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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주도권을 디자인하라 - AI를 도구를 넘어 무기로 만드는 질문의 힘
박용후 지음 / 경이로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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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지 않고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6가지 인간상의 미래

박용후의 생각의 주도권을 디자인하라를 읽고

 

 

AI가 주도하는 생각에 종속당하지 않고 생각의 주도권을 거머쥐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해야 할 한 가지는 전대미문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중, 무엇이 곧 틀릴 수 있는가?” 옳다고 믿고 있던 신념도 통념으로 뒤바뀔 수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이나 가치관, 판단기준 등이 여전히 현실에서 유용하거나 유효한지의 여부를 부단히 질문을 던져 확인하지 않으면 진리도 무리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이다. 확신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나브로 부패한다. 부패되는 확신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던져 여전히 확신은 신념으로 작용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해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부패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은 방부제다. 질문은 단순히 답을 얻기 위한 촉발점이라기보다 기존의 타성이나 관성에 젖은 고정관념을 통렬하게 깨부수고 낯선 생각을 잉태하게 만들어주는 촉발제다.

 

우리는 AI가 던져주는 정답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인간이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성찰하지 않는다. 스마트함과 편리함, 효율 뒤에 숨은 사고의 실종은 그 어떤 기술적 진보보다 더 위험한 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거나 지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AI함께 사유하는 존재로 진화해야 한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질문하는 힘을 가지고 말이다. “질문은 생각의 씨앗”(53)이자 이 시대의 나침반이며 관점을 배우는 레버”(296)이고 사고를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도구”(297). 자신이 얻고자 하는 답을 위해 질문만 디자인하지 말고,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 AI가 대답한 문장에 담긴 주장의 신뢰성이나 타당성에 관한 비판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 없이 AI의 사고 논리나 정답에 의존할수록 AI가 양산하는 방대한 답에 질식사할 수 있다.

 

AI는 몸이 없어서 직접 겪어본 경험이 없다. 겪어본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AI가 던져주는 답은 자기만의 주관적 신념이나 경험적 통찰이 없다. 문제는 AI를 비롯한 SNS에 의존하며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 접속으로 대리 경험을 할수록 타인의 아픔에 측은지심을 발동, 공감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세나 태도를 갖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나아가 질문 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의존, 사고의 식민지화가 가속화되어 결과적으로 AI가 던져주는 주장의 신뢰성이나 타당성에 대해 반문하지도 않는다. 이제 인간은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없어서 자기 주도적으로 뭔가를 선택하지 못하는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인공지능만도 못한 인간지능으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탄생하는 6가지 인간상을 생각해 보았다.

 

경험하지 않는 인간-모험이 부족한 인간

 

AI가 제공하는 가상 경험이나 정제된 정보에만 의존하여, 실제 세계에서 직접 부딪히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는 생생한 경험과 그 과정에서 얻는 성장의 기회를 상실하는 인간, 즉 경험의 폭이 좁아지는 인간(The Experientially Limited Human)이다. AI 기반 여행 추천 앱이 제시하는 최적화된 경로와 유명 관광지 정보만을 맹신하여, 예상치 못한 장소를 발견하거나 현지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의 기회를 놓치는 여행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경험의 멸종에 보면 베자듀(Veja du)라는 개념이 나온다. 현실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걸 가상으로 경험한다는 의미다. 경험(經驗)과 실험(實驗)을 뜻하는 experienceexperiment에서의 peri-시도에 가깝고, 위험(危險)이나 모험(冒險)을 뜻하는 ‘peril’에서의 ‘peri’위험을 의미한다. 경험은 본래 수준과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위험한 행동이자 실천이다. 위험하다고 경험하지 않고 마치 경험한 것과 같은 가상경험을 반복할수록 베자듀(Veja du)라는 개념을 경험한다. 베자듀는 현실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걸 가상으로 경험하는 현상이다.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을 AI 챗봇에게 질문하여 요약된 정보만을 습득하고, 직접 자료를 찾아 읽거나 실험하며 깊이 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을 생략하는 학생도 베자듀에 해당된다. 하지만 반대로 '베자듀'는 위험한 경험을 하지 않고 가상세계에서 편리하고 편안한 간접경험만 반복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디지털 가상 기술이 발전하고 인공지능 기술도 더불어 발전하면서 접촉이 없는 접속경험으로 일상이 대체되면서 경험의 뿌리가 뿌리째 뽑히고 있다. “모험이 부족한 사람은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일본철도의 광고 카피다.

 

 

공감하지 않는/못하는 인간-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숙맥

 

AI가 제공하는 정량적 데이터나 표면적인 정보에만 집중하고, 타인의 미묘한 감정이나 비언어적 신호, 그리고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공감 능력이 저하되는 인간, 즉 공감 능력이 저하되는 인간(The Empathy-Diminished Human)이다. AI 챗봇과의 효율적인 대화에 익숙해져, 사람과의 대화에서 상대방의 표정 변화, 목소리 톤, 몸짓 등 비언어적 신호를 읽어내지 못하고 공감적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AI가 필터링하여 제공하는 뉴스나 정보만을 접하며, 사회적 이슈의 이면에 있는 인간적인 고통이나 복잡한 이해관계를 깊이 있게 느끼고 공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공감능력은 상대의 입장에 되어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생기는 감정이다. 책상에서 머리로 이해하는 걸 배울 수는 있지만 책상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힘든 경우를 가슴으로 공감하는 걸 배울 수는 없다. AI와 오랫동안 대화를 하다 보면 직접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표정변화나 감정의 기복을 몸으로 감지하고, 그 순간에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지를 느낌으로 알아서 반응하는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이해하는 AI의 알고리즘에 익숙해지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친구의 고민을 듣고도 AI 상담만을 의존하며, 직접적 공감이나 위로를 해본 경험이 없어질 경우 사람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아픔을 감지하거나 공감하는 능력은 더욱 실종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생각하지 않는/못하는 인간-판단하지 않는/못하는 인간

 

AI의 분석 결과나 추천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독립적인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거나 점차 퇴화시키는 인간, 즉 사고와 판단을 위임하는 인간(The Judgment-Outsourced Human)이다. 이는 중요한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AI에 넘겨주면서 점차 생각하지 못하는 바보로 전락하는 위험한 인간이다. 예전에는 궁금한 물음표(?)가 생기면 도서관에 가서 직접 찾아보거나 사람을 만나 물어보는 등 끈질기게 생각하면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마침내 감동의 느낌표(!)를 만나는 경험을 했었다. 지금은 물음표가 생기면 바로 인공지능에게 물어본다. 인공지능은 느낌표를 주지 않고 마침표가 찍힌 정답을 순식간에 찾아다 준다. 이제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의 거리가 실종되면서 사람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궁금한 게 생기면 밖에 가서 Outsourcing하면서 사고의 외주화가 빈번하게 일어나 이제는 주체적 사유능력을 상실하고 사고의 식민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문제가 터지면 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고들거나 해당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어떤 해결 대안이 최적의 설루션인지를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따져보지 않고 바로 AI에게 문제의 원인과 해결대안을 물어보고 그에 대한 대답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일수록 인간지능은 인공지능에 종속되어 간다. 다른 사람의 정보를 수용하며 휩쓸려 떠내려가면서도, 자신의 판단이나 비판적 사고를 기반으로 주체적으로 사유하지 않을수록 사고의 외주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반문하지 않는/못하는 인간-시야를 상실한 인간

 

AI가 제공하는 정보나 답변에 대해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로운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는 대신 주어진 정보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인간, 비판적 질문이 없는 인간(The Unquestioning Human)이다. AI 챗봇에게 질문하여 얻은 답변의 정확성이나 편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거나, AI의 한계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려 하지 않는 학습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AI가 제시하는 분석 결과나 예측 모델에 대해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 작동 원리나 잠재적 오류 가능성을 검증하려 하지 않는 전문가도 문제다. 정답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자신이 풀고 있는 문제의 본질과 성격에 대해 스스로 반문하지 않는 인간이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인간은 질문하고 AI는 대답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이유는 어제와 따듯한 의심을 품고 전대미문의 질문을 던져 어제와 다른 관문을 열어가는 데 있다. 주어진 문제에 대해 정답을 찾아 설명하는 능력보다 각기 다양한 해답을 요구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아의 질문 능력이 더욱 소중하다. AI가 던져준 설명에 의문을 품고 다른 설명논리는 없는지, 그 설명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본적인 가정이나 전제는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질문 자체도 올바른 질문인지를 반문하는 메타 질문도 중요하다. AI의 설명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의존할수록 설명에 압도당하면서 결국 세상을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시력은 물론 시야도 읽고 결과적으로 실명당하는 위험에 처할 수 있

 

해석하지 않는/못하는 인간-해답이 뭔지 모르는 인간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제시하는 결과나 요약에 만족하고, 그 결과의 의미를 스스로 탐구하고 심층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통찰을 도출하는 능력이 약화되는 인간, , 의미를 해석하지 않는 인간(The Meaning-Uninterpreting Human)이다. AI가 분석하여 도출한 통계적 결과나 패턴만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함의나 인간 행동의 동기를 깊이 있게 해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연구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AI가 요약해 주는 영화 줄거리나 책의 핵심 내용만을 보고,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의도나 숨겨진 메시지를 스스로 탐색하고 해석하는 즐거움을 놓치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AI 투자 자문 시스템이 제시하는 매수/매도 신호에만 따라 움직이며, 시장 상황이나 기업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스스로의 분석이나 판단 없이 맹목적으로 투자 결정을 내리는 투자자가 이런 인간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AI가 생성한 보고서나 제안서를 비판적인 검토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그 내용의 논리적 오류나 편향성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직장인도 여기에 해당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AI가 제공하는 정답을 어떤 자료로 근간으로 작성된 것이며, 어떤 근거로 지금과 같은 판단을 하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AI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경우다. 자료 편집과정을 생각하지 않는 자료 생성결과를 중심적으로 사고하면서 AI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가는 심각한 문제가 대중화되고 있다.

 

 

선택하지 않는/못하는 인간-선택당하는 인간

 

과연 우리는 주체적 관심과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정답의 이면을 구조적으로 이끌어가는 알고리즘이 추천한 선택에 선택당하고 있는가? 주어진 다양한 선택지 안에서 어떤 판단과 결정이 지금 이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인지를 숙고하지 않고 AI 알고리즘이 결정해 준 대로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타성과 관성이 생긴다. AI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최적화된 선택지나 추천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며, 자신의 고유한 필요와 가치에 기반한 능동적인 선택권을 상실하는 인간, , 선택을 위임하는 인간(The Choice-Delegating Human)이다. 온라인 쇼핑 플랫폼에서 AI가 추천하는 상품만 구매하거나, 스트리밍 서비스의 AI 추천 목록 외에는 다른 콘텐츠를 탐색하려 하지 않고 그저 제시되는 것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AI 기반 직업 추천 시스템이 제시하는 직업군에 자신의 적성이나 흥미를 맞추려 하고, 스스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진정한 열정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학생도 전형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선택당하는 인간이다. 이게 맞는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게 가장 먼저 떠서 선택당하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주도적 판단과 의사결정 능력을 상실한다. 선택은 선별과정이다. 선별하려면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나에게 최선의 대안이 무엇인지를 고르는 선구안(選球眼)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정보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주도적으로 의사결정의 기준을 잡고 세상을 뒤흔드는 선택은 영원히 할 수 없는 선택당하는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알고리즘이 걸러주는 선택에 당할수록 다른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면서 다르게 생각하기는 아예 불가능해진다.

 

인공지능은 하나의 기술이나 도구라기보다 인간과 협업하며 인간의 능력을 신장시켜 줄 수 있는 또 다른 에이전트나 파트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간지능을 능가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스마트해질수록 인간지능은 멍청해질 수 있는 역설(유영만, 2025)을 극복하고, 오히려 인공지능을 활용, 인간지성의 깊은 사유기능을 심화-확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인류의 미래도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올 것이다. “같은 도구를 쓰더라도 누구는 생산도구로 쓰고, 누구는 사고 파트너로 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기능의 이해가 아니라 관계의 설계다. 관계가 형성되어야만, 관점이 생긴다. 관점이 생겨야 사고가 구조를 갖는다”(292). 방대한 데이터 양을 빠르게 편집하며 생성하는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의 속도와 가능성뿐만 아니라 데이터의 질적 속성을 판단하는 사유의 밀도와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재해석하는 노력이 동반될 때 인공지능과의 긴밀한 협업관계가 새롭게 재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더 빠르게 생성(generation)하는 속도나 생산성 또는 효율보다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더 다르게 생성(becoming)하는 밀도나 효과적인 의미의 재구성을 강조할 때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능력을 확장시켜 주는 소중한 삶의 파트너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날로 스마트해지는 인공지능 기술 덕분에 더 편리하고 안락한 삶으로 가려는 관성에 빠질수록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더 깊이 사유하려는 근성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인간은 사유기능을 점차 잃어가는 멍청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앞으로 미래 사회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구분될 것이다. 첫째 AI를 외면하거나 전혀 사용하지 않는 사람(People without AI)이다. 이 사람은 AI 기술을 무시하거나 저항하면서 기존 삶에 안주하려는 안이한 사람이다. 앞으로 어떤 경쟁력도 갖기 힘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둘째, AI를 적극적으로 활용만 하는 사람(People with AI)이다. AI만 사용하는 이 사람은 AI가 던져주는 답에 완전히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다. AI를 생산도구나 수단적 기계로 사용하면서 빠르게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AI를 활용하면서도 AI의 능력을 능가하는 사람(People beyond AI)이다. 이 사람은 AI를 사고의 도구를 넘어 어제와 다른 사고를 하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을 던져 놓고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반문하고 더 좋은 해답을 얻기 위해 AI를 파트너로 살아가면서 사고를 부단히 재설계하는 사람이다. “게으름이 낳은 사고의 관성을 깨뜨리는 저항, 낯선 충격, 불편한 질문과 같은 마찰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통찰과 사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283). 지적 자극을 던지는 낯선 질문, 낯선 사유를 잉태하는 전대미문의 질문으로 기존 사유체계와 잦은 충돌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낳는 공부를 멈추지 않을 때, AI는 단순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넘어 놀라운 상상력(AI: Amazing Imagination)과 혁신적 발상(AI: Amazing Innovation)을 촉진시키는 사고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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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 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철학 에세이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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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고정된 추상명사가 아니라 역동적인 동사다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철학 에세이

 

나 자신의 행복을 일구는 연습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연습

동료-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

 

인용부호가 없는 행복과 인용부호가 있는 행복의 경계와 사이

 

자크 데리다는 개념은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과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으로 나뉜다고 한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은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이해하는 상식적인 개념이고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은 자신의 경험과 철학에 비추어 기존 개념을 재개념화시킨 새로운 개념이다. 즉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은 자신의 신념과 철학으로 기존 개념을 자기만의 언어로 재정의한 개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인용부호가 없는 행복과 자기만의 철학과 신념을 담아 기존 행복이라는 개념을 자기만의 언어로 재개념화시킨 개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독, 행복, 열정, 용기, 존재와 같은 모든 개념은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시전에 나오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과 오랜 숙고 끝에 새로운 의미를 잉태하고 출산된 개념이다. 즉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추상적이며 통념에 젖은 개념이 아니라 저자가 구체적인 일상에서 치열하게 고뇌하며 겪어낸 경험적 흔적과 얼룩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탄생한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행복이라는 개념도 돈과 부, 가시적 조건과 물질적 자산으로 해석되는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행복과 대체 불가능한 내가 삶의 다양한 조건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만의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용기를 발휘해서 얻는 행복의 의미는 천지차이다. 대체 불가능한 나, 고유명사로서의 내가 나의 동료-인간으로서의 너가 만나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가운데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사랑과 행복은 언제나 로부터 시작해서, 와 연결된 개인(singulat individual)’과의 관계를 통해 실현될 뿐”(21)이기 때문이다.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 나와 네가 만나 서로의 마음과 정신 세계를 드러내고 공유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답게 살아가려는 안간힘을 쓰며 자신이 의미있다고 판단하는 일에 몰두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과정을 지순한 미소로 화답하며 서로의 존재감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행복정원은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결국 이 책은 인용부호가 없는 통념에 젖은 행복에서 인용부호가 있는 신념에 찬 행복의 의미와 가치를 존재에의 용기 속에서 꽃피우자는 이야기를 넌지시 건네고 있다.

