 구분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탁월한 설명을 듣고 머리로 이해가 와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 까닭은 내가 직접 세 가지 꽃 앞에 직면해서 감각적으로 느끼는 차이를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식물을 구분한다는 의미는 다른 식물과 분리시켜 독립적인 생명체로 인식한다기보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 주고 내가 너와 어울릴 수 있지만 나만의 대체 불가능한 고유함을 다름과 차이로 인정하고 수용해 달라는 식물들의 항거에 우리가 겸허히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참나뭇과에 속하는 6형제 나무, 즉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를 설명하는 내용은 더욱더 혼돈을 넘어 혼란이 급습하지만 그걸 잠재울 명료한 구분 기준으로 서로의 차이점에 따라 구분하는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갈참나무는 잎을 갈아치운다는 가랑잎과 갈잎에서 유래된 이름이자 모든 나뭇잎이 푸르다는 고정관념을 깨 주는 주인공이 바로 갈참나무인 까닭은 어린 나뭇잎이 꽤나 갈색이다. 신갈나무는 전형적으로 푸른 잎이고 떡갈나무는 붉은빛이 감도는 밝은 색으로 분홍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상수리나무는 앞면보다는 약간 노란색이 감도는 초록색이고, 굴참나무는 앞면은 초록색이고 뒷면은 분녹색으로 흰빛이 난다고 설명하지만 참나무 6형제를 구분해서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육감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내가 직접 참나무 6형제를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육감적으로 그 미묘한 차이를 가슴으로 느껴봐야 참나무 6형제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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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을 바꾸면 운명도 바뀌는 혁명이 일어난다


저마다의 이름에는 각자 살아오면서 겪어낸 사연과 뒷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을 품은 채 해독이나 해석되기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살구나무는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고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자두나무는 자도(紫桃), 즉 자주색의 복숭아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겨울을 당차게 살아내며 겨우겨우 살아남아서 겨우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라는 사연을 들어보면 그 식물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식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사람에게 말 못 할 사연을 남기기도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식물은 한 번 씨앗이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뼛속 깊숙이 박혀 있는 생명체다. 예를 들면 물이 좋아 물가에 사는 버드나무는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하다. 하지만 씨앗이 날아가다 바람의 방향을 잘 못 타고 가가 물가에 떨어져 생명성의 보장받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할 수도 있지만 씨앗이 물에 닿지 않도록 털이 있어서 물에 떨어져도 떠내려가다 물가장자리 쪽으로 운 좋게 맞닿아 생명성을 이어가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식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자리 탓을 하는 게 아니라 자세를 바꿔서 자격을 새롭게 취득하는 거다.


이름을 알려고 노력하면서 이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이름은 마음과 생각의 주름으로 남고 이름으로 구분되는 식물의 근원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색찬란한 삶을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식물들에게 아직은 미안한 이야기지만 누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을 쓴 작가처럼 가던 길도 멈춰 서서 늘 만나고 지나쳤지만 어제와 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주변의 식물친구들에게 안부인사라도 전해주고 싶다. 하지만 한 번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고 멀리서 관망하거나 관조하면서 가까이서 살아가는 내 삶의 친구이자 연인인 식물들에게 안부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바쁜 삶의 일과에 매몰되어 살아왔던 적이 더 많지 않았던가. 식물인간에서 식물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내 삶의 철학과 교훈을 배우는 식물사람으로 거듭나며 식물철학자로 재탄생하고 싶은 우리들에게 이 책은 명령보다 명명이 한 사람의 운명도 바꾸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명령하는 사람보다 자기만의 문제의식으로 명명하는 사람이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하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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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며, 곧 그들과 사랑과 빠지겠다는 열린 마음입니다. 이름을 알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은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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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 퇴직을 앞둔 당신에게 다가오는 가장 절박한 질문
권민 지음 / 생각속의집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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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독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낯선 생각으로 물꼬를 터주는 질문이 많이 등장한다. 현실에 안주하며 안락한 삶을 살다가 낯선 질문을 받으면 가던 길을 멈춰서서 자신을 점검하고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특정한 가치에 비추어 반추해본다. 개미가 지나가던 지네에게 난생 처음 질문을 던졌다. “지네야, 너는 수많은 다리 중에서 앞으로 걸어갈 때 어떤 다리를 첫 발로 내딛느냐?” 이 질문을 받은 지네는 가던 길을 멈춰서서 깜짝 놀랐다. 자신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질문은 가던 길을 멈춰세우고 어디로 왜 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탐문(探問)이자 심문(審問)이다. 탐문하거나 심문하는 질문을 받으면 안 보이던 관문도 열리고 없어도 창문도 생긴다. 그 때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질문하면 우리의 정신도 젊어진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자신을 허기지게 만든다. 나에 대해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146). 질문하는 동안은 동안(童顔)이 되는 까닭이다.

 

질문은 새로운 자기다움을 찾아 나서는 탐문이다

 

우선 이 책 제목부터 질문이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그냥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논리적 이해 수준이 차이가 아니라 심리적 강도가 천지차이가 날 정도로 폐부를 찌르는 수준이 다르다. 2007411일 교통사고가 나서 중태에 빠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던진 질문이 있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왜 여기 와 있는거지?” “여기 있는 나는 누구지?” 이런 질문은 인간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평상시에는 그 누구도 잘 던지지 않는 질문이지만 정신 나갔다가 정신을 차리면 던지는 질문이다. 이 책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해서 더 이상 숨쉬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자기다움을 탐구하는 여정을 마친다. “네가 답을 맞히는 데만 욕심을 내기 때문에,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거야. 답은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문이 뭐인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한 거다. 왜냐하면 틀린 질문에서 옳은 답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지.” 저자가 특별히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 나오는 대사를 강조해서 인용하는 까닭이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반복해서 강조된다.

 

나는 어떤 코끼리를 그리며 살아왔을까?”라는 질문을 시작하는 이 책 서두에 두 마리의 코끼리가 등장한다. 한 마리의 코끼리에는 남이 정해준 순서대로 번호를 따라가며 그리면 되는 코끼리가 있고, 다른 한 마리의 코끼리에는 번호가 없고 점만 이어져 있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남이나 사회가 정해준 순서대로 동일한 코끼리를 무한 복제하는 동일성의 코끼리 그리기 패러다임이다. 반면에 점만 이어져 있는 코끼리는 퇴직이나 은퇴로 더 이상 일하지 않는 순간이 갑자기 다가오면서 직면하는 금시초문의 인생 패러다임을 대변한다. 갑자기 낯선 상황에 놓여진 내가 찾는 자기가 과연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무슨 점을 어떻게 찍는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면서 극심한 불안감을 불확실성이 가중시키는 순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전매미문의 질문으로 나를 엄습한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외에 필자가 품고 있는 필생의 질문은 브랜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유니타스 브랜드라는 책 같은 매거진을 만들어 전세계 수많은 브랜드니스(BrandNess)를 갖고 브랜드로 리더십을 만드는 브랜드십(BrandShip)을 발휘하며 브랜드웨이(Brand Way)를 가는 자기다움으로 우리다움을 구축하는 브랜드 생태계를 권민 대표만의 방식으로 정립해왔다. 이미 2002년도 새벽 나라에서 사는 거인으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2012자기다움이라는 책으로 한 번 자신이 품은 질문을 재확인한 다음, “나는 나답게 죽을 수 있을까?” “죽기 한 달전까지 일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절체절명의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놓고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 제목의 자문에 심문하면서 탐문하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마케팅은 넘버원을 지향하고 브랜딩은 온리원을 추구한다

 

브랜드란 자기다움으로 남과 다름이다. 브랜드란 비제품이 제품을 초월하는 것이다”(163).자기다운 브랜드는 색다른 브랜드이고, 색다른 브랜드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서 사랑과 존경심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브랜드다. ‘자기다움색다름이고 색다름이 곧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색달라지면 저절로 남달라지는데 남달라지려고 노력하다 자기 정체성마져 잃어버리고 다른 브랜드를 복제하며 복사본으로 생을 마감한다. 자기다워지려는 브랜딩과 남달라지려는 마케팅은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넘버원을 추구하는 마케팅은 남과 경쟁을 거듭하면서 결국 다른 브랜드와 닮은 복제본을 대량 양산한다. 반면에 온리원을 추구하는 브랜딩은 어제의 나와 경쟁하면서 전보다 잘하려는 노력으로 대체불가능한 원본을 만들어간다. 마케팅은 남과 경쟁하면서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고 브랜딩은 어제의 나와 경쟁하면서 유일한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을 추구한다. 마케팅을 할수록 결국 동일성의 패러다임에 갇혀 서로 닮아가지만 브랜들을 계속할수록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면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자기만의 컬러와 스타일을 갖추게 된다.

