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니스 - 자기 자신으로 살게 하는 라이프 코칭 안내서
육현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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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니스(Oneness)’홀니스(wholeness)’

원니스’, ‘코나투스를 찾아가 홀니스를 만나다

 

봄날 어느 저녁에 삶은 계란, 계란말이, 계란 프라이, 계란찜이 만나 저녁요리상에 올라와 저마다 자기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맨 먼저 삶은 계란이라고 설파하는 삶은 계란이 입을 열었다. 삶은 계란과 다른 삶은 계란과의 만남은 마치 당구공처럼 부딪치는 찰나의 스침일 뿐이다. 스쳐 지나갔지만 스며들지 못하는 만남이고 관계다. 스쳐 지나갔지만 스며들지 못한 삶은 계란, ‘삶의 계란이 되지 못했다고 서글퍼한다. 이어서 계란말이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동물성과 식물성 뒤섞여 불판에 말려들었지만 산산조각 이산가족된 계란말이, 서로를 말아먹고 말이 통하지 않아 서글프다고 글썽거린다. 계란 프라이가 뒤를 이어 말을 전한다. 기름에 튀겨져 흰자위로 어깨동무는 했지만 노른자가 말하는 심장은 통하지 않은 계란 프라이, 튀지 못하고 튀겨져 삶만 구겨졌다고 한탄에 한탄을 거듭한다. 마지막으로 계란찜에 식탁에 등장하면서 인생교훈을 촌철살인의 언어로 갈파하다. 뒤엉켜 한 그릇에 녹아들었지만 정작 나는 없어진 계란찜, 내 것으로 찜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소연을 거듭한다.

 

계란의 정체성은 삶은 계란이 되면 다른 삶은 계란과 스쳐 지나가는 만남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을 받거나 주지 않고 자기 주관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계란찜이나 계란말이가 되면 존재 자체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계란이나 음식재료와 뒤섞이면서 정체성이 변질된 제3의 자아로 탈바꿈된다. 한편 계란 프라이의 경우 강한 연대의식을 느끼면서 흰자위끼리 어깨동무를 하며 우정을 나누지만 존재의 핵심은 뒤섞이지 않고 자기 존재의 색깔을 유지하는 화이부동의 만남을 이어간다.

 

삶은 계란과 계란 프라이, 계란말이와 계란찜, 홀리스에 도달하지 못하다

 

요리상 위의 계란들은 현재 자신의 상태에 절망하고 있다. 이 절망의 핵심은 진정한 나(Authentic Self)”를 어떻게 유지하거나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삶은 계란과 계란 프라이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를 유지하려 한다. 삶은 계란은 당구공처럼 타자와 부딪칠 뿐 스며들지 못하는 고립된 개인(individual)’이며, 계란 프라이는 어깨동무(연대)는 하지만 심장(핵심)은 통하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상태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반해 계란말이와 계란찜은 타자와 뒤섞이며 정체성이 변질된 상태다. 계란말이는 이산가족이 되어 말이 통하지 않고, 계란찜은 뒤엉켜 녹아들었으나 정작 라는 존재는 사라져 버린 상실감을 토로한다. 이 우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타인과 관계 맺으면서도 고립되지 않고, 통합되면서도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네 가지 계란 요리의 상태는 완벽한 통합 상태인 홀니스(wholeness)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한 단계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이 홀니스에 이르기 위해서는 별도의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에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인 개인(Individual)’에 반기를 들며, 관계에 따라 나뉘는 분인(dividual)’을 제시한다. 우리는 부모님 앞에서의 나, 직장 동료 앞에서의 나, 연인 앞에서의 나가 각각 다르다. 이 중 어느 하나가 진짜 나이고 나머지는 연기가 아니다. 분인은 불변하는 진정한 자아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아 사상과 궤를 같이하며,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때그때 생성되는 마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삶은 계란과 계란 프라이가 느끼는 한계는 히라노 게이이치로의 분인(dividual) 개념으로 설명된다. 인간은 나눌 수 없는 단 하나의 정체성(individual)이 아니라, 관계 맺는 상대에 따라 분화되는 여러 개의 자아(dividual)의 집합체다. 삶은 계란은 단단한 껍질과 속으로 자신을 가둔 고정된 개인(individual)’이다. 그는 분인적 유연성을 발휘하여 타자에게 스며들지 못한다. 계란 프라이 역시 노른자라는 핵심을 고수하며 타자와의 완전한 융합을 두려워한다. 이 고정된 상태는 코나투스(Conatus)를 저해한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기쁨을 증가시키려는 욕망/애씀이다. 삶은 계란은 타자와 교류하며 더 큰 기쁨을 얻으려는 코나투스가 고립에 의해 억압당한 상태이며, 계란 프라이는 타자와의 깊은 정서적 유대(심장의 통함)를 통한 코나투스의 확장에 실패한 상태다.

 

반면, 계란말이와 계란찜은 통합을 시도했으나 외려 절망에 빠졌다. 이는 원니스(Oneness)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자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사상을 슬프게 해석한 결과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원리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독립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조건)의 결합체일 뿐이다. 자동차의 부품을 다 해체하면 자동차라는 실체가 남지 않듯, 우리 몸과 마음의 요소를 분석하면 그 어디에도 영원불변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고정된 나에 집착하지 말라는 역동적 관계의 선언이다.

 

육현주 대표가 말하는 원니스는 경계가 허물어지며 일체가 되는 통합이지만, 이것은 결코 나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계란찜은 타자와 물리적으로 뒤엉켜 녹아들었지만(통합), 정작 라는 고유한 존재감이 사라졌다고 하소연한다. 이것은 진정한 합일이 아닌 자아의 상실이다. 계란말이 역시 서로를 말아먹는(잠식하는) 불통의 통합일 뿐이다. 제법무아는 고정된 참다운 자아의 실체는 없다는 사상이다. 계란찜은 제법무아의 상태(변하지 않는 나는 없다)Culinary(요리적)으로 구현했지만, 이것이 지혜나 해탈이 아닌 내 것으로 찜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허무주의적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자아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코나투스(존재 유지 욕망) 역시 발휘될 기반을 잃어버린다. 코나투스는 '라는 주체가 타자와 상호작용하며 확장되는 것인데, 주체가 사라져 버린 계란찜은 더 이상 기쁨을 느낄 수도, 증가시킬 수도 없는 상태다.

 

타자는 나를 말아먹는존재가 아니라 나를 완성시키는존재다

 

그렇다면 원니스가 코나투스를 만나 홀니스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신세 한탄을 거듭하는 계란들이 홀니스(합일로서의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참나라니, 나참!이라는 시에서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내가 되는 영롱함이라는 시를 쓴 김선우 시인의 이슬방울이 보여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김선우 시인의 이슬방울은 투명하고 연약하지만, 타자와 만날 때 당구공처럼 튕겨 나가지 않는다(삶은 계란 거부). 또한 타자와 섞여 자신의 투명함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계란찜/계란말이 거부). 이슬방울은 서로에게 스며들되, 서로를 온전히 비춰주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진정한 완성을 보여준다. 이것이 육현주 대표가 말하는 분열된 내가 진짜 나와 만나는 원니스의 순간이다. 타자와 섞이기 전에 고립된 개인(individual)’이 아닌, 먼저 내적 통합을 이룬 주체로서 내 안의 분열을 통합하고 강건한 코나투스를 가진 진짜 나로 서야 한다. 이렇게 강건한 코나투스를 가진 주체들이 만날 때, 이들은 자신의 색깔을 잃을까 두려워 경계를 쌓지 않는다(계란 프라이 거부). 이슬방울처럼 서로에게 투명하게 스며드다.

 

김선우 시인은 이슬방울을 통해 무아(無我)와 분인(分人)이 어떻게 참나에 도달하는지를 시적으로 증명한다. 이슬방울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서늘한 밤공기, 풀잎의 경사, 적당한 습도라는 인연이 모여 잠시 맺힌 순간적 존재다. 이슬방울 속에는 온 우주(햇살, 바람, 나무)가 비치고 있다. 여기서 참나는 나 홀로 고고하게 존재하는 본질이 아니다. 주변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그들을 온전히 비추고 있는 투명한 관계의 상태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슬방울이 깨지는 순간 그 안의 우주도 흩어지듯, 관계를 벗어난 참나는 존재할 수 없다. 이슬방울처럼 서로에게 스며들 때, 고정된 자아에 대한 집착(individual)이 사라지는 진정한 제법무아를 경험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아 상실(계란찜)이 아니라, ‘자연그리고 큰 존재로 확장되는 코나투스의 폭발적 증가다. 이 순간이 바로 육현주 대표가 말하는 통합 또는 합일로서의 원니스, 즉 홀니스(Wholeness)의 순간이다. 네 가지 계란 요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계와 정체성의 한계에 부딪혀 한탄했다. 이들은 타자와 부딪치거나(삶은 계란), 타자와 섞여 나를 잃거나(계란찜), 표면적인 연대에 멈췄을 뿐이다(계란 프라이). 이들이 구원받는 길은 이슬방울처럼 타자에게 투명하게 스며들되, 서로의 코나투스(존재 애씀)를 온전히 비춰주고 확장시키는 진정한 원니스를 실현하는 것이다.

 

고정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진정한 제법무아), 경계를 허물어 나-타인-자연이 일체가 되는 순간, 타자는 나를 말아먹는존재가 아니라 나를 완성시키는존재가 거듭난다. 이때 3(감동, 감탄, 감사)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홀니스(Wholeness)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신세 한탄을 하던 계란들이 서로를 이슬방울로 바라보는 순간, 요리상 위의 저녁 자리는 절망의 공간이 아닌, 서로의 존재가 통합되며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홀니스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제법무아에 따르면 고정된 라는 알맹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만나는 타자와의 관계만큼 존재한다. 이슬방울이 다른 관계의 그물망에 투명하게 교차할 때 비로소 참나가 반짝인다. 결국 제법무아와 분인, 이슬방울이 공통으로 말하는 바는 나라는 존재는 명사(고정된 것)가 아니라 동사(변화하고 관계 맺는 것)”라는 사실이다. ‘참다운 나란 내면 깊숙이 숨겨진 보물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둘러싼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를 얼마나 풍성하고 투명하게 맺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상태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머무는 장소, 내가 읽는 책들이 곧 를 구성하는 분인들이며, 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제법무아의 지혜 속에서 이슬방울 같은 참나를 경험하게 된다.

 

원니스코나투스가 폭등하는 순간 다가오는 홀니스로서의 참다운 자기다움이다.

 

“‘Oneness’는 하나를 뜻하는 ‘One’에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 '-ness'가 결합된 단어로, 중세 영어 ‘onness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단어 그대로 전체성’, ‘하나 됨’, ‘하나임의 의미를 넘어 "분열된 자아자기 Self’로 통합되는 과정”(5)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원니스는 정체된 명사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사로서의 부단한 생성을 반복하며 나다움의 온전한 모습으로 부단히 변신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정체성은 정체되어 존재하는 명사가 아니다. 정체성은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통해 자극을 받는지에 따라 나의 관점과 해석이 달라지면서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는 역동적인 동사다. 마음속에서 수시로 변덕스럽게 움직이는 마음 도깨비도 외부에서 입력되는 감정적 자극에 따라 부정적인 자아로 밑바닥을 기어 다니다가도 밝고 명랑한 기운을 만나면 긍정적인 에너지 모드로 급변한다. 분열된 자아(ego)는 방탕 생활을 할 수도 있고 기나긴 방랑을 거듭하다 대책 없이 방황하다 진짜 나(self)와 만나 통합되는 순간, 내가 하면 신나는 방향을 잡을 수도 있다.

 

원니스는 분열된 내가 진짜 나와 만나는 순간, -타인-자연 그리고 어떤 큰 존재와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일체가 될 때 3(감동, 감탄, 감사)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면서 통합 또는 합일로서의 원니스, 즉 홀니스(Wholeness)의 순간”(6-7)이다. 자아가 자기로부터 분열되어 있을 때 인간은 무력감을 느끼지만, 원니스(Oneness)라는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자기(Self)와 통합될 때 이 존재의 힘(역능)은 극대화된다. 이때 느끼는 압도적인 ‘3(감동, 감탄, 감사)’은 물론 감격하고 감명받으며 내 안의 코나투스(Conatus)가 억압에서 벗어나 가장 온전하게 발현되는 홀니스(Wholeness)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분열된 자아가 참다운 자기와 만나는 순간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코나투스와 만나는 접근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본질적인 힘을 뜻하다. 코나투스는 심각한 가뭄으로 굳어진 땅 속, 메마른 돌틈이나 콘크리트 틈새, 그리고 뙤약볕이 내리쬐며 달궈진 아스팔트의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씨앗을 틔워 성장하려는 강렬한 생존 본능이다. 어떤 열악한 환경에도 척박한 환경을 뚫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는 본원적인 힘이다. 코나투스는 또한 거센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촛불의 안간힘이다. 외부 억압이나 방해에도 존재의 살아가려는 욕망을 굽히지 않고 자기 몸을 끈질기게 태워 빛과 열을 내는 촛불처럼 스스로를 지키며 끈질기게 버티는 생존본능이다. 코나투스는 스스로를 지키는 끈질긴 생명력의 원천이다.