 

글쓰기는 작은 세계의 출산이자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려는 존재론적 몸짓이다

 

행복한 사람은 읽고 쓰는 절대 고독의 시간을 즐긴다. 저자에게 한 편의 글쓰기는 장르와 상관없이 언제나 작은 세계의 출산을 의미한다(153). 쓰기를 통해 작은 세계를 출산하기 위해서는 쓰인 텍스트만이 아니라 사건을 읽고 정황을 읽고, 해석하는 읽기가 동반되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읽기는 1차적 읽기와 2차적 읽기로 구분되는 이중적 읽기라고 볼 수 있는 더블 리딩(double reading)’이다. 1차적 읽기는 저자가 텍스트를 통해 드러내고자하는 의미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고들어 이해하는 긍정적 읽기다. 2차적 읽기는 저자가 드러내고자하는 의미를 보다 거시적 차원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해보고 나름의 가능성과 문제점 또는 한계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문제제기의 읽기. 1차적 읽기가 저자의 사유체계 속으로 파고들어가 저자의 입장에서 의미를 이해하는 빠져들기의 읽기라면 2차적 읽기는 저자의 의미체계 속에서 빠져나와 저자의 의도와 의미를 사회구조적 차원과의 관계 속에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재해석하면서 빠져나오는 읽기다. 빠져들었다가 다시 빠져나와서 저자의 텍스트가 특정한 컨텍스트 속에서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보는 읽기가 동반될 때 텍스트는 텍스트로 끝나지 않고 저마다의 컨텍스트 속에서 독자의 텍스트로 재탄생되는 읽기가 된다.

 

이 책을 독자인 나도 1차적으로 빠져들어서 읽어본 다음 저자가 던져주는 의미의 덩어리를 내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반추해고 성찰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찾아내서 누려야 할 행복은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질문을 던지면서 읽어냈다. 읽으면서 내가 만약 강남순 교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유와 더불어 상상이 일상을 넘나들며 비상하는 즐겁고 행복한 읽기의 여정이었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살아있음의 표시이며, 이 세계에 개입하는 하나의 방식(155)이자 자기 삶에 대한 방치와 무관심에서 벗어나고자하는 하는 존재론적 몸짓“(26)이다. 이런 점에서 읽기와 쓰기는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무엇을 의미 있게 추구하는 사람인지, 내가 품고 있는 필생의 질문은 무엇이고, 그걸 기반으로 탐구하면서 찾아내고자하는 존재목적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싸우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위치에서 부단히 읽고 쓰는 존재론적 몸짓인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유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는 인용부호가 있는 핵심 개념과 그 개념에 담긴 저자의 신념을 기반으로 읽고 쓰는 모든 활동 자체도 강남순 교수님이 행복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면서 썼던 다양한 존재론적 몸짓의 다른 이름이다.

 

물리적 공간에 머무는 주택(house)과 심리적 장소에 거주하는 집(home)

 

행복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기소임을 다하는 존재는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 즉 하우스(house)보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충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34), 살아내는 공간(lived place)”(33)에서 거주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에서 장소는 영어의 공간을 의미하는 ‘space’가 더 적절한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과 연결시켜 사용한 공간은 영어의 ‘place’에 맞는 장소라는 개념으로 바꿔서 쓰면 하우스와 홈의 의미상의 차이는 물론 심리적 느낌상의 차이를 더 확연하게 드러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우편번호가 있는 장소(place)”라고 쓰고 살아내는 공간(lived place)”살아내는 공간(lived space)”라고 바꿔써보면 하우스와 홈, 공간과 장소가 어울려 저자가 말하는 행복의 정원을 더 적확하게 설명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흔히 하우스는 물리적인 구조물, 즉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의미한다. 이는 객관적이고, 유형적이며, 교체 가능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저기 큰 하우스가 있다"라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건물의 형태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살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 빈껍데기와 같다. 반면에 은 개인이 소속감을 느끼고, 편안함과 안정감을 얻으며, 가족과의 추억이 쌓이는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은 물리적인 건물을 넘어선 경험, 감정, 관계, 그리고 기억으로 채워진 곳이다. "집에 간다"라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건물로 돌아가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유대, 편안한 휴식, 그리고 개인적인 역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우스에 어울리는 공간(space)은 추상적이고 비어 있는, 지리적인 위치만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아무런 의미나 경험이 부여되지 않은 중립적인 영역을 의미한다. 마치 백지처럼, 잠재력은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상태다. 예를 들어, "이곳은 넓은 공간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저 면적이나 부피만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홈에 어울리는 장소place)는 인간의 경험, 감정, 기억, 문화적 의미 등이 부여되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터전을 의미한다. 공간이 인간의 상호작용과 의미 부여를 통해 비로소 '장소'로 변모하는 것이다. '장소'는 개인적인 유대감이나 공동체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정체성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나의 고향은 특별한 장소다"라고 할 때, 그곳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넘어선 마음의 고향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나의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인정되고, 포용되는 공간이 홈이라면 결국 은 나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어에 이란 당신의 가슴이 깃드는 곳(home is where your heart is)”(35)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당신은 외로운 주택(house)에서 사료를 먹는가, 고독한 집(home)에서 식사를 하는가

 

하우스와 홈, 공간과 장소 개념의 차이는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에서 말하는 사료(飼料)와 식사(食事)의 차이와도 상응한다. 발터 벤야민은 인간의 경험과 의미 부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료''식사'는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한다. 사료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영양 공급, 즉 본능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목적 지향적이고, 기계적이며, 의미가 결여된 소비 행위와 유사하다. 마치 가축에게 주어지는 먹이처럼,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식사는 단순히 영양을 섭취하는 것을 넘어, 관계, 소통, 문화, 그리고 사랑이 담긴 행위를 의미한다. 벤야민은 "식사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라는 말의 동의어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음식을 나누고, 대화하며,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적인 행위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볼 때, '주택(house)'은 단순히 거주를 위해 억지로 '사료'를 먹는 '공간'에 불과하다. 반면, '(home)'은 그 '주택(house)'이라는 '공간'에 사랑과 추억, 관계라는 의미가 더해져 비로소 '식사'를 나눠 먹으며 풍요로운 행복을 꽃피우는 '장소'로 변모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물리적 공간이 차지하고 있는 하우스에서 사료를 먹고 충족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기쁨을 만끽하며 행복할 권리는 정감이 오고가는 관계의 정원, 홈이라는 삶의 터전, 장소에서 밥을 하는 사람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식사를 나누면서 대체불가능한 나와 네가 만나서 아름다운 우리라는 연대망이 형성될 때 비로소 구현된다.

 

고독의 공간은 사유하기, 중심부와의 거리 두기, 반학습적인 창의성이 꽃피는 자리이며 무엇보다도 자신과 만나는 자리다”(39). 고독한 사람은 자신을 인간화시키는 소중한 예식, ‘고독 예식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고독한 한 사람은 외로움(loneliness)을 느끼지 않는다. 작가가 조용한 서재에서 홀로 글을 쓰거나, 화가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고독해져야 한다. 외부의 방해 없이 오롯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며 창작의 즐거움을 만끽해야 작품이 타생된다. 또는 숲길을 걷거나 낯선 도시를 여행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고독한 경험이다. 주변의 풍경에 집중하고, 자신만의 생각에 잠기며, 새로운 영감을 얻는 등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가운데 존재이유를 새롭게 깨닫는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파티나 모임에 참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소통이나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고립되었다는 감정에서 외로움이 시작된다. 고독과 외로움은 관련성이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혼자 있는 상태인 '고독'이 반드시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군중과 떨어져 홀로 있는 고독한 상태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지만, 그렇다고 고독과 외로움이 같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긍정적인 상태인 반면, 외로움은 원치 않는 고립감과 쓸쓸함을 동반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결국 고독력으로 온전한 자신과의 대화를 하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면서 고립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고립의 공간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되며, 이 세계로의 개입이나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삭제하는 공간이다”(39).

 

자기의식을 고양시키는 리추얼이 없으면 얼빠진 삶에 휘둘린다.

 

주택(house)에서 사료를 먹으며 고립된 공간(space)에 입주하고 다시 이주를 반복하는 외로운 사람보다 집(home)에서 식사하며 관계의 정원을 싹틔우는 장소(place)에서 거주하며 정주하는 사람이 인용부호 속의 행복을 일상에서 만끽하는 사람이다. 행복한 일상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택은 행복을 가꾸는 정원이라기보다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전시용에 가깝다. 투자대상으로서의 주택은 언제나 다른 주택으로 이주하기 위해 잠시 입주하고 있는 중간 거점지에 불과하다. 주택에 거주하는 사람은 경기변동과 소비 트렌드에 민감하고 세상의 변화나 화두가 던지는 욕망의 그물에 자주 걸려든다. 그들은 저자가 말하는 AM-모드에 휘말리는 사람이다. “AM-모드는 복잡한 문제들이 산재해있는 세계다”(50). 반면에 집이라는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바깥 세계의 흐름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정신적 안전모드에 머물며 바깥 세계의 변화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한다. FM-모드는 외부세계의 암담하고 착잡한 현실은 의도적으로 괄호 속에 넣는 것에서 외부의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물들지 않게 자기의식을 고양시키는 리추얼이다. 외부의 잔혹한 현실이 내면으로 파고들어 뒤흔들고 파괴하려는 온갖 유혹의 손길이 난무하는 AM-모드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면세계를 굳건하게 지켜내는 자기만의 고독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행복이 무르익는 삶의 정원은 고립이나 외로운 공간보다 고독의 장소에서 자란다. 고독한 시간은 외부의 자극과 방해 없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다.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의 생각, 감정, 가치관을 깊이 들여다보고, 진정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 이해는 내면의 평화와 만족감, 즉 행복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고독을 통해 우리는 외부 환경이나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스리는 방법을 배운다. 이는 역경에 직면했을 때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과 자율성을 길러주며, 궁극적으로 더 단단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기여한다. 역설적으로, 고독은 타인과의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재정비하고 에너지를 충전함으로써,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더 진정성 있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유, 책과 꽃 그리고 달이 있다면 행복하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유

책들,꽃들

그리고 달이 있다면

누가 행복하지 않으리?“

 

나에게 행복은 자유, 책과 와인, 그리고 정체성을 증명하는 신체성의 증표, 짐에서 들어올리는 바벨이다.

 

자유,

책과 와인

그리고 바벨이 있다면

누가 행복하지 않으리?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어제와 다른 자유를 갈망하고 책을 읽으며 낯선 깨우침을 얻고 싶은 지적 황홀감을 동경하며 농밀한 향과 깊이있는 숙성의 향연이 만나는 와인을 마시고 싶은 갈망이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많다.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갈망은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갈급한 열망이라기보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한 차원 높은 미지의 삶으로 떠나보려는 간절한 희망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연결된다. “결국 존재한다는 것갈망하는 것이다”(65). 무엇을 갈망하는가? 기지에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희망을 갈망하고, 한 두 번의 시도로 충족될 수 없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에너지인 욕망을 어제와 다르게 갈망할 때 존재는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무한히 변신을 거듭한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어제와 다르게 변신하고 싶은 갈망과 욕망의 물줄기를 잡으려는 본능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나는 갈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삶을 살아간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수전 손택이다. 수전 손택의 일기에서 나타나듯이, 그녀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교감에 대한 통렬한 욕구"와 함께 "지적인 황홀경" 속에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육체적 친밀감과 깊은 정신적 교감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기를 바랐던 그녀의 내면을 드러낸다.

 

'고뇌에 찬 갈망'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욕구는 쉽게 충족되지 않았고, 그녀의 삶 내내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대상이자 때로는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수전 손택의 삶에서 이 갈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와의 관계다. 두 사람은 단순한 연인 관계를 넘어, 깊은 지적 동반자이자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 존재였다. 두 사람 모두 강렬한 개성과 지적 욕구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관계 속에서 갈등과 고뇌도 존재했을 것이다. 손택의 일기에서 드러나는 '갈망'은 이러한 관계의 복합성과 완전한 합일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반영한다. 결론적으로, 수전 손택의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동반자 관계에 대한 고뇌에 찬 갈망"은 그녀가 삶에서 추구했던 완전성과 진정성을 나타낸다. 그녀는 육체적 친밀감과 정신적 교감이 조화를 이루는 총체적인 관계를 원했으며, 이러한 갈망은 그녀의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지적 활동과 글쓰기에도 깊이 스며들어 그녀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이 갈망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와 재창조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삶은 물음표다

 

삶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느끼고, 대면하고, 그 속에서 깊숙이 침잠하는 듯 지독한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것”(88)을 저자는 실존적 독감이라고 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희망의 뒤안길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존재하고, 성공하기까지에는 무수한 장애물과 걸림돌에 넘어지는 실패의 늪이 존재한다. 생각보다 깊은 우울과 절망의 세계에서 저마다 힘든 전쟁을 벌이는 일상적 삶에서 물러나지 않고 일생동안 씨름해야 되는 난제들을 붙잡고 살아가는 이유와 존재목적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근원적 질문의 그물을 던져놓고 어제와 다른 답을 찾기 위해 부단히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어제와 다른 대안을 탐색하지만 생각보다 우리가 직면하는 복잡한 딜레마를 해결하는 해답을 얻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 각자가 지닌 이 살아감의 크고 작은 문제들과 딜레마에는 해답이 없다”(95). 엄밀히 말하면 저마다의 상황적 문제를 해결할 하나의 정답은 없지만, 주관적 해석에 따라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 있는 해답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정답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해답은 해석방식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직면하는 딜레마를 탈출할 대안의 가능성은 얻을 수 있다.

 

삶은 물음표다.” 20세기 니체라고 하는 에밀 시오랑의 말이다. 내가 품고 있는 물음표의 곡선이 내가 찾을 수 있는 느낌표의 직선을 만날 수 있다. 곡선의 물음표가 품은 호기심의 강도가 직선이 느낌표가 품은 감동의 강도를 결정한다. 삶에는 정답이 없어서 오늘도 어제와 다른 호기심의 물음표를 품고 불확실하고 불안하지만 다가오는 미래를 끌어안고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고 살아내기 위해 한 걸음 내딛는 사람들의 연대가 함께 고독의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을 보자.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 한다.