 

마케팅 하다 사라진 상품은 유사 상품이라 사라져 없어져도 소설 미키7에 나오는 지금껏 죽어본 중에서 가장 멍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현실로 구현시킨 복사본이다. “우리는 어째서 원본으로 태어나 복제가 되어 죽는가?”라는 에드워드 영의 물음처럼 차별화를 외치며 벤치마킹을 거듭해왔지만 결국 벤치에 앉아서 복사본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순간을 반복한다. 반면에 브랜딩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상품은 죽어도 죽지 않고 지속가능성을 넘어 영혼의 향기가 영속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간직되어 브랜드답게 살아가려는 욕망을 부단히 부추긴다. 할리데이비슨은 오토 사이클이라는 상품을 팔지 않고 일탈과 자유라는 욕망을 판다. 그래서 진정한 브랜드란 비제품이 제품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일탈과 자유라는 비제품이 모터 사이클이라는 제품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라는 퍼스널 브랜드는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라는 휴먼 브랜드로 거듭날 때 비로소 유수한 대학교수라는 직업으로 다른 교수와 경쟁하지 않고 어제의 유영만이 가장 지식생태학자 답게 차이를 반복하며 반전을 거듭하는 자기다움의 여정에 몰입하며 의미와 재미의 이중주를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는 퍼스널 브랜드이고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휴먼 브랜드다

 

자기답게 사는 것은 자기 이름처럼 산다는 뜻이다”(266). 한 사람의 이름값도 우여곡절의 삶을 살아가면서, 문제와 씨름하고 시름시름앓아가면서, 마음의 고름까지 생길 정도로 구구절절 사연을 간직한 먹구름에 담긴 주름을 펼치는 과정에서 생긴다. 지금의 먹구름이 미래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이름에 담긴 수많은 사연의 주름이 자기다움과 자기다움이 아닌 것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자기 이름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찬이 바로 이 사람은 브랜드야!”(276)라는 말이라고 한다. “퍼스널 브랜드와 휴먼 브랜드의 가장 큰 차이는 퍼스널 브랜드는 살아있는 개인을 위한 브랜드이고, 휴먼 브랜드는 자신이 죽어서도 영속 가능한 브랜드”(277). 휴먼 브랜드는 브랜딩을 할수록 대체 불가능한 원본이나 나만의 스타일로 거듭나는 자기다움의 상징이고, 퍼스널 브랜드는 마케팅을 할수록 대체가 가능한 복사본이나 개인의 상품으로 닳아없어지는 남다름의 특징이다. 당연히 퍼스널 브랜드는 경쟁상대와 부단한 경쟁을 통해 시장가치 1위를 차지하여 최고가 되는 것이고, 휴먼 브랜드는 다름과 차이를 반복하여 마침내 반전을 일으키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온리원이 되는 것이다. “휴먼 브랜드는 자기다움의 시작이자 완성”(263)이 되는 까닭이다.

 

이 책에 따르면 마케팅으로 시장가치를 올리려는 상품은 남과 다르기 위해 자기다움을 추구하다 유사품으로 전락하며 상표로 인식(認識)된다. 하지만 자기다움으로 남과 다름을 증명하려는 브랜딩은 정체성을 인정(認定)하는 것이다. 이래서 마케팅의 대상은 경쟁자이고, 브랜딩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107). 마케팅은 100m를 똑 같은 출발선성에서 치열한 각축전 끝에 1등을 가리는 전쟁이고, 브랜딩은 100m360도 방향으로 뛰면서 저마다의 자기다움으로 유일한 내가 되는 자신과의 경쟁이다. 100m를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골인지점을 향해 뛰면 모두가 경쟁상대지만 360도 방향으로 뛰면 유일한 경쟁상대는 내가 했던 어제의 방식이다. 100m를 같은 방향으로 뛰는 사람은 누군가 나를 조명해주고 좋겠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고, 100m360도 방향으로 뛰는 사람은 소명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이라 누군가 그 소명에 감명받고 호명받는 사람이다.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는 무수한 교수 중에 조명받고 싶어서 다른 교수와 경쟁하면서 차별화를 추구할수록 다른 교수와 닮아져가며 이미지가 닳아 없어지지만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는 자기다움의 소명을 받고 유영만 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유영만 답게 대체불가능한 원본임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간다. 소명은 오직 나만이 창조할 수 있는 가치이자, 내가 표현하지 않으면 다른 누구도 표현할 수 없고, 이름이 없는 그 무엇”(64)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의 소명에 충실할수록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로부터 호명을 받으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할수록 내 삶의 혁명을 일으키며 운명조차 바꿀 수 있다. 조명받고 싶은 사람에서 호명받고 싶은 사람은 자기만의 가치를 중심으로 의사결정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진다. 그런 단어를 미국의 철학자 로티는 마지막 단어(final vocabilary)라고 했다.

 

가치 중심으로 삶을 준비해야 삶아져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어휘는 평상시에는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잠자고 있다가 결정적인 딜레마 상황에 빠져있을 때 결단과 결행 일보 직전에 눈앞에 나타난다. ‘마지막 어휘는 가장 나다운 색깔을 담고 있는 내 삶의 등대이자 나침반이기도 하다. 가던 길을 잃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고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를 고심하게 만들어주는 내 삶의 가치판단 기준이자 행동규범이기도하다. 나의 마지막 어휘는 도전이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호기심의 발로이자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며, 능력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내 삶의 카니발이 도전이다. 도전은 내 능력의 한계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능력의 심화와 확장 가능성을 알려주는 성장 발판이기도 하다. 도전은 나에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버팀목이기도 하다. 마지막 어휘를 중심으로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갈수록 나의 자기다움은 한계에 도전하면서 어제와 다른 나로 도약을 반복하며 완벽보다 완성을 향한 미()완성 교향곡을 연주할 것이다.

 

내가 정한 가치판단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정한 가치판단 기준에 열심히 성과를 달성하며 살아왔지만 그 속에서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음에도 우리는 자기계발을 계속하면서 자아를 탕진하는 경험을 반복해오고 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공사다망하게 사는 삶이 복사본의 인생이다. 뭔가 일이 꼬이면 리부팅을 하고 업무 효율을 높이며 더 많은 목표를 달성하지만 목숨은 점차 위태로워지는 까닭도 모른 채 오늘도 삶을 준비해야 조직 안에서 삶아지지 않는 삶”(92)을 살 수 있다는 잠재된 위험 조차도 스스로 잠재우며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도 모른채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가치는 무엇일까? 어떤 가치로 의미있게 살 것인가? 자기답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109) 이런 질문이 품고 있는 의미나 가치조차 모른 채 성과를 달성해서 받는 자리나 지위, 그리고 금전적 가치로 자신의 존재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멈춰서면서 나는 지금까지 무슨 일을 왜 이렇게 열심히 하면 살아왔는지, 그런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때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삶의 가치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저자에 따르면 나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는 한 가지 방법은 명언 500개를 모은 다음 그 중에서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는 100개를 찾은 다음 그 100개의 명언이 나의 심장을 왜 뛰게 만드는지를 귀담아 들어보면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는 원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 “가치는 찾는 게 아니라 결정하는 것이다. 의미도 찾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이다”(293-294). 나의 심장을 두드리는 5개의 단어가 있다.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이다. 열정적으로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는 혁신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매일 5가지 키워드와 관련된 생각과 행동으로 작은 스토리(story)를 만들고 나만의 시각과 관점으로 해석한 서사(narrative)를 구축, 유영만의 역사(history)를 기록하며, 유영만답게 살아가는 유영만 웨이(way)를 만드는 삶이 자기답게 살아가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5가지 키워드가 바로 내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결정한 가치이고, 그 가치가 만들어가는 스토리나 서사에 의미를 부여해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게 만든 삶을 살아갈 때 자기다움으로 남다름을 증명하는 삶이다.