 

여기서 말하는 홀니스는 단순히 섞이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자아가 진정한 자기를 만나고 타자 및 세계와 경계 없이 합일되는 감동과 감사의 순간이다. 결국 원니스는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코나투스라는 자기다움을 드러내려는 생명의 동력을 통해 끊임없이 진정한 나(Self)’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여정인 셈이다. 자아가 자기로부터 분열되어 있을 때 인간은 무력감을 느끼지만, 원니스(Oneness)라는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자기(Self)와 통합될 때 이 존재의 힘(역능)은 극대화된다. 이때 느끼는 압도적인 ‘3(감동, 감탄, 감사)’은 물론 감격하고 감명받으며 내 안의 코나투스가 억압에서 벗어나 가장 온전하게 발현되는 홀니스(Wholeness)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원니스는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코나투스라는 생명의 동력을 통해 끊임없이 진정한 나(Self)’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여정인 셈이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온전한 전체인 동시에, 더 큰 전체의 부분이다

 

통합 철학자 켄 윌버(Ken Wilber)의 말이다. 모든 존재는 부분과 전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통해 부단히 자기 변신을 거듭하며 가장 나다운 자기다움을 향해 부단히 성장하고 장성한다. 우주라는 완전한 전체(홀니스, 원니스) 속에서, 각 개체는 자신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고유한 힘(코나투스)을 발휘한다. 흥미로운 점은, 개체가 단순히 전체의 부속품이 아니라 전체의 질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축소판(프랙털)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부분과 전체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성을 잃고 완전히 똑같은 하나로 뭉개져 있지도 않은 오묘한 상태(不一不二를 이룬다.

 

불일불이不一不二)’는 한자 그대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는 뜻으로, 주로 동양 철학에서 우주의 실상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이다. 이 개념은 앞서 다룬 프랙털의 구조적 딜레마와 코나투스의 동력적 딜레마를 완벽하게 해결해 준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바다와 파도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파도(개체)는 바다(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존재할 수 없다. 파도의 본질은 그저 바닷물일 뿐이다. 앞서 프랙털(내 안에 전체의 구조가 있음)과 코나투스(나의 에너지가 우주 전체의 조화와 연결됨)에서 보았듯, 부분과 전체는 뚝 떨어져 분리된 별개의 존재, 이 아니다. 즉 홀니스와 원니스는 둘이 아니다(不二). 하나도 아니다(불일, 不一). 그렇다고 해서 파도와 바다가 완전히 똑같은 하나도 아니다. 바다에는 수백만 개의 각기 다른 파도가 끊임없이 친다. 어떤 파도는 높고 세차며, 어떤 파도는 잔잔하다. 각 개체는 자신만의 고유한 형태(프랙털의 한 조각)와 생명력(코나투스)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개성이 다 뭉개진 밋밋한 덩어리가 아니니 완전히 하나라고 부를 수도 없다.

 

부분 속에 담긴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프랙털(Fractal)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나 자연은 단순히 여러 부품이 조립된 기계가 아니라, 쪼갤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바탕, 즉 홀니스(전체성)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전체 속에서 부분인 개체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프랙털은 잣나무 가지, 눈송이, 해안선처럼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성질(자기 유사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고사리잎의 아주 작은 잎갈래 하나를 떼어내서 확대해 보면, 놀랍게도 큰 고사리잎 전체의 모양과 완벽하게 닮아 있다. , 프랙털의 관점에서 부분은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단순한 파편이 아니라, 전체의 질서와 정보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축소판이다. 이 원리를 홀니스에 적용하면, 우주 안의 개체(인간, 동물, 별 등)는 유한하고 작아 보이지만 그 내면의 구조는 거대한 우주 전체의 패턴을 품고 있다. 부분 안에 이미 전체가 들어있는 오묘한 섭리를 발견한다.

 

이 거대한 퍼즐을 단계별로 맞춰가기 위해, 나를 향한 에너지가 우주로 확장되다 만나는 코나투스와 원니스의 마주침은 신비한 만남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생명력을 확장하려는 본질적인 힘, 즉 자기 보존 욕구를 넘어 가장 나다운 자기다움으로 살아가려는 강렬한 욕망을 뜻한다. 얼핏 들으면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이기적인 생존 경쟁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힘은 자연스럽게 원니스(하나 됨)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앞서 프랙털에서 보았듯, 개체는 결코 전체와 분리되어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맑은 공기를 마시려면 지구의 숲이 건강해야 하고, 내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내가 속한 사회 공동체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 개체가 자신의 생명력(코나투스)을 온전히 꽃 피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와 타인, 인간과 자연이 깊이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원니스)을 깨닫고 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다. 철저히 나를 위하는 방향이 결국 전체를 위하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논리다. 우리가 숨을 쉬기 위해 나무의 광합성에 의존하는 것처럼 말이죠. 혹시 우리 일상이나 자연 생태계에서 이처럼 '개체의 생존이나 이익(코나투스)'을 추구하는 행동이 결국 '전체의 조화(원니스)'와 연결된다.

 

우주(전체)와 나(부분)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은 완전한 하나(홀니스, 원니스)이지만, 동시에 우주는 각 개체가 고유한 힘(코나투스)을 발휘하며 다채로운 형태(프랙털)로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것이 바로 불일불이의 신비다. 바다와 파도의 비유처럼,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분명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불이),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살아 숨 쉬는(불일)” 관계를 경험하는 곳이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코칭은 상대의 잠재성을 일깨워 경이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다정한 상상력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은 다른 말로 코나투스가 폭등하는 순간이다. 코나투스대로 살아가면서 전율하는 행복감이 내 몸을 파고들 때, 그 순간은 우주와 나와 내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공중부양되는 느낌이다. 이런 원니스의 충일감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낸 육현주 코치의 원니스라는 책은 나 자신이 존재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저도 육현주 코치를 십수 년간 가까이서 지켜보면 깨달은 산증인으로서 이 책을 강력하게 권하는 추천사도 아래와 같이 썼다.

 

코칭은 내가 진정한 나와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발견의 과정이다. 또한 스스로를 직시하고 치유하도록 돕는 선물이다. , , 우리, 우주는 독립된 하나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뿌리로 단단히 연결된 거대한 한 그루 나무다. 개별적 파도로 넘실대며 떠돌아도,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면 결국 동일한 바다에 닿는다. 그것이 하나됨Oneness, 즉 원니스다. 이 책은 오랜 경험과 깊은 탐구를 바탕으로 독자 스스로 자기 자신과 둘러싼 세계를 탐구하도록 안내한다. 원하는 길을 찾도록 내면의 나침반 역할을 함은 물론, 따뜻하게 위로하며 곁을 지키는 단단한 동반자 역할을 해낸다. 살아있음의 전율을 온몸으로 느끼며, 삶을 감동과 감탄과 감사로 물들이고 싶은 이들에게 일생의 지침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니스하는 삶은 ’ ‘스스로찾아가는 역동적인 여정에서 만나는 신비하고 경이로운 선물이다. 그 선물을 이미 내면에 갖고 있으면서도 그걸 일깨우지 못하고 마음 도깨비가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완전(complete, total)하고 완벽(perfect, flawless)하지 않지만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코나투스의 힘으로 원니스를 찾아 온전한(intact, sound) 전체(wholeness)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북두칠성처럼 우리가 걸어가는 밤길의 다정하고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다정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힘을 다정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정함이란 상상력을 말하는 겁니다”(222). 나쓰카와 소스케의 신의 카르테 0’중에서 나오는 말이다. 코칭은 상대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마음껏 발휘해서 원니스로 살아가며 코나투스를 만나 홀니스가 되는 경이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다정한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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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물리학 - 개정증보판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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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물리학목적지에 있지 않고 본적지에 있습니다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p.21). 애나 로웬하웁트 칭의 세계 끝의 버섯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는 이 문장을 산책이 아니라 으로 바꿔서 읽습니다.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인두같은 문장을 발견한다.”

 

나는 림태주 작가의 관계의 물리학을 읽으며 인 문장을 대입해서 읽었습니다. 관계의 물리학은 갓 삶아낸 고구마를 먹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기존의 앎에 상처가 생기는 인두같은 문장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밑줄을 긋다 말고 자주 멈춰서서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가락을 여러 번 데이는 즐거운 고통을 감내하면서 한꺼번에 읽고 말았습니다. 읽은 게 아니라 읽고 말았으며, 읽어버렸습니다. 그대와의 바람직한 관계의 목적지를 찾아 끝까지 읽었지만, 그대와의 관계는 이미 내면 깊숙이 본적지에 존재한다는 소중한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문장이 담고 있는 관계에 대한 보이지 않는 사유의 깊이가 심장을 파고들어 의미의 무늬를 남깁니다. 문장의 행간에서 저자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속삭이는 데 생각지도 못한 울림으로 다가와 귀를 먹게 할 정도로 우렁찹니다. 다른 존재와의 낯선 마주침이 영롱한 이슬방울을 만들 듯, 다른 존재를 받아들여야 새로운 관계의 물리학이 생기는 사람과의 만남이 따듯한 봄날의 온기로 온몸을 스며듭니다.

 

열길 물속은 잴 수 있지만 한 길 사람 속을 알 길이 없습니다. 저자가 관계의 물리학을 기반으로 흔들리는 관계의 흐름을 헤아림으로 보살피면서도 관계의 심리학으로 바라보는 다정한 손길을 내미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문장은 이유없는 다정함과 소중한 마주침으로 건축된 깨우침의 향연입니다. 다름이 뒤섞이며 만드는 관계의 화학은 물론 빛보다 열 에너지로 풀어내는 관계의 열역학’, 그리고 관계의 윤리학을 넘나들며 깨달은 일리있는 정문일침이 저자와 독자 사이를 밀고 당기는 다정함의 중력으로 작용하며 빠져들게 만듭니다.

 

동시에 이 책은 나의 확신으로 이해됨은 오해의 불씨를 키울 수 있고, 나의 비판이 안락한 과녁 주위만 맴도는 인식의 위험한 비난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진심으로 끌리는 관계의 미학으로 풀어냅니다. “동사는 주어를 만날 때까지 끝끝내 기다린다. 사랑은 동사의 의지다”(107). 오늘도 주어를 기다리며 서성거리는 동사가 품을 의지를 어떤 의도로 전달할지 설렘을 참지 못하고 그리움으로 물들이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끌어당기는 다정함의 중력을 가졌지만, 부딪혀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맴도는 별입니다. 한번 누군가에게로 향하기 시작한 마음은, 멈추려 애를 써도 자꾸만 네 곁으로 굴러가려는 관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내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작용을 하면, 내 마음속에서는 정확히 똑같은 크기의 따뜻한 파동이 일어나는 까닭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관계의 진리를 파헤친 관계의 물리학은 노벨 관계의 물리학상이 생기면 처음으로 수상작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듯, 인간은 관계의 그물로 지은 집에서 거주합니다.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맺어지는 관계는 운명을 바꾸는 혁명적 사건이 될 뿐만 아니라 한 세상을 열어젖히는 전대미문의 관문입니다. 한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이 누군가에는 한 세상을 열어젖히는 운명적 사건이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관문이 열리는 위대한 출발입니다.

 

보이지 않는 관계의 원리를 보이는 관계의 물리학으로 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던 림태주 시인의 분투는 문장 곳곳에서 애쓰기의 흔적으로 잠복 근무중입니다.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잊혔을 때죽는다고 만화 원피스의 등장인물인 닥터 히루루크가 남긴 유명한 대사를 기억하면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잊혀져가고 있지는 않은지 관계의 물리학을 성찰의 거울로 삼아 우리 사이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전망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져봅니다.