 

길이란 찾은 것이라기보다 만들어 가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이란 없다. 그 길은 오로지 내가, 치열성과 용기를 가지고 창출해 가는 것(invent)(”274)이라서 길은 앞에 있지 않고 뒤로 생긴다. 앞에 있는 길은 누군가 이미 걸어간 길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바로 존재이유를 찾아가는 길이다. 다른 사람이 걸어간 길을 따라 가는 길 위에서는 존재의 기쁨이 일어나지 않고 불확실성과 싸울 필요가 없는 안전한 길이다. 익숙한 여기를 떠나지 않고 낯선 미지의 세계와 의도적으로 만나지 않는 길에서는 어제와 다른 마주침이 일어나지 않는다.

 

떠남은 근원적인 물음과 조우하는 과정이다

 

고독을 고향삼아 함께의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진정한 친구이자 행복한 관계의 정원을 함께 가꾸어가는 삶의 동반자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와의 작별과 미래와의 조우에 존재하는 사이공간을 넘나들며 그 사이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들이다. “떠남을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 등 근원적인 물음과 조우하는 과정”(100)으로 삼을 때 그때의 마주침이 색다른 깨우침으로 나에게 선물로 다가온다. 과거와의 작별을 고하고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익숙한 공간에 고립되어 외로움에 시달릴 수 있다. “자신의 과거와이 작별, 그리고 새로운 미래와의 조우라는 이 두 축의 사이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101)보는 사람만이 실존적 독감을 극복하는 실존적 몸짓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권리를 누리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익숙한 지금 여기서의 타성에서 벗어나 불확실한 낯선 저기로의 과감한 떠남을 진행형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뜻밖의 해프닝(happenings)’이 발생할 수 있고, 그 해프닝이 뜻밖의 해피니스(happiness)’, 행복을 낳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행복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이어지는 산문의 세계와 이성과 합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미소, 눈물, 포옹, 키스와 같은 시의 세계가 어우러질 때 가능해진다고 한다. 열길 물속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측정 대상이지만 한 길 사람 속은 인문학적 헤아림의 대상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한 길 사람 속이 품은 깊은 뜻은 알 길이 없다. 그저 보살피고 어루만지며 헤아리는 수밖에 없다. 존재함의 의미 역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추론만으로 밝혀질 수 없는 미스터리의 세계다. 왜 사는지, 왜 사랑하는지 그 이유의 저변을 아무리 파고들어도 의미의 심연은 더 깊어만 간다.

 

장미는 가 없다;

장미는 그저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것이다.

(The rose is without ‘why’;

it becomes simply because it blooms.)

 

17세기 독일시인, 안젤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의 시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수많은 왜에는 언제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을에 단풍이 드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과학적 설명 너머의 단풍의 존재이유는 시적 사유의 대상이다. 바람은 왜 부는지, 구름은 왜 생기는지, 나뭇가지는 왜 흔들리는지는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은 존재 자체의 신비로움을 이해하는 충분한 조건으로 납득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왜 10개인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시인은 그런 설명논리에 만족하지 않는다. 함민복 시인의 성선설이라는 시에 보면 전혀 다른 시적 상상력이 등장한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존재의 이유를 아무리 물어봐도 하나의 정답으로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존재함 자체가 바로 살아감의 의미와 이유가 된다”(174).

 

안개꽃 배경 덕분에 장미꽃 전경이 돋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고갱의 그림 제목처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사람이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의 멈추지 않는 물음이다. 이런 질문의 끝에는 또 다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어떤 관계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오늘 나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관계 없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선우 시인의 참나라니, 참나!’라는 시가 있다. “비루할지라도 당신, 당신들과의 접촉면에서 이슬이 맺히죠/이슬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죠/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내가 되는 영롱함.” 나는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존재다. 무수한 들에 의해서 비로소 내가 영롱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한끼를 해결하는데 동원되는 자연자원과 수많은 생명체에 가하는 생태학적 죄(ecological sin)’ 앞에서 딜레마를 탈출한 대안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화 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운명이다(146).”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한 말이다. 나는 오늘도 한 끼 식사를 위해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태를 뽐내며 살아가던 각양각색의 동물과 식물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폭력을 가하고 살인행위를 저지르며 배고픔만 채우며 살아가는 생태학적 죄인이다. 존재의 부채를 느끼며 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과학자 테슬러가 말하는 복잡성 보존의 법칙이라고 있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과 단순함은 내 대신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불편하고 복잡한 일을 해준 덕분이라는 의미다. 마트에 가서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쇼핑을 하고 집에 갈 때는 주차장이나 적당한 장소에 버리듯 아무데나 두고 간다. 다시 쇼핑하러 오면 누군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카트를 입구에 질서정연하게 정렬해놓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편리하게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쇼핑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가 버리고 간 카트를 끌어가 다시 입구에 질서 정연하게 정렬해놓은 덕분이다. 모든 전문성은 사회적 합작품이다. 스타 플레이어는 보지 않는 가운데 누군가 도움을 제공해준 덕분에 빛나는 보이는 사람이다. 모든 커피에 다 들어가는 에스프레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다양한 커피로 맛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은 에스프레소 커피 덕분이다. 그래서 맡은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을 빛나 보이게 만드는 사람을 에스프레소맨이라고 한다. 하얀 안개꽃 배경에 빨간 장미꽃을 전경으로 드러내면 장미꽃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다. 전경으로 드러난 장미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묵묵히 배경에서 장미꽃을 전경으로 드러나게 도와준 안개꽃 덕분이다.

 

질문은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비료다

 

행복한 관계의 정원에서는 미소는 글의 언어와 말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심오한 몸의 언어”(106)로 소통한다. 상대방의 작은 표정 하나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담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하고 대답을 경청하면서 서로가 미소짓는 화기애애한 소통이 이어질 때 행복은 관계 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나를 미소짓게 하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의 타자들을 미소짓게하는 것은 무엇인가?”(107)를 자문한다. 나는 오늘 누군가를 위해 얼마나 미소짓게 하는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반문하면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미지의 내일에 만나게 또 다른 사람과의 행복한 관계를 상상상해본다. 상대에 대한 질문은 자동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물론 스스로 뭔가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과 열정, 기반 지식은 물론 폭넓은 교양과 자기분야의 깊은 전문지식이 있어야 상대를 감동시키는 질문을 만들 수 있다. 사랑하면 질문이 연이어 형성되고 그 질문이 경계를 넘나들어 마침내 깊은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비료 역할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미소짓고(smile at) 누군가와 함께 웃는(laugh with) 의미는 매우 심오하다”(177). 진정한 미소는 타자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존중과 환대의 마음으로 포옹할 때 비로소 진정성의 교감이 일어나면서 미소를 띠고 더불어 상대도 미소로 화답(和答)하면서 화통(和通)이 시작된다. 그런데 경쟁이 극심해지고 성과와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유혹의 손길이 곳곳에 미치면서 상업적이고 상투적인 미소, 자기만족적인 승리의 미소가 판을 치기 시작한다. 이런 미소는 조소에 가깝다. “누군가를 조롱할 줄은 알지만, 누군가와 함께 웃는 것은 하지 못한다는 현실”(179)은 개인적인 품성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우열의 관계나 지나친 경쟁관계가 낳은 역기능이자 폐해이며 구조적 산물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의견의 차이가 발생하면 비판보다 비난을 퍼붓고 미소보다 조소와 조롱으로 상대를 벗어나기 어려운 덫에 가둬버린다. 미소는 혼자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상대와 진심으로 교감하면서 인식과 관심을 같이 하는 가운데 심리적으로 느끼는 희망의 연대감이 생길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표정이다. 이때 구축하려는 연대는 관점과 해석의 같음만을 공유하는 동질성의 연대(solidarity of sameness)’가 아니라, 다름도 인내심 있게 경청하면서 그 다름을 적대가 아닌 개방과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다름의 연대(solidarity of alterity)’ 속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눌 수 있다.

 

우정은 살아있음의 생생한 방식이자 행복한 권리를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이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다고 질문이 많아지거나 정신적인 성숙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타자에 대하여, 사물에 대하여 좀 알고자 하는 지순한 호기심과 열정을 지니고 있는가, 새로운 앎이나 의미추구에 대한 실존적 배고픔이 있는가 하는 점”(110-111)실존적 배고픔의 성격, 강도, 그리고 깊이에 따라 나는 그 사람의 정신의 나이를 측정”(111)한다. 지순한 호기심과 식지 않는 열정,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려는 지적 갈망이 실존적 배고픔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실존적 배고픔은 뭔가를 추구해서 달성한다고 해소되는 결핍이 아니라 이전과 다른 실존적 배고픔이 끊이지 않고 생성되는 영원한 미완성이다. 그 미완성이 어제와 다르게 변신하게 만드는 희망의 원동력이 된다. 실존적 배고픔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의 존재가 지닌 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배경으로 깔린다. 보이지 않는 진중한 배경이 서로의 존재를 번갈아가면 전경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진정한 친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우정의 싹을 틔운다. 내가 먼저 진정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만나서 쉽게 만남의 끈이 끊어지는 플라스틱 관계를 넘어서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가려고 더 낮은 자세로 상대를 존중과 환대의 존재로 바라본다.

 

오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Oh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 자크 데리다의 우정의 정치학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여기서 앞에 복수로 호명되는 친구들(friends)은 보편성의 친구들이고 단수로 언급된 친구(friend)는 개별성의 친구다. 복수로 호명되는 보편성의 친구들은 불특정 다수의 만남이 특별한 관심과 인식 없이 스쳐지나가는 대중적 만남으로 형성된 관계 속의 친구들이다. 동문, 동창, 각종 친목 모임, 단톡방에 존재하는 무수한 익명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바로 친구들이다. 스친 기억은 있지만 스며든 정은 없는 친구들이다. 반면에 단수로 호명되는 개별성의 친구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singular) 친구다. 지순한 호기심과 열정, 실존적 배고픔이 매개가 되어 만나는 친구다. “‘언제나 이미(always already)’ 존재하는 우정과 친구의 존재”(118-119)를 넘어서 아직 아닌 우정, 아직 아닌 관계, 아직 아닌 세계에 대한 갈망”(119)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우정은 살아있음의 생생한 방식(active mode of being alive)”이자 행복한 권리를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friendship ad practice)”으로서의 다가올 우정의 관계로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된다.

 

지식은 보편적 진리(眞理)’가 아니라 상황 구속적 일리(一理)’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확실성보다 불확실성, 명증성보다는 불투명성이 지배”(139)하는 세계는 언제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 천국이다. 좌절과 절망이 상존하고 패배와 실의(失意)의 텃밭이 무성하며, 어둠과 그늘이 삶의 배경과 친구로 가까이서 지내는 일상이 매일 전쟁과 같은 삶의 터전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바로 한편으로는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이라는 더블 제스쳐(double jesture)’.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 인간의 삶은 완벽하지 않기에 다층적 좌절과 절망감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밖에”(139) 없으며, “‘또 다른 한 편으로(on the other hand) 우리는 절망과 낙담 가운데서, 변화의 희망을 품고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딛는 삶”(139-140)을 살아가는 것이다. 더블 제스쳐를 불안감에 적용하면 불안감의 부정적 해석에서 긍정적 대응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불안감이 엄습하면 지금까지 살았던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으니 이제부터 새로운 각성을 통해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야 되는 시점이라고 해석한다. 더블 제스쳐에 따르면 지금 여기서의 사유가 아니라 아직 아닌미래를 불안한 미지의 세계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세계를 향해 씨름하고 고민하는 그 과정 자체”(140)로 해석하면서 미래를 희망이 자라는 가능성의 텃밭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존재가 되기 위하여 내가 하는 선택이 바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70). 칼 융의 말이다. 사건은 낯선 기호를 발생시킨다고 들뢰즈가 말한다. 들뢰즈에게 기호는 이전과 다른 해석을 기다리는 모든 신호다. 즉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해석을 기다리는 모든 기호는 사건과 더불어 등장한다. 누구에게나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 사건이 품고 있는 기호를 누가 어떤 관점애서 해석하는지에 따라 사건은 저마다 다른 의미로 기록된다. 더블 제스쳐로 사건을 해석하면 한편으로는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과 후회가 생기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사연 속에서 뜻밖의 사유를 잉태하는 낯선 생각의 임신이기도 하다. 사건이 함의하는 의미를 해석하는 가운데 이전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낯선 생각을 잉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기도 한다. 모든 지식은 특정한 상황적 맥락에서 탄생되는 사건과 사고의 산물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맥락이 품고 있는 고유한 특수성은 또 다른 상황에 일반화시켜 해석할 수 없다. 모든 지식은 상황 지워진 지식(situated knowledg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지식은 보편적 진리(眞理)’가 아니라 상황 구속적 일리(一理)’일 뿐이다.

 

행복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한국 사회에 자주 등장하는 시대의 스승이나 어르신또는 국민 멘트는 모든 상황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를 갖고 있는 신이 아니다. 성공에 이르는 길에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알 수 없는 미지수 느닷없이 출몰하는 혼돈과 복잡성의 세계다. 성공에 이르는 단 한나의 길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은 무수한 변수들의 상황맥락적 상호작용의 산물이고 성공에 이르는 길에 관여되는 모든 사람과 도구와 환경의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성공 일반도 없고 행복 일반도 없다. 성공이든 행복이든 모든 추상명사는 추상적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에 내던져진 몸이 겪어낸 육체적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면서 탄생하는 개별성이나 단독성의 산물이다. 한 사람의 성공과 행복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일반화시켜 확산 적용할 수 없다. 성공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표준화시켜 매뉴얼로 처방할 수 없다. 성공이나 행복은 저마다의 상황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전쟁의 산물이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무엇이 나를 성공에 이르도록 이끌어 가는지는 주어진 삶의 조건과 환경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정답이 아니라 해답이다. 오늘도 불확실성과 불안감에 맞서 싸우기보다 함께 춤을 추며 타성과 통념을 거부하면서 다양한 관점과 복합적인 시선을 부단히 학습하는 길 밖에 없다.

 

더블 제스쳐는 존재함의 용기를 심어준다. 살아감은 절망과 희망, 어둠과 빛, 실패와 성공, 기쁨과 슬픔, 익숙함과 낯섬, 내적 외적 사건과 사고의 사이처럼 무수한 다리들(bridges)과 마주하며 씨름하는 것이다. 익숙한 지금 여기, 이곳과 낯선 아직 아닌 미래, 저기나 저 곳 사이에 존재하는 다리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감이 잠재되어 있다. 두려움과 불안감의 다리를 건너는 용기가 바로 존재에의 용기. 존재에의 용기를 발휘하며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이 다리가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리 도래하는 행복의 정원으로 건너가는 디딤돌이다. 다리를 디딤돌로 생각하며 건너는 용기있는 존재는 행복을 추상명사로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어제와 다르게 온몸으로 감각하며 지각하는 동사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행복하다는 말보다는 행복을 가꾸고 있다는 말이 적절하다고 한다. 존재에의 용기를 품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시시포스처럼 부조리한 삶을 직시하면서,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서 떨어지는 바위를 끌어올리는 주체적 행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행복한 삶도 살아감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대면하면서 부조리와 무의미성을 직시하고 합리성-너머의 자신만의 의미창출 방식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는, 나만의 삶의 의미창출’”(163) 과정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삶이다.

