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 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철학 에세이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5년 6월
평점 :
행복은 고정된 추상명사가 아니라 역동적인 동사다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철학 에세이
나 자신의 행복을 일구는 연습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연습
동료-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
인용부호가 없는 행복과 인용부호가 있는 “행복”의 경계와 사이
자크 데리다는 개념은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과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으로 나뉜다고 한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은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이해하는 상식적인 개념이고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은 자신의 경험과 철학에 비추어 기존 개념을 재개념화시킨 새로운 개념이다. 즉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은 자신의 신념과 철학으로 기존 개념을 자기만의 언어로 재정의한 개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인용부호가 없는 행복과 자기만의 철학과 신념을 담아 기존 행복이라는 개념을 자기만의 언어로 재개념화시킨 개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독, 행복, 열정, 용기, 존재와 같은 모든 개념은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시전에 나오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과 오랜 숙고 끝에 새로운 의미를 잉태하고 출산된 개념이다. 즉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추상적이며 통념에 젖은 개념이 아니라 저자가 구체적인 일상에서 치열하게 고뇌하며 겪어낸 경험적 흔적과 얼룩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탄생한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행복이라는 개념도 돈과 부, 가시적 조건과 물질적 자산으로 해석되는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행복과 대체 불가능한 내가 삶의 다양한 조건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만의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용기를 발휘해서 얻는 행복의 의미는 천지차이다. 대체 불가능한 나, 고유명사로서의 내가 나의 동료-인간으로서의 너가 만나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가운데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사랑과 행복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해서, 그 ‘나’와 연결된 ‘개인(singulat individual)’과의 관계를 통해 실현될 뿐”(21쪽)이기 때문이다.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 나와 네가 만나 서로의 마음과 정신 세계를 드러내고 공유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답게 살아가려는 안간힘을 쓰며 자신이 의미있다고 판단하는 일에 몰두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과정을 지순한 미소로 화답하며 서로의 존재감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행복정원은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결국 이 책은 인용부호가 없는 통념에 젖은 행복에서 인용부호가 있는 신념에 찬 행복의 의미와 가치를 존재에의 용기 속에서 꽃피우자는 이야기를 넌지시 건네고 있다.
글쓰기는 작은 세계의 출산이자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려는 존재론적 몸짓이다
행복한 사람은 읽고 쓰는 절대 고독의 시간을 즐긴다. 저자에게 “한 편의 글쓰기는 장르와 상관없이 언제나 ‘작은 세계의 출산’을 의미한다(153쪽). 쓰기를 통해 작은 세계를 출산하기 위해서는 쓰인 텍스트만이 아니라 사건을 읽고 정황을 읽고, 해석하는 읽기가 동반되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읽기는 1차적 읽기와 2차적 읽기로 구분되는 ‘이중적 읽기’라고 볼 수 있는 ‘더블 리딩(double reading)’이다. 1차적 읽기는 저자가 텍스트를 통해 드러내고자하는 의미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고들어 이해하는 긍정적 읽기다. 2차적 읽기는 저자가 드러내고자하는 의미를 보다 거시적 차원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해보고 나름의 가능성과 문제점 또는 한계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문제제기의 읽기’다. 1차적 읽기가 저자의 사유체계 속으로 파고들어가 저자의 입장에서 의미를 이해하는 빠져들기의 읽기라면 2차적 읽기는 저자의 의미체계 속에서 빠져나와 저자의 의도와 의미를 사회구조적 차원과의 관계 속에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재해석하면서 빠져나오는 읽기다. 빠져들었다가 다시 빠져나와서 저자의 텍스트가 특정한 컨텍스트 속에서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보는 읽기가 동반될 때 텍스트는 텍스트로 끝나지 않고 저마다의 컨텍스트 속에서 독자의 텍스트로 재탄생되는 읽기가 된다.