 

누군가는 멀어지고 희미해졌지만 고단한 삶의 안쪽을 여전히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도 관계의 물리와 심리와 윤리를 통해 인간관계의 원리를 배우고 익히는 소중한 순간을 만끽하게 해준 림태주 작가님에게 마음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동사는 주어를 만날 때까지 끝끝내 기다린다. 사랑은 동사의 의지다"(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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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주도권을 디자인하라 - AI를 도구를 넘어 무기로 만드는 질문의 힘
박용후 지음 / 경이로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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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지 않고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6가지 인간상의 미래

박용후의 생각의 주도권을 디자인하라를 읽고

 

 

AI가 주도하는 생각에 종속당하지 않고 생각의 주도권을 거머쥐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해야 할 한 가지는 전대미문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중, 무엇이 곧 틀릴 수 있는가?” 옳다고 믿고 있던 신념도 통념으로 뒤바뀔 수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이나 가치관, 판단기준 등이 여전히 현실에서 유용하거나 유효한지의 여부를 부단히 질문을 던져 확인하지 않으면 진리도 무리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이다. 확신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나브로 부패한다. 부패되는 확신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던져 여전히 확신은 신념으로 작용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해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부패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은 방부제다. 질문은 단순히 답을 얻기 위한 촉발점이라기보다 기존의 타성이나 관성에 젖은 고정관념을 통렬하게 깨부수고 낯선 생각을 잉태하게 만들어주는 촉발제다.

 

우리는 AI가 던져주는 정답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인간이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성찰하지 않는다. 스마트함과 편리함, 효율 뒤에 숨은 사고의 실종은 그 어떤 기술적 진보보다 더 위험한 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거나 지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AI함께 사유하는 존재로 진화해야 한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질문하는 힘을 가지고 말이다. “질문은 생각의 씨앗”(53)이자 이 시대의 나침반이며 관점을 배우는 레버”(296)이고 사고를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도구”(297). 자신이 얻고자 하는 답을 위해 질문만 디자인하지 말고,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 AI가 대답한 문장에 담긴 주장의 신뢰성이나 타당성에 관한 비판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 없이 AI의 사고 논리나 정답에 의존할수록 AI가 양산하는 방대한 답에 질식사할 수 있다.

 

AI는 몸이 없어서 직접 겪어본 경험이 없다. 겪어본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AI가 던져주는 답은 자기만의 주관적 신념이나 경험적 통찰이 없다. 문제는 AI를 비롯한 SNS에 의존하며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 접속으로 대리 경험을 할수록 타인의 아픔에 측은지심을 발동, 공감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세나 태도를 갖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나아가 질문 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의존, 사고의 식민지화가 가속화되어 결과적으로 AI가 던져주는 주장의 신뢰성이나 타당성에 대해 반문하지도 않는다. 이제 인간은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없어서 자기 주도적으로 뭔가를 선택하지 못하는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인공지능만도 못한 인간지능으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탄생하는 6가지 인간상을 생각해 보았다.

 

경험하지 않는 인간-모험이 부족한 인간

 

AI가 제공하는 가상 경험이나 정제된 정보에만 의존하여, 실제 세계에서 직접 부딪히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는 생생한 경험과 그 과정에서 얻는 성장의 기회를 상실하는 인간, 즉 경험의 폭이 좁아지는 인간(The Experientially Limited Human)이다. AI 기반 여행 추천 앱이 제시하는 최적화된 경로와 유명 관광지 정보만을 맹신하여, 예상치 못한 장소를 발견하거나 현지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의 기회를 놓치는 여행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경험의 멸종에 보면 베자듀(Veja du)라는 개념이 나온다. 현실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걸 가상으로 경험한다는 의미다. 경험(經驗)과 실험(實驗)을 뜻하는 experienceexperiment에서의 peri-시도에 가깝고, 위험(危險)이나 모험(冒險)을 뜻하는 ‘peril’에서의 ‘peri’위험을 의미한다. 경험은 본래 수준과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위험한 행동이자 실천이다. 위험하다고 경험하지 않고 마치 경험한 것과 같은 가상경험을 반복할수록 베자듀(Veja du)라는 개념을 경험한다. 베자듀는 현실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걸 가상으로 경험하는 현상이다.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을 AI 챗봇에게 질문하여 요약된 정보만을 습득하고, 직접 자료를 찾아 읽거나 실험하며 깊이 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을 생략하는 학생도 베자듀에 해당된다. 하지만 반대로 '베자듀'는 위험한 경험을 하지 않고 가상세계에서 편리하고 편안한 간접경험만 반복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디지털 가상 기술이 발전하고 인공지능 기술도 더불어 발전하면서 접촉이 없는 접속경험으로 일상이 대체되면서 경험의 뿌리가 뿌리째 뽑히고 있다. “모험이 부족한 사람은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일본철도의 광고 카피다.

 

 

공감하지 않는/못하는 인간-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숙맥

 

AI가 제공하는 정량적 데이터나 표면적인 정보에만 집중하고, 타인의 미묘한 감정이나 비언어적 신호, 그리고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공감 능력이 저하되는 인간, 즉 공감 능력이 저하되는 인간(The Empathy-Diminished Human)이다. AI 챗봇과의 효율적인 대화에 익숙해져, 사람과의 대화에서 상대방의 표정 변화, 목소리 톤, 몸짓 등 비언어적 신호를 읽어내지 못하고 공감적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AI가 필터링하여 제공하는 뉴스나 정보만을 접하며, 사회적 이슈의 이면에 있는 인간적인 고통이나 복잡한 이해관계를 깊이 있게 느끼고 공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공감능력은 상대의 입장에 되어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생기는 감정이다. 책상에서 머리로 이해하는 걸 배울 수는 있지만 책상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힘든 경우를 가슴으로 공감하는 걸 배울 수는 없다. AI와 오랫동안 대화를 하다 보면 직접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표정변화나 감정의 기복을 몸으로 감지하고, 그 순간에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지를 느낌으로 알아서 반응하는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이해하는 AI의 알고리즘에 익숙해지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친구의 고민을 듣고도 AI 상담만을 의존하며, 직접적 공감이나 위로를 해본 경험이 없어질 경우 사람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아픔을 감지하거나 공감하는 능력은 더욱 실종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생각하지 않는/못하는 인간-판단하지 않는/못하는 인간

 

AI의 분석 결과나 추천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독립적인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거나 점차 퇴화시키는 인간, 즉 사고와 판단을 위임하는 인간(The Judgment-Outsourced Human)이다. 이는 중요한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AI에 넘겨주면서 점차 생각하지 못하는 바보로 전락하는 위험한 인간이다. 예전에는 궁금한 물음표(?)가 생기면 도서관에 가서 직접 찾아보거나 사람을 만나 물어보는 등 끈질기게 생각하면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마침내 감동의 느낌표(!)를 만나는 경험을 했었다. 지금은 물음표가 생기면 바로 인공지능에게 물어본다. 인공지능은 느낌표를 주지 않고 마침표가 찍힌 정답을 순식간에 찾아다 준다. 이제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의 거리가 실종되면서 사람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궁금한 게 생기면 밖에 가서 Outsourcing하면서 사고의 외주화가 빈번하게 일어나 이제는 주체적 사유능력을 상실하고 사고의 식민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문제가 터지면 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고들거나 해당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어떤 해결 대안이 최적의 설루션인지를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따져보지 않고 바로 AI에게 문제의 원인과 해결대안을 물어보고 그에 대한 대답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일수록 인간지능은 인공지능에 종속되어 간다. 다른 사람의 정보를 수용하며 휩쓸려 떠내려가면서도, 자신의 판단이나 비판적 사고를 기반으로 주체적으로 사유하지 않을수록 사고의 외주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반문하지 않는/못하는 인간-시야를 상실한 인간

 

AI가 제공하는 정보나 답변에 대해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로운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는 대신 주어진 정보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인간, 비판적 질문이 없는 인간(The Unquestioning Human)이다. AI 챗봇에게 질문하여 얻은 답변의 정확성이나 편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거나, AI의 한계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려 하지 않는 학습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AI가 제시하는 분석 결과나 예측 모델에 대해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 작동 원리나 잠재적 오류 가능성을 검증하려 하지 않는 전문가도 문제다. 정답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자신이 풀고 있는 문제의 본질과 성격에 대해 스스로 반문하지 않는 인간이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인간은 질문하고 AI는 대답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이유는 어제와 따듯한 의심을 품고 전대미문의 질문을 던져 어제와 다른 관문을 열어가는 데 있다. 주어진 문제에 대해 정답을 찾아 설명하는 능력보다 각기 다양한 해답을 요구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아의 질문 능력이 더욱 소중하다. AI가 던져준 설명에 의문을 품고 다른 설명논리는 없는지, 그 설명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본적인 가정이나 전제는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질문 자체도 올바른 질문인지를 반문하는 메타 질문도 중요하다. AI의 설명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의존할수록 설명에 압도당하면서 결국 세상을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시력은 물론 시야도 읽고 결과적으로 실명당하는 위험에 처할 수 있

 

해석하지 않는/못하는 인간-해답이 뭔지 모르는 인간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제시하는 결과나 요약에 만족하고, 그 결과의 의미를 스스로 탐구하고 심층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통찰을 도출하는 능력이 약화되는 인간, , 의미를 해석하지 않는 인간(The Meaning-Uninterpreting Human)이다. AI가 분석하여 도출한 통계적 결과나 패턴만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함의나 인간 행동의 동기를 깊이 있게 해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연구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AI가 요약해 주는 영화 줄거리나 책의 핵심 내용만을 보고,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의도나 숨겨진 메시지를 스스로 탐색하고 해석하는 즐거움을 놓치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AI 투자 자문 시스템이 제시하는 매수/매도 신호에만 따라 움직이며, 시장 상황이나 기업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스스로의 분석이나 판단 없이 맹목적으로 투자 결정을 내리는 투자자가 이런 인간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AI가 생성한 보고서나 제안서를 비판적인 검토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그 내용의 논리적 오류나 편향성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직장인도 여기에 해당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AI가 제공하는 정답을 어떤 자료로 근간으로 작성된 것이며, 어떤 근거로 지금과 같은 판단을 하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AI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경우다. 자료 편집과정을 생각하지 않는 자료 생성결과를 중심적으로 사고하면서 AI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가는 심각한 문제가 대중화되고 있다.

 

 

선택하지 않는/못하는 인간-선택당하는 인간

 

과연 우리는 주체적 관심과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정답의 이면을 구조적으로 이끌어가는 알고리즘이 추천한 선택에 선택당하고 있는가? 주어진 다양한 선택지 안에서 어떤 판단과 결정이 지금 이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인지를 숙고하지 않고 AI 알고리즘이 결정해 준 대로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타성과 관성이 생긴다. AI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최적화된 선택지나 추천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며, 자신의 고유한 필요와 가치에 기반한 능동적인 선택권을 상실하는 인간, , 선택을 위임하는 인간(The Choice-Delegating Human)이다. 온라인 쇼핑 플랫폼에서 AI가 추천하는 상품만 구매하거나, 스트리밍 서비스의 AI 추천 목록 외에는 다른 콘텐츠를 탐색하려 하지 않고 그저 제시되는 것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AI 기반 직업 추천 시스템이 제시하는 직업군에 자신의 적성이나 흥미를 맞추려 하고, 스스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진정한 열정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학생도 전형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선택당하는 인간이다. 이게 맞는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게 가장 먼저 떠서 선택당하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주도적 판단과 의사결정 능력을 상실한다. 선택은 선별과정이다. 선별하려면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나에게 최선의 대안이 무엇인지를 고르는 선구안(選球眼)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정보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주도적으로 의사결정의 기준을 잡고 세상을 뒤흔드는 선택은 영원히 할 수 없는 선택당하는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알고리즘이 걸러주는 선택에 당할수록 다른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면서 다르게 생각하기는 아예 불가능해진다.