 

자기다움으로 글을 써야 자기 삶을 담아내는 고유한 문체가 생긴다

 

이 일은 나의 인생을 살게 만드는가? 이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진짜 사는 것인가?“(76). 이런 질문 자체도 사치로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2-30여년 조직에서 근무했던 회사생활 장기복역수가 어느 날 맞이하는 냉엄한 현실은 남이 만든 의미의 틀에 갇혀 살아가는 재미도 잊은 채 능률복음으로 성과를 극대화하는 목표달성 기계로 살아온 것이다. 이런 사람들 앞에 자기다움으로 남다름을 증명하는 절박한 질문으로 자기존재혁명 선언문을 발표한 책이 바로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군인가?. “하나의 원본이 떠돌고 있다. 자기다움이라는 원본이.” 자기다움이라는 원본이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살아 있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과 간극을 두면서도 끝없이 현실에 출몰하는 존재, 특이한 의미에서의 존재이다. 자기다움은 남다름이라는 현실과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실재로서, 현실과 간극을 두면서도 끝없이 현실에 출몰하는, 그래서 현실을 놀라게 하고, 위험에 빠뜨리고, 종국에는 무너뜨리려 하는 자기다움이다. 자기다움은 현실 속 인간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그래서 권민 작가는 말한다. “자기다움으로 하여금 원본이 일으키는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공산당 선언문을 패러디해서 자기다움으로 원본을 증명하고 증거하려는 절박한 주장을 담아봤다.

 

자기답게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의 지문을 남긴다”(111). 지문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문체다. 톨스토이와 괴테의 문체가 다르고 스피노자와 니체의 문체가 다르다. 가장 자기답게 살면서 자신의 삶을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대체불가능한 원본을 창작한 작가들은 모두 저마다의 삶의 지문으로 문체를 남긴다. 이 책의 저자처럼 나 역시 글쓰기는 내가 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다움의 증거다”(145). 내 삶을 능가하는 말도 글도 할 수 없다. 내가 살아본 삶만큼 삶을 바꾸는 글을 쓸 수 있다. “내가 쓴 글은 내 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히 나의 글이다. 왜냐하면 내 글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123).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내 글은 나답게 살아가는 길에서 깨달은 삶의 정수가 언어로 번역되어 건축되는 문장의 향연이다. 삶의 색깔과 스타일이 글의 문체로 각인되어 그 사람 고유의 지문으로 남는 까닭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명대사가 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이 남긴 말이다. “신의 문서는 이 아니라 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 가셔야 할 길이옵니다.” 글은 글로서 끝나지 않고 길로 연결된다. 그 길에 그 사람의 살아가는 삶의 지문이 아로새겨지기 때문이다.

 

자기다운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을 알아가는 배움”(147)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자신을 알아가는 배움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언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가,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자기다움을 느끼는가와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면서 내가 어떤 일에 다리가 떨리고 어떤 일에 심장이 뛰는 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의 실존을 위협하거나 슬픔을 주는 사람이나 일에 몸소 저항을 함과 동시에 나를 기쁘게 만드는 정서가 끌리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코나투스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코나투스를 갖고 있지만 모든 사람의 코나투스는 저마다 다르다. 자기 코나투스가 품고 있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이 뒤따를 때 없었던 새로운 능력이 개발된다. 욕망과 능력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몰입의 통로가 개설되고 그 통로에 흐르는 명랑하고 행복한 에너지가 흐른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공사다망하게 살다가 다 망하는 삶, “자신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는”(148) 선택과 동시에 내가 아니면 할 수 없고, 나만 사랑하고, 나만 느끼는 그 무엇을 찾을 때까지”(148) 자기답게 살아가는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을수록 가장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좋은 브랜드(생태계)는 자기다움과 우리다움이 어울리는 지식생태계다

 

자기답게 살아가는지 읽어보기 위해서는 자기다움 일기를 써야 된다고 강조한다. “자기다움 일기의 목적은 자기다움 읽기다. 자기다움 일기는 자기답게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한 일일 사용설명서와 같다”(186). 권민 작가는 매일 새벽에 질문 노트와 자기다움 일기를 쓴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질문 노트는 인생을 멀리 보기 위한 오목 렌즈이고, 자기다움 일기는 하루를 인생이 초점을 맞추기 위한 볼록 렌즈”(188)라고 한다. 질문노트는 오목렌즈로 멀리 있는 미래를 보기 위한 망원경이고, 자기다움 일기는 볼록렌즈로 가까운 현실을 관찰하기 위한 현미경이다.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미래를 내다보면서 동시에 현실을 들여다보며 단순한 생존차원의 삶이 아니라 생동하는 역동적인 삶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바로 자기다움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의미있고 가치는 인생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다는 의미는 나듦으로 요약된다. 나이들면서 자기다워짐, 나이들면서 어른스러워짐, 아름답게 자기다워짐, 자기다움으로 어른스러워짐, 어른답게 자기다워짐, 자기다움으로 어른스러워짐 등으로 이해되는 나듦은 목적의식을 가진 진정한 나의 존재가 내 안으로 들어와 소명과 목적대로 살아가는 과정에 이루어지는 성숙한 자기다움이다. 나이를 먹었지만 어른답지 못한 사람은 나이를 처먹은사람이고, 나이가 들면서 자기다운 삶, 자신의 소명을 증명하는 사람은 나이가 든사람이다.

 

소명에 따라 자기 사명을 다하며 자기다움을 증명하는 사람은 자기다움의 완성을 위해서는 우리다움의 됫받침이 필요(219)하다는 점을 깨닫고 우리다움을 실천하기 위해 생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관계의 거울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며, 함께 나누는 순간들 속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간다”(214). 자기다움은 또 다른 자기다움을 만나 우리다움으로 거듭날 때 홀로 만드는 자기다움에서 벗어나 함께 만드는 브랜드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 브랜드 공동체는 나다움과 너다움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느슨하게 어울릴 때, ‘우리라는 충만함(322-323)으로 넘쳐나는 생태계다. 자기다움 없이 우리다움은 완성되지 못하고, 우리다움 없이 자기다움은 불안하다. 자기다움과 우리다움이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 때 자기다운 브랜드는 우리다움 속에서 영속하는 브랜드 생태계를 이룩할 것이다. “좋은(진짜) 브랜드는 좋은 생태계”(164)가 되는 까닭이다. 브랜드 생태계는 브랜드에 남긴 신념과 철학을 공유하고 저마다의 고유한 온리원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하는 지식생태계다. “내가 우리다움으로 함께 하고 싶은 지식생태계는 자신의 목적과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함께 공부하는 공동체이다”(234). 나만 절실하게 사랑하는 그것을 찾아 질문을 던져 놓고 배움과 익힘을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며 자기다움의 무늬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우리다움이 발현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영속적인 브랜드 생태계도 구축될 것이다. 다만 브랜드 생태계는 영원한 미()완성이라서 끊임없이 함께 공부하며 건설되는 지식생태계로 공진화할 것이다.

브랜드란 자기다움으로 남과 다름이다. 브랜드란 비제품이 제품을 초월하는 것이다"(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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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 - 지금 준비해야 할 문해력의 미래
김성우 지음 / 유유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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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 읽기와 쓰기의 생성(generation)을 다시 생성(becoming)하다:

인공지능은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를 읽고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회변화는 물론 경제기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면서 교육분야도 예외없이 배우고 익히는 학습과정을 촉진시키는 교수학습 패러다임을 흔들어놓고 있다. 문제는 인공지능 기술이 가져올 기술결정론적 변화에 주목한 나머지 장밋빛 미래를 예측하거나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적 리터러시를 배울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공지능이 몰고오는 변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영상이나 이미지가 대세인 시대, 텍스트를 읽는 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리터러시의 방향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했던 김성우 저자가 이번에는 인공지능은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를 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일과 학습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려는 관련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시기에 인공지능과 함께 하는 읽기와 쓰기의 변화, 더 나아가 인공지능이 바꿔나가는 리터러시의 의미를 비판적로 재조명하는 책이라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책과 눈이 맞으면 단순히 읽었다고 하지 않고 읽어버렸거나 읽고말았다는 고백을 망설임없이 하게된다. 인공지능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지금 여기서의 우리들의 삶을 성찰해보고 읽고 쓰는 창작의 본질적 의미가 인공지능이 관여되면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문해력을 개인적인 역량으로 간주하지 않고 관계론적 역량으로 재해석한다. 문해력은 개인의 머릿속에 쌓여 있는 정적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역동적 실천”(51)이자 특정 공동체와 조직에 분산되어 있고, 상황에 따라 새롭게 조합되며, 구성원들의 문해력 발달과 전인적 성장을 돕는 집단의 역량”(51)이다. 문해력에 대한 이런 재정의와 재해석은 인공지능을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나 기술을 익혀 일의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제고하는 기능적 리터러시를 넘어 인공지능이 일상적 삶은 물론 사회경제적이고 생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근원적으로 살펴보고 자신을 둘러싼 관계적 변화에 날선 관점으로 바라보는 비판적 리터러시와 성찰적 리터러시로 새롭게 개념변경을 요구한다. 개념이 변경되어 재개념화되면 감춰진 세상이 새롭게 열리고 그 개념이 품고 있는 세계를 이전과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개념은 자기생각과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기도 하다.