이 책을 독자인 나도 1차적으로 빠져들어서 읽어본 다음 저자가 던져주는 의미의 덩어리를 내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반추해고 성찰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찾아내서 누려야 할 행복은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질문을 던지면서 읽어냈다. 읽으면서 내가 만약 강남순 교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유와 더불어 상상이 일상을 넘나들며 비상하는 즐겁고 행복한 읽기의 여정이었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살아있음의 표시이며, 이 세계에 개입하는 하나의 방식(155쪽)이자 ”자기 삶에 대한 방치와 무관심에서 벗어나고자하는 하는 존재론적 몸짓“(26쪽)이다. 이런 점에서 읽기와 쓰기는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무엇을 의미 있게 추구하는 사람인지, 내가 품고 있는 필생의 질문은 무엇이고, 그걸 기반으로 탐구하면서 찾아내고자하는 존재목적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싸우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위치에서 부단히 읽고 쓰는 존재론적 몸짓인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유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는 인용부호가 있는 핵심 개념과 그 개념에 담긴 저자의 신념을 기반으로 읽고 쓰는 모든 활동 자체도 강남순 교수님이 행복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면서 썼던 다양한 존재론적 몸짓의 다른 이름이다.
물리적 공간에 머무는 주택(house)과 심리적 장소에 거주하는 집(home)
행복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기소임을 다하는 존재는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 즉 하우스(house)보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충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34), 즉 “살아내는 공간(lived place)”(33쪽)에서 거주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에서 ‘장소’는 영어의 공간을 의미하는 ‘space’가 더 적절한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홈’과 연결시켜 사용한 ‘공간’은 영어의 ‘place’에 맞는 ‘장소’라는 개념으로 바꿔서 쓰면 하우스와 홈의 의미상의 차이는 물론 심리적 느낌상의 차이를 더 확연하게 드러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즉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는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라고 쓰고 “살아내는 공간(lived place)”은 “살아내는 공간(lived space)”라고 바꿔써보면 하우스와 홈, 공간과 장소가 어울려 저자가 말하는 행복의 정원을 더 적확하게 설명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흔히 ‘하우스’는 물리적인 구조물, 즉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의미한다. 이는 객관적이고, 유형적이며, 교체 가능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저기 큰 하우스가 있다"라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건물의 형태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살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 빈껍데기와 같다. 반면에 ‘홈’은 개인이 소속감을 느끼고, 편안함과 안정감을 얻으며, 가족과의 추억이 쌓이는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홈'은 물리적인 건물을 넘어선 경험, 감정, 관계, 그리고 기억으로 채워진 곳이다. "집에 간다"라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건물로 돌아가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유대, 편안한 휴식, 그리고 개인적인 역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우스에 어울리는 공간(space)은 추상적이고 비어 있는, 지리적인 위치만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아무런 의미나 경험이 부여되지 않은 중립적인 영역을 의미한다. 마치 백지처럼, 잠재력은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상태다. 예를 들어, "이곳은 넓은 공간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저 면적이나 부피만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홈에 어울리는 장소place)는 인간의 경험, 감정, 기억, 문화적 의미 등이 부여되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터전을 의미한다. 공간이 인간의 상호작용과 의미 부여를 통해 비로소 '장소'로 변모하는 것이다. '장소'는 개인적인 유대감이나 공동체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정체성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나의 고향은 특별한 장소다"라고 할 때, 그곳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넘어선 마음의 고향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나의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인정되고, 포용되는 공간이 홈이라면 결국 ‘홈’은 나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어에 ‘홈’이란 당신의 가슴이 깃드는 곳(home is where your heart is)”(35쪽)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당신은 외로운 주택(house)에서 사료를 먹는가, 고독한 집(home)에서 식사를 하는가
하우스와 홈, 공간과 장소 개념의 차이는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에서 말하는 사료(飼料)와 식사(食事)의 차이와도 상응한다. 발터 벤야민은 인간의 경험과 의미 부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료'와 '식사'는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한다. 사료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영양 공급, 즉 본능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목적 지향적이고, 기계적이며, 의미가 결여된 소비 행위와 유사하다. 마치 가축에게 주어지는 먹이처럼,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식사는 단순히 영양을 섭취하는 것을 넘어, 관계, 소통, 문화, 그리고 사랑이 담긴 행위를 의미한다. 벤야민은 "식사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라는 말의 동의어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음식을 나누고, 대화하며,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적인 행위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볼 때, '주택(house)'은 단순히 거주를 위해 억지로 '사료'를 먹는 '공간'에 불과하다. 반면, '집(home)'은 그 '주택(house)'이라는 '공간'에 사랑과 추억, 관계라는 의미가 더해져 비로소 '식사'를 나눠 먹으며 풍요로운 행복을 꽃피우는 '장소'로 변모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물리적 공간이 차지하고 있는 하우스에서 사료를 먹고 충족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기쁨을 만끽하며 행복할 권리는 정감이 오고가는 관계의 정원, 홈이라는 삶의 터전, 장소에서 밥을 하는 사람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식사를 나누면서 대체불가능한 나와 네가 만나서 아름다운 우리라는 연대망이 형성될 때 비로소 구현된다.