 

인공지능은 하나의 기술이나 도구라기보다 인간과 협업하며 인간의 능력을 신장시켜 줄 수 있는 또 다른 에이전트나 파트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간지능을 능가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스마트해질수록 인간지능은 멍청해질 수 있는 역설(유영만, 2025)을 극복하고, 오히려 인공지능을 활용, 인간지성의 깊은 사유기능을 심화-확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인류의 미래도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올 것이다. “같은 도구를 쓰더라도 누구는 생산도구로 쓰고, 누구는 사고 파트너로 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기능의 이해가 아니라 관계의 설계다. 관계가 형성되어야만, 관점이 생긴다. 관점이 생겨야 사고가 구조를 갖는다”(292). 방대한 데이터 양을 빠르게 편집하며 생성하는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의 속도와 가능성뿐만 아니라 데이터의 질적 속성을 판단하는 사유의 밀도와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재해석하는 노력이 동반될 때 인공지능과의 긴밀한 협업관계가 새롭게 재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더 빠르게 생성(generation)하는 속도나 생산성 또는 효율보다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더 다르게 생성(becoming)하는 밀도나 효과적인 의미의 재구성을 강조할 때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능력을 확장시켜 주는 소중한 삶의 파트너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날로 스마트해지는 인공지능 기술 덕분에 더 편리하고 안락한 삶으로 가려는 관성에 빠질수록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더 깊이 사유하려는 근성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인간은 사유기능을 점차 잃어가는 멍청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앞으로 미래 사회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구분될 것이다. 첫째 AI를 외면하거나 전혀 사용하지 않는 사람(People without AI)이다. 이 사람은 AI 기술을 무시하거나 저항하면서 기존 삶에 안주하려는 안이한 사람이다. 앞으로 어떤 경쟁력도 갖기 힘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둘째, AI를 적극적으로 활용만 하는 사람(People with AI)이다. AI만 사용하는 이 사람은 AI가 던져주는 답에 완전히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다. AI를 생산도구나 수단적 기계로 사용하면서 빠르게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AI를 활용하면서도 AI의 능력을 능가하는 사람(People beyond AI)이다. 이 사람은 AI를 사고의 도구를 넘어 어제와 다른 사고를 하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을 던져 놓고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반문하고 더 좋은 해답을 얻기 위해 AI를 파트너로 살아가면서 사고를 부단히 재설계하는 사람이다. “게으름이 낳은 사고의 관성을 깨뜨리는 저항, 낯선 충격, 불편한 질문과 같은 마찰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통찰과 사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283). 지적 자극을 던지는 낯선 질문, 낯선 사유를 잉태하는 전대미문의 질문으로 기존 사유체계와 잦은 충돌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낳는 공부를 멈추지 않을 때, AI는 단순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넘어 놀라운 상상력(AI: Amazing Imagination)과 혁신적 발상(AI: Amazing Innovation)을 촉진시키는 사고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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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 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철학 에세이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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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고정된 추상명사가 아니라 역동적인 동사다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철학 에세이

 

나 자신의 행복을 일구는 연습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연습

동료-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

 

인용부호가 없는 행복과 인용부호가 있는 행복의 경계와 사이

 

자크 데리다는 개념은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과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으로 나뉜다고 한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은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이해하는 상식적인 개념이고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은 자신의 경험과 철학에 비추어 기존 개념을 재개념화시킨 새로운 개념이다. 즉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은 자신의 신념과 철학으로 기존 개념을 자기만의 언어로 재정의한 개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인용부호가 없는 행복과 자기만의 철학과 신념을 담아 기존 행복이라는 개념을 자기만의 언어로 재개념화시킨 개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독, 행복, 열정, 용기, 존재와 같은 모든 개념은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시전에 나오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과 오랜 숙고 끝에 새로운 의미를 잉태하고 출산된 개념이다. 즉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추상적이며 통념에 젖은 개념이 아니라 저자가 구체적인 일상에서 치열하게 고뇌하며 겪어낸 경험적 흔적과 얼룩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탄생한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행복이라는 개념도 돈과 부, 가시적 조건과 물질적 자산으로 해석되는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행복과 대체 불가능한 내가 삶의 다양한 조건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만의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용기를 발휘해서 얻는 행복의 의미는 천지차이다. 대체 불가능한 나, 고유명사로서의 내가 나의 동료-인간으로서의 너가 만나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가운데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사랑과 행복은 언제나 로부터 시작해서, 와 연결된 개인(singulat individual)’과의 관계를 통해 실현될 뿐”(21)이기 때문이다.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 나와 네가 만나 서로의 마음과 정신 세계를 드러내고 공유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답게 살아가려는 안간힘을 쓰며 자신이 의미있다고 판단하는 일에 몰두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과정을 지순한 미소로 화답하며 서로의 존재감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행복정원은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결국 이 책은 인용부호가 없는 통념에 젖은 행복에서 인용부호가 있는 신념에 찬 행복의 의미와 가치를 존재에의 용기 속에서 꽃피우자는 이야기를 넌지시 건네고 있다.

 

글쓰기는 작은 세계의 출산이자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려는 존재론적 몸짓이다

 

행복한 사람은 읽고 쓰는 절대 고독의 시간을 즐긴다. 저자에게 한 편의 글쓰기는 장르와 상관없이 언제나 작은 세계의 출산을 의미한다(153). 쓰기를 통해 작은 세계를 출산하기 위해서는 쓰인 텍스트만이 아니라 사건을 읽고 정황을 읽고, 해석하는 읽기가 동반되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읽기는 1차적 읽기와 2차적 읽기로 구분되는 이중적 읽기라고 볼 수 있는 더블 리딩(double reading)’이다. 1차적 읽기는 저자가 텍스트를 통해 드러내고자하는 의미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고들어 이해하는 긍정적 읽기다. 2차적 읽기는 저자가 드러내고자하는 의미를 보다 거시적 차원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해보고 나름의 가능성과 문제점 또는 한계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문제제기의 읽기. 1차적 읽기가 저자의 사유체계 속으로 파고들어가 저자의 입장에서 의미를 이해하는 빠져들기의 읽기라면 2차적 읽기는 저자의 의미체계 속에서 빠져나와 저자의 의도와 의미를 사회구조적 차원과의 관계 속에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재해석하면서 빠져나오는 읽기다. 빠져들었다가 다시 빠져나와서 저자의 텍스트가 특정한 컨텍스트 속에서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보는 읽기가 동반될 때 텍스트는 텍스트로 끝나지 않고 저마다의 컨텍스트 속에서 독자의 텍스트로 재탄생되는 읽기가 된다.

 

이 책을 독자인 나도 1차적으로 빠져들어서 읽어본 다음 저자가 던져주는 의미의 덩어리를 내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반추해고 성찰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찾아내서 누려야 할 행복은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질문을 던지면서 읽어냈다. 읽으면서 내가 만약 강남순 교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유와 더불어 상상이 일상을 넘나들며 비상하는 즐겁고 행복한 읽기의 여정이었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살아있음의 표시이며, 이 세계에 개입하는 하나의 방식(155)이자 자기 삶에 대한 방치와 무관심에서 벗어나고자하는 하는 존재론적 몸짓“(26)이다. 이런 점에서 읽기와 쓰기는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무엇을 의미 있게 추구하는 사람인지, 내가 품고 있는 필생의 질문은 무엇이고, 그걸 기반으로 탐구하면서 찾아내고자하는 존재목적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싸우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위치에서 부단히 읽고 쓰는 존재론적 몸짓인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유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는 인용부호가 있는 핵심 개념과 그 개념에 담긴 저자의 신념을 기반으로 읽고 쓰는 모든 활동 자체도 강남순 교수님이 행복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면서 썼던 다양한 존재론적 몸짓의 다른 이름이다.

 

물리적 공간에 머무는 주택(house)과 심리적 장소에 거주하는 집(home)

 

행복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기소임을 다하는 존재는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 즉 하우스(house)보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충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34), 살아내는 공간(lived place)”(33)에서 거주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에서 장소는 영어의 공간을 의미하는 ‘space’가 더 적절한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과 연결시켜 사용한 공간은 영어의 ‘place’에 맞는 장소라는 개념으로 바꿔서 쓰면 하우스와 홈의 의미상의 차이는 물론 심리적 느낌상의 차이를 더 확연하게 드러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라고 쓰고 살아내는 공간(lived place)”살아내는 공간(lived space)”라고 바꿔써보면 하우스와 홈, 공간과 장소가 어울려 저자가 말하는 행복의 정원을 더 적확하게 설명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흔히 하우스는 물리적인 구조물, 즉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의미한다. 이는 객관적이고, 유형적이며, 교체 가능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저기 큰 하우스가 있다"라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건물의 형태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살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 빈껍데기와 같다. 반면에 은 개인이 소속감을 느끼고, 편안함과 안정감을 얻으며, 가족과의 추억이 쌓이는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은 물리적인 건물을 넘어선 경험, 감정, 관계, 그리고 기억으로 채워진 곳이다. "집에 간다"라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건물로 돌아가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유대, 편안한 휴식, 그리고 개인적인 역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우스에 어울리는 공간(space)은 추상적이고 비어 있는, 지리적인 위치만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아무런 의미나 경험이 부여되지 않은 중립적인 영역을 의미한다. 마치 백지처럼, 잠재력은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상태다. 예를 들어, "이곳은 넓은 공간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저 면적이나 부피만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홈에 어울리는 장소place)는 인간의 경험, 감정, 기억, 문화적 의미 등이 부여되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터전을 의미한다. 공간이 인간의 상호작용과 의미 부여를 통해 비로소 '장소'로 변모하는 것이다. '장소'는 개인적인 유대감이나 공동체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정체성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나의 고향은 특별한 장소다"라고 할 때, 그곳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넘어선 마음의 고향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나의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인정되고, 포용되는 공간이 홈이라면 결국 은 나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어에 이란 당신의 가슴이 깃드는 곳(home is where your heart is)”(35)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당신은 외로운 주택(house)에서 사료를 먹는가, 고독한 집(home)에서 식사를 하는가

 

하우스와 홈, 공간과 장소 개념의 차이는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에서 말하는 사료(飼料)와 식사(食事)의 차이와도 상응한다. 발터 벤야민은 인간의 경험과 의미 부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료''식사'는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한다. 사료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영양 공급, 즉 본능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목적 지향적이고, 기계적이며, 의미가 결여된 소비 행위와 유사하다. 마치 가축에게 주어지는 먹이처럼,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식사는 단순히 영양을 섭취하는 것을 넘어, 관계, 소통, 문화, 그리고 사랑이 담긴 행위를 의미한다. 벤야민은 "식사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라는 말의 동의어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음식을 나누고, 대화하며,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적인 행위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볼 때, '주택(house)'은 단순히 거주를 위해 억지로 '사료'를 먹는 '공간'에 불과하다. 반면, '(home)'은 그 '주택(house)'이라는 '공간'에 사랑과 추억, 관계라는 의미가 더해져 비로소 '식사'를 나눠 먹으며 풍요로운 행복을 꽃피우는 '장소'로 변모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물리적 공간이 차지하고 있는 하우스에서 사료를 먹고 충족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기쁨을 만끽하며 행복할 권리는 정감이 오고가는 관계의 정원, 홈이라는 삶의 터전, 장소에서 밥을 하는 사람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식사를 나누면서 대체불가능한 나와 네가 만나서 아름다운 우리라는 연대망이 형성될 때 비로소 구현된다.

 

고독의 공간은 사유하기, 중심부와의 거리 두기, 반학습적인 창의성이 꽃피는 자리이며 무엇보다도 자신과 만나는 자리다”(39). 고독한 사람은 자신을 인간화시키는 소중한 예식, ‘고독 예식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고독한 한 사람은 외로움(loneliness)을 느끼지 않는다. 작가가 조용한 서재에서 홀로 글을 쓰거나, 화가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고독해져야 한다. 외부의 방해 없이 오롯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며 창작의 즐거움을 만끽해야 작품이 타생된다. 또는 숲길을 걷거나 낯선 도시를 여행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고독한 경험이다. 주변의 풍경에 집중하고, 자신만의 생각에 잠기며, 새로운 영감을 얻는 등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가운데 존재이유를 새롭게 깨닫는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파티나 모임에 참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소통이나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고립되었다는 감정에서 외로움이 시작된다. 고독과 외로움은 관련성이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혼자 있는 상태인 '고독'이 반드시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군중과 떨어져 홀로 있는 고독한 상태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지만, 그렇다고 고독과 외로움이 같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긍정적인 상태인 반면, 외로움은 원치 않는 고립감과 쓸쓸함을 동반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결국 고독력으로 온전한 자신과의 대화를 하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면서 고립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고립의 공간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되며, 이 세계로의 개입이나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삭제하는 공간이다”(39).

 

자기의식을 고양시키는 리추얼이 없으면 얼빠진 삶에 휘둘린다.