 

질문을 바꾸면 관문도 바뀐다

 

저자는 우선 질문부터 바꾸자고 제안한다. 인공지능 시대 어떻게 하면 기술진화 속도를 따라잡으며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부가가치를 드 높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질문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다. 즉 지금 여기서 우리는 읽고 쓰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나 리터러시 생태계의 근본적 변화 속에서 읽고 쓰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어떻게 잘 돌 볼 수 있을까로 바꿔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를 활용하는 접근논리는 혁명적인 전환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내느냐가, 하루를 어떻게 읽어내고 기록하느냐가, 어떤 이야기를 건네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느냐가, 어떤 삶의 가치를 지켜내느냐가 시대를 선언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보다 더욱 긴급하고 중요하다는 사실”(59)을 강조한다. 인공지능의 몰고올 미래에 대한 준비를 강조할수록 과장된 메시지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과거에 대한 암묵적 망각이 은밀하게 강조되는 사이에 현재는 언제나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그럴 때마다 기술적 탁월성이 끌고가는 화려한 변화의 그림자에 파묻혀 기술적 영향력으로 생기는 본질적 변화의 뒤안길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물론 질문이 중요하지만 좋은 질문을 던져놓고도 이에 대한 대답의 질적 속성을 판단하는 심미안적 안목이나 비판적 사유 능력 없이는 좋은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인지를 알 수 없다. 좋은 질문은 자신이 관심을 두는 분야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갖추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는다. 전문지식의 깊이는 물론 배경지식의 넓이가 확보되어야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질문은 일방적이지 않다. 좋은 질문, 날카로운 질문, 뜻밖의 질문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갖추는 독립적인 역량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주변 상황과 만나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며, 전문지식이나 배경지식과의 부단한 대화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정곡을 찌르거나 전반적 상황을 정리하면서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질문을 던질 수 없다. 질문은 탈맥락적 공간에서 단순히 질문 주체의 호기심이나 열정만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 질문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질문하는 방법이나 기법을 가르치는 경우, 생각만큼 개대했던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이유는 질문은 기법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지식과 배경지식의 심오한 깊이와 풍부한 넓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질문은 독립적인 공간에서 외로운 탐색의 결과 생기는 개별적 호기심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적 화두의 태생적인 배경이나 사연을 기반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역동적인 관계망 속에서 잉태되는 사회적 합작품이다. 즉 질문은 개인의 독립적 역량의 산물이 아니라 질문을 장려하고 촉진하는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관계론적 역량의 부산물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현실 속 인간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평균으로 수렴되지 않는 개성과 몸 그 자체이며, 다양한 사회경제적·정치적·기술적 특성을 지닌 구체적인 사람들”(25)이 인공지능과 함께 어떤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미래 사회 변화추세나 기술발전 동향에 비추어 읽기와 쓰기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예단하기보다 타인에 의해 선언된 시대에 규정당하기보다 우리가 희망하는 시대를 직조하는 읽기와 쓰기의 가능성을 탐구”(65)하고, “저 먼 곳의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 정의하는 인공지능을 고민”(65)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예를 들면 인공지능 시대에 질문이 중요하다는 주장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과연 질문만 잘하면 우리가 원하는 답을 찾아낼 수 있는지를 다시 질문을 던져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프롬프트로 질문을 잘 디자인해서 인공지능에게 요청한 답에 흐뭇해하면서 감탄사만 연발하다가 우리가 잃고 있는 읽기와 쓰기의 진면목은 무엇인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관점의 변화가 도구를 사용하는 습관과 관습도 파괴한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을 결정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일상적 삶은 물론 사회경제적인 측면과 교육적인 측면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구적 관점에 비추어 본 인공지능은 양날의 칼처럼 사용자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두 얼굴을 지닌 실체로 인식된다. 저자의 인공지능에 대한 관점은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적 변화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다각적인 측면의 긍정적 순기능을 포함 역기능적 폐해나 한계 또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는 시각이다. 비판적 관점에 비추어 본 인공지능은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의 주체와 대상을 매개하는 인공물이나 도구의 중재(mediation) 개념에 주목하게 된다. 작가(subject)가 인공지능이라는 중재도구(mediational tool)를 활용하여 책이라는 대상(object)을 만들어 낸다. 중재도구인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혁신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고, 그걸 어떤 목적으로 누가 사용하는지에 따라 효율적인 창작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관점은 인공지능이 읽기와 쓰기에 미치는 리터러시 전반에 대한 사회문화적이고 교육적인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려는 노력이다.

 

인공지능이 중재하는 행위·의미·관계가 각자에게 어떻게 이해될지, 나아가 그 사회적 영향이 어떠할지는 예측하거나 일반화하기 힘듭니다”(343). 인공지능이 바꾸는 미래가 독립적 인공지능 기술이 주체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회문화적 관계맺음 방식의 변화이자 경제적 생산양식의 근본적인 전환에서 비롯된다. 교육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교육과 노동의 생태계 속에 새로운 비인간 존재가 자리를 잡아갈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새로운 도구를 얼마나 잘 활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새로운 비인간 존재와 공존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법을 고민하는 일”(393)이다. 인간만 주체적인 학습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발상에서 벗어나 인공지능을 비롯한 수많은 비생명체도 인간 학습자는 물론 다른 비생명와의 관계에 서로 다른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로 파악할 때 인공지능이 포함되는 새로운 학습생태계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 인간 학습주체의 주도적 학습능력은 한 사람의 외로운 노력으로 생성된 산물이 아니라 인간 학습자와 직간접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창발적 상호작용 덕분에 생긴 부산물이다. 인공지능은 물론 주어진 환경이나 맥락적 조건이나 변수들의 우발적 마주침과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예기치 못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계획에 없었던 새로운 의미가 탄생되고 뜻밖의 놀라운 문장이 단어들의 갑작스런 만남으로 건축되기도 한다.

 

사람의 언어는 침묵이자 주저함이고, 끝맺지 못한 문장이자 떨림이며, 푹 숙인 고개다

 