 

자유로운 결단과 치열한 추구, 삶을 가꾸는 두 가지 조건이다

 

니체에 따르면 행복한 삶 또는 의미로운 삶의 두 가지 조건은 치열성과 자유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결단하고 그 결단에 따르는 선택을 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치열성과 자유의 삶”(266)이다. 니체가 강조하는 삶은 단순히 외부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가치와 의지에 따라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르는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만들어가는 치열한 과정을 의미한다. 우리가 내린 결단과 행동이 곧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판단한다. 사회적 성공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열정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자유의 본질이다.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을 보여준다. 니체가 말하는 치열성과 자유의 삶은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을 인식하고, 외부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용기 있게 '결단'하며, 그 결단에 따르는 '행동'을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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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 : 니체 시 필사집 쓰는 기쁨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유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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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시는 앎의 암을 유발하는 하나의 염증이다

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

쓰는 기쁨 - 니체 시 필사집

 

 

니체는 시쓰다보다 시하다로 일생을 살았다

 

김혜순 시인이 시를 쓰다는 말보다 시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시 쓰기의 본질적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한다. '쓰다'는 주로 글을 종이나 화면에 기록하는 행위를 의미하지만 '하다'는 어떤 행위를 수행하거나, 어떤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훨씬 포괄적인 동사다. 김혜순 시인은 여성이 시를 창작하는 것이 단순히 언어를 배열하는 것을 넘어, 여성으로서 겪는 삶의 모든 경험, 즉 차별, 혐오, 폭력 등 남성과는 다른 고유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그것을 시로 '체현'하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특히 여성에게 시는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재구성하는 행위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찾아 헤매고 끄집어내는 작업을 '시하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시가 여성의 몸과 정신, 그리고 삶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론적인 행위임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다'는 문자를 기록하는 행위다. 하지만 만약 '글하다'라는 표현이 있다면, 이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을 넘어, 글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사상을 펼치며, 글 자체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자 정체성이 되는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혜순 시인의 '시하다'는 여성이 시를 창작하는 행위가 단순히 언어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삶의 경험과 존재론적 투쟁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이를 시로 승화시키는 총체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니체는 시를 쓰지 않고 시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를 쓴 철학자가 아니라 삶 자체가 시다. 니체는 시를 쓰지 않고 쓴(쓰라린) 삶을 쓴다. 시하다는 니체에게 신을 죽임으로써 기존의 형이상학적 가정이나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며 지켰던 도덕이나 규범을 파괴하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는 모든 활동 그 자체다. 니체에게 시는 고난의 역사적 기록이나 당연한 가정에 짓눌려 헐떡거리는 일상의 비루함에 통렬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문장건축이 아니다. 니체게 다른 사람을 비롯해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시적 탐구나 상상력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명사적 실체가 아니라 존재증명을 위해 다른 존재와 치열한 관계 맺기를 통해 부단히 움직이는 동사들이다. 니체에게 시하다는 이런 저마다의 존재들이 자기존재를 증명하기위해 다른 존재와의 부단한 관계맺기를 통해 부딪히며 살아가는 일상의 다른 이름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시인 이외의 다른 타자를 관찰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시하는 사람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관계에서 벗어나 동사로서의 저마다의 존재들이 부딪히며 타자의 몸과 몸으로 만나 부단히 살아 숨쉬는 움직임이는 사람이다.

 

니체의 시는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빛나는 삶의 찬가다

 

이런 점에서 니체에게 시(예술)는 삶의 고통과 혼돈을 미적으로 승화시켜, 존재 자체를 긍정하게 만드는 행위니다. 니체에게 '시하기'는 마치 삶을 표현하는 무용수와 같다. 무용수는 건축가처럼 어떤 이론을 제시하거나 기존의 건물을 부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몸으로 음악에 맞춰 아름다운 춤을 춘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때로는 환희에 찬 몸짓으로 삶의 비극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 춤은 어떤 논리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완전한 미적 경험이다. 관객은 이 춤을 통해 삶의 고통과 혼돈조차도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음을 느끼고, 존재 자체를 긍정한다. 예술은 이렇게 삶의 모든 면을 끌어안고,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우리에게 삶을 사랑할 이유를 제공한다.

 

시답지 않아도 사람시답게 살아야 사람답게 산다.” 인생이 시답지 않아서 표지에 쓴 글이다. 와 사람은 조사가 다르다. ‘은는이가조사 중에서 은는은 주관적 느낌의 표현이고 이가는 객관적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꽃은 피었다로 썼다가 한 나절 고민하다 다시 꽃이 피었다로 고쳤다는 일화가 있다. “꽃은 피었다라고 쓰면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 신념의 표현이고, “꽃이 피었다라고 쓰면 누가 봐도 밖에 꽃이 핀 사실을 확인하는 표현이다. 지금의 현실 자체는 시답지 않은 건 주관적 감정의 강도가 다를 뿐 객관적 사실이라서 삶시답지 않아도라고 썼고, 그래도 사람시답게 자기 주관을 갖고 살아야 밖의 좋다는 이야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원심력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시답게 살아야 비로소 사람다움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난다. 삶 자체가 한 편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시답지 않은 인생을 억지로 꾸리며 살아간다. 시답게와 사람답게는 동의어다. 시답게와 사람답게의 거리가 좁아지지 않을 때 삶은 시답지 않게 변질된다. 니체의 쓰는 기쁨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들었던 생각은 시답게 살아가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한 인간의 총체적 몸부림이 이렇게도 유쾌한 유희지만 통렬한 가르침이자 속깊은 아픔이자 심연을 알 수 없는 어둠이지만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빛나는 삶의 찬가다.

 

니체에게 시하다사랑하다와 동격이다

 

하늘을 흐리게 하는 자들을 몰아내자

세상을 어둡게 하는 자들

구름을 떠밀고 오는 자들을 쫒아내자

우리의 천국을 환하게 만들자

 

휘몰아치자, 더 없이 자유로운 영혼이여

-북서풍에게-

 

암울과 우울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니체는 판을 뒤집을 정도로 과격하지만 서광이 비치는 희망으로 명랑하고 쾌활한 광인의 삶을 보여준다. 시답지 않은 세상에 시답게 살아가는 것은 사람처럼 시를 사랑하며 사는 삶이다. 시평론가 데이비드 오어(Daivd Orr)에 따르면 나는 X를 좋아한다나는 X를 사랑한다를 구글 검색하면 사랑한다보다 좋아한다가 세 배 많다고 한다.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나는 와인을 좋아한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하지만 (poetry)’X자리에 집어 넣으면 좋아한다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시를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나는 나무를 사랑한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무를 좋아한다는 말은 나무가 멋있을 때나 나에게 나무가 어떤 혜택이나 잇점을 제공해줄 때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무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무가 헐벗었어도 나무의 진면목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암에 걸리면 여전히 좋아하는 감정이 유지될까?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의 건강한 모습을 좋아했을 것이다. 암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 곁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가 암에 걸렸어도 사랑하는 감정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은 그 사람의 모든 걸 목숨걸고 아끼는 감정이다.

 

이런 점에서 “‘시하다사랑하다입니다. 나를 타자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하는 말이 시입니다”(57). 김혜순(2023)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단하는 순간이 사랑하는 감정이 생겼을 때다. 시인의 시쓰기는 사랑하기와 동격이다. 그 사람 덕분에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근간에는 사랑하는 감정이 흐른다. 시를 사랑하는 순간, 나도 시보다 더 멋진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우리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감정을 품고 있다 시를 읽는 사람의 심장에 의미를 심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명사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동사로 사는 사람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사랑에 빠뜨린 사람이나 사물의 실체나 정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다 알 수 없기고 모르는 게 남아 있기에 알고 싶어서 질문이 쏟아지고, 질문이 어제와 다른 사랑의 방법을 알려준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알고 싶은 욕망의 물줄기는 멈추고 질문도 멈춘다. 정희진 작가가 사랑의 끝은 질문이 없어진 상태라고 표현한 까닭이다. 부단히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신하는 사랑에 빠뜨린 사람은 한 순간도 자신을 고정된 명사형태로 정체되어 있지 않다.

 

니체의 시는 우울을 없애고 하늘을 빗질하는 청소부다

 

니체에게 시는 쓰기의 대상이 아니라 시하다와 같이 차라투스트라가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오늘과 다르게 늘 바뀌는 부단한 자기변신과정이다. 니체에게 시는 숨막히는 순간에 숨통 트이게 하는 지적 호흡이다 다름없다. 정현종 시인의 -언어 깃-언어에 따르면 시는 읽는 게 아니라 시를 숨쉰다또는 시를 산다가 맞다. 기대했던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뜻밖의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때 숨막히다는 표현을 쓴다. 생명의 상징인 숨이 막히니까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난국에 직면했음을 직감적으로 드러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숨쉰다는 말이 결국 시를 산다는 말로 연결되는 까닭은 숨막히는 긴장과 초조 속에서 시를 숨쉬면 그것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면 막혔던 숨통도 트이고, 갈등과 모순의 사안 사이에서 잠시 한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도 찾아온다. 이런 저런 일로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감으로 답답하고 탈출구 조차 보이지 않을 때,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숨막혔던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는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순간, 깊이 쌓였던 시름조차 잊어버리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세상이 답답하고 마음도 갑갑할 때 그 어떤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심신이 마비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시는 온몸에 흐르는 활력과 생기다. 시는 숨막히는 순간에 숨통이 트이게 만들고 한 숨 쉬면서 대안을 모색할 때 나도 모르게 내 몸을 따라 흐르는 숨결이다.

 

니체는 허무주의(虛無主義)가 온 세상을 뒤덮을 암울한 전조가 보이자 허무주의에 오하려 주의(注意)를 기울이며 우울함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삶의 빛나는 운명을 역설적으로 칭송하면서 언제나 보통 사람보다 높은 곳에서 시대의 조짐을 예언한 철학자 시인이다. 낙타처럼 도덕에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의 인생도, 사자같이 울부짖으며 불만만 토로하는 반항자도 거부하고 오로지 삶을 놀이와 긍정으로 해석, 웃음으로 세상의 낙원을 건설하는 어린아이처럼 목적이 없는 온전한 시간을 만끽하며 모든 것이 그저 놀이일 뿐이다”(실스마리아)라고 주창하고 있지 않은가. “니체의 시는 무력하고 우울할 때, 더 이상 꿈의 추구가 불가능해보일 때, 자신이 벌레처럼 누추하다고 느껴질 때 읽을 만하다. 니체의 시가 우리 몸과 마음을 꼼꼼하게 진찰하고 써준 명의의 처방전이 될 수도 있을 테다”(9). 장석주 시인의 추천하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의 시는 길 잃은 선원들에겐 불빛 신호/답을 가진 사람들에겐 의문부호”(등대)이고 공간에도, 무상한 시간에도/결코 묶이지 않는 나는/독수리처럼 한껏 자유”(고향없는 사람)로운 영혼을 꿈꾸는 방랑자의 고뇌이자 결단이다. 니체의 시는 우울을 없애고 하늘을 빗질하는 청소부이자 네 부름을 듣고 바위 계단으로, 바닷가에서 우뚝 솟은 누런 절벽으로”(북서풍에게) 위풍당당하게 뛰어내리는 과감한 도전이며, “금빛 햇살이 발그레한 아침놀 사이로 돌진하듯, 화살처럼 몸을 움츠렸다가/심연으로 돌진하는철없는 예술가다. 니체는 틀 밖에서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뜻밖의 느낌표(!)를 찾으며,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힘든 세상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시답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전도사다.

 

춤추는 별도 극심한 혼돈이 낳은 자식이다

 

헌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인생 방향전환을 결심한 니체도 흥미롭게도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극복하고 생의 긍정으로 나아갔다다. 쇼펜하우어의 암울한 인생관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을 발전시키며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아르 투르 쇼펜하우어). “사유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12)이라고 해석한 유영미 번역자의 말에서도 짐작하듯 니체는 평범함과 편안한 일상을 거부하고 스스로 정상적 사유를 전복하며 비정상적 삶을 즐기는 가운데 몸을 관통하고 남은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해서 철학적 삶을 살고 시하기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에 온몸으로 항거한 광기의 전범(典範)이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처럼 니체는 극심한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창조하고 하나의 바람이 나를 거부한 뒤로/닥치는 대로 모든 바람을 붙잡고/항해할 줄 알게 되었네”(나의 행복)처럼 생의 모든 순간을 배움과 익힘의 소중한 순간으로 포착한다. “내가 좋아하는 건/숲과 바다의 동물처럼/한참동안 헤매며 한 눈을 파는 것/사랑스런 혼란 속에 쪼그려 앉아 사색에 잠기는 것/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나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고독한 자)이다. 불안과 혼란, 걱정과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며 인생반전과 역전의 발판으로 삼아 어제와 다른 위버멘쉬로 변신하기 위해 언제나 생의 찬가를 부르며 긍정의 디오니소스적 인간으로 평생을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니체는 흔들리되 뿌리까지 뽑히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네가 서 있는 곳을/깊이 파고들어라/그 밑에 샘이 있다!”(겁먹지 말고)는 걸 알아차려여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깊이만 파다 기피 대상이 되니 높은 곳에 올라가 내가 어떤 샘물을 찾아 깊이 파고들어가는지를 조망해보라고 한다. “때로는 태양/때로는 구름이 되어/길을 간다네/늘 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서!”(현자는 말한다). 높은 곳에 있어야 세상의 흐름을 예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구석의 뒤안길에 매몰되어 전체적인 구조와 관계에 어둡지 않을 것이다. “그는 멀리, 높은 곳으로 가야하리/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가/나의 별이 될 수 있겠는가”(가장 가까운 사람). 누군가의 별이 된 사람은 한 두 번의 노력을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범접할 수 없는 곳에서 아우라를 내 뿜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별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경을 넘어 존경의 대상이다. 별은 단순히 높은 곳에서 내리비치는 빛의 의미를 넘어선다. 고독한 자에게 벗이 되어주고 힘든 자에게 밤을 배경으로 전경으로 드러나게 힘 실어주는 위로의 손길이다. “그대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이 떠올라/별이 되어 내 생의 밤하늘에서/가물가물 반짝인다”(지는 별). 높은 곳에 올라 밤하늘의 별이 된다는 의미는 어둠을 밝히는 벗이 되어 존재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삶의 뒤안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어주겠다는 뜻이다,

 

모든 편견은 꼬인 내장에서 비롯된다

 

그는 사람들의 칭송을 뛰어 넘은 곳에/살고 있다/그는 저 위의 사람이다!”(높은 곳의 사람들). 저 위의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높은 곳에서 자기 과시를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치열한 일상을 살면서도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잉태하기 위해 몸으로 겪어본 신체적 깨달음을 정신적 각성제로 제조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지침과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발은 낮은 곳에 두되 머리는 늘 이상을 지향하면서 현실에서 진실을 캐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 위에서 새상을 관념적으로 파악하며 지적 유희만 즐기지 않는다. 몸이라는 신체성을 현장성과 맞닥드리며 전쟁을 일삼는다. 생각의 발로(發露)는 발로에서 나온다. “근육이 축제를 벌이지 않는 생각들은 도무지 믿지 마라/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전에도 말했지만/엉덩이를 붙이고 끈덕지게 앉아 있는 건/신성한 정신을 거스르는 죄다”(가만히 잊지 마라). 땀은 근육이 흘리는 눈물이다. 그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근육에 상처가 아물며 험난한 세상을 샇아갈 근력(根力)도 없다. 근육의 힘, 근력(筋力)이 근본을 파고드는 힘, 근력(根力)이 되는 까닭이다. 몸을 수직으로 세워 움직이지 않고 책상에 오랫동안 앉아 골머리를 앓다보니 내장은 꼬이고 생각을 뒤틀리며 마음은 정처를 찾지 못하고 헤매기 시작한다. 견딜 수 없는 창자의 고통이 애간장을 녹이다 마침내 굽어지는 허리 압력에 못이겨 근거없는 편파적 의견을 대책없이 쏟아낸다.