 

주택(house)에서 사료를 먹으며 고립된 공간(space)에 입주하고 다시 이주를 반복하는 외로운 사람보다 집(home)에서 식사하며 관계의 정원을 싹틔우는 장소(place)에서 거주하며 정주하는 사람이 인용부호 속의 행복을 일상에서 만끽하는 사람이다. 행복한 일상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택은 행복을 가꾸는 정원이라기보다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전시용에 가깝다. 투자대상으로서의 주택은 언제나 다른 주택으로 이주하기 위해 잠시 입주하고 있는 중간 거점지에 불과하다. 주택에 거주하는 사람은 경기변동과 소비 트렌드에 민감하고 세상의 변화나 화두가 던지는 욕망의 그물에 자주 걸려든다. 그들은 저자가 말하는 AM-모드에 휘말리는 사람이다. “AM-모드는 복잡한 문제들이 산재해있는 세계다”(50). 반면에 집이라는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바깥 세계의 흐름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정신적 안전모드에 머물며 바깥 세계의 변화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한다. FM-모드는 외부세계의 암담하고 착잡한 현실은 의도적으로 괄호 속에 넣는 것에서 외부의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물들지 않게 자기의식을 고양시키는 리추얼이다. 외부의 잔혹한 현실이 내면으로 파고들어 뒤흔들고 파괴하려는 온갖 유혹의 손길이 난무하는 AM-모드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면세계를 굳건하게 지켜내는 자기만의 고독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행복이 무르익는 삶의 정원은 고립이나 외로운 공간보다 고독의 장소에서 자란다. 고독한 시간은 외부의 자극과 방해 없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다.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의 생각, 감정, 가치관을 깊이 들여다보고, 진정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 이해는 내면의 평화와 만족감, 즉 행복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고독을 통해 우리는 외부 환경이나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스리는 방법을 배운다. 이는 역경에 직면했을 때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과 자율성을 길러주며, 궁극적으로 더 단단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기여한다. 역설적으로, 고독은 타인과의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재정비하고 에너지를 충전함으로써,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더 진정성 있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유, 책과 꽃 그리고 달이 있다면 행복하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유

책들,꽃들

그리고 달이 있다면

누가 행복하지 않으리?“

 

나에게 행복은 자유, 책과 와인, 그리고 정체성을 증명하는 신체성의 증표, 짐에서 들어올리는 바벨이다.

 

자유,

책과 와인

그리고 바벨이 있다면

누가 행복하지 않으리?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어제와 다른 자유를 갈망하고 책을 읽으며 낯선 깨우침을 얻고 싶은 지적 황홀감을 동경하며 농밀한 향과 깊이있는 숙성의 향연이 만나는 와인을 마시고 싶은 갈망이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많다.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갈망은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갈급한 열망이라기보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한 차원 높은 미지의 삶으로 떠나보려는 간절한 희망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연결된다. “결국 존재한다는 것갈망하는 것이다”(65). 무엇을 갈망하는가? 기지에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희망을 갈망하고, 한 두 번의 시도로 충족될 수 없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에너지인 욕망을 어제와 다르게 갈망할 때 존재는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무한히 변신을 거듭한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어제와 다르게 변신하고 싶은 갈망과 욕망의 물줄기를 잡으려는 본능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삶을 살아간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수전 손택이다. 수전 손택의 일기에서 나타나듯이, 그녀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교감에 대한 통렬한 욕구"와 함께 "지적인 황홀경" 속에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육체적 친밀감과 깊은 정신적 교감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기를 바랐던 그녀의 내면을 드러낸다.

 

'고뇌에 찬 갈망'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욕구는 쉽게 충족되지 않았고, 그녀의 삶 내내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대상이자 때로는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수전 손택의 삶에서 이 갈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와의 관계다. 두 사람은 단순한 연인 관계를 넘어, 깊은 지적 동반자이자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 존재였다. 두 사람 모두 강렬한 개성과 지적 욕구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관계 속에서 갈등과 고뇌도 존재했을 것이다. 손택의 일기에서 드러나는 '갈망'은 이러한 관계의 복합성과 완전한 합일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반영한다. 결론적으로, 수전 손택의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동반자 관계에 대한 고뇌에 찬 갈망"은 그녀가 삶에서 추구했던 완전성과 진정성을 나타낸다. 그녀는 육체적 친밀감과 정신적 교감이 조화를 이루는 총체적인 관계를 원했으며, 이러한 갈망은 그녀의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지적 활동과 글쓰기에도 깊이 스며들어 그녀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이 갈망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와 재창조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삶은 물음표다

 

삶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느끼고, 대면하고, 그 속에서 깊숙이 침잠하는 듯 지독한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것”(88)을 저자는 실존적 독감이라고 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희망의 뒤안길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존재하고, 성공하기까지에는 무수한 장애물과 걸림돌에 넘어지는 실패의 늪이 존재한다. 생각보다 깊은 우울과 절망의 세계에서 저마다 힘든 전쟁을 벌이는 일상적 삶에서 물러나지 않고 일생동안 씨름해야 되는 난제들을 붙잡고 살아가는 이유와 존재목적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근원적 질문의 그물을 던져놓고 어제와 다른 답을 찾기 위해 부단히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어제와 다른 대안을 탐색하지만 생각보다 우리가 직면하는 복잡한 딜레마를 해결하는 해답을 얻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 각자가 지닌 이 살아감의 크고 작은 문제들과 딜레마에는 해답이 없다”(95). 엄밀히 말하면 저마다의 상황적 문제를 해결할 하나의 정답은 없지만, 주관적 해석에 따라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 있는 해답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정답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해답은 해석방식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직면하는 딜레마를 탈출할 대안의 가능성은 얻을 수 있다.

 

삶은 물음표다.” 20세기 니체라고 하는 에밀 시오랑의 말이다. 내가 품고 있는 물음표의 곡선이 내가 찾을 수 있는 느낌표의 직선을 만날 수 있다. 곡선의 물음표가 품은 호기심의 강도가 직선이 느낌표가 품은 감동의 강도를 결정한다. 삶에는 정답이 없어서 오늘도 어제와 다른 호기심의 물음표를 품고 불확실하고 불안하지만 다가오는 미래를 끌어안고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고 살아내기 위해 한 걸음 내딛는 사람들의 연대가 함께 고독의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을 보자.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 한다.

 

길이란 찾은 것이라기보다 만들어 가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이란 없다. 그 길은 오로지 내가, 치열성과 용기를 가지고 창출해 가는 것(invent)(”274)이라서 길은 앞에 있지 않고 뒤로 생긴다. 앞에 있는 길은 누군가 이미 걸어간 길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바로 존재이유를 찾아가는 길이다. 다른 사람이 걸어간 길을 따라 가는 길 위에서는 존재의 기쁨이 일어나지 않고 불확실성과 싸울 필요가 없는 안전한 길이다. 익숙한 여기를 떠나지 않고 낯선 미지의 세계와 의도적으로 만나지 않는 길에서는 어제와 다른 마주침이 일어나지 않는다.

 

떠남은 근원적인 물음과 조우하는 과정이다

 

고독을 고향삼아 함께의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진정한 친구이자 행복한 관계의 정원을 함께 가꾸어가는 삶의 동반자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와의 작별과 미래와의 조우에 존재하는 사이공간을 넘나들며 그 사이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들이다. “떠남을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 등 근원적인 물음과 조우하는 과정”(100)으로 삼을 때 그때의 마주침이 색다른 깨우침으로 나에게 선물로 다가온다. 과거와의 작별을 고하고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익숙한 공간에 고립되어 외로움에 시달릴 수 있다. “자신의 과거와이 작별, 그리고 새로운 미래와의 조우라는 이 두 축의 사이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101)보는 사람만이 실존적 독감을 극복하는 실존적 몸짓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권리를 누리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익숙한 지금 여기서의 타성에서 벗어나 불확실한 낯선 저기로의 과감한 떠남을 진행형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뜻밖의 해프닝(happenings)’이 발생할 수 있고, 그 해프닝이 뜻밖의 해피니스(happiness)’, 행복을 낳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행복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이어지는 산문의 세계와 이성과 합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미소, 눈물, 포옹, 키스와 같은 시의 세계가 어우러질 때 가능해진다고 한다. 열길 물속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측정 대상이지만 한 길 사람 속은 인문학적 헤아림의 대상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한 길 사람 속이 품은 깊은 뜻은 알 길이 없다. 그저 보살피고 어루만지며 헤아리는 수밖에 없다. 존재함의 의미 역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추론만으로 밝혀질 수 없는 미스터리의 세계다. 왜 사는지, 왜 사랑하는지 그 이유의 저변을 아무리 파고들어도 의미의 심연은 더 깊어만 간다.

 

장미는 가 없다;

장미는 그저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것이다.

(The rose is without ‘why’;

it becomes simply because it blooms.)

 

17세기 독일시인, 안젤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의 시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수많은 왜에는 언제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을에 단풍이 드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과학적 설명 너머의 단풍의 존재이유는 시적 사유의 대상이다. 바람은 왜 부는지, 구름은 왜 생기는지, 나뭇가지는 왜 흔들리는지는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은 존재 자체의 신비로움을 이해하는 충분한 조건으로 납득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왜 10개인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시인은 그런 설명논리에 만족하지 않는다. 함민복 시인의 성선설이라는 시에 보면 전혀 다른 시적 상상력이 등장한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존재의 이유를 아무리 물어봐도 하나의 정답으로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존재함 자체가 바로 살아감의 의미와 이유가 된다”(174).

 

안개꽃 배경 덕분에 장미꽃 전경이 돋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고갱의 그림 제목처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사람이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의 멈추지 않는 물음이다. 이런 질문의 끝에는 또 다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어떤 관계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오늘 나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관계 없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선우 시인의 참나라니, 참나!’라는 시가 있다. “비루할지라도 당신, 당신들과의 접촉면에서 이슬이 맺히죠/이슬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죠/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내가 되는 영롱함.” 나는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존재다. 무수한 들에 의해서 비로소 내가 영롱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한끼를 해결하는데 동원되는 자연자원과 수많은 생명체에 가하는 생태학적 죄(ecological sin)’ 앞에서 딜레마를 탈출한 대안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화 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운명이다(146).”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한 말이다. 나는 오늘도 한 끼 식사를 위해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태를 뽐내며 살아가던 각양각색의 동물과 식물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폭력을 가하고 살인행위를 저지르며 배고픔만 채우며 살아가는 생태학적 죄인이다. 존재의 부채를 느끼며 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과학자 테슬러가 말하는 복잡성 보존의 법칙이라고 있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과 단순함은 내 대신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불편하고 복잡한 일을 해준 덕분이라는 의미다. 마트에 가서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쇼핑을 하고 집에 갈 때는 주차장이나 적당한 장소에 버리듯 아무데나 두고 간다. 다시 쇼핑하러 오면 누군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카트를 입구에 질서정연하게 정렬해놓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편리하게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쇼핑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가 버리고 간 카트를 끌어가 다시 입구에 질서 정연하게 정렬해놓은 덕분이다. 모든 전문성은 사회적 합작품이다. 스타 플레이어는 보지 않는 가운데 누군가 도움을 제공해준 덕분에 빛나는 보이는 사람이다. 모든 커피에 다 들어가는 에스프레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다양한 커피로 맛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은 에스프레소 커피 덕분이다. 그래서 맡은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을 빛나 보이게 만드는 사람을 에스프레소맨이라고 한다. 하얀 안개꽃 배경에 빨간 장미꽃을 전경으로 드러내면 장미꽃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다. 전경으로 드러난 장미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묵묵히 배경에서 장미꽃을 전경으로 드러나게 도와준 안개꽃 덕분이다.

 

질문은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비료다

 

행복한 관계의 정원에서는 미소는 글의 언어와 말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심오한 몸의 언어”(106)로 소통한다. 상대방의 작은 표정 하나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담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하고 대답을 경청하면서 서로가 미소짓는 화기애애한 소통이 이어질 때 행복은 관계 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나를 미소짓게 하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의 타자들을 미소짓게하는 것은 무엇인가?”(107)를 자문한다. 나는 오늘 누군가를 위해 얼마나 미소짓게 하는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반문하면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미지의 내일에 만나게 또 다른 사람과의 행복한 관계를 상상상해본다. 상대에 대한 질문은 자동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물론 스스로 뭔가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과 열정, 기반 지식은 물론 폭넓은 교양과 자기분야의 깊은 전문지식이 있어야 상대를 감동시키는 질문을 만들 수 있다. 사랑하면 질문이 연이어 형성되고 그 질문이 경계를 넘나들어 마침내 깊은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비료 역할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미소짓고(smile at) 누군가와 함께 웃는(laugh with) 의미는 매우 심오하다”(177). 진정한 미소는 타자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존중과 환대의 마음으로 포옹할 때 비로소 진정성의 교감이 일어나면서 미소를 띠고 더불어 상대도 미소로 화답(和答)하면서 화통(和通)이 시작된다. 그런데 경쟁이 극심해지고 성과와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유혹의 손길이 곳곳에 미치면서 상업적이고 상투적인 미소, 자기만족적인 승리의 미소가 판을 치기 시작한다. 이런 미소는 조소에 가깝다. “누군가를 조롱할 줄은 알지만, 누군가와 함께 웃는 것은 하지 못한다는 현실”(179)은 개인적인 품성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우열의 관계나 지나친 경쟁관계가 낳은 역기능이자 폐해이며 구조적 산물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의견의 차이가 발생하면 비판보다 비난을 퍼붓고 미소보다 조소와 조롱으로 상대를 벗어나기 어려운 덫에 가둬버린다. 미소는 혼자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상대와 진심으로 교감하면서 인식과 관심을 같이 하는 가운데 심리적으로 느끼는 희망의 연대감이 생길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표정이다. 이때 구축하려는 연대는 관점과 해석의 같음만을 공유하는 동질성의 연대(solidarity of sameness)’가 아니라, 다름도 인내심 있게 경청하면서 그 다름을 적대가 아닌 개방과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다름의 연대(solidarity of alterity)’ 속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눌 수 있다.