“고독의 공간은 사유하기, 중심부와의 거리 두기, 반학습적인 창의성이 꽃피는 자리이며 무엇보다도 자신과 만나는 자리다”(39쪽). 고독한 사람은 자신을 인간화시키는 소중한 예식, ‘고독 예식’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고독한 한 사람은 외로움(loneliness)을 느끼지 않는다. 작가가 조용한 서재에서 홀로 글을 쓰거나, 화가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고독해져야 한다. 외부의 방해 없이 오롯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며 창작의 즐거움을 만끽해야 작품이 타생된다. 또는 숲길을 걷거나 낯선 도시를 여행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고독한 경험이다. 주변의 풍경에 집중하고, 자신만의 생각에 잠기며, 새로운 영감을 얻는 등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가운데 존재이유를 새롭게 깨닫는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파티나 모임에 참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소통이나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고립되었다는 감정에서 외로움이 시작된다. 고독과 외로움은 관련성이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혼자 있는 상태인 '고독'이 반드시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군중과 떨어져 홀로 있는 고독한 상태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지만, 그렇다고 고독과 외로움이 같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긍정적인 상태인 반면, 외로움은 원치 않는 고립감과 쓸쓸함을 동반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결국 고독력으로 온전한 자신과의 대화를 하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면서 고립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고립의 공간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되며, 이 세계로의 개입이나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삭제하는 공간이다”(39쪽).
자기의식을 고양시키는 리추얼이 없으면 얼빠진 삶에 휘둘린다.
주택(house)에서 사료를 먹으며 고립된 공간(space)에 입주하고 다시 이주를 반복하는 외로운 사람보다 집(home)에서 식사하며 관계의 정원을 싹틔우는 장소(place)에서 거주하며 정주하는 사람이 인용부호 속의 “행복”을 일상에서 만끽하는 사람이다. 행복한 일상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택은 행복을 가꾸는 정원이라기보다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전시용에 가깝다. 투자대상으로서의 주택은 언제나 다른 주택으로 이주하기 위해 잠시 입주하고 있는 중간 거점지에 불과하다. 주택에 거주하는 사람은 경기변동과 소비 트렌드에 민감하고 세상의 변화나 화두가 던지는 욕망의 그물에 자주 걸려든다. 그들은 저자가 말하는 AM-모드에 휘말리는 사람이다. “AM-모드는 복잡한 문제들이 산재해있는 세계다”(50쪽). 반면에 집이라는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바깥 세계의 흐름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정신적 안전모드에 머물며 바깥 세계의 변화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한다. FM-모드는 외부세계의 암담하고 착잡한 현실은 ‘의도적으로 괄호 속에 넣는 것’에서 외부의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물들지 않게 자기의식을 고양시키는 리추얼이다. 외부의 잔혹한 현실이 내면으로 파고들어 뒤흔들고 파괴하려는 온갖 유혹의 손길이 난무하는 AM-모드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면세계를 굳건하게 지켜내는 자기만의 고독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행복이 무르익는 삶의 정원은 고립이나 외로운 ‘공간’보다 고독의 ‘장소’에서 자란다. 고독한 시간은 외부의 자극과 방해 없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다.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의 생각, 감정, 가치관을 깊이 들여다보고, 진정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 이해는 내면의 평화와 만족감, 즉 행복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고독을 통해 우리는 외부 환경이나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스리는 방법을 배운다. 이는 역경에 직면했을 때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과 자율성을 길러주며, 궁극적으로 더 단단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기여한다. 역설적으로, 고독은 타인과의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재정비하고 에너지를 충전함으로써,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더 진정성 있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유, 책과 꽃 그리고 달이 있다면 행복하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유
책들,꽃들
그리고 달이 있다면
누가 행복하지 않으리…?“
나에게 행복은 자유, 책과 와인, 그리고 정체성을 증명하는 신체성의 증표, 짐에서 들어올리는 바벨이다.