 

니체는 신체를 커다란 이성으로 위치지우고 우리가 말하는 이성을 작은 이성으로 전락시켜, 머리가 생각하는 로고스 중심의 철학을 전복시키고 몸이 철학의 중심으로 등장시킨 철학자다.

이성이란 얼마나 지긋지긋한 것인지!/그런 우리를 너무 빨리 목적지로 옮겨다 놓는다네”(남쪽 나라에서). 이성은 목적지에 도달한 최단거리를 계산하고 거기에 이른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직접 목적지에 이르는 현장에서 현실을 만나 몸으로 진실을 캐내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고 논리적 정합성만 무수한 담론으로 따져물어본다. 당연히 골머리를 앓으니 두통은 심화되고 내장은 꼬여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편리한 의견만 임기응변적으로 쏟아낸다. 내장에서 나온 편견으로 쓰는 글은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지 못한다. 니체가 말하느 쓰는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 니체는 그래서 일장훈시를 시작한다. “나는 손으로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란다/언제나 발이 함께 쓴단다/굳건하고 자유롭게/그리고 용감하게/발은 때로는 들판을/때로는 종이 위를/뛰어다니지.” ‘발로 글을 쓰다라는 시 전문이다. 손발이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만 움직여 쓰는 글의 관념적 폐해의 역기능을 일갈하는 주장이다. 니체의 시가 심오하면서도 경쾌하고 의미심장하면서도 유쾌한 까닭은 격전의 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면서 오감각으로 받아들인 자연과 세상의 목소리르 번역한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행위란다/몸이 없는 성자들을 믿지 마라.” 김선우 시인의 녹턴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햇봄, 간빙기의 순진 보살에 나오는 시 구절이다. 인공지능이 감탄을 자아내는 시를 써도 몸이 없는 논리기계로 편집한 시라서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니체에게 위험은 의지(依支)하고 싶은 의지(意志)

 

니체는 미끄러운 얼음판/춤출 줄 아는 자에게는/그곳이/바로/파라다이스”(춤추는 이를 위하여)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엄동설한의 추위에도 그냥 떨고있지 않고 세상의 위기에 맞서 춤을 추는 위버멘쉬였다. 바람에 맞서는 방법은 책상에 앉아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고민하는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 “반갑다,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들아/너희는 오는구나/너희 서늘한 오후의 정령들이여!/중략/강인함을 잃지마라, 내 용감한 심장이여!/이유는 묻지 마라!”(해가 저문다). 어떤 바람이 느닷없이 불어와도 관념의 거품을 걷어내고 내면을 가리는 포장을 뜯어내며 위장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모든 것을 버리고 혹한의 시련을 견디는 나목(裸木)처럼 껍데기로 가려진 자신을 드러내는 나체(裸體)가 될 때, 그러고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곧 나력(裸力)의 지혜임을 니체는 온몸으로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세상의 진리를 몸으로 증명하지 않고 기존 관념에 기생하거나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내장은 꼬여서 온갖 편파적 의견이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온다. 바람이 불면 바람과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바람과 더불어 춤출 수 없는 자들/붕대를 감아야 하는 약한 자들/묶인 자들과 늙어 몸이 불편한 자들/위선에 찬 무리들/명예만 따지는 얼간이들/시시콜콜 도덕을 따지는 인간들/우리 낙원에서 물러가라!”(북서풍에게). 변화와 위기는 관리대상이라기보다 함께 맞서 춤추는 가운데 그 물결과 흐름 속에서 난국을 돌파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작은 위기에도 넘어지고 고정관념에 묶여 관념조차 고장난 사람들이 온갖 명예와 위선에 묶여 내가 주어가 되지 못하고 언제나 그들이 말하는 도덕에 억눌려 생각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니체는 늘 고통스러운 충고를 던져주어 고충이 되는 사람이다. “명성을 얻고자 하는가?/그렇다면 이 교훈에/귀 기울여야 하리라/너무 늦지 않게/명예를 포기하라”(충고). 명성을 얻고 싶으면 명예를 포기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 싶으면 기존의 도덕과 규범에 종속되어 노예의 인생을 살아가지 마라고 니체는 일갈한다. “이제 차갑게 직시하라!/너는 길을 잃었다/네가 의지할 건 이제 위험뿐이다!”(헤매는 자). 모든 시작을 위험하지만 시작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겪어본 경험이 삶의 지침이되는 경전이다. 때로는 기존 앎에 심각한 생채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더 큰 시련을 견뎌낼 앎의 근육이 생기는 법이다. “녹이스는 일도 필요하다/예리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녹이 슬어 철이 산화되는 화학적 변화를 겪어내야 제3의 새로운 물질로 탄생하는 것처럼 고통의 자막을 주체적으로 해석해내야 그 누구도 갖지 않는 나만의 해답을 장착,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으로 유배된 자들이 내게 띄우는 편지다.“ 김경주 시인의 비정성시(非情聖市)’ 라는 시의 일부다.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듣는다

 

그대들 독자들이여

튼튼한 치아와 튼튼한 위를

가지고 있기를 바라겠소이다!

내 책을 잘 소화해야만 비로소

나와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니!

-나의 독자들에게

 

니체의 글과 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니체처럼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삶의 정수를 걸러내는 아프고 힘든 삶의 깊이와 넓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 삶을 능가하는 글을 읽을수도 쓸 수도 없다. 니체처럼 살아가려면 튼튼한 치아와 튼튼한 위를 갖고 니체가 말하는 메시지를 잘 씹어 소화시켜야 한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틀이 생기지 않는다.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9).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중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의 시가 짧지만 긴 울림을 내포한 상태로 통렬하면서도 동시에 통쾌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몸을 관통한 흔적으로 시처럼 살아가는 삶을 살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377). 니체의 비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인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대 바그너 중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에서 이어서 말한다. “우리 청각의 한계: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듣는다”(231). 아무리 좋은 질문을 던져도 자신이 겪어본 경험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알아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사는 시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은가?

시대의 진면목을 보고 싶은가?

한 번 쯤 멀리 떨어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말하자면, 시대의 해안에서 발을 빼어

멀리 과거의 바다로 떠밀려 가보라,

먼 바다에서 해안을 바라보면

해안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해안에 가까이 오면,

해안을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보다

해안을 전체적으로 훨씬 더 잘 알 수 있다

 

어제와 다른 곳으로 떠나야 어제와 다른 마주침을 얻을 수 있고 그 마주침이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낯선 깨우침으로 다가온다. 그 깨우침이 어제와 다른 시를 쓰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나는 오로지 작가가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 니체는 경험해본 것만 피로 쓴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니체에게 글을 쓴다는 것과 삶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이며 니체에게 시쓰기시하다로 바뀌는 이유다. 경험하며 흘린 땀과 눈물의 이중주가 사투를 벌이며 흘린 피를 만나 땀과 눈물과 피의 3중주가 만든 흔적과 얼룩을 특유의 통쾌한 서사적 문체로 써내려간다. 니체의 시를 읽노라면 피눈물이 고여 있고 피땀어린 흔적이 숨어 있지만 초긍정의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열정을 녹여내는 진중한 발걸음으로 하늘을 날아가는 명쾌함과 유쾌함이 통쾌함이 뒤섞여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도 철학서이기 이전에 차라투스트라의 격동적인 삶을 담아낸 음악이자 그림이며 장편의 서사시다. “생각을 하는 것은/그만하고 싶네/생각을 하는 자는/생각의 손아귀에 붙잡힌 자/난 더 이상 생각에/봉사하고 싶지 않다”(은자는 말한다). 생각하지 않는 철학자는 없다. 니체가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자기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갉아먹으면서까지도 몸을 움직이고 않고 생각만 거듭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존 생각에 갇뎌 자기 생각의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기존 생각으로 생각의 자손을 무한 출산하는 사람들이다. 진짜 생각하는 사람은 니체가 말하는 부자유한 자. “그는 서서히 귀를 기울인다/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귓전을 맴도는 소리는 무엇일까/그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건 무엇일까”(부자유한 자).

 

시는 나는 나의 해석자가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진짜 생각하는 사람은 기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자기 생각이 낳은 통념이나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귓전을 맴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전과 다르게 다가오는 모든 외부적 자극에 대한 내면적 반응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 없이 치솟아 오르려는 자만심을 땅으로 끌어내려 낮은 곳으로 임하려는 겸손한 자세와 노력 속에 치열한 생각이 잉태된다. 니체가 그렇게 해서 찾아낸 진리가 드디어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가만! 나의 진리가 왔다!/머뭇거리는 눈으로, 비단처럼 부드럽게 전율하며/진리의 눈이 나를 쳐다본다/사랑스럽고 심술궂은 소녀의 눈빛”(가장 부유한 자의 가난에 대하여). 니체는 언제나 확신이나 기존 진리는 부패하기 때문에 통념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어제와 다른 질문으로 언제나 믿음의 근거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정에 통렬한 문제를 제기한다. 자기자신의 해석틀에 갇히는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구축한 철학체계와 기반도 수시로 전복했던 망치철학자였다. “사회 현상의 실존적 영향력은 그것이 팽창할 때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미약한 상태인 초창기에 가장 날카롭게 인지될 수 있다”(178). 밀란 쿤테라의 커튼에 나오는 말이다. 영향력이 도처에 산재해서 익숙한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다가오는 자극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니체도 같은 맥락에서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낀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타락도 타성에 젖으면 관성이 되어 별 다른 느낌을 갖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는 의미다. “어떤 현실이 전혀 부끄러움 없이 되풀이 된다면, 그 반복되는 현실에 직면한 사상은 결국 언제나 입을 다물게 되는 법이다”(179). 밀란 쿤데라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시는 반복되는 현실에 의문을 던져 부끄러움을 낳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여 타성에 젖은 생각을 세탁, 날 좋은 햇빝에 말리는 가운데 탄생된다.

 

내가 나를 해석하면/스스로를 속이게 되리라/나는 나의 해석자가/될 수 없으니!/오직 자신의 길을 꾸준히 오르는 자, 그 사람만이/나의 모습도 더 밝은 빛에서/비추어주리라”(해석). 시는 나는 나의 해석자가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있는 곳에서 머무르고, 자기 전공 틀안에 갇혀서 전공지식간 부단한 순혈교배를 통해 자기들만 알아듣는 지식을 생산, 자기들이 갇혀 있는 이론적 틀로 해석하는 자가당착적 오류를 범하는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경고다. 내가 나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은 물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고 있었던 신념이 통념으로 바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부단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물음 앞에 나의 해석된 지식이 불안에 떨고 위험에 노출되어 언제나 긴장과 불안 속에서 세상을 밝히는 온전한 앎이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단련당하고 옳음이라는 소금에 뿌려져 썩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를 그렇게/부풀리지 마라/계속 부풀리기만 하면/풍선처럼 조금만/찔러도 터져버릴 테니”(오만에 대하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장성세를 구가하며 위장하고 치장하는 관념적 거품을 걷어내고 해방된 정신으로 세상의 흐름을 이끄는 이면의 구조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리하지 않았다.

 

시는 몸안으로 침입해 통증을 유발하는 염증이다

 

해방된 정신

 

다른 의견을 용납할 줄 아는 것이

문화의 표지라는 건 이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더 나아가 수준 높은 인간은 자신에 대해

이의가 제기 되기를 원하고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몰랐던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보다 더 위대한 것은

다른 의견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거리낌 없는 양심으로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익숙한 것,

신성하게 여겨지는 것에 맞서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위대하고 새롭고 놀라운 면이며,

해방된 정신이 걷는 가장 앞선 걸음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시는 관성에 따라 움직이는 발상이 아니라 생각의 물구나무를 서서 관성을 거부하고 거꾸로 바라보는 역발상이며 닫힌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해방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시는 책속의 깨알 같은 글씨가 아니라 책을 쥔 손에 맺힌 작은 땀방울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관망'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밑바닥의 절박한 현실을 몸으로 느끼며 부대끼는 치열함이다. 그래서 니체의 시는 하나의 염증이다. 사랑은 하나의 염증/너라는 이물질이/내 안에 침입해/통증을 유발하는 것/미열처럼 너는/궤양처럼/너는.” 조원희의 염증이라는 시다. “시는 하나의 염증/시라는 이물질이/내 안에 침입해/통증을 유발하는 것/미열처럼 시는/궤양처럼/시는.” 니체의 쓰는 기쁨에 나오는 시는 모두 하나의 염증을 유발한다. 니체의 시을 읽고 나면 기존 앎에 심각한 암()이 생긴다. 그래도 두렵지 않다. 그 암이 기존 앎을 뒤엎고 새로운 앎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고통 끝에 찾아오는 새로운 앎의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이 어떤 암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새로운 앎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다. 이성복 시인이 그날이라는 시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처럼. 앎의 암이나 염증을 치료하는 특효약이 바로 니체의 쓰는 기쁨에 나오는 시다. 니체가 전해주는 치료약으로 힘들고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명랑하고 행복한 일상이 주는 소중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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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문 전략 - 사업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생존 기술 딥 인사이트 시리즈 2
라유진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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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문은 전대미문의 질문으로 금시초문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돌파구다

옆문 전략을 읽고: 사업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생존 기술

 

정답을 보다 빨리 찾아내기 위해 정문만 바라보고 앞만보고 달리지 않고 익히 알고 있던 기존 방식이 통하지 않을 때, “새로운 각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다시 말해 목표달성을 위해 창의적인 해결책”(22)을 모색하는 사람을 프로 옆문 오프너라고 한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위기는 없다. 2015년 킬리만자로 정상등반에 성공한 적이 있다. 11시에 4,700m 베이스 캠프에서 출발, 5,800m 정상을 향한 등정을 시작한다. 수직 절벽에 가까운 정상을 향한 등정에서 올라가도 끝은 보이지 않고 물은 떨어지고 체온은 낮아지며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정말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계속 수직 절벽을 타고 직진하면서 올라가든지 아니면 포기하고 방향을 틀어 내려가든지 양자택일이었다. 하지만 잠시 쉬면서 또 다른 탈출구를 모색하면서 정상을 우회하는 옆문 전략을 선택, 속도는 느리지만 우회도로를 선택하면서 천천히 옆으로 가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앞으로 못가고 뒤로도 못가면 옆문으로 가면 된다. “탈출로는 대개 옆에 있다”(80). 문은 앞과 뒤에만 있지 않고 질문을 던져 탐문을 시작하면 언제든지 낯선 관문이 열린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는 불가능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며 한계는 스스로 정한 경계일 뿐이다. 관점과 접근논리를 바꾸면 언제든지 우리가 찾는 길은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는 언제나 다른 길이 있다영화 모아나 2의 명대사를 삶의 신념과 철학으로 믿고 따르면서 행동 철칙으로 삼는다. 옆문 전략을 읽으면서 이 책에 등장하는 프로 옆문 오프너가 발휘하는 역할이나 미션을 6가지로 정리해보았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드는 역발상의 귀재이자 당연함에 시비를 걸며 대안을 모색하는 비정상적 사고 실험자이고,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라고 생각하는 도전정신의 전형이며, 다양한 전문성을 융합, 난국을 돌파하는 문제해결의 달인이자 과감하게 행동하며 가능성을 찾아내는 방법개발 전문가이며 어제와 질문으로 새로운 관문을 열어가는 질문술사이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2c600003.b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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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옆문 오프너는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드는 역발상의 귀재

 

정문은 직선 주로 끝에 있지만, 옆문은 곡선 우회 도로 어딘가에 숨어 있다. 정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사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고속도로나 철도를 고속으로 달려가 목적지에 보다 빨리 도달하려는 사람이다. 반면에 옆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오솔길을 걸으며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는 낯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만끽하면서 때로는 머뭇거리고 망설이며 서성거리는 가운데 묘안을 구상하기도 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갈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실험하고 모색하기도 한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은 출발지와 목적지가 정해져 있고 목적지로 이르는 길에도 대안이 별로 존재하지 않지만 오솔길을 걷는 옆문 지향자는 출발지와 목적지는 물론 목적지에 이르는 여정 자체가 사전에 정해져 있지 않아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대안을 임기응변력을 발휘해 모색할 수 있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의 경력은 직선주로를 달리면서 주로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중시하는 ()의 사람이다. 반면에 옆문을 찾아나서는 사람은 곡선적 우회도로를 걸으면서 어떤 자리든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일을 통해 경험하고 깨닫는 배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의 사람이다. ‘직의 사람은 자리에 목숨을 걸고 남과 경쟁하며 넘버원(No.1)을 추구하지만, ‘업의 사람은 일의 의미에 목숨을 걸며 대체 불가능한 온리원(Only 1)을 지향한다.