프롬프팅 디자인만 잘 하면 인공지능을 마치 나의 수족처럼 사용하면서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장된 주장을 주변에서 자주 만난다. 프로픔팅 엔지니어링이 앞으로 각광받는 새로운 분야라고 하면서 미래 인재의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으로 손꼽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과연 그럴까라고 갸우뚱하면서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프롬프팅으로 인공지능을 통해 텍스트를 생성하는 것이 읽기-쓰기의 본령을 저버리는 일은 아닐까요? 우리가 글쓰기에 마음과 정성을 쏟는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뚝딱 던져줄만한 텍스트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신속한 텍스트 생산의 과정에서 종종 잃어버리는 생각의 결·세심한 느낌·새로운 관점을 찾기위해서는 아닌가요?”(267). 텍스트는 한 사람이 몸담고 있는 컨텍스트에서 주체적인 고뇌와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경험과 생각을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는 과정에서 탄생되는 인고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를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효율로 급조할수록 나의 주체적인 생각과 열정적인 문제의식이 담긴 텍스트는 실종되기 시작한다.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던져 얻고 싶은 텍스트를 생성할수록 인공지능을 통한 흐릿한 읽기뭉뚱그리는 쓰기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저자와 자기 사이를 깊게 파고드는 읽기·경험의 박동과 손끝의 떨림을 새기는 불가능”(267)한 까닭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지 않는 다양한 사람은 저마다의 컨텍스트에서 나름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갖고 기대하거나 의도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쟁같은 하루를 보낸다. 신체성이 삶의 현장성을 만나 일어나는 구체성의 글쓰기는 이미 공식화된 프로세스대로 정해진 단어를 배열해서 문장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다. “인간은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자리에 놓기보다 단어들 사이를 유영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끝없이 재정의하며, 그들을 시시각각 재배치”(130)하는 와중에 문장을 건축하는 노동자다. 사람의 글쓰기는 자신이 겪어본 경험을 통해 생긴 감정이나 생각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내는 단어를 고르고 배치한 다음 다시 고민하며 알맞은 단어들이 알맞은 곳에서 자기 본분과 역할을 수행하며 작가가 쓰고 싶은 의도를 반영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한다. 이때 기존 단어가 다른 단어로 바뀌기도 하고 단어의 배열이 바뀌어 이전과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언어는 자신이 겪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단어 선택에 따르는 고뇌나 망설임도 없다. 그저 수학적 알고리듬에 따라 통계적으로 정확한 단어를 선택, 필요한 위치에 처방할 뿐이다. 인공지능의 언어는 정확하고 매끄럽고 깔끔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어떤 단어를 어느 곳에 배치해야 되는지, 그 자리에 그 단어가 적합한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망설이며 주저하는 끈질긴 자기와의 싸움은 생략되어 있다.

 

인공지능의 언어에 고뇌하는 사람의 깊은 심리적 아픔이나 선택적 의사결정에 따르는 사고와 언어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쓴다는 것은 기계적 단어 선택과 통계적 처리의 문제가 아니다. “삶에 뿌리박은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웹상의 방대한 빅데이터가 아니라, 여태껏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지금 자신이 발딛고 있는 자리에 맞는 적확하고도 온기를 담은 언어”(131). 이때 인간이 선택하는 언어는 침묵이고, 주저함이고, 끝맺지 못한 문장이고, 떨림이며, 푹 숙인 고개(132-133). 사람이 선택한 단어에는 그 사람이 겪어온 삶의 깊이와 넓이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있고, 결연한 용기와 멈출 수 없는 열정이 숨어 있으며, 통제 불가능한 감정이 단어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더욱이 사람의 글쓰기에는 글을 쓰는 주체는 물론 그 사람이 지향하는 또 다른 사람이나 사물은 물론이고 그 글이 탄생하는 상황적 맥락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담아 표현하려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사고와 언어의 유기적 결합”(135) 또는 텍스트와 사고가 변증법적으로 엮이는 과정”(136)이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바로 기계적 글쓰기와 인간적 글쓰기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인공지능은 정보처리 기계이자 통계 엔진이다

 

세계는 인간의 몸으로 끊임없이, 예고없이,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스며들고 침투”(143)하면서 인간은 세계와 만나면서 몸을 변형시켜 나갑니다. 하지만 기계학습은 이런 몸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습니다”(123). 사람은 몸으로 겪어내며 땀을 흘리지만 인공지능은 자신이 직접 겪어본 경험적 스토리가 없고 자기만의 서사도 없다. 땀을 흘리지 않는 인공지능은 기계학습을 통해 다양한 데이터를 배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도 느낄 수가 없지요”(123). 몸으로 느끼는 감정의 변화가 없는 인공지능은 자기만의 서사도 없고 언어도 없다. 인공지능의 언어는 주어진 문맥에 따라 몸이 감각하는 대화와 소통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변화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내뱉는 관념적인 머리의 언어다. 100% 다른 사람의 정보를 편집하고 가공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생성해서 보여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인공지능은 통계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개체(145)이자 일종의 통계엔진이지 세계에 대한 설명과 논리적 추론을 하지 못한다”(107). 수학적 알고리듬에 따라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나 생산성은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를 정도로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기계 학습을 통해 정보를 대량 생성한다.

 

인공지능은 쑥맥이다. 쑥맥은 눈치를 보지 않는다. 자신이 던진 메시지를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이해하는지를 알아치리지 못하고 사전에 알고리듬으로 짜여진 각본대로 말한다. 대화형 인공지능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인공지능이 수행하는 대화는 발화행위가 아니다. 주어진 맥락에 따라 시시각각 반응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의도나 의미를 주어진 상황적 맥락에 따라 바꿔나가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해나가는 사람이 대화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다. “너 물 먹었니?”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 의미가 목이 말라서 진짜 물을 마셨는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질문인지, 아니면 극심한 경기침체로 회사마다 구조조정을 하면서 인원은 감축할 수밖에 없어서 정리해고당했는지를 물어보는 질문인지를 인간은 알아차린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Did you drink water?”라고 번역해서 말할 뿐이다. “적확한 단어의 선택은 이전 텍스트를 적절히 이해할 때 가능(155)한 까닭이다. 인간의 모든 텍스트는 컨텍스트의 산물이기에 컨텍스트가 달라지면 동일한 텍스트도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된다.

 

인간은 과거의 데이터가 보여주는 압도적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언어를 새롭게 주조하는 이해”(156)를 보여주면서 타성에 젖은 언어, 점성으로 달라붙은 습관적인 언어 사용 방식에서 벗어나 아직껏 사용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해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시시각각으로 입력되는 외부의 신호나 기호, 사건과 사고의 의미를 보다 적확한 언어로 번역하면서 어제와 다른 문장을 건축하고 의미를 찾아낸다. “기계가 과거의 축적으로 현재를 인식한다면, 인간은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로 가는 자신을 끊임없이 인식하며,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잠재의 세계에 천착하는 경향”(156)을 보이는 이유도 계획된 각본이나 전통적인 매뉴얼에 따르는 습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의 가능성과 능력에 안주하지 않고 어제보다 나아지려는 욕망이 새로운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끌어당긴다. 마치 밀개와 끌개가 서로 밀고 당기면서 인공지능과 다르게 인간은 경험과 언어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면서 삶의 얼룩을 무늬로 변신시키는 부단한 수고와 정성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속도의 생태계가 읽기와 쓰기의 밀도를 잡아 먹는다

 

인간은 깊이의 존재라면 인공지능은 너비의 존재”(114). 수직적 깊이를 추구하는 인간의 사유체계는 수평적 확산 측면에 비추어 보면 인공지능을 능가하기 어렵다. 인공지능은 프롬프트 명령을 받는 순간 수평적으로 데이터를 검색, 선별, 편집, 가공해서 연결성이 높은 단어와 문장을 기계적으로 학습한다. 너비의 존재인 인공지능은 읽기와 쓰기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종래의 글쓰기를 구성하는 읽기쓰기의 방향성은 생성형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에서 쓰기읽기로 변화”(192)된다. 뭔가를 쓰려면 읽어야 된다는 전통적인 창작의 발상이 인공지능 기반 쓰기에서는 무너진다. 특정 주제와 관련된 글을 쓰려면 글감을 확보하거나 색다른 발상의 전환을 위한 다양한 관련 자료를 읽어야 하지만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에서는 프롬프트로 명령을 주면 입력된 주제와 관련해서 순식간에 글을 써서 보여준다. 그 글을 읽으면서 수정 보완 명령을 입력하는대로 글을 대신 써주는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 방식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면 어떤 문제나 한계가 노정될까. 읽지 않고 대신 인공지능에게 글을 써달라고 명령할수록 타인의 글을 하나하나 읽고 무엇을 배울지, 저자의 핵심의도가 무엇인지, 자신의 글에 어떻게 녹일지를 궁리하는 동안 우리는 타인의 경험과 지식·생각과 마음을 탐험”(193)하는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또 다른 문제는 긴 글이나 두꺼운 책을 읽고 요약하고 정리하는 능력도 인공지능에게 아웃소싱할수록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을 선별하는 판단능력도 없어질 뿐만 아니라 복잡한 생각의 핵심과 정수를 끄집어 나의 생각과 언어로 정리하고 구조화시키는 사고 능력도 실종될 수 있다.