자유,
책과 와인
그리고 바벨이 있다면
누가 행복하지 않으리…?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어제와 다른 자유를 갈망하고 책을 읽으며 낯선 깨우침을 얻고 싶은 지적 황홀감을 동경하며 농밀한 향과 깊이있는 숙성의 향연이 만나는 와인을 마시고 싶은 갈망이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많다.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갈망은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갈급한 열망이라기보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한 차원 높은 미지의 삶으로 떠나보려는 간절한 희망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연결된다. “결국 ‘존재한다는 것’은 ‘갈망하는 것’이다”(65쪽). 무엇을 갈망하는가? 기지에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희망을 갈망하고, 한 두 번의 시도로 충족될 수 없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에너지인 욕망을 어제와 다르게 갈망할 때 존재는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무한히 변신을 거듭한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어제와 다르게 변신하고 싶은 갈망과 욕망의 물줄기를 잡으려는 본능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삶을 살아간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수전 손택이다. 수전 손택의 일기에서 나타나듯이, 그녀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교감에 대한 통렬한 욕구"와 함께 "지적인 황홀경" 속에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육체적 친밀감과 깊은 정신적 교감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기를 바랐던 그녀의 내면을 드러낸다.
'고뇌에 찬 갈망'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욕구는 쉽게 충족되지 않았고, 그녀의 삶 내내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대상이자 때로는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수전 손택의 삶에서 이 갈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와의 관계다. 두 사람은 단순한 연인 관계를 넘어, 깊은 지적 동반자이자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 존재였다. 두 사람 모두 강렬한 개성과 지적 욕구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관계 속에서 갈등과 고뇌도 존재했을 것이다. 손택의 일기에서 드러나는 '갈망'은 이러한 관계의 복합성과 완전한 합일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반영한다. 결론적으로, 수전 손택의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동반자 관계에 대한 고뇌에 찬 갈망"은 그녀가 삶에서 추구했던 완전성과 진정성을 나타낸다. 그녀는 육체적 친밀감과 정신적 교감이 조화를 이루는 총체적인 관계를 원했으며, 이러한 갈망은 그녀의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지적 활동과 글쓰기에도 깊이 스며들어 그녀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이 갈망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와 재창조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삶은 물음표다
“삶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느끼고, 대면하고, 그 속에서 깊숙이 침잠하는 듯 지독한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것”(88쪽)을 저자는 ‘실존적 독감’이라고 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희망의 뒤안길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존재하고, 성공하기까지에는 무수한 장애물과 걸림돌에 넘어지는 실패의 늪이 존재한다. 생각보다 깊은 우울과 절망의 세계에서 저마다 힘든 전쟁을 벌이는 일상적 삶에서 물러나지 않고 일생동안 씨름해야 되는 난제들을 붙잡고 살아가는 이유와 존재목적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근원적 질문의 그물을 던져놓고 어제와 다른 답을 찾기 위해 부단히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어제와 다른 대안을 탐색하지만 생각보다 우리가 직면하는 복잡한 딜레마를 해결하는 해답을 얻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 각자가 지닌 이 살아감의 크고 작은 문제들과 딜레마에는 해답이 없다”(95쪽). 엄밀히 말하면 저마다의 상황적 문제를 해결할 하나의 정답은 없지만, 주관적 해석에 따라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 있는 해답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정답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해답은 해석방식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직면하는 딜레마를 탈출할 대안의 가능성은 얻을 수 있다.
“삶은 물음표다.” 20세기 니체라고 하는 에밀 시오랑의 말이다. 내가 품고 있는 물음표의 곡선이 내가 찾을 수 있는 느낌표의 직선을 만날 수 있다. 곡선의 물음표가 품은 호기심의 강도가 직선이 느낌표가 품은 감동의 강도를 결정한다. 삶에는 정답이 없어서 오늘도 어제와 다른 호기심의 물음표를 품고 불확실하고 불안하지만 다가오는 미래를 끌어안고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고 살아내기 위해 한 걸음 내딛는 사람들의 연대가 함께 고독의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을 보자.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 한다.