 

정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복사본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고, 옆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정한 판단 기준에 따라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원본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룬 꿈을 꿈꾸면서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옆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하면 살아있음을 느끼는 욕망을 추구하면서 노력을 통해 능력을 개발하는 사람이다. 대체 불가능한 원본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을 하면서 최고의 절정경험을 만끽하는 사람만이 자기 경험을 통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내러티브를 창조할 수 있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정보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길을 빠르게 추적하는 추종자(Fast Follower)’ 인생을 살지만 옆문을 찾아내는 사람은 다양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의 경험으로 엮은 내러티브를 통해 삶의 주도권을 잡고 추월자(Path Breaking)’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사이트에 중독되어 스스로 겪어본 경험이 부재하므로 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 옷을 입고 남의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사고의 식민지에 머물며 살아간다. 반면에 옆문을 찾아 나서는 사람은 직접 어제와 다른 경험을 통해 아웃사이트를 바꾸며 생긴 낯선 생각을 날선 언어로 벼리고 벼리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며 자기주도적 삶을 살아간다.

 

정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실패하면 실기라고 생각하지만 옆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실패는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정문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걸림돌은 가급적 피하거나 치워야 할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옆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걸림돌은 한 단계 도약하는 디딤돌로 생각한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역경은 힘들고 어려운 난관이지만 옆문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역경은 색다른 경력으로 만들 수 있는 소중한 배움의 기회라고 해석한다. “실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충분히 혁신적이지 않은 것이다.” 필자가 인용한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한 말이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 실패는 문제해결과정에서 발생하는 해프닝이나 아직 성공하지 못한 정도로 여길 뿐이다”(25).

 

불가능 속에서도 누군가는 성과를 낸다는 부제목이 붙은 긍정적 이탈은 세이브더칠드런 소속이었던 제리 스터닌이 전후 절대빈곤 속의 베트남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추진했던 프로젝트 경험을 기반으로 저술한 책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영양실조가 발생하지만 가난한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영양상태가 양호한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긍정적 이탈(Positive Deviance)’이다. 가난한데도 영양상태가 좋은 사례를 발굴, 이웃의 가난한 다른 아이의 영양상태 개선에 적용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전략이 성공하는 변종이다 어떤 곳이든지 일반적인 표준이나 보편화된 통념 또는 정상분포에서 벗어나는 이상한 상태, 즉 일탈을 경험하는 소수자가 있고, 이들의 행동 속에 놀랍게도 전반적인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긍정적실마리를 찾아내는 전략이 바로 긍정적 이탈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긍정적 이탈'이란 특정 집단 안의 난제에 대해서 분명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문제해결의 열쇠를 쥔 사람은 외부 전문가가 아니라 집단 내부에 있는 특별한 소수가 찾아낸 숨겨져 있는 성공하는 변종이다. 늘 추진하던 거창한 계획이나 대규모 프로젝트 방식으로 추진하다 실패하는 상식이 아닌 주변에서 쉽게 취할 수 있는 토착적 해결법을 활용하여 뜻밖의 성취결과를 만들어내는 성공적인 변종에 주목하는 접근방법이다. 프로 옆문 오프너 역시 남들이 다 추진하는 틀에 박힌 접근방식이나 당연히 안 된다고 생각해서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상에서 취할 수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이면을 드러내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하는 역발상의 귀재다. 이런 저에서 옆문 전략은 숨겨진 기회를 포착하고 활용하는 사고방식”(36)이자 아직 주목받지 못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기회를 발굴해 새로운 가능성이나 가치로 전환하는 마인드셋(mindset)“(36)이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당연함에 시비를 걸며 대안을 모색하는 비정상적 사고 실험자

 

정상(頂上)에 간 사람은 정상(正常)입니까?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발상으로 정상적인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뒤쫓아 가지만, 옆문을 찾아내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의 눈길에 벗어난 옆길이나 에움길에서 그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자기만의 행보를 이어간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은 호화로운 요트 여행자로 살아가며 누군가 운전하는 차나 배에 몸을 맡기며 관객으로 살아가지만 옆문을 찾아가는 사라은 자신이 운전수가 되어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간다. “옆문 전략은 기존의 정문 대신 새로운 문을 통해 시장에 진입, 산업의 패러다임을 아예 바꿔버리는 매우 전환적인 사고방식”(40)을 추구하는 프로 옆문 오프너는 기존의 판 위에서 뭔가를 더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아예 남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판을 깔아보려고 한다. ‘다르게 생각하려는 정문 추구자보다 전혀 다른 것을 생각’(think different)하려는 옆문 개척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상을 공략하지 않는다. 세계 최초로 높이 뛰기 방식을 바꾼 딕 포스베리(Richard Douglas Dick Fosbury)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배면뛰기 방식으로 정상적인 높이 뛰기의 한계를 넘었다. 그전까지 정상에 정상적으로 도전한 높이뛰기 선수들은 모두 2m 벽을 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해있었다. 하지만 딕 포스베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상에 도전하지 않았다. 세계 최초로 무게 중심을 뒤에 두는 배면 뛰기 방식으로 2m 한계를 넘어섰다.

 

옆문 전략의 핵심은 문제 해결의 프레임을 바꾸는 데 있다”(35). 온라인 DVD 비디오 대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였던 넷플릭스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업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꿈으로써 경쟁상대였던 블록 버스터(Block Buster)를 침몰시킨 사례는 문제 해결의 프레임을 바꿔서 모두가 반대하는 사업전략을 관철시킨 비정상적 사고 실험의 전형적인 사례다. “옆문 전략은 생존을 위한 배수의 진이다. 호화로운 요트가 아니라 구명보트다. 구명보트가 바다 위 모든 배의 필수 장비이듯, 옆문 전략은 우리 모두가 장착해야 할 구명조끼와 같다”(51). 위기와 난국에 처했을 때 프로 옆문 오프너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업의 본질을 재정의하고 정상적인 방식에 관성적으로 물들은 과거의 사업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독특한 시력으로 무장한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는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네 가지 독특한 시력’(視力)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시력은 폭넓게 보는 시야’(視野). 한 마디로 시야는 시력으로 볼 수 있는 넓이나 범위다. 시야가 넓어질수록 좌정관천의 안목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보다 넓은 관점에서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 시야가 중요한 이유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한 다음 엉뚱한 의사결정과 행동을 방지하고 또 다른 가능성이 옆문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 요구되는 두 번째 시력은 시각’(視覺)이다. 시각은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각성이 달라지는 시력이다. 정면에서만 보는 시각은 정문밖에 안 보이지만 곁눈질해가서면서 각도를 달리해서 옆에서 보면 정문으로 갈 수 없는 옆문이 존재한다는 걸 시각이 찾아준다. 틀에 박힌 시각은 타성이나 관성을 친구로 불러들여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 필요한 세 번째 시력은 시선’(視線)이다. 시선을 사선(死線)도 넘을 수 있는 눈이 가는 방향이나 길을 의미한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는 프로 옆문 오프너의 관심과 인식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사안을 바라보는 가치판단 기준이나 세상을 이해하는 세계관에 따라 시선의 방향과 성격도 달라질 수 있다. 선입견과 편견의 시선을로 바라보는 삐닥한 시선도 있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측은지심의 시선도 있다. 한계나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를 처벌하기 위해 사람과 싸우려는 시선도 있고, 문제를 해결한 대안모색에 중점을 두면 문제와 싸우려는 시선도 있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 필요한 네 번째 시력은 시점(視點)’이다. 시점은 글 속에서 서술자의 위치, 예를 들면 1인칭 주인공이나 관찰자 시점인지, 아니면 이야기 밖의 3인칭 시점인지에 따라 이야기의 전달 방식을 다르게 구성하는 시력이다. 시점은 또한 시점(時點)이다. 시점(時點)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 어느 한 순간이다. 시점이 과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력인지, 현재나 미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력인지에 따라서 동일한 현상이나 실제도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과거에는 맞는 이야기였지만 현재는 통용되지 않는 통념일 수도 있고, 현재는 맞지만 미래에도 여전히 진리로 통용되는 관점인지는 그 때마다 다르게 인식된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라고 생각하는 도전정신의 전형

 

위기 상황이나 문제 상황에 직면할수록 혼자 상상하고 검토에 검토만 거듭하다 실기할 수 있다. 밑저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물어보기만 해도 뜻밖의 가능성이나 혜택을 받는 행운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해보기도 전에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실패는 경험을, 성공은 성취를 낳는다. 잃을 게 하나도 없다”(90). 도전하는 사람 앞에 언제나 대기중인 유혹자가 있다. 바로 현명한 포기다. “실은 상처받기 싫어서, 실패를 마주하기 싫어서, 혹은 도전에 대한 부담감 때문”(91)인데도 현명한 포기를 시간과 자원을 절약하는 현명한 전략으로 미화한다. “현명한 포기는 당장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기회와 가능성을 날려버리는 잘못된 선택이다”(95-96). 정문이 막혔다는 의미는 또 다른 정문, 즉 옆문을 찾아보라는 경고 메시지이자,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가능성과 한계에 도전해보라는 의미다.

 

도전은 한 두 번에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마법의 성취동인이 아니다. 작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반복해서 도전하다보면 어느 순간 반전을 일으키면서 도약이 시작된다. 1-29-300법칙, 다른 이름으로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있다. 미국의 보험관리자가 보험사고 패턴을 분석해보니 한 번의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사태는 29번의 사건과 사고를 방치한 결과이고, 29번의 사건과 사고는 300번의 작은 조짐이나 징후를 무시한 결과라는 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사태도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걸 뒤집어 도전으로 해석해도 유의미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1번의 위대한 성취를 이루려면 29번의 작은 도전으로 성공체험을 맞보고, 29번의 도전성취는 300번의 지루한 도전적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하다보면 임계점에 달라면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지점을 만난다. 인생은 한 방에 뭔가 위대한 성취가 일어나지 않는다.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을 시작한다는 주역의 사자성어, 물극필반(物極必反)이 도전을 즐기는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 주는 시사점은 크다.

 

도전은 우연한 기회에 뜻밖의 선물 꾸러미를 갖고 우리들에게 달려온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영화에는 인생 최고의 감독은 우연이라는 명대사가 나온지 않는가. 사전 각복이나 계획 또는 의도대로 도전한다고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이 수시로 발생하고 생각지도 못한 사고(事故)가 발생해서 전혀 다른 사고(思考)로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를 찾아낼 가능성이 자라는 텃밭이 바로 도전이다. “우연은 강력하다. 항상 낚시바늘을 던져둬라. 전혀 기대하지 않는 곳에 물고기가 있다.” 저자가 인용한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말이다. 어느 구름이 비를 품고 있을지 모르고 어떤 사소한 도전이 경이로운 기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지는 도전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작고 사소한 도전이라고 앉아서 생각하고 검토하며 아이디어를 내는 시간보다 몸을 던져 도전하면서 색다른 가능성의 관문을 끊임없이 찾아나서는 ‘Street Smart’. ‘Street Smart’는 책상에서 공부만 해서 머리가 좋아진 책상 똑똑이(Book Smart)와는 다르게 몸소 도전해본 경험과 거기서 얻은 통찰력으로 난국을 돌파해나가는 맥가이버버혀 인재, 다른 말로 브리꼴레르(bricoleur). 브리꼴레르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언급한 개념이다. 건축학에 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 현재 가용한 자원과 도구를 활용하여 집을 즉석에서 짓는 과정을 지켜보고 창안한 개념이다. 서구과학에 상응하는, 길들여지지 않는(unschooled) 야생의 사고를 통해 실전형 문제를 해결하는 브리꼴레르로서의 프로 옆문 오프너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용한 지식과 자원이나 도구를 활용해 주어진 문제상황에 다각도로 적용하면서 난국타개방안을 모색한다. “가령 우물을 판다고 했을 때, 무뎌진 삽 하나로만 계속 파지 말고 상황에 따라 호미든, 괭이든, 전동 드릴이든,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도구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163). 한 우물을 한 가지 도구로 깊이 파다가 자신이 판 우물에 매몰될 수 있고, 깊이 파다가 기피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다양한 전문성을 융합, 난국을 돌파하는 문제해결의 달인

 

옆문 전략은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다”(118). 정문으로 못 들어가고 옆문으로 들어가면 뭔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부정적 관점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판단 기준이었다. 사실 옆문은 정문이 막혔을 때 새로운 탈출구를 열어주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곁눈질로 열리는 옆문은 삿대질, 고자질, 지적질처럼 이라는 접미사가 품은 부정적 뉘앙스로 바람직하지 못한 관점으로 우리 사회에 통용되어 왔다. 정면돌파만이 난국을 돌파하는 유일한 대안인것처럼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사회에서 옆문을 바라보는 뿌리깊은 선입견과 편견은 옆문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의 싹이 자라기도 전에 잘라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왔다.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적 아디어는 언제나 현재 가용한 지식과 경험적 깨달음이 연상작용을 일으켜 출현한다. 아이디어 자체가 익숙한 것의 낯선 조합이고 창의성도 이미 있는 익숙한 것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연결시켜 발아된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언제나 문제상황의 본질을 재정의하면서 그 상황이 전정으로 원하는 해결대안이 무엇인지를 반복해서 물어본다. 문제 자체를 바라보는 프레임이나 관점을 바꾸고 문제의 성격이나 본질을 재정의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문제도 문제 상황을 탈출하는 색다른 대안이나 묘안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과감한 실행력을 갖춘 유능한 전략가이고,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이라는 잠재적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해 상대를 설득하는 뛰어난 협상가이다”(124). 프로 옆문 오프너는 유능한 전략가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사업에 관한 전략적 의지와 의도를 이해관계자는 물론 고객들을 대상으로 설득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탁월한 협상가다. 혁신의 실패는 아이디어의 부족에서 기인하기보다 혁신적 아이디의 설득과정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프로 옆문 오프너들의 문제해결 전략은 실리콘 밸리 스타트업 창업자가 자주 활용한다는 MVPM(Minimum Viable Product)처럼 완벽한 제품을 출시하기보다는 핵심기능만 갖춘 제품을 고객에게 빠르게 보여준 후 피드백을 받아 제품의 품질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완벽한 제품과 서비슬 만들어 고객에게 보여주다 실패하기보다 사전에 고객의 요구와 욕망의 지향성을 지속으로로 모니터링하면서 마침내 고객을 감동시키는 최종의 설루션을 개발하는 전략을 채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젝트가 상당 부분 진척되는 중간이나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는 리스크를 떠 안기기보다 사전에 문제가 되는 부분을 빠르게 수정하고 보완함으로써 시장의 요구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문제해결 프로세스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 복잡한 문제는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전문지식이 융복합되어 주어진 문제상황에 최적의 설루션을 제공하는 아이디어가 연상되는 과정에서 해결된다.