 

우정은 살아있음의 생생한 방식이자 행복한 권리를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이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다고 질문이 많아지거나 정신적인 성숙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타자에 대하여, 사물에 대하여 좀 알고자 하는 지순한 호기심과 열정을 지니고 있는가, 새로운 앎이나 의미추구에 대한 실존적 배고픔이 있는가 하는 점”(110-111)실존적 배고픔의 성격, 강도, 그리고 깊이에 따라 나는 그 사람의 정신의 나이를 측정”(111)한다. 지순한 호기심과 식지 않는 열정,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려는 지적 갈망이 실존적 배고픔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실존적 배고픔은 뭔가를 추구해서 달성한다고 해소되는 결핍이 아니라 이전과 다른 실존적 배고픔이 끊이지 않고 생성되는 영원한 미완성이다. 그 미완성이 어제와 다르게 변신하게 만드는 희망의 원동력이 된다. 실존적 배고픔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의 존재가 지닌 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배경으로 깔린다. 보이지 않는 진중한 배경이 서로의 존재를 번갈아가면 전경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진정한 친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우정의 싹을 틔운다. 내가 먼저 진정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만나서 쉽게 만남의 끈이 끊어지는 플라스틱 관계를 넘어서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가려고 더 낮은 자세로 상대를 존중과 환대의 존재로 바라본다.

 

오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Oh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 자크 데리다의 우정의 정치학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여기서 앞에 복수로 호명되는 친구들(friends)은 보편성의 친구들이고 단수로 언급된 친구(friend)는 개별성의 친구다. 복수로 호명되는 보편성의 친구들은 불특정 다수의 만남이 특별한 관심과 인식 없이 스쳐지나가는 대중적 만남으로 형성된 관계 속의 친구들이다. 동문, 동창, 각종 친목 모임, 단톡방에 존재하는 무수한 익명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바로 친구들이다. 스친 기억은 있지만 스며든 정은 없는 친구들이다. 반면에 단수로 호명되는 개별성의 친구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singular) 친구다. 지순한 호기심과 열정, 실존적 배고픔이 매개가 되어 만나는 친구다. “‘언제나 이미(always already)’ 존재하는 우정과 친구의 존재”(118-119)를 넘어서 아직 아닌 우정, 아직 아닌 관계, 아직 아닌 세계에 대한 갈망”(119)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우정은 살아있음의 생생한 방식(active mode of being alive)”이자 행복한 권리를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friendship ad practice)”으로서의 다가올 우정의 관계로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된다.

 

지식은 보편적 진리(眞理)’가 아니라 상황 구속적 일리(一理)’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확실성보다 불확실성, 명증성보다는 불투명성이 지배”(139)하는 세계는 언제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 천국이다. 좌절과 절망이 상존하고 패배와 실의(失意)의 텃밭이 무성하며, 어둠과 그늘이 삶의 배경과 친구로 가까이서 지내는 일상이 매일 전쟁과 같은 삶의 터전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바로 한편으로는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이라는 더블 제스쳐(double jesture)’.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 인간의 삶은 완벽하지 않기에 다층적 좌절과 절망감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밖에”(139) 없으며, “‘또 다른 한 편으로(on the other hand) 우리는 절망과 낙담 가운데서, 변화의 희망을 품고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딛는 삶”(139-140)을 살아가는 것이다. 더블 제스쳐를 불안감에 적용하면 불안감의 부정적 해석에서 긍정적 대응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불안감이 엄습하면 지금까지 살았던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으니 이제부터 새로운 각성을 통해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야 되는 시점이라고 해석한다. 더블 제스쳐에 따르면 지금 여기서의 사유가 아니라 아직 아닌미래를 불안한 미지의 세계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세계를 향해 씨름하고 고민하는 그 과정 자체”(140)로 해석하면서 미래를 희망이 자라는 가능성의 텃밭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존재가 되기 위하여 내가 하는 선택이 바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70). 칼 융의 말이다. 사건은 낯선 기호를 발생시킨다고 들뢰즈가 말한다. 들뢰즈에게 기호는 이전과 다른 해석을 기다리는 모든 신호다. 즉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해석을 기다리는 모든 기호는 사건과 더불어 등장한다. 누구에게나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 사건이 품고 있는 기호를 누가 어떤 관점애서 해석하는지에 따라 사건은 저마다 다른 의미로 기록된다. 더블 제스쳐로 사건을 해석하면 한편으로는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과 후회가 생기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사연 속에서 뜻밖의 사유를 잉태하는 낯선 생각의 임신이기도 하다. 사건이 함의하는 의미를 해석하는 가운데 이전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낯선 생각을 잉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기도 한다. 모든 지식은 특정한 상황적 맥락에서 탄생되는 사건과 사고의 산물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맥락이 품고 있는 고유한 특수성은 또 다른 상황에 일반화시켜 해석할 수 없다. 모든 지식은 상황 지워진 지식(situated knowledg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지식은 보편적 진리(眞理)’가 아니라 상황 구속적 일리(一理)’일 뿐이다.

 

행복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한국 사회에 자주 등장하는 시대의 스승이나 어르신또는 국민 멘트는 모든 상황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를 갖고 있는 신이 아니다. 성공에 이르는 길에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알 수 없는 미지수 느닷없이 출몰하는 혼돈과 복잡성의 세계다. 성공에 이르는 단 한나의 길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은 무수한 변수들의 상황맥락적 상호작용의 산물이고 성공에 이르는 길에 관여되는 모든 사람과 도구와 환경의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성공 일반도 없고 행복 일반도 없다. 성공이든 행복이든 모든 추상명사는 추상적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에 내던져진 몸이 겪어낸 육체적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면서 탄생하는 개별성이나 단독성의 산물이다. 한 사람의 성공과 행복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일반화시켜 확산 적용할 수 없다. 성공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표준화시켜 매뉴얼로 처방할 수 없다. 성공이나 행복은 저마다의 상황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전쟁의 산물이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무엇이 나를 성공에 이르도록 이끌어 가는지는 주어진 삶의 조건과 환경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정답이 아니라 해답이다. 오늘도 불확실성과 불안감에 맞서 싸우기보다 함께 춤을 추며 타성과 통념을 거부하면서 다양한 관점과 복합적인 시선을 부단히 학습하는 길 밖에 없다.

 

더블 제스쳐는 존재함의 용기를 심어준다. 살아감은 절망과 희망, 어둠과 빛, 실패와 성공, 기쁨과 슬픔, 익숙함과 낯섬, 내적 외적 사건과 사고의 사이처럼 무수한 다리들(bridges)과 마주하며 씨름하는 것이다. 익숙한 지금 여기, 이곳과 낯선 아직 아닌 미래, 저기나 저 곳 사이에 존재하는 다리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감이 잠재되어 있다. 두려움과 불안감의 다리를 건너는 용기가 바로 존재에의 용기. 존재에의 용기를 발휘하며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이 다리가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리 도래하는 행복의 정원으로 건너가는 디딤돌이다. 다리를 디딤돌로 생각하며 건너는 용기있는 존재는 행복을 추상명사로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어제와 다르게 온몸으로 감각하며 지각하는 동사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행복하다는 말보다는 행복을 가꾸고 있다는 말이 적절하다고 한다. 존재에의 용기를 품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시시포스처럼 부조리한 삶을 직시하면서,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서 떨어지는 바위를 끌어올리는 주체적 행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행복한 삶도 살아감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대면하면서 부조리와 무의미성을 직시하고 합리성-너머의 자신만의 의미창출 방식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는, 나만의 삶의 의미창출’”(163) 과정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삶이다.

 

자유로운 결단과 치열한 추구, 삶을 가꾸는 두 가지 조건이다

 

니체에 따르면 행복한 삶 또는 의미로운 삶의 두 가지 조건은 치열성과 자유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결단하고 그 결단에 따르는 선택을 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치열성과 자유의 삶”(266)이다. 니체가 강조하는 삶은 단순히 외부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가치와 의지에 따라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르는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만들어가는 치열한 과정을 의미한다. 우리가 내린 결단과 행동이 곧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판단한다. 사회적 성공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열정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자유의 본질이다.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을 보여준다. 니체가 말하는 치열성과 자유의 삶은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을 인식하고, 외부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용기 있게 '결단'하며, 그 결단에 따르는 '행동'을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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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 : 니체 시 필사집 쓰는 기쁨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유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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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시는 앎의 암을 유발하는 하나의 염증이다

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

쓰는 기쁨 - 니체 시 필사집

 

 

니체는 시쓰다보다 시하다로 일생을 살았다

 

김혜순 시인이 시를 쓰다는 말보다 시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시 쓰기의 본질적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한다. '쓰다'는 주로 글을 종이나 화면에 기록하는 행위를 의미하지만 '하다'는 어떤 행위를 수행하거나, 어떤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훨씬 포괄적인 동사다. 김혜순 시인은 여성이 시를 창작하는 것이 단순히 언어를 배열하는 것을 넘어, 여성으로서 겪는 삶의 모든 경험, 즉 차별, 혐오, 폭력 등 남성과는 다른 고유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그것을 시로 '체현'하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특히 여성에게 시는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재구성하는 행위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찾아 헤매고 끄집어내는 작업을 '시하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시가 여성의 몸과 정신, 그리고 삶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론적인 행위임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다'는 문자를 기록하는 행위다. 하지만 만약 '글하다'라는 표현이 있다면, 이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을 넘어, 글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사상을 펼치며, 글 자체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자 정체성이 되는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혜순 시인의 '시하다'는 여성이 시를 창작하는 행위가 단순히 언어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삶의 경험과 존재론적 투쟁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이를 시로 승화시키는 총체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니체는 시를 쓰지 않고 시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를 쓴 철학자가 아니라 삶 자체가 시다. 니체는 시를 쓰지 않고 쓴(쓰라린) 삶을 쓴다. 시하다는 니체에게 신을 죽임으로써 기존의 형이상학적 가정이나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며 지켰던 도덕이나 규범을 파괴하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는 모든 활동 그 자체다. 니체에게 시는 고난의 역사적 기록이나 당연한 가정에 짓눌려 헐떡거리는 일상의 비루함에 통렬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문장건축이 아니다. 니체게 다른 사람을 비롯해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시적 탐구나 상상력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명사적 실체가 아니라 존재증명을 위해 다른 존재와 치열한 관계 맺기를 통해 부단히 움직이는 동사들이다. 니체에게 시하다는 이런 저마다의 존재들이 자기존재를 증명하기위해 다른 존재와의 부단한 관계맺기를 통해 부딪히며 살아가는 일상의 다른 이름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시인 이외의 다른 타자를 관찰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시하는 사람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관계에서 벗어나 동사로서의 저마다의 존재들이 부딪히며 타자의 몸과 몸으로 만나 부단히 살아 숨쉬는 움직임이는 사람이다.

 

니체의 시는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빛나는 삶의 찬가다

 

이런 점에서 니체에게 시(예술)는 삶의 고통과 혼돈을 미적으로 승화시켜, 존재 자체를 긍정하게 만드는 행위니다. 니체에게 '시하기'는 마치 삶을 표현하는 무용수와 같다. 무용수는 건축가처럼 어떤 이론을 제시하거나 기존의 건물을 부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몸으로 음악에 맞춰 아름다운 춤을 춘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때로는 환희에 찬 몸짓으로 삶의 비극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 춤은 어떤 논리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완전한 미적 경험이다. 관객은 이 춤을 통해 삶의 고통과 혼돈조차도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음을 느끼고, 존재 자체를 긍정한다. 예술은 이렇게 삶의 모든 면을 끌어안고,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우리에게 삶을 사랑할 이유를 제공한다.