“길이란 찾은 것이라기보다 만들어 가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이란 없다. 그 길은 오로지 내가, 치열성과 용기를 가지고 창출해 가는 것(invent)(”274쪽)이라서 길은 앞에 있지 않고 뒤로 생긴다. 앞에 있는 길은 누군가 이미 걸어간 길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바로 존재이유를 찾아가는 길이다. 다른 사람이 걸어간 길을 따라 가는 길 위에서는 존재의 기쁨이 일어나지 않고 불확실성과 싸울 필요가 없는 안전한 길이다. 익숙한 여기를 떠나지 않고 낯선 미지의 세계와 의도적으로 만나지 않는 길에서는 어제와 다른 마주침이 일어나지 않는다.
떠남은 근원적인 물음과 조우하는 과정이다
고독을 고향삼아 함께의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진정한 친구이자 행복한 관계의 정원을 함께 가꾸어가는 삶의 동반자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와의 작별과 미래와의 조우에 존재하는 사이공간을 넘나들며 그 사이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들이다. “떠남을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 등 근원적인 물음과 조우하는 과정”(100쪽)으로 삼을 때 그때의 마주침이 색다른 깨우침으로 나에게 선물로 다가온다. 과거와의 작별을 고하고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익숙한 공간에 고립되어 외로움에 시달릴 수 있다. “자신의 과거와이 작별, 그리고 새로운 미래와의 조우라는 이 두 축의 사이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101쪽)보는 사람만이 실존적 독감을 극복하는 실존적 몸짓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권리를 누리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익숙한 지금 여기서의 타성에서 벗어나 불확실한 낯선 저기로의 과감한 떠남을 진행형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뜻밖의 ‘해프닝(happenings)’이 발생할 수 있고, 그 해프닝이 뜻밖의 ‘해피니스(happiness)’, 행복을 낳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행복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이어지는 산문의 세계와 이성과 합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미소, 눈물, 포옹, 키스와 같은 시의 세계가 어우러질 때 가능해진다고 한다. 열길 물속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측정 대상이지만 한 길 사람 속은 인문학적 헤아림의 대상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한 길 사람 속이 품은 깊은 뜻은 알 길이 없다. 그저 보살피고 어루만지며 헤아리는 수밖에 없다. 존재함의 의미 역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추론만으로 밝혀질 수 없는 미스터리의 세계다. 왜 사는지, 왜 사랑하는지 그 이유의 저변을 아무리 파고들어도 의미의 심연은 더 깊어만 간다.
장미는 ‘왜’가 없다;
장미는 그저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것이다.
(The rose is without ‘why’;
it becomes simply because it blooms.)
17세기 독일시인, 안젤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의 시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수많은 왜에는 언제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을에 단풍이 드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과학적 설명 너머의 단풍의 존재이유는 시적 사유의 대상이다. 바람은 왜 부는지, 구름은 왜 생기는지, 나뭇가지는 왜 흔들리는지는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은 존재 자체의 신비로움을 이해하는 충분한 조건으로 납득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왜 10개인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시인은 그런 설명논리에 만족하지 않는다. 함민복 시인의 ‘성선설’이라는 시에 보면 전혀 다른 시적 상상력이 등장한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존재의 이유를 아무리 물어봐도 하나의 정답으로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존재함 자체가 바로 살아감의 의미와 이유가 된다”(174쪽).