 

휘몰아치는 속도를 잠재우고 반짝이는 눈으로 세계와 대면하고 자신을 돌보며 위로하는 읽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199). 미디어가 주도하는 삶의 속도변화를 감당하거나 통제하지 못하고 떠밀려 내려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가공한 정보에 휩쓸려가고, 다른 사람이 요약하고 정리한 결과물에 중독되어 나만의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침묵과 숙성의 시간을 갖기 어렵다. “심장의 울림·마음의 떨림과 텍스트를 읽는 일이 공명할 수 없을 때, 필자가 펼쳐 놓은 복잡다단한 감정의 지형과 미묘한 사건의 전개가 독자가 구획하는 좋아요/싫어요·재미있어요/지루해요의 이분법 속에서 말끔하게 삭제될 때”(199-200) 삶과 교육이 중심을 잡고 만들어가는 리터러시의 진정한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속도의 생태계가 숙고하면서 사색하는 읽기와 쓰기의 시간을 잡아먹을수록 각각의 속도는 읽기와 쓰기의 밀도에 어떠한 영향”(201)을 주는지를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생산성이나 속도가 구체적인 삶에 뿌리박고 전개되는 읽기와 쓰기의 밀도를 대체하는 심각한 위험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은 생성(becoming)없이 생성(generation)

 

생성(becoming)없는 생성(generation)의 확산을 경계”(69)하거나 “‘되기없이 만들기에 골몰하는 사회·체화 없이 외화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사회”(70)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지 않으면 생성형 인공지능이 생산한 텍스트의 의미를 재음미하지 못하고 인공지능의 글쓰기는 글 쓰는 주체와 객체, 사고와 언어,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밀한 상호작용이나 변증법적 교섭을 통한 창발적 생성(becoming)없이 기존의 방대한 빅데이터 언어 창고에서 늘 새롭게 생성(generation)할 뿐이다. “생산성은 과정을 지우고 효율성은 가치를 압도하며 텍스트 생성 마법에 대한 경탄은 읽고 쓰는 노동의 기쁨과 슬픔(23)이 희석될 수 있다. 과정에 투입되는 고뇌와 몸이 구체적인 현장성과 만나 땀으로 일궈가는 신체적 과정성이 방대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텍스트를 대량 양산하는 생산성을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컨텍스트와 무관한 텍스트의 허망함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본질을 보려는 눈을 가릴 것이다. 진정한 읽기와 쓰기가 이루어지는 경험과 언어의 유기적 순환을 끊어버리고 폐쇄적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된 텍스트를 편집해서 만들어내는 또 다른 텍스트가 글쓰기의 효율성을 대변할 때 느리고 더딘 비효율적 과정을 통해 땀과 눈물에 젖은 문장건축 노동의 진정한 의미는 실종되기 시작한다.

 

이미 생산되어 있는 단어들의 연쇄가 담아내지 못하는 세계를 탐색하는 일의 가치”(474)를 드높이고 데이터화되지 않았던 세계를 텍스트화하는 작업, ‘world’(세계)에서 ‘word’(언어)를 이끌어내는 일의 중요성”(474)을 더욱 강조하고 실천에 옮길 때 생성형 인공지능의 생성(generation)’이 갖는 치명적인 한계나 문제점을 또 다른 생성(becoming)’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릴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생성은 쓰기 전에 더 좋은 텍스트를 깊이 읽으면서 낭독도 하고,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어 노골적으로 다 보여주는 정보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삶으로 앎을 평가하고, 삶에서 몸으로 겪은 경험적 깨우침을 몸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고단하고 지루한 노동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생성(generation)’의 속도가 생성(becoming)’를 압도할 때 우리들의 깊이 읽기와 신체적 신뢰성이 살아숨쉬는 에토스가 살아 숨쉬는 글쓰기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필요하다.

 

생성 속도가 이해 노동을 대체한

 

인공지능을 사용해 빠르게 글을 생성한다고 해서 해당 글의 내용을 우리가 체화”(341)하지 않으면 나의 신념과 철학이 담긴 텍스트로 탄생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진공관에서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직조되는 논리적 사고과정의 산물이 아니다. 텍스트는 텍스트 생성에 관여되는 다양한 조건과 환경을 배경으로 도구나 기술이 매개되거나 사회적 관계 맺음 속에서 몸과 마음이 주어진 컨텍스트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체화 속에서 탄생되는 마주침의 산물이다. “텍스트를 벼리는 일은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고, 타인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자, 글을 읽고 써내는 일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고민”(418)하는 의미를 띄는 까닭이다. “인간의 언어학습은 경험의 총체와 연관을 맺고 진행”(118)되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의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거대언어모델은 텍스트, 즉 글을 통해 언어를 배우기 때문에 거대언어모델이 학습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경험 즉, 시간·공간·관계·주변환경과 물건, 온도·조명·소음·음악·상대의표정·말하는 사람간의 거리·제스처·몸의자세·이동·목소리의 질감과 크기·말의속도·키나 덩치등 대화 참여자의 신체적 특성 등을 포함하는 상호작용의 총체와는 거리”(119)가 멀게 느껴지는 이유다.

 

생성속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기술이 있더라도 이해를 위한 노동이 없다면 좋은 글을 탄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206).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할수록 텍스트를 생성하는 속도가 빨라져도 생성하기 위한 읽기나 생성된 텍스트를 읽기의 속도를 기술로 가속화시킬 수 없다. 특히 저자가 숨겨놓은 의미의 껍질이 두꺼울수록 단숨에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곱씹어먹으면서 소화시키는 일정한 시간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주어진 텍스트는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심장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특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생성하는 인공지능의 노동 강도는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그 글의 의미와 가치는 물론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어진 데이터를 수평적으로 검색, 편집한 결과에 대해서도 윤리적 책임감도 없는 인공지능의 텍스트 생성은 과연 누구를 위한 생성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청산유수의 텍스트는 분명 인간의 언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없습니다”(418). 텍스트 생성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지만 텍스트에 담긴 인간적 고뇌의 밀도나 강도는 점차 줄어들고, 텍스트 생성 기술이 발전할수록 텍스트에 담기는 컨텍스트의 복잡성이나 애매성은 거세된다.

 

인공지능의 텍스트는 결과(생산성)가 과정()을 삭제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작가되기의 조건, 작가의 형식적 정체성은 문법적 규준과 스타일적 상수들이 가진 굳건함의 밖에서만 진정으로 성립”(414)한다는 말은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의 작가되기는 결격사유가 될 수밖에 없다. 문법에 맞는 스타일과 형식을 갖춘 문장을 무한 생성하는 인공지능의 텍스트에는 가장 중요한 에토스가 빠져 있다. 에토스는 작가가 살아오면서 몸으로 겪어낸 내공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고유한 품성이나 겉으로 봐도 믿음직스러운 신뢰성을 말한다. 즉 에토스는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냉철한 판단력을 지칭하는 신언서판(身言書判)과 비슷한 맥락을 품고 있다. 에토스는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생기지 않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나 미덕을 갖춘 최고 경지의 전문성을 지칭하는 아레테(arete)를 기반으로 발휘되는 선의(eunoia)가 만드는 합작품이다. 에토스가 살아 숨쉬는 텍스트에는 기존 텍스트를 모아 다른 텍스트로 편집하거나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나오지 않고, “쓰기를 언어와 세계를 씨줄과 날줄로 엮는 연대의 과정으로 볼 때라야 글은 삶이 되고 삶은 글”(435)이 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나오는 윤리적 판단력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에토스가 살아 숨쉬는 텍스트가 생성되려면 기존 텍스트를 재구성하거나 분해 또는 조립하는 과정보다 날 것 그대로의 삶을 텍스트로 번역해보는 작업”(436)이나 텍스트에서 텍스트를 낳는 기호적 전환이 아니라 비-텍스트에서 텍스트로 변신하는 존재론적 변환의 경험”(436)이 축적되어야 한다. 자신의 일상이 살아 숨쉬는 텍스트의 텃밭에서 일어나는 우발적 마주침을 적확한 언어로 벼리는 과정에서 기존의 노동을 삭제하고 경험의 체화를 축소하는 인공지능의 사용에 반하는 저자의 집념과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드는 텍스트가 탄생된다. “결과가 과정을 삭제하는 경향 나아가 과정을 귀히 여기는 관점을 무시하는 습속의 강화”(453-454)생산성(productivity)’에 몰두하는 결과 중심 리터러시에서 벗어나 과정성(processibvity)’을 강조하는 리터러시로 거듭날 때, 조금 부족하고 틀리더라도, 조금 느리고 답답해도 자세를 낮추고 사람과 삶이 말하고 싶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고단한 아름다움의 꽃이 필 수 있다.