 

시답지 않아도 사람시답게 살아야 사람답게 산다.” 인생이 시답지 않아서 표지에 쓴 글이다. 와 사람은 조사가 다르다. ‘은는이가조사 중에서 은는은 주관적 느낌의 표현이고 이가는 객관적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꽃은 피었다로 썼다가 한 나절 고민하다 다시 꽃이 피었다로 고쳤다는 일화가 있다. “꽃은 피었다라고 쓰면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 신념의 표현이고, “꽃이 피었다라고 쓰면 누가 봐도 밖에 꽃이 핀 사실을 확인하는 표현이다. 지금의 현실 자체는 시답지 않은 건 주관적 감정의 강도가 다를 뿐 객관적 사실이라서 삶시답지 않아도라고 썼고, 그래도 사람시답게 자기 주관을 갖고 살아야 밖의 좋다는 이야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원심력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시답게 살아야 비로소 사람다움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난다. 삶 자체가 한 편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시답지 않은 인생을 억지로 꾸리며 살아간다. 시답게와 사람답게는 동의어다. 시답게와 사람답게의 거리가 좁아지지 않을 때 삶은 시답지 않게 변질된다. 니체의 쓰는 기쁨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들었던 생각은 시답게 살아가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한 인간의 총체적 몸부림이 이렇게도 유쾌한 유희지만 통렬한 가르침이자 속깊은 아픔이자 심연을 알 수 없는 어둠이지만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빛나는 삶의 찬가다.

 

니체에게 시하다사랑하다와 동격이다

 

하늘을 흐리게 하는 자들을 몰아내자

세상을 어둡게 하는 자들

구름을 떠밀고 오는 자들을 쫒아내자

우리의 천국을 환하게 만들자

 

휘몰아치자, 더 없이 자유로운 영혼이여

-북서풍에게-

 

암울과 우울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니체는 판을 뒤집을 정도로 과격하지만 서광이 비치는 희망으로 명랑하고 쾌활한 광인의 삶을 보여준다. 시답지 않은 세상에 시답게 살아가는 것은 사람처럼 시를 사랑하며 사는 삶이다. 시평론가 데이비드 오어(Daivd Orr)에 따르면 나는 X를 좋아한다나는 X를 사랑한다를 구글 검색하면 사랑한다보다 좋아한다가 세 배 많다고 한다.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나는 와인을 좋아한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하지만 (poetry)’X자리에 집어 넣으면 좋아한다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시를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나는 나무를 사랑한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무를 좋아한다는 말은 나무가 멋있을 때나 나에게 나무가 어떤 혜택이나 잇점을 제공해줄 때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무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무가 헐벗었어도 나무의 진면목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암에 걸리면 여전히 좋아하는 감정이 유지될까?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의 건강한 모습을 좋아했을 것이다. 암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 곁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가 암에 걸렸어도 사랑하는 감정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은 그 사람의 모든 걸 목숨걸고 아끼는 감정이다.

 

이런 점에서 “‘시하다사랑하다입니다. 나를 타자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하는 말이 시입니다”(57). 김혜순(2023)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단하는 순간이 사랑하는 감정이 생겼을 때다. 시인의 시쓰기는 사랑하기와 동격이다. 그 사람 덕분에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근간에는 사랑하는 감정이 흐른다. 시를 사랑하는 순간, 나도 시보다 더 멋진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우리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감정을 품고 있다 시를 읽는 사람의 심장에 의미를 심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명사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동사로 사는 사람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사랑에 빠뜨린 사람이나 사물의 실체나 정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다 알 수 없기고 모르는 게 남아 있기에 알고 싶어서 질문이 쏟아지고, 질문이 어제와 다른 사랑의 방법을 알려준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알고 싶은 욕망의 물줄기는 멈추고 질문도 멈춘다. 정희진 작가가 사랑의 끝은 질문이 없어진 상태라고 표현한 까닭이다. 부단히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신하는 사랑에 빠뜨린 사람은 한 순간도 자신을 고정된 명사형태로 정체되어 있지 않다.

 

니체의 시는 우울을 없애고 하늘을 빗질하는 청소부다

 

니체에게 시는 쓰기의 대상이 아니라 시하다와 같이 차라투스트라가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오늘과 다르게 늘 바뀌는 부단한 자기변신과정이다. 니체에게 시는 숨막히는 순간에 숨통 트이게 하는 지적 호흡이다 다름없다. 정현종 시인의 -언어 깃-언어에 따르면 시는 읽는 게 아니라 시를 숨쉰다또는 시를 산다가 맞다. 기대했던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뜻밖의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때 숨막히다는 표현을 쓴다. 생명의 상징인 숨이 막히니까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난국에 직면했음을 직감적으로 드러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숨쉰다는 말이 결국 시를 산다는 말로 연결되는 까닭은 숨막히는 긴장과 초조 속에서 시를 숨쉬면 그것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면 막혔던 숨통도 트이고, 갈등과 모순의 사안 사이에서 잠시 한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도 찾아온다. 이런 저런 일로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감으로 답답하고 탈출구 조차 보이지 않을 때,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숨막혔던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는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순간, 깊이 쌓였던 시름조차 잊어버리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세상이 답답하고 마음도 갑갑할 때 그 어떤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심신이 마비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시는 온몸에 흐르는 활력과 생기다. 시는 숨막히는 순간에 숨통이 트이게 만들고 한 숨 쉬면서 대안을 모색할 때 나도 모르게 내 몸을 따라 흐르는 숨결이다.

 

니체는 허무주의(虛無主義)가 온 세상을 뒤덮을 암울한 전조가 보이자 허무주의에 오하려 주의(注意)를 기울이며 우울함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삶의 빛나는 운명을 역설적으로 칭송하면서 언제나 보통 사람보다 높은 곳에서 시대의 조짐을 예언한 철학자 시인이다. 낙타처럼 도덕에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의 인생도, 사자같이 울부짖으며 불만만 토로하는 반항자도 거부하고 오로지 삶을 놀이와 긍정으로 해석, 웃음으로 세상의 낙원을 건설하는 어린아이처럼 목적이 없는 온전한 시간을 만끽하며 모든 것이 그저 놀이일 뿐이다”(실스마리아)라고 주창하고 있지 않은가. “니체의 시는 무력하고 우울할 때, 더 이상 꿈의 추구가 불가능해보일 때, 자신이 벌레처럼 누추하다고 느껴질 때 읽을 만하다. 니체의 시가 우리 몸과 마음을 꼼꼼하게 진찰하고 써준 명의의 처방전이 될 수도 있을 테다”(9). 장석주 시인의 추천하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의 시는 길 잃은 선원들에겐 불빛 신호/답을 가진 사람들에겐 의문부호”(등대)이고 공간에도, 무상한 시간에도/결코 묶이지 않는 나는/독수리처럼 한껏 자유”(고향없는 사람)로운 영혼을 꿈꾸는 방랑자의 고뇌이자 결단이다. 니체의 시는 우울을 없애고 하늘을 빗질하는 청소부이자 네 부름을 듣고 바위 계단으로, 바닷가에서 우뚝 솟은 누런 절벽으로”(북서풍에게) 위풍당당하게 뛰어내리는 과감한 도전이며, “금빛 햇살이 발그레한 아침놀 사이로 돌진하듯, 화살처럼 몸을 움츠렸다가/심연으로 돌진하는철없는 예술가다. 니체는 틀 밖에서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뜻밖의 느낌표(!)를 찾으며,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힘든 세상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시답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전도사다.

 

춤추는 별도 극심한 혼돈이 낳은 자식이다

 

헌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인생 방향전환을 결심한 니체도 흥미롭게도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극복하고 생의 긍정으로 나아갔다다. 쇼펜하우어의 암울한 인생관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을 발전시키며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아르 투르 쇼펜하우어). “사유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12)이라고 해석한 유영미 번역자의 말에서도 짐작하듯 니체는 평범함과 편안한 일상을 거부하고 스스로 정상적 사유를 전복하며 비정상적 삶을 즐기는 가운데 몸을 관통하고 남은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해서 철학적 삶을 살고 시하기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에 온몸으로 항거한 광기의 전범(典範)이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처럼 니체는 극심한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창조하고 하나의 바람이 나를 거부한 뒤로/닥치는 대로 모든 바람을 붙잡고/항해할 줄 알게 되었네”(나의 행복)처럼 생의 모든 순간을 배움과 익힘의 소중한 순간으로 포착한다. “내가 좋아하는 건/숲과 바다의 동물처럼/한참동안 헤매며 한 눈을 파는 것/사랑스런 혼란 속에 쪼그려 앉아 사색에 잠기는 것/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나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고독한 자)이다. 불안과 혼란, 걱정과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며 인생반전과 역전의 발판으로 삼아 어제와 다른 위버멘쉬로 변신하기 위해 언제나 생의 찬가를 부르며 긍정의 디오니소스적 인간으로 평생을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니체는 흔들리되 뿌리까지 뽑히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네가 서 있는 곳을/깊이 파고들어라/그 밑에 샘이 있다!”(겁먹지 말고)는 걸 알아차려여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깊이만 파다 기피 대상이 되니 높은 곳에 올라가 내가 어떤 샘물을 찾아 깊이 파고들어가는지를 조망해보라고 한다. “때로는 태양/때로는 구름이 되어/길을 간다네/늘 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서!”(현자는 말한다). 높은 곳에 있어야 세상의 흐름을 예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구석의 뒤안길에 매몰되어 전체적인 구조와 관계에 어둡지 않을 것이다. “그는 멀리, 높은 곳으로 가야하리/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가/나의 별이 될 수 있겠는가”(가장 가까운 사람). 누군가의 별이 된 사람은 한 두 번의 노력을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범접할 수 없는 곳에서 아우라를 내 뿜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별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경을 넘어 존경의 대상이다. 별은 단순히 높은 곳에서 내리비치는 빛의 의미를 넘어선다. 고독한 자에게 벗이 되어주고 힘든 자에게 밤을 배경으로 전경으로 드러나게 힘 실어주는 위로의 손길이다. “그대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이 떠올라/별이 되어 내 생의 밤하늘에서/가물가물 반짝인다”(지는 별). 높은 곳에 올라 밤하늘의 별이 된다는 의미는 어둠을 밝히는 벗이 되어 존재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삶의 뒤안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어주겠다는 뜻이다,

 

모든 편견은 꼬인 내장에서 비롯된다

 

그는 사람들의 칭송을 뛰어 넘은 곳에/살고 있다/그는 저 위의 사람이다!”(높은 곳의 사람들). 저 위의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높은 곳에서 자기 과시를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치열한 일상을 살면서도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잉태하기 위해 몸으로 겪어본 신체적 깨달음을 정신적 각성제로 제조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지침과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발은 낮은 곳에 두되 머리는 늘 이상을 지향하면서 현실에서 진실을 캐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 위에서 새상을 관념적으로 파악하며 지적 유희만 즐기지 않는다. 몸이라는 신체성을 현장성과 맞닥드리며 전쟁을 일삼는다. 생각의 발로(發露)는 발로에서 나온다. “근육이 축제를 벌이지 않는 생각들은 도무지 믿지 마라/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전에도 말했지만/엉덩이를 붙이고 끈덕지게 앉아 있는 건/신성한 정신을 거스르는 죄다”(가만히 잊지 마라). 땀은 근육이 흘리는 눈물이다. 그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근육에 상처가 아물며 험난한 세상을 샇아갈 근력(根力)도 없다. 근육의 힘, 근력(筋力)이 근본을 파고드는 힘, 근력(根力)이 되는 까닭이다. 몸을 수직으로 세워 움직이지 않고 책상에 오랫동안 앉아 골머리를 앓다보니 내장은 꼬이고 생각을 뒤틀리며 마음은 정처를 찾지 못하고 헤매기 시작한다. 견딜 수 없는 창자의 고통이 애간장을 녹이다 마침내 굽어지는 허리 압력에 못이겨 근거없는 편파적 의견을 대책없이 쏟아낸다.

 

니체는 신체를 커다란 이성으로 위치지우고 우리가 말하는 이성을 작은 이성으로 전락시켜, 머리가 생각하는 로고스 중심의 철학을 전복시키고 몸이 철학의 중심으로 등장시킨 철학자다.