안개꽃 배경 덕분에 장미꽃 전경이 돋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고갱의 그림 제목처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사람이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의 멈추지 않는 물음이다. 이런 질문의 끝에는 또 다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어떤 관계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오늘 나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관계 없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선우 시인의 ‘참나라니, 참나!’라는 시가 있다. “비루할지라도 당신, 당신들과의 접촉면에서 이슬이 맺히죠/이슬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죠/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내가 되는 영롱함.” 나는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존재다. 무수한 ‘너’들에 의해서 비로소 내가 영롱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한끼를 해결하는데 동원되는 자연자원과 수많은 생명체에 가하는 ‘생태학적 죄(ecological sin)’ 앞에서 딜레마를 탈출한 대안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화 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운명이다(146쪽).”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한 말이다. 나는 오늘도 한 끼 식사를 위해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태를 뽐내며 살아가던 각양각색의 동물과 식물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폭력을 가하고 살인행위를 저지르며 배고픔만 채우며 살아가는 생태학적 죄인이다. 존재의 부채를 느끼며 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과학자 테슬러가 말하는 복잡성 보존의 법칙이라고 있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과 단순함은 내 대신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불편하고 복잡한 일을 해준 덕분이라는 의미다. 마트에 가서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쇼핑을 하고 집에 갈 때는 주차장이나 적당한 장소에 버리듯 아무데나 두고 간다. 다시 쇼핑하러 오면 누군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카트를 입구에 질서정연하게 정렬해놓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편리하게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쇼핑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가 버리고 간 카트를 끌어가 다시 입구에 질서 정연하게 정렬해놓은 덕분이다. 모든 전문성은 사회적 합작품이다. 스타 플레이어는 보지 않는 가운데 누군가 도움을 제공해준 덕분에 빛나는 보이는 사람이다. 모든 커피에 다 들어가는 에스프레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다양한 커피로 맛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은 에스프레소 커피 덕분이다. 그래서 맡은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을 빛나 보이게 만드는 사람을 에스프레소맨이라고 한다. 하얀 안개꽃 배경에 빨간 장미꽃을 전경으로 드러내면 장미꽃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다. 전경으로 드러난 장미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묵묵히 배경에서 장미꽃을 전경으로 드러나게 도와준 안개꽃 덕분이다.
질문은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비료다
행복한 관계의 정원에서는 “미소는 글의 언어와 말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심오한 몸의 언어”(106쪽)로 소통한다. 상대방의 작은 표정 하나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담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하고 대답을 경청하면서 서로가 미소짓는 화기애애한 소통이 이어질 때 행복은 관계 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나를 미소짓게 하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의 타자들을 미소짓게하는 것은 무엇인가?”(107쪽)를 자문한다. 나는 오늘 누군가를 위해 얼마나 미소짓게 하는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반문하면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미지의 내일에 만나게 또 다른 사람과의 행복한 관계를 상상상해본다. 상대에 대한 질문은 자동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물론 스스로 뭔가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과 열정, 기반 지식은 물론 폭넓은 교양과 자기분야의 깊은 전문지식이 있어야 상대를 감동시키는 질문을 만들 수 있다. 사랑하면 질문이 연이어 형성되고 그 질문이 경계를 넘나들어 마침내 깊은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비료 역할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미소짓고(smile at) 누군가와 함께 웃는(laugh with) 의미는 매우 심오하다”(177쪽). 진정한 미소는 타자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존중과 환대의 마음으로 포옹할 때 비로소 진정성의 교감이 일어나면서 미소를 띠고 더불어 상대도 미소로 화답(和答)하면서 화통(和通)이 시작된다. 그런데 경쟁이 극심해지고 성과와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유혹의 손길이 곳곳에 미치면서 상업적이고 상투적인 미소, 자기만족적인 승리의 미소가 판을 치기 시작한다. 이런 미소는 조소에 가깝다. “누군가를 조롱할 줄은 알지만, 누군가와 함께 웃는 것은 하지 못한다는 현실”(179쪽)은 개인적인 품성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우열의 관계나 지나친 경쟁관계가 낳은 역기능이자 폐해이며 구조적 산물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의견의 차이가 발생하면 비판보다 비난을 퍼붓고 미소보다 조소와 조롱으로 상대를 벗어나기 어려운 덫에 가둬버린다. 미소는 혼자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상대와 진심으로 교감하면서 인식과 관심을 같이 하는 가운데 심리적으로 느끼는 희망의 연대감이 생길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표정이다. 이때 구축하려는 연대는 관점과 해석의 같음만을 공유하는 ‘동질성의 연대(solidarity of sameness)’가 아니라, 다름도 인내심 있게 경청하면서 그 다름을 적대가 아닌 개방과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다름의 연대(solidarity of alterity)’ 속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눌 수 있다.