 

소프트웨어 시제품 개발방법론 중에 MVPM과 유사한 방법이 속성시제품 개발 방법(Rapid Prototyping)이라고 있다. 고객이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궁극적인 모델을 완벽한 분석과 설계 및 개발 끝에 완성하는 전략이 아니라 속성으로 시제품을 개발한 다음, 고객에게 피드백을 받아 궁극적으로 고객이 감동하는 제품을 지속적인 수정과 보완 과정을 통해 빠르게 완성해나가는 방법이다.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기 과정에는 과거의 제품 개발 경험과정에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고객과의 대면적 접촉 경험을 통해 깨달은 통찰력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더 좋은 품질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입력 요인이다. 내 몸에 각인된 경험적 흔적과 얼룩은 물론 개념적 렌즈나 관점은 모두 정문이 막혔을 때 사용되는 소중한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필요 없는 조각, 즉 쓸모 없는 경험”(176)당장을 불필요해 보이는 노력의 시간들, 실패로 여겨졌던 순간들, 심지어 의미를 찾기 힘들었던 고난의 날들”(176)까지도 나중에 우발적 마주침으로 색다른 깨우침으로 탄생할 소중한 창의적 재료다.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했던 점을 연결하라(Connecting the Dots)”는 철학에 비추어 과거의 모든 경험을 연결하면 생각지도 못한 문제해결의 단서나 대안을 모색하는 소중한 아이디어 원천으로 작용한다. 무의식 중에 흘려 보낸 모든 순간의 경과 스치듯 지나간 인연의 고리는 옆문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단서로 불현 듯 나타나 소중한 해결책을 선물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니 쓸데 없는 것은 없다. 다만 쓸 때가 아니라서 그 때를 기다릴 뿐이다.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되면 쓸데 없던 것도 쓸 때가 되어 찾아온다. “수십년에 걸쳐 축적한 풍부한 인생 경험과 업무 노하우, 그리고 오랫동안 형성된 광범위한 인맥은 옆문을 발견하고 열어가는 데 귀중한 자산이 된다.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을 겪으며 체득한 깊은 통찰과 삶의 지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성숙한 판단력은 옆문과 뒷문을 명확히 구분하고 잠재적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186-187).

 

프로 옆문 오프너는 과감하게 행동하며 가능성을 찾아내는 방법개발 전문가

 

앞서가는 방법의 비밀은 시작하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마크 트웨인의 명언이다. “옆문을 열기에 가장 좋은 때는 지금이다”(190).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조목조목 다 다 따져보고 분석하며 검토하다 더 적극 검토하지만 걱정이 앞을 가려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다는 티벳 속담이 말해주듯 걱정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희박하다. 뭔가를 해결하려면 완벽하게 계획 세우고 준비하고 검토하는 시간에 그냥 시작해보는 거다. 의도대로 안 되면 다시 해도 늦지 않다. 시작해봐야 생각했던 방법이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있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문이 막히면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안절부절 못하거나 좌절하고 절망하기 일쑤다. 이들이 주로 다니는 대학은 걱정대학교 부정학과 자포자기 전공이다. 시도해보기도 전에 걱정이 앞서서 과감한 실생 자체를 망설이며 주저하다 주저 앉는다. 반대로 옆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우선 시도해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서 적용하는 가운데 새로운 방법을 개발한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은 법대로 하는 사람이고 옆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법대로 안 되면 자신이 방법이라는 법을 새롭게 개발한다. 이들이 주로 다니는 대학은 들이대학교 저절러 학과 뒷수습전공이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생각이 깊거나 뛰어난 아이디어로 검토하고 완벽한 준비를 거듭하는 사람보다 어제와 다르게 도전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꾸준히 개발하는 사람이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들이대학고 저질러학과 뒷수습 수석 졸업생이다. 책상에 앉아서 과거를 파면서 법대로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제와 다르게 행동하면서 색다른 가능성의 텃밭을 일구는 방법 개발전문가다. “옆문 전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회를 발견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효과적인 돌파구”(50)이자 살아나기 위한 최선의 대안이자 최후의 탈출구”(50). 효과적인 돌파구나 최후의 탈출구다 책상에서 만들 수 없다. 돌파구와 탈출구는 사전에 세운 계획대로 마련되지 않는다. 직접 몸을 던져 다양한 옆문을 모색하고 시도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열리는 방법 개발 전문가의 부산물이다. 법은 책상에서 만들 수 있지만 방법은 반드시 실행해봐야 개발할 수 있다. 생각이 통찰을 일으키기보다 행동이 통찰을 일으킨다고 믿는 프로 옆문 오프너는 어제와 다르게 도전하면서 문제상황을 탈출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방법을 부단히 실험하고 모색한다. 법은 소수 전문가만이 만들 수 있지만 방법은 누구가 과감한 결단과 실행을 통해 개발할 수 있다. 방법은 시행착오 속에서 판단착오를 줄여나가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의 산물이다. 법은 과거를 지향하지만 방법은 미래를 지향한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시도하지 않으면 어떤 방법이 맞는지를 알 수 없다. 프로 옆문 오프너가 방법 개발 전문가인 까닭이다. 미래는 행동을 통해 통찰을 얻으며 어제와 다르게 시도하면서 색다를 방법을 개발하는 전문가가 리더가 되는 세상이다. 법대로 정문이 열리지 않으면 옆문을 열어가는 방법을 개발하는 사람이 바로 프로 옆문 오프너이다.

 

방법 개발 전문가인 프로 옆문 오프너는 대단하고 거창한 방법을 개발하는 사람이 아니다. 방법 개발 전문가가 믿는 일상은 작고 사소한 일들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면서 때로는 얼룩도 생기고 그 얼룩이 또 무늬로 바뀌는 평범한 삶의 연속이다. “일상은 슈펴 히어로나 해결할 만한 엄청난 스케일의 사건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자잘하고 사소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우리네 인생이다”(148). 사소한 평범한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게 정상적인 일상이다. 오히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심각한 문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왜 불가능한지, 불가능한 전제나 가정 또는 조건을 따져 묻다보면 내가 짐작했던 추측이나 예측이 쓸데없이 내가 스스로 설정한 잘 못된 전제나 가정 때문이라는 현실이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시작해서 시도해야 역동적인 격전의 현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현장감있는 현실맥락적 방법이 부각된다. 모든 방법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용되는 일리일 뿐이다. 만고불변하는 절대 진리처럼 작용하는 방법은 없다. 언제나 방법은 주어진 문제 상황이 만들어내는 맥락적 산물이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어제와 다른 질문으로 새로운 관문을 열어가는 질문술사

 

옆문을 앞문이나 정문만 바라보며 달리는 사라에게는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문이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술은 누군가 출제한 문제를 풀어서 정답을 맞추는 능력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역량은 남이 낸 문제의 의도나 문제의식을 파악한 다음, 출제자가 원하는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정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답은 정답 하나 밖에 없다. 철도와 고속도로를 통해 도달할 목적지가 이미 정해진 것처럼 정문을 추구하는 추종자들이 찾아내야 할 답은 출제자가 원하는 정답이다. 하지만 옆문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기보다 이전까지 누구도 던지지 않은 질문을 던져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방향으로 새로운 해답을 찾아나서게 만드는 촉발점을 마련하게 더 중요하다. 정답은 하나지만 해답은 여러 가지가 될 수도 있다. 정문과 정답은 하나지만 옆문을 찾아가는 해답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다. 해답은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오답이 될 수도 있다.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 더욱 중요하게 요구되는 능력은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정문찾기 전략보다 전대미문의 질문으로 전혀 다른 옆문을 찾아내는 탐구능력이다.

 

나는 매번 기말고사를 내가 출제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출제하게 만든다. 기존의 문제중심 학습(PBL: Problem Based Learning)도 문제는 다른 사람이 내고 학생은 여전히 대답을 찾아내는 수업전략이다. 학생들에게 직접 문제를 출제하게 만드는 이유는 문제가 독특하고 창의적이어야 그에 상응하는 해답도 독창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PBL의 문제나 한계점을 개선하기 위해 내가 질문중심 학습(QBL: Question-Bases Learning)을 개발, 실제로 기말고사에서 학생들에게 출제하는 기회를 준다. 학생들에게 질문은 벽도 문으로 바꾸는 전대미문의 마법의 열쇠이며, 낯선 관문을 열어가는 탐문이자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창문이다. 마찬가지로 프로 옆문 오프너에게 질문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탐문이자 시야도 넓혀주는 견문이며 고정관념도 파괴하는 파문이다. KSA를 뒤집으면 ASK가 된다. 여기서 KKnowledge SSkill AAttitude. 지식을 가장 많이 가르치고, 스킬은 조금 가르치며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나 태도 패러다임은 거의 가르치지 않을 때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해진다. 이제 기존 지식과 스킬, 그리고 태도를 가르치기보다 세상를 바라보는 자세나 패러다임을 강조함으로써 문제의식을 갖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스스로 던진 질문에 해답을 찾아가는 프로 옆문 오프노가 필요하다.

 

앞으로 교육은 기존 지식(Knowledge)과 기술(Skill)의 비중을 줄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관점과 태도(Attitude)의 비중을 높여 나가면서 KSA를 뒤집어 ASK 패러다임을 추구해야 한다. 질문을 바꾸지 않으면 색다른 관점과 태도는 생기지 않는다.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의 그물을 바꿔야 그물에 걸리는 답의 종류도 바뀐다. 확신은 부패한다. 질문은 방부제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언제나 자기가 믿고 있는 신념도 통념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수시로 질문을 던져본다.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 통념인지, 확신은 편견과 선입견을 기반으로 생긴 미신은 아닌지를 질문을 통해 확인해봐야 한다. 정문을 추구하며 정답을 찾는 모범생은 이제 학교에서 성적은 잘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난국이 항시적으로 존재하는 복잡한 현실 세계에서는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도태될 것이다. 정문에만 정답이 존재하지 않고 옆문에도 얼마든지 우리가 찾는 또 다른 정답이 해답으로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옆문에서 해답을 찾아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며 색다른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가는 모험생이 바로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다. 문제를 잘 내는 인재를 전문용어로 문제아라고 한다. 프로 옆문 오프너가 바로 문제아다.

 

옆문으로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5가지 다른 문

 

정문이 막혔을 때 정면돌파 전략으로 막힌 정문만 열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관점과 접근 논리로 정문과 다른 옆문으로 난국을 타개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사람이 바로 이 책에서 강조하는 프로 옆문 오프너다. 프로 옆문 오프너는 한 마디로 어제와 다른 전대미문의 질문을 던져 금시초문의 옆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난국타개자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2c600001.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600pixel, 세로 900pixel

 

옆문은 세상을 다르게 내다보게 만드는 창문(窓門)’이다. 정문만 바라보다 막히면 깜깜한 세계에 갇힐 수 있지만 창문을 내는 순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로 입문(入門)할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된다. 창문의 종류와 위치에 따라 옆문의 종류와 성격도 바뀐다. 정문만 갖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정면돌파전략을 구사하지만 창문을 여러개 갖고 있는 사람은 난국을 돌파할 묘안도 다양하다. “문이 닫히면 창문이 열린단다. 인생이 그렇더라. 그러니 어떤 문이 닫히거든 단힌 문에 집중하지 말고 열린 창문을 찾으면 된단다”(166). 필자가 인용한 손녀를 울컥하게 한 90세 할머니의 감동 조언이다. 정문은 하나 뿐이지만 마음먹고 행동하기에 따라 창문은 무궁무진하게 열린다.

 

옆문은 이제껏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관문(關門)’이다. 예선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결선에 진출할 수 없듯이 관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목이다. 관문을 뚫지 않고서는 기대하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낯선 포문(砲門)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옆문은 색다른 시도와 도전을 통해 견문(見聞)’을 쌓을 수 있는 새로운 학습기회다. 옆문은 시야를 넓혀 가면서 생기는 다른 견문으로 낯선 곳을 방문(訪問)’,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견문을 넓히면 방문 기회도 그만큼 심화-확산되기 때문에 또 다른 옆문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도 있다.

 

옆문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탐문(探問)이다. 경찰이 탐문 수사하듯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소식 따위를 알아내기 위하여 더듬어 찾아 묻고 묻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를 발견할 수 있다. 탐문은 새로운 가능성의 기회가 잠재되어 있을 때 자세시 따져서 물어보는 심문(審問)으로 연결되어 뜻밖의 비즈니스 기회가 숨죽이며 기다른 곳을 찾아낼 수 있다.

 

옆문은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파문(波紋)’이다. 옆문을 찾아내는 과정은 정상적인 발상이나 접근논리로 생각해낼 수 없는 금시초문의 문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찾아내려는 옆문이 발견되는 순간 세상을 놀라게 하는 파문이 일어날 수 있으며, 그 순간 세상 사람들은 파문의 진위여부에 대해 반문(反問)한다. 하지만 반문은 파문의 확산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프로 옆문 오프너는 브리꼴레르와 일맥상통하는 전문가이자 리더상이다. 브레꼴레르는 정문을 추구하면서 누군가 이미 만든 정답을 찾아가지 않는다. 브리꼴레르는 이 세상에 어디에나 통용되는 진리로서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브리꼴레르로서의 프로 옆문 오프너는 하나의 정답을 찾아 끝까지 넘버원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사업자가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해답을 찾아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대체불가능한 온리원사업가로 거듭나는 사람이다. 브리꼴레르로서의 프로 옆문 오프너는 책상 지식으로 문제를 관념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맥가이버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가용한 지식과 도구, 그리고 경험을 융합, 임기응변력을 발휘하면서 주어진 문제상황을 탈출한다. 브리꼴레르야말로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드는 역발상의 귀재이자 당연함에 시비를 걸며 대안을 모색하는 비정상적 사고 실험자이고,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라고 생각하는 도전정신의 전형이며, 다양한 전문성을 융합, 난국을 돌파하는 문제해결의 달인이자 과감하게 행동하며 가능성을 찾아내는 방법개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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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김승남 지음 / 조은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절판


보이지 않는 힘,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드는 원동력

김승남 회장님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를 읽고


20여 년 전에 멘토링 모임에서 우연한 만남으로 인연이 되는 김승남 회장님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초심으로 중심을 잡고 매사를 덕분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봉사하는 삶을 몸소 보여주시는 모범입니다. 올해 85세라는 믿기지 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외된 곳과 낮은 곳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따듯한 손길 내밀어주시고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십니다. 그저 회장님을 뵐 때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삶 자체만 생각해봐도 숙연해집니다. 고맙습니다책에는 보잘 것 없는 저의 행보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봐 주시면서 칭찬을 아끼시지 않았고, 좋은 성공이라는 책에서는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회장님의 삶의 여정에서 깨달은 깨우침에 비추어 나보다 힘든 사람을 향하는 애정과 관심으로 세상을 따듯하게 바꾸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에너지와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한 때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는 시절이 있었을 때도 거의 매일 손수 따뜻한 음식을 손수 사들고 병문안을 오실 때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저에게는 최고의 인생 멘토이시자 결연한 자세로 난국을 돌파하며 도전을 멈추지 않고 삶을 살아가시는 선구자이십니다. 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가슴에 담아 조금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면서 지난 시절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을 찾아가려고 노력 중에 있습니다.