이성이란 얼마나 지긋지긋한 것인지!/그런 우리를 너무 빨리 목적지로 옮겨다 놓는다네”(남쪽 나라에서). 이성은 목적지에 도달한 최단거리를 계산하고 거기에 이른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직접 목적지에 이르는 현장에서 현실을 만나 몸으로 진실을 캐내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고 논리적 정합성만 무수한 담론으로 따져물어본다. 당연히 골머리를 앓으니 두통은 심화되고 내장은 꼬여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편리한 의견만 임기응변적으로 쏟아낸다. 내장에서 나온 편견으로 쓰는 글은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지 못한다. 니체가 말하느 쓰는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 니체는 그래서 일장훈시를 시작한다. “나는 손으로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란다/언제나 발이 함께 쓴단다/굳건하고 자유롭게/그리고 용감하게/발은 때로는 들판을/때로는 종이 위를/뛰어다니지.” ‘발로 글을 쓰다라는 시 전문이다. 손발이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만 움직여 쓰는 글의 관념적 폐해의 역기능을 일갈하는 주장이다. 니체의 시가 심오하면서도 경쾌하고 의미심장하면서도 유쾌한 까닭은 격전의 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면서 오감각으로 받아들인 자연과 세상의 목소리르 번역한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행위란다/몸이 없는 성자들을 믿지 마라.” 김선우 시인의 녹턴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햇봄, 간빙기의 순진 보살에 나오는 시 구절이다. 인공지능이 감탄을 자아내는 시를 써도 몸이 없는 논리기계로 편집한 시라서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니체에게 위험은 의지(依支)하고 싶은 의지(意志)

 

니체는 미끄러운 얼음판/춤출 줄 아는 자에게는/그곳이/바로/파라다이스”(춤추는 이를 위하여)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엄동설한의 추위에도 그냥 떨고있지 않고 세상의 위기에 맞서 춤을 추는 위버멘쉬였다. 바람에 맞서는 방법은 책상에 앉아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고민하는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 “반갑다,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들아/너희는 오는구나/너희 서늘한 오후의 정령들이여!/중략/강인함을 잃지마라, 내 용감한 심장이여!/이유는 묻지 마라!”(해가 저문다). 어떤 바람이 느닷없이 불어와도 관념의 거품을 걷어내고 내면을 가리는 포장을 뜯어내며 위장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모든 것을 버리고 혹한의 시련을 견디는 나목(裸木)처럼 껍데기로 가려진 자신을 드러내는 나체(裸體)가 될 때, 그러고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곧 나력(裸力)의 지혜임을 니체는 온몸으로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세상의 진리를 몸으로 증명하지 않고 기존 관념에 기생하거나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내장은 꼬여서 온갖 편파적 의견이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온다. 바람이 불면 바람과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바람과 더불어 춤출 수 없는 자들/붕대를 감아야 하는 약한 자들/묶인 자들과 늙어 몸이 불편한 자들/위선에 찬 무리들/명예만 따지는 얼간이들/시시콜콜 도덕을 따지는 인간들/우리 낙원에서 물러가라!”(북서풍에게). 변화와 위기는 관리대상이라기보다 함께 맞서 춤추는 가운데 그 물결과 흐름 속에서 난국을 돌파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작은 위기에도 넘어지고 고정관념에 묶여 관념조차 고장난 사람들이 온갖 명예와 위선에 묶여 내가 주어가 되지 못하고 언제나 그들이 말하는 도덕에 억눌려 생각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니체는 늘 고통스러운 충고를 던져주어 고충이 되는 사람이다. “명성을 얻고자 하는가?/그렇다면 이 교훈에/귀 기울여야 하리라/너무 늦지 않게/명예를 포기하라”(충고). 명성을 얻고 싶으면 명예를 포기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 싶으면 기존의 도덕과 규범에 종속되어 노예의 인생을 살아가지 마라고 니체는 일갈한다. “이제 차갑게 직시하라!/너는 길을 잃었다/네가 의지할 건 이제 위험뿐이다!”(헤매는 자). 모든 시작을 위험하지만 시작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겪어본 경험이 삶의 지침이되는 경전이다. 때로는 기존 앎에 심각한 생채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더 큰 시련을 견뎌낼 앎의 근육이 생기는 법이다. “녹이스는 일도 필요하다/예리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녹이 슬어 철이 산화되는 화학적 변화를 겪어내야 제3의 새로운 물질로 탄생하는 것처럼 고통의 자막을 주체적으로 해석해내야 그 누구도 갖지 않는 나만의 해답을 장착,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으로 유배된 자들이 내게 띄우는 편지다.“ 김경주 시인의 비정성시(非情聖市)’ 라는 시의 일부다.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듣는다

 

그대들 독자들이여

튼튼한 치아와 튼튼한 위를

가지고 있기를 바라겠소이다!

내 책을 잘 소화해야만 비로소

나와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니!

-나의 독자들에게

 

니체의 글과 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니체처럼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삶의 정수를 걸러내는 아프고 힘든 삶의 깊이와 넓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 삶을 능가하는 글을 읽을수도 쓸 수도 없다. 니체처럼 살아가려면 튼튼한 치아와 튼튼한 위를 갖고 니체가 말하는 메시지를 잘 씹어 소화시켜야 한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틀이 생기지 않는다.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9).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중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의 시가 짧지만 긴 울림을 내포한 상태로 통렬하면서도 동시에 통쾌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몸을 관통한 흔적으로 시처럼 살아가는 삶을 살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377). 니체의 비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인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대 바그너 중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에서 이어서 말한다. “우리 청각의 한계: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듣는다”(231). 아무리 좋은 질문을 던져도 자신이 겪어본 경험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알아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사는 시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은가?

시대의 진면목을 보고 싶은가?

한 번 쯤 멀리 떨어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말하자면, 시대의 해안에서 발을 빼어

멀리 과거의 바다로 떠밀려 가보라,

먼 바다에서 해안을 바라보면

해안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해안에 가까이 오면,

해안을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보다

해안을 전체적으로 훨씬 더 잘 알 수 있다

 

어제와 다른 곳으로 떠나야 어제와 다른 마주침을 얻을 수 있고 그 마주침이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낯선 깨우침으로 다가온다. 그 깨우침이 어제와 다른 시를 쓰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나는 오로지 작가가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 니체는 경험해본 것만 피로 쓴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니체에게 글을 쓴다는 것과 삶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이며 니체에게 시쓰기시하다로 바뀌는 이유다. 경험하며 흘린 땀과 눈물의 이중주가 사투를 벌이며 흘린 피를 만나 땀과 눈물과 피의 3중주가 만든 흔적과 얼룩을 특유의 통쾌한 서사적 문체로 써내려간다. 니체의 시를 읽노라면 피눈물이 고여 있고 피땀어린 흔적이 숨어 있지만 초긍정의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열정을 녹여내는 진중한 발걸음으로 하늘을 날아가는 명쾌함과 유쾌함이 통쾌함이 뒤섞여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도 철학서이기 이전에 차라투스트라의 격동적인 삶을 담아낸 음악이자 그림이며 장편의 서사시다. “생각을 하는 것은/그만하고 싶네/생각을 하는 자는/생각의 손아귀에 붙잡힌 자/난 더 이상 생각에/봉사하고 싶지 않다”(은자는 말한다). 생각하지 않는 철학자는 없다. 니체가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자기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갉아먹으면서까지도 몸을 움직이고 않고 생각만 거듭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존 생각에 갇뎌 자기 생각의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기존 생각으로 생각의 자손을 무한 출산하는 사람들이다. 진짜 생각하는 사람은 니체가 말하는 부자유한 자. “그는 서서히 귀를 기울인다/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귓전을 맴도는 소리는 무엇일까/그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건 무엇일까”(부자유한 자).

 

시는 나는 나의 해석자가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진짜 생각하는 사람은 기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자기 생각이 낳은 통념이나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귓전을 맴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전과 다르게 다가오는 모든 외부적 자극에 대한 내면적 반응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 없이 치솟아 오르려는 자만심을 땅으로 끌어내려 낮은 곳으로 임하려는 겸손한 자세와 노력 속에 치열한 생각이 잉태된다. 니체가 그렇게 해서 찾아낸 진리가 드디어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가만! 나의 진리가 왔다!/머뭇거리는 눈으로, 비단처럼 부드럽게 전율하며/진리의 눈이 나를 쳐다본다/사랑스럽고 심술궂은 소녀의 눈빛”(가장 부유한 자의 가난에 대하여). 니체는 언제나 확신이나 기존 진리는 부패하기 때문에 통념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어제와 다른 질문으로 언제나 믿음의 근거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정에 통렬한 문제를 제기한다. 자기자신의 해석틀에 갇히는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구축한 철학체계와 기반도 수시로 전복했던 망치철학자였다. “사회 현상의 실존적 영향력은 그것이 팽창할 때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미약한 상태인 초창기에 가장 날카롭게 인지될 수 있다”(178). 밀란 쿤테라의 커튼에 나오는 말이다. 영향력이 도처에 산재해서 익숙한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다가오는 자극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니체도 같은 맥락에서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낀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타락도 타성에 젖으면 관성이 되어 별 다른 느낌을 갖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는 의미다. “어떤 현실이 전혀 부끄러움 없이 되풀이 된다면, 그 반복되는 현실에 직면한 사상은 결국 언제나 입을 다물게 되는 법이다”(179). 밀란 쿤데라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시는 반복되는 현실에 의문을 던져 부끄러움을 낳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여 타성에 젖은 생각을 세탁, 날 좋은 햇빝에 말리는 가운데 탄생된다.

 

내가 나를 해석하면/스스로를 속이게 되리라/나는 나의 해석자가/될 수 없으니!/오직 자신의 길을 꾸준히 오르는 자, 그 사람만이/나의 모습도 더 밝은 빛에서/비추어주리라”(해석). 시는 나는 나의 해석자가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있는 곳에서 머무르고, 자기 전공 틀안에 갇혀서 전공지식간 부단한 순혈교배를 통해 자기들만 알아듣는 지식을 생산, 자기들이 갇혀 있는 이론적 틀로 해석하는 자가당착적 오류를 범하는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경고다. 내가 나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은 물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고 있었던 신념이 통념으로 바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부단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물음 앞에 나의 해석된 지식이 불안에 떨고 위험에 노출되어 언제나 긴장과 불안 속에서 세상을 밝히는 온전한 앎이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단련당하고 옳음이라는 소금에 뿌려져 썩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를 그렇게/부풀리지 마라/계속 부풀리기만 하면/풍선처럼 조금만/찔러도 터져버릴 테니”(오만에 대하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장성세를 구가하며 위장하고 치장하는 관념적 거품을 걷어내고 해방된 정신으로 세상의 흐름을 이끄는 이면의 구조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리하지 않았다.

 

시는 몸안으로 침입해 통증을 유발하는 염증이다

 

해방된 정신

 

다른 의견을 용납할 줄 아는 것이

문화의 표지라는 건 이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더 나아가 수준 높은 인간은 자신에 대해

이의가 제기 되기를 원하고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몰랐던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보다 더 위대한 것은

다른 의견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거리낌 없는 양심으로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익숙한 것,

신성하게 여겨지는 것에 맞서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위대하고 새롭고 놀라운 면이며,

해방된 정신이 걷는 가장 앞선 걸음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시는 관성에 따라 움직이는 발상이 아니라 생각의 물구나무를 서서 관성을 거부하고 거꾸로 바라보는 역발상이며 닫힌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해방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시는 책속의 깨알 같은 글씨가 아니라 책을 쥔 손에 맺힌 작은 땀방울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관망'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밑바닥의 절박한 현실을 몸으로 느끼며 부대끼는 치열함이다. 그래서 니체의 시는 하나의 염증이다. 사랑은 하나의 염증/너라는 이물질이/내 안에 침입해/통증을 유발하는 것/미열처럼 너는/궤양처럼/너는.” 조원희의 염증이라는 시다. “시는 하나의 염증/시라는 이물질이/내 안에 침입해/통증을 유발하는 것/미열처럼 시는/궤양처럼/시는.” 니체의 쓰는 기쁨에 나오는 시는 모두 하나의 염증을 유발한다. 니체의 시을 읽고 나면 기존 앎에 심각한 암()이 생긴다. 그래도 두렵지 않다. 그 암이 기존 앎을 뒤엎고 새로운 앎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고통 끝에 찾아오는 새로운 앎의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이 어떤 암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새로운 앎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다. 이성복 시인이 그날이라는 시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처럼. 앎의 암이나 염증을 치료하는 특효약이 바로 니체의 쓰는 기쁨에 나오는 시다. 니체가 전해주는 치료약으로 힘들고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명랑하고 행복한 일상이 주는 소중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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