우정은 살아있음의 생생한 방식이자 행복한 권리를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이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다고 질문이 많아지거나 정신적인 성숙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타자에 대하여, 사물에 대하여 좀 알고자 하는 지순한 호기심과 열정을 지니고 있는가, 새로운 앎이나 의미추구에 대한 ‘실존적 배고픔’이 있는가 하는 점”(110-111쪽)과 “그 ‘실존적 배고픔’의 성격, 강도, 그리고 깊이에 따라 나는 그 사람의 정신의 나이를 측정”(111쪽)한다. 지순한 호기심과 식지 않는 열정,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려는 지적 갈망이 실존적 배고픔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실존적 배고픔은 뭔가를 추구해서 달성한다고 해소되는 결핍이 아니라 이전과 다른 실존적 배고픔이 끊이지 않고 생성되는 영원한 미완성이다. 그 미완성이 어제와 다르게 변신하게 만드는 희망의 원동력이 된다. 실존적 배고픔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의 존재가 지닌 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배경으로 깔린다. 보이지 않는 진중한 배경이 서로의 존재를 번갈아가면 전경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진정한 친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우정의 싹을 틔운다. 내가 먼저 진정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만나서 쉽게 만남의 끈이 끊어지는 플라스틱 관계를 넘어서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가려고 더 낮은 자세로 상대를 존중과 환대의 존재로 바라본다.
“오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Oh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 자크 데리다의 《우정의 정치학》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여기서 앞에 복수로 호명되는 친구들(friends)은 보편성의 친구들이고 단수로 언급된 친구(friend)는 개별성의 친구다. 복수로 호명되는 보편성의 친구들은 불특정 다수의 만남이 특별한 관심과 인식 없이 스쳐지나가는 대중적 만남으로 형성된 관계 속의 친구들이다. 동문, 동창, 각종 친목 모임, 단톡방에 존재하는 무수한 익명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바로 친구들이다. 스친 기억은 있지만 스며든 정은 없는 친구들이다. 반면에 단수로 호명되는 개별성의 친구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singular) 친구다. 지순한 호기심과 열정, 실존적 배고픔이 매개가 되어 만나는 친구다. “‘언제나 이미(always already)’ 존재하는 우정과 친구의 존재”(118-119쪽)를 넘어서 “아직 아닌 우정, 아직 아닌 관계, 아직 아닌 세계에 대한 갈망”(119쪽)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우정은 “살아있음의 생생한 방식(active mode of being alive)”이자 행복한 권리를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friendship ad practice)”으로서의 다가올 우정의 관계로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된다.
지식은 보편적 ‘진리(眞理)’가 아니라 상황 구속적 ‘일리(一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확실성보다 불확실성, 명증성보다는 불투명성이 지배”(139쪽)하는 세계는 언제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 천국이다. 좌절과 절망이 상존하고 패배와 실의(失意)의 텃밭이 무성하며, 어둠과 그늘이 삶의 배경과 친구로 가까이서 지내는 일상이 매일 전쟁과 같은 삶의 터전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바로 ‘한편으로는…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이라는 ‘더블 제스쳐(double jesture)’다.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 인간의 삶은 완벽하지 않기에 다층적 좌절과 절망감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밖에”(139쪽) 없으며, “‘또 다른 한 편으로(on the other hand) 우리는 절망과 낙담 가운데서, 변화의 희망을 품고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딛는 삶”(139-140)을 살아가는 것이다. 더블 제스쳐를 불안감에 적용하면 불안감의 부정적 해석에서 긍정적 대응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불안감이 엄습하면 지금까지 살았던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으니 이제부터 새로운 각성을 통해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야 되는 시점이라고 해석한다. 더블 제스쳐에 따르면 ’지금 여기‘서의 사유가 아니라 ’아직 아닌‘ 미래를 불안한 미지의 세계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세계를 향해 씨름하고 고민하는 그 과정 자체”(140쪽)로 해석하면서 미래를 희망이 자라는 가능성의 텃밭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존재가 되기 위하여 내가 하는 선택이 바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70쪽). 칼 융의 말이다. 사건은 낯선 기호를 발생시킨다고 들뢰즈가 말한다. 들뢰즈에게 기호는 이전과 다른 해석을 기다리는 모든 신호다. 즉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해석을 기다리는 모든 기호는 사건과 더불어 등장한다. 누구에게나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 사건이 품고 있는 기호를 누가 어떤 관점애서 해석하는지에 따라 사건은 저마다 다른 의미로 기록된다. 더블 제스쳐로 사건을 해석하면 ‘한편으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과 후회가 생기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사연 속에서 뜻밖의 사유를 잉태하는 낯선 생각의 임신이기도 하다. 사건이 함의하는 의미를 해석하는 가운데 이전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낯선 생각을 잉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기도 한다. 모든 지식은 특정한 상황적 맥락에서 탄생되는 사건과 사고의 산물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맥락이 품고 있는 고유한 특수성은 또 다른 상황에 일반화시켜 해석할 수 없다. 모든 지식은 ‘상황 지워진 지식(situated knowledg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지식은 보편적 ‘진리(眞理)’가 아니라 상황 구속적 ‘일리(一理)’일 뿐이다.