 

생성된 텍스트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해당 텍스트와 독자,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는다면 글이 우리 몸과 마음에 스미도록 하는 정성과 노동이 반드시 필요”(341)하다. 몸과 마음에 스미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는 정보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파편화된 관념의 부산물일수 있다. “기본적으로 쓰기는 단어를 하나하나 고르고 세심하게 배치하는 일”(342)이라면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텍스트는 글쓰는 주체의 고뇌에찬 결단과 결정이 만들어가는 배치의 산물이라기보다 거대한 언어모델이 논리적으로 조합해서 배열하는 자동화의 산물이다. 깊은 고심 끝에 단어의 배치를 순간적으로 바꾸면 생각지도 못한 의미의 연쇄가 갑자기 급습하면서 새로운 생각의 지도를 그리는 문장이 건축된다. 글쓰는 주체가 어떤 도구나 장비의 도움을 받아 어떤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창발적 상호작용을 거듭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텍스트가 얼마든지 탄생된다. 그 텍스트에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익숙한 단어의 낯선 조합으로 의미심장한 문장이 직조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연쇄가 언어적 점성과 관성을 깨뜨리고 또 다른 문장으로 건축되기도 한다.

 

 

인공지능의 텍스트는 결과(생산성)가 과정()을 삭제한다

 

지금 여기서 인공지능의 기술적 가능성과 도구적 효용성이 지향하는 생산성 담론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물론 한 개인의 독립적 역량으로 바라봤던 전통적인 리터러시 개념을 재개념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critical meta-literacy)를 제안한다. 전통적인 리터러시 관점의 관행적 사유를 되돌아보고, 속도의 생태계에 매몰되어 결과가 과정을 대체하는 생산성 담론을 비판적으로 탐색하며, 앎과 삶이 분리되어 따로 노는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 삶으로 앎을 생성하고, 살기와 읽기와 쓰기가 하나로 맞물려돌아가는 생태학적 리터러시로 나아가자는 주장이 바로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한 개인의 독립적 노고의 산물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공동으로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인공지능이 품고 있는 방대한 데이터는 수많은 개인과 조직이 오랫동안 축적한 수고의 댓가로 누리는 기술적 산물이자 다른 사람의 데이터를 일방적으로 탈취하여 독점 제품화시킨 자본화된 지식의 축적이다. 인공지능이 발휘하는 기술적 탁월성에 감탄한 나머지 인공지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태학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발전하는 기술적 정교함에 인간은 언제나 압도당하기 일쑤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광물과 에너지를 재료로 다종다양한 노동을 투입하여 만든 노동지능이며, 그런 노동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정성·궁리와 피땀·때로는 차별과 착취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식”(403-404)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가 활성화될 때 리터러시를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다양한 조직과 자원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적 역량이자 관계적 행위로 재개념화시킬 수 있으며, 개별적 경쟁력을 표준화된 점수로 측정하고 평가하는 인간 중심적 담론에서 벗어나 윤리적이고 생태학적인 성찰을 기반으로 다양성을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비인간도 포함되는 행위자 네트워크 개념으로 재정립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는 우리 몸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다른 몸과 동식물 그리고 대지와 바다를 어떻게 대하는가·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변화하는가로 증명”(498)된다.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는 기술발전의 속도와 능률복음이 전하는 달콤한 미래의 손짓에 몸을 맡기지 않고, 인공지능 기술이 매개하는 구체적인 일상적 삶의 방식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읽기와 쓰기의 본령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 역사적 경각심의 발현이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려는 자본의 유혹적 메시지가 담고 있는 권력의 원형을 비판적으로 조명해보고, 지금 여기서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변화 양상의 근본적인 동인을 파헤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일상의 작은 변화에 주목하며, 몸으로 읽고 쓰며 나누는 생명의 연대망을 구축하자는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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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4-08-08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럽게 써주신 리뷰를 읽고 도서 구매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청년 택배 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김희우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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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덕분에 누리는 인생의 축배’, 그 고마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진정한 대인배

청년 택배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를 읽고

 

모든 삶은 물류다. 오늘도 배송 완료.”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택배는 아무래도 주문한 책을 집으로 배송받는 서비스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면 빠르면 그 다음 날 새벽에 택배로 받을 수 있고 늦어도 2-3일 이내에는 원하는 책을 받아보는 순간의 기쁨도 누군가 대신 책을 배송해준 덕분에 누리는 일상의 작은 행복이다. 택배가 도착한 문 앞의 그 책과의 첫 만남은 언제나 설레는 가장 심장 뛰는 순간 중의 하나다. 만약 물류가 없다면 세상은 하루 아침에 정체된 상태로 주어진 장소에서 자가생산과 소비를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근본적인 경제체제를 전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상이 펼쳐질 것이다. 배송 완료된 그 택배 덕분에 나는 그걸 기반으로 내 삶의 또 다른 일상을 누리는 행복을 만끽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금까지는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다.

 

택배 기사 덕분에 내 삶에 경배하는 삶을 살다

 

청년 택배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는 한 젊은 친구가 우여곡절 끝에 택배 기사를 하면서 겪어낸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고뇌로 풀어낸 택배 기사 사투기다. 누군가에게 택배는 부르면 앉아서 편하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배송 시스템의 한 부분이지만 그걸 직접 수행하는 택배 관련 관계자들에게는 땀으로 얼룩진 고된 육체노동을 대가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먹고 사는 고귀한 실천이다. 그들에게 택배라는 단어는 일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고, 인간사의 음양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면서 엮여나가는 자기 삶의 내러티브다. 택배를 직접 몸으로 수행하는 택배 기사와 택배 기사의 고된 노동 덕분에 소소한 행복감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택배라는 단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강도와 의미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배송완료 메시지 뒤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땀이 흐른다.” 배송이 완료되기 까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에게까지 도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와 정성이 담겨 있는지를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자본주의의 속성상 많이 생산해서 소비자의 구매욕구와 소비 욕망을 자극, 보다 많이 팔면 되는 경제논리에 매몰된 나머지 내가 먹고 사는 과정에 관여되는 수많은 노동의 대가가 과연 얼마나 깊은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모두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중심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의 속도와 효율, 목표와 성과를 비롯 능률복음에 물들어 살면서 내가 누리는 지금 이 순간의 작은 행복을 만들어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와 노동의 대가를 잊어버리고 산다.

 

복잡성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마트에 가서 쇼핑을 하기 위해 입구에 정렬된 카트를 끌고 쇼핑을 한다. 쇼핑을 마치면 주차장에 카트를 버리고 가거나 일정한 장소에 놓고 간다. 거기에 아무렇게나 놓인 카트는 다시 아르바이트생이나 해당 직원들이 다시 마트 입구에 가지런히 정렬해놓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편리하게 쇼핑을 하는 과정에는 내 대신 누군가가 힘들고 복잡한 노동을 대신해주는 수많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스며들어 있다. 내가 경험하는 단순함이나 편리함은 나 이전에 누군가 복잡하거나 불편한 고된 노동 덕분에 누리는 행복이라는 점을 알면 사회는 더욱 인간적인 정이 오고가는 따듯한 공동체의 연대가 생길 것이다. 택배를 거의 매일 같이 이용하면서도 그 택배로 인해 내가 느끼는 일상의 작은 행복이 누구 덕분인지를 잠시라도 생각해본다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흔적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기적의 감동적인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단어에는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실려있다

 

나에게는 용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수많은 감정의 기복이 희로애락의 곡선을 타고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 단어에 담긴 내 삶의 흔적과 얼룩이 의미를 머금고 무겁게 짓누르는 단어가 바로 용접이다. 단어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향기를 머금고 있다. 용접으로 회색빛 청춘을 보내고 용접으로 일생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운명과도 같은 단어였기에 용접이라는 단어를 저울에 달아보면 내 몸 속에 잠복근무하고 있는 단어 중에 가장 무거운 중력을 지닌 단어다. 그만큼 회색빛 청춘을 용접과 함께 보내면서 용접이라는 개념은 관념의 파편으로 떠돌아다니지 않고 고달픔 속에서 내 삶의 신념을 잉태한 아픔의 단어였다. 폭염을 능가하는 전기용접의 불꽃 온도를 몸으로 겪어냈던 한 여름의 용접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등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고 가슴팍을 휘저으며 끝없이 흐르는 땀의 정체는 내가 느끼는 용접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적어도 나에게 용접은 용접봉으로 철판을 녹여 붙이는 접합 행위를 넘어선다. 나에게 용접은 젊은 날의 방황과 고뇌가 목적지를 상실하고 뜨거운 쇳물 속에서 하염없이 녹아내리는 혼절(昏絶)에 가깝다.

 

고된 택배 노동을 통해 하루치 삶을 견뎌내고 그것으로 젊음의 낭만과 청춘을 상쇄시켜 비루한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택배 기사의 책에서 택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택배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실감(實感)으로 다가오지 않고 체감(體感)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저마다 다른 택배의 무게를 고스란히 자신의 몸으로 나르면서 흘리는 눈물과 땀의 얼룩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역시 택배를 평소에 많이 활용하는 한 사람으로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을 때 무턱대로 택배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이야기 했던 순간이 떠올라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다. 한 사람에게 택배는 내가 겪어낸 용접만큼이나 인생에서 고단함의 무게가 고스란히 박혀버린 가장 무거운 의미로 온 몸에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다

 

택배가 오늘 몇 시쯤 도착할 예정이니 배송 장소를 저장해달라는 메시지가 올 때 언제나 나는 문앞이라고 저장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택배기사 입장에서는 문앞보다 경비실이나 1층 택배 보관 장소로 저장을 해야 택배 기사는 보다 많은 택배물건을 배송할 수 있고, 그 결과로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겠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뒤늦은 후회를 한다. 수백개의 택배를 주어진 시간 안에 배송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에는 언제나 심리적 압박감과 가중되어서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를 앞두고 발걸음은 언제나 더욱더 무거워질 수 있다. 오늘부터라도 택배 기사의 무거운 배송 노동의 일부라도 절감해주기 위해 문앞이 아니라 1층 경비실에 저장하는 문자로 답신을 보내면서 부가적인 메시지로 오늘도 당신들 덕분에 행복합니다라고 써놓고 싶어졌다.

 

청년 택배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를 쓴 육체노동자 택배기사의 삶은 몸이 중심을 잡고 배송 서비스를 담당하는 기사지만 사실 그에 못지않게 정신노동의 비중도 생각보다 크게 차지하는 일상이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러니까 택배 기사 따위나 하지라고 심한 갑질 발언을 한 어느 대학교수의 이야기를 들고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같은 대학교수지만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사람이 택배 기사의 고된 노동을 인정해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해도 되는지 한참 동안이나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새로 옮긴 주소로 쓰지 않고 예전 연구실 주소를 입력해놓고 왜 자기 택배가 안 오느냐고 정말 상식이하의 발언을 하는 갑집 고객 중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설을 퍼붓는 사람이 대학에 있다는 건 국가적 낭비이자 부끄러움이다. 그럼에도 측은지심으로 감싸안고 심하게 손상된 감정의 뒤안길을 어루만져 다시 힘을 회복한다. 그렇게 내면으로 그리고 밑으로 축적된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새로운 지혜가 싹튼다

 

웨이터 법칙이라고 있다. 웨이터가 와인을 따르다 실수로 고객의 옷에 와인을 흘렸을 때 두 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한 고객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매니저 나오라고 해, 너 해고될 수도 있다는 폭언으로 웨이터의 실수를 꾸짖는 경우다. 또 다른 고객은 전혀 다른 반응으로 웨이터의 실수를 인정하고 오히려 자기 잘 못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제가 오늘 샤워를 안 하고 나와서 다행이다. 집에 가서 옷을 바꿔 있고 세탁한 다음 샤워도 같이 하면 더욱 상쾌해질 것이다.” 이런 말을 들은 웨이터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말을 듣고 얼마나 감사하면서 미안해할까. 자기보다 더 힘든 처지에서 일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는 비즈니스를 하지 말라는 게 웨이터 법칙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누리는 모든 경우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모든 경우 다른 사람의 힘든 노동 덕분에 우리가 누리는 행복한 순간의 연속이다.

 

청년 택배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를 쓴 김희우 작가는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습관적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고객에게 불평불만의 소리를 들으면 잘못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찾는다. 내가 잘 못했으니 거울을 바라보면 반성하고 성찰하며 더 좋은 서비스를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작은 일의 성과나 실수도 늘 기록하고 반성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심판자의 질문을 던져 상대를 야단치거나 나무라지 않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이전과 다른 관문을 찾아 나선다. 대학교 총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기숙사에 배달되는 택배 분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CCTV를 설치해달라고 부탁, 분실사고를 혁신적으로 줄이거나 없앤 일이나 코로나가 한참 창궐할 때 비대면 서비스를 위해 1층에 택배를 배송하는 서비스를 설득 끝에 실현, 서비스의 질은 물로 효율도 함께 올리는 혁신적 사고를 몸으로 실천한다. 꾸준한 기록과 성찰이 기적을 부르고 통찰을 일으킨다는 점을 몸으로 보여주는 일상의 혁명가가 바로 김희우 작가다. 역지사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이처럼 세상을 움직이는 새로운 지혜가 싹튼다.

 

특별하지 않아도 대체불가능하게 특별하다

 

내가 잘 못했든 고객이 잘 못했든 항상 생각대로 풀리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고객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그 대안을 모색한다. 어제와 다른 시행착오를 해봐야 어제와 질적으로 다른 판단착오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의 관문을 열수 있음을 몸으로 실천하며 삶의 가치를 두 배로 올리며 다른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계영배(戒盈杯). 김희우 택배기사가 삶의 실천 덕목으로 몸에 배게 반복하는 미덕이 바로 계영배의 가치다. 계영배란 "잔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욕심과 탐욕이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이 가지고 있었다던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은 전체 술잔의 7할 이상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버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가득 채우려는 욕심을 포기하고, 100%를 다 가지려는 탐욕을 내려놓고 최소한 30%는 나에게 도움을 제공헤준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라는의미다. 혼자 독차지하려다 가진 것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고, 술잔이 가득차는 지도 모르고 계속 술을 따르다 술이 흘러 방바닥을 채우는지도 모를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택배로 더 많은 돈을 벌수록 그걸 모두 자기 노력의 산물로 생각, 다 차지하려는 욕심보다, 내가 이렇게 돈을 벌 수 있게 만들어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공을 돌리는 미덕이 계영배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만족을 얻고 안주하는 방법도 인생을 살아가는 한 가지 대안이지만, 지금 여기서의 삶에 안주하는 순간, 더 이상의 성장과 발전은 없다. 지금 하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내 일을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질문도 많아지고 더 좋은 가능성의 관문도 열린다. 세상은 택배 기사가 매일 경험하는 것과 같이 생각보다 생각만큼 세상은 바뀌지 않고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 때 사람은 이전과 더 낮은 자세로 배우고 익히는 기회를 잡고,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할 수 있다.

 

땀을 흘린 만큼 돈이 들어오는 정직하고 투명한 일, 나쁜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이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228)이 택배라고 고백하면서 저자는 누구나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는 소중한 일의 의미를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택배는 인생 밑바닥을 기는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세상에서 자기 삶의 보배를 택배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는 저자의 겪어본 경험담이 몸을 파고드는 신체성의 메시지로 들린다. 생각만 해본 사람은 당해본 사람을 못 당한다. 직접 겪어본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등불을 밝혀주는 경전이다. 당해본 사람의 육체적 담론, 겪어본 사람의 신체성의 언어가 정처없이 표류하는 관념의 파편과 머리의 언어를 이긴다. 오늘도 택배를 통해서 인생의 축배를 들고 있는 김희우 작가가 고백하는 말, “나는 남들처럼 특별하지 않아도 특별”(228)하는 수준을 넘어 대체불가능한 김희우의 원본대로 살아가면서 오늘보다 명랑하고 행복한 코나투스를 따라가는 멋진 도전 여정이 무한대로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땀을 흘린 만큼 돈이 들어오는 정직하고 투명한 일, 나쁜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이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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