행복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한국 사회에 자주 등장하는 ‘시대의 스승’이나 ‘어르신’ 또는 ‘국민 멘트’는 모든 상황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를 갖고 있는 신이 아니다. 성공에 이르는 길에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알 수 없는 미지수 느닷없이 출몰하는 혼돈과 복잡성의 세계다. 성공에 이르는 단 한나의 길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은 무수한 변수들의 상황맥락적 상호작용의 산물이고 성공에 이르는 길에 관여되는 모든 사람과 도구와 환경의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성공 일반도 없고 행복 일반도 없다. 성공이든 행복이든 모든 추상명사는 추상적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에 내던져진 몸이 겪어낸 육체적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면서 탄생하는 개별성이나 단독성의 산물이다. 한 사람의 성공과 행복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일반화시켜 확산 적용할 수 없다. 성공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표준화시켜 매뉴얼로 처방할 수 없다. 성공이나 행복은 저마다의 상황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전쟁의 산물이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무엇이 나를 성공에 이르도록 이끌어 가는지는 주어진 삶의 조건과 환경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정답이 아니라 해답이다. 오늘도 불확실성과 불안감에 맞서 싸우기보다 함께 춤을 추며 타성과 통념을 거부하면서 다양한 관점과 복합적인 시선을 부단히 학습하는 길 밖에 없다.
더블 제스쳐는 ‘존재함의 용기’를 심어준다. 살아감은 절망과 희망, 어둠과 빛, 실패와 성공, 기쁨과 슬픔, 익숙함과 낯섬, 내적 외적 사건과 사고의 사이처럼 무수한 다리들(bridges)과 마주하며 씨름하는 것이다. 익숙한 지금 여기, 이곳과 낯선 아직 아닌 미래, 저기나 저 곳 사이에 존재하는 다리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감이 잠재되어 있다. 두려움과 불안감의 다리를 건너는 용기가 바로 ‘존재에의 용기’다. 존재에의 용기를 발휘하며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이 다리가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리 도래하는 행복의 정원으로 건너가는 디딤돌이다. 다리를 디딤돌로 생각하며 건너는 용기있는 존재는 행복을 추상명사로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어제와 다르게 온몸으로 감각하며 지각하는 동사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행복하다’는 말보다는 ‘행복을 가꾸고 있다’는 말이 적절하다고 한다. 존재에의 용기를 품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시시포스처럼 부조리한 삶을 직시하면서,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서 떨어지는 바위를 끌어올리는 주체적 행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행복한 삶도 “살아감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대면하면서 부조리와 무의미성을 직시하고 합리성-너머의 자신만의 의미창출 방식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는, 나만의 ‘삶의 의미창출’”(163쪽) 과정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삶이다.
자유로운 결단과 치열한 추구, 삶을 가꾸는 두 가지 조건이다
니체에 따르면 행복한 삶 또는 의미로운 삶의 두 가지 조건은 치열성과 자유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결단하고 그 결단에 따르는 선택을 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치열성과 자유의 삶”(266쪽)이다. 니체가 강조하는 삶은 단순히 외부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가치와 의지에 따라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르는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만들어가는 치열한 과정을 의미한다. 우리가 내린 결단과 행동이 곧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판단한다. 사회적 성공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열정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자유의 본질이다.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을 보여준다. 니체가 말하는 치열성과 자유의 삶은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을 인식하고, 외부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용기 있게 '결단'하며, 그 결단에 따르는 '행동'을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