 

사명(社名)’안에 삶의 목적과 사명(使命)’을 담아내다

 

제가 태어나던 해 김승남 회장님은 육군 간부후보생으로 임관, 21년간 육군에서 대대, 연대, 사단작전참모를 역임하고 5.18 당시 광주지역을 담당했던 179연대장을 마지막으로 전역하셨습니다. 친지에게 서준 재정보증으로 파산한 후 10여 년간 우여곡절을 겪으며 빚을 갚아나가는 힘든 시절을 극복한 아픈 경험도 있습니다. 몇 몇 회사를 다니다 199450대 중반에 임직원 4명과 조은 시스템을 창업, 1996년에는 잡코리아를 창업하기도 했습니다. 숱한 역경을 경력으로 바꿔가면서 조은시스템, 세이프원, 조은INS, 잡코리아, 조은문화재단 대표 및 회장을 역임하고 이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덕분에 얻은 삶의 혜택을 나눔으로 승화시켜, 몸으로 실천하면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며 매사에 감사함을 잊지 않습니다. 회장님은 여러 갈래의 길에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놓아두지 않고 우리를 인도하는 이 보이지 않는 힘”(7)을 믿으며 주어진 길 위에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가시밭길을 걸으면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명을 묵묵히 수행할 뿐입니다. 회장님의 고민은 한결같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배고픈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지금의 현실에서 경쟁으로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랑하는 젊은 청년들과 손주 세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11). 회장님의 책속에는 언제나 시선을 밖으로 향하면서 오늘의 당신이 위치한 현실 속에서 냉철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보이지 않는 힘을 믿으며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역동적으로 살아내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결코 순탄치 않았던 인생의 뒤안길을 회고해보면 숱한 역경과 좌절이 절망을 낳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운명과 팔자를 능가하는 위대한 영도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회장님이 믿고 따르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삶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동인으로 작용해왔습니다. 갈수록 평안한 삶보다 고난과 역경이 일상으로 다가오는 삶 앞에서 좌절하고 낙망한 나머지 삶 자체를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기도와 번민을 담아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은 진솔한 회장님의 마음이 책 곳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희망은 내면에 있는 영혼의 기도, 즉 절망의 부정성을 마주했을 때 눈뜨는 고난의 열정이다”(29).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불안한 사회에 나오는 말이다. 왕의 축복을 의미하는 조은(朝恩)이라는 회사이름도 좋은 일을 통해 헐벗고 힘든 상황에서도 살아내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뜻을 전하고 싶어서 만든 사명(社名)이다. ‘사명(社名)’안에 회장님께서 이루고 싶은 삶의 목적과 사명(使命)’을 염두에 두고 정하신 이름인 듯합니다. 잡코리아를 창립, 성공시킨 후에 1억불의 조건으로 M&A를 성사시키고 640여억을 투자를 받고도 임직원들에게 40여억원을 지급하고 나머지 투자유치금은 대학과 선교단체에 기부하고 오늘날의 조은 문화재단을 설립하는 기금으로 사용하였을 정도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성공한 회장님의 겸손한 자세와 헌신적인 노력은 세상을 바꾸는 선한 영향력의 DNA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고난(苦難) 극복의 경험이 고난이도(高難易度) 지혜를 개발하다다

 

김승남 회장님은 온라인 물류 회사를 설립했다가 망하고 장애인 관련 회사를 설립했지만 뜻과 사명대로 풀리지 않는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힘이 실패한 사업의 역설(逆說)을 다시 힘주어 역설(力說)할 수 있는 성공적 노하우로 다가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희망은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돕는 산파다. 희망 없이는 새 출발도, 혁명도 불가능하다”(59). 한병철 교수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좌절하고 절망할지라도 회장님은 보이지 않는 힘이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 선한 의도와 의지를 갖고 실행하는 사업 여정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게 만드는 산파가 반드시 몸을 던져 기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몇 번의 사업실패로 인해 생기는 절망의 그늘도 희망을 품는 순간 “‘지나간 것안에서도 앞으로 도래할 것을 발견한다……희망의 정신은 지나간 것안에서 앞으로 도래할 것의 흔적”(126)을 찾아 반드시 보이지 않는 힘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사업전략을 가다듬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실패는 나의 잘 못이 아닐 수 있지만 실패하거나 좌절했을 때 일어서지 않는 건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실수가 축적되면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낳는다. 실수가 치명타를 날리기 전에 실수를 통해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경험적 깨달음을 회장님은 무수한 사업 실패경험과 그 때 겪은 좌절과 절망을 기반으로 배우고 익혔습니다.

 

회장님은 군 생활에서도 부당한 징계로 인해 더 이상 승진 길이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과 책임을 밖에서 찾지 않고 안에서 찾은 다음 모든 결과가 당신의 탓으로 생긴 잘 못이라고 해석하는 겸손하고 진솔한 자세와 태도가 몸에 각인되었습니다. 고난이 다가와도 오히려 희망을 갖고 긍정적인 차원에서 해석, ‘고난(苦難)’이야말로 이전보다 더 힘든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고난이도(高難易度)’ 기술을 개발하게 만드는 절호의 찬스라고 해석합니다. 회장님에게 모든 걸림돌은 디딤돌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걸림돌에서 디딤돌로 바꾸는 혜안과 안목이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힘의 구원과 희망을 버팀목 삼사 의연하게 극복하는 삶의 지혜를 몸으로 축적합니다. 회장님은 힘든 경험에 직면할수록 때문에 안 된다는 불평불만보다 덕분에 소중한 성장과 발전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고 역발상으로 난국을 타개하며 어제와 다른 내공으로 세상을 버티고 견뎌내는 힘을 스스로 몸으로 익히셨습니다.

 

무조건 원인이라는 씨앗이 미래의 불확실성이나 불안을 이겨내는 희망이다

 

출신이나 태어난 환경과 조건을 따지면서 안 되는 이유를 찾아 자기를 합리화시키기보다 회장님은 고난의 연속이고 늘 새로운 도전과제가 줄을 이어가도 비주류로 따돌림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뒤집어 당신만의 경력으로 만들어가는 행보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공으로 가는 기차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회장님은 낮은 자세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으셨고, 매사 덕분에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불가능한 상황이 펼쳐지고 인간의 한계로 인해 더 이상 도전이 힘들다고 할지라도 도전해보기도 전에 포기하지 않고 일단 몸을 던져 난국을 돌파하는 방법적 지혜나 혜안을 몸소 익히십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애정 어린 꾸지람과 걱정을 토로하는 점도 우리 사회의 조급한 성과주의에 대한 쓴 소리일 수 있습니다.

 

회장님의 인간관계 철학은 주는 만큼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알파라는 증대인수가 부가되어 돌아온다는 것이다”(84). 소위 give and take라는 철학을 믿고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만 준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세계에서도 무조건 베푸는 사람이 베푼 것 이상으로 나중에 몇 배의 덕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의 지혜에는 씨앗의 법칙이 있다”(90).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먼저 뿌려야 한다. 씨앗이라는 원인도 제공하지 않고 그 씨앗에서 싹이 자라고 줄기와 가지가 뻗어나가면서 마침내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릴 것이라는 꿈을 갖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만들어냅니다. 중요한 점은 결과를 먼저 예상하지 않고 무조건 원인이라는 씨앗을 뿌리면서 미래의 불확실성이나 불안을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씨앗에서 싹이 자라지 않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나 혼자의 힘과 노력만으로 씨앗에서 훌륭한 열매나 성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 혼자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날씨나 기후 조건이 안 맞아서 싹이 아예 자라지 않을 수도 있고, 꽃이 피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보이지 않는 힘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복잡한 인연(因緣)과 연기(緣起)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경이로운 성과나 성취가 발생합니다. 그저 감사할 일입니다.

 

많이 노력(多勞)해서 얻은 배움의 지혜(多學)를 베풀다(多施)

 

()은 직접적이며 연()은 간접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인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목화를 심으면 목화가 피고, 제비꽃을 심으면 제비꽃이 피는 것처럼. 그러나 연은 다르다고 한다. 좋은 땅인가 나쁜 땅인가? 물을 많이 주느냐 적게 주느냐에 따라서 꽃이 활짝 피기도 하고, 시들기도 하며 심지어 아예 피어나지 못 할 수도 있다”(114). 농부가 농사를 아무리 잘 지으려고 노력해도 환경과 여건이 따라주지 않으면 헛수고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보여줄 수 있는 노력은 농사가 잘 되기 위한 극히 일부분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할 뿐입니다. 예를 들면 비가 많이 오면 물꼬를 터주지 않으면 농사는 망칠 수도 있는데, 물꼬만 잘 터준다고 농사가 잘 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적당한 비와 햇빛, 바람과 온도를 맞추는 날씨와 기후가 합작해야 하고, 자연에 살아가는 곤충과 수많은 미생물들이 함께 거들어주는 인연의 끈이 끊어지면 농사는 절대로 잘 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인연의 연결고리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들에 직간접적으로 에너지를 전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회장님의 인간관계 철학은 3()로 요약됩니다. “삼다는 내게 인생의 작은 지표입니다. 일도 많이 하고 꾸준히 노력하고(다노, 多勞·), 항상 배우고(다학. 多學), 뭐든지 줄 수 있는(다시, 多施) 자기 사랑 방정식을 말한다”(93). 다노(多勞·)는 작은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해서 반전을 일으키는 철학입니다. 흔적을 축적해서 목적을 만나면 어느 순간 기적이 일어나는 법칙, 위대한 성취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철학입니다. 다학(多學)은 자만하지 말고 늘 낮은 자세로 배움의 끈을 놓지 말고 익힘을 통해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철학으로 만들으라는 메시지다. 회장님께서 가장 우둔한 사람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자만하는 사람”(216)이라고 하는 까닭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多施)는 말 그대로 많이 베푸는 미덕이다. 회장님은 같이 밥을 먹으면 언제나 밥을 삽니다. ‘박사위의 학위가 밥사인데 밥사를 넘어 매사에 감사하면서 봉사하는 삶을 몸으로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십니다. 한시도 허투루 살아가지 않고 진지함과 치열함의 연료를 기반으로 성실과 진실을 매개로 세상을 바꿔나가고 싶은 소박한 꿈을 잊지 않고 오늘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애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한 평생 배우고 사는 삶,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심지어 악한 사람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반면교사(反面敎師) 의 교훈을 배웁니다. “정말 인생을 바로 배우는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겸손과 자기 심화에서 참된 자기를 키우며 사는 사람”(122)이라고 정의하고 늘 저에게도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보여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겸손이 있다

 

겸손은 회장님에게 세상을 이기는 가장 무서운 힘”(124)이자 최고의 지혜”(124). 겸손과 더불어 회장님에게 배우는 가장 소중한 인생의 미덕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에너지이다”(127). 겸손한 자세로 매사에 감사하며 멈추지 않고 실력을 키우는 와중에 운동 따릅니다. 실력이 운을 부르기도 하고 운이 실력을 부르기도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지만 자세를 낮추고 세상을 배움의 터전으로 생각하면서 덕분에 잘 된다고 생각하며 감사함을 잊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힘과 용기를 건네주려 달려온다는 사실입니다. 회장님은 어둔 시절을 희망을 품고 도전하면서 사막에서도 사업 기회를 포착하며 평생을 보이지 않는 힘을 믿으며 실패를 통해 실력을 구축해오셨습니다. 회장님의 과거 어둔 시절에서 깨달은 소중한 삶의 교훈을 어떻게 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는 깨달음의 원천으로 삼을지를 언제나 고민하십니다. 회장님은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항상 겸손을 지니고 다니며 저처럼 한참 인생 후배에게도 자세를 낮추고 배우려는 겸손함을 잃지 않습니다.

 

유대인 부모가 내 인생은 선인장 같았다. 나는 사막에서 뿌리를 내리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땡볕이 쪼이는 악조건에서 살아남았다. 아침에 맺히는 이슬처럼 이슬방울 몇 방울 빨아들이며 기어코 살아남았다. 그러니 너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냐. 너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나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냈다. 너는 사브라. 선인장 열매다. 그러니 너도 끝까지 살아 남거라. 그리하여 또 다른 열매를 맺어라. 그 열매가 맺어지거든 사브라고 불러 주어라”(192-193). 사브라는 선인장 꽃의 열매로서 유대인이 자신의 자손들에게 의지를 강화시키는 교육적 가르침이자 삶의 지혜로 활용하는 말이다. 회장님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사브라의 지혜를 알려주고 전파하기 위해 봉사활동은 물론 장학 사업을 통해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밝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환경을 탓하기보다 한계에 도전하면서 가능성의 문을 열어가는 패기 넘치는 젊은이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을 회장님의 소중한 미션으로 생각합니다. 안 되는 이유를 찾아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나약한 사람보다 사막의 선인장처럼 악조건 속에서도 되는 방법을 찾아 괴짜 같은 도전을 즐기는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길에 몸소 회장님이 나서는 까닭입니다.

 

도전은 한계를 시험하고 성장을 촉진하는 버팀목이다

 

도전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개인적인 성장을 촉진하며 삶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과정”(207)이자 우리가 세상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위치를 찾으며, 가치 있는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부분을 보완해가며 세상의 변화를 즐기는 행동”(207)으로 정의하는 회장님의 도전관에서 회장님의 삶에 대한 도전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도전을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말하는 마지막 단어(Final Vocabulary)입니다. 마지막 단어는 내 목숨에 칼이 들어와도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신념어입니다. 마지막 단어는 평상시에는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잠자고 있다가 결정적인 딜레마 상황에 빠져있을 때 결단과 결행 일보 직전에 눈앞에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간디가 아프리카 한 지역에서 1등석 기차를 탔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면서 부유한 변호사의 길을 포기하고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기로 인생의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결정적인 사건 후에 생긴 결연한 방향 전환은 간디에게 새로운 신념 어를 잉태합니다. 마지막 단어는 가장 나다운 색깔을 담고 있는 내 삶의 등대이자 나침반입니다. 가던 길을 잃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고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를 고심하게 만들어주는 내 삶의 가치판단 기준이자 행동규범이기도 합니다. 도전은 제 능력의 한계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능력의 심화와 확장 가능성을 알려주는 성장 발판이기도 합니다. 도전은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버팀목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이룬 작은 성취라도 남을 위해 돌려줄 수 있는 삶이라면 좋은 성공”(291)이라고 생각하는 회장님의 성공철학은 평생을 매사에 감사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게 만든 원동력입니다. 기업 활동을 통해 창출한 수익도 다 덕분에 번 돈이니 국가와 사회를 위해 돌려줘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만든 까닭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은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기쁨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라.” 니체가 한 말처럼 회장님은 하루를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다음 위해 당신이 해야 될 소중한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자문하고 끊임없이 더 좋은 대안을 찾아 몸으로 실천하고 성찰하는 삶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겉으로 보이는 난관과 시련만 보지 말고 그것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믿고 그것이 결국 나를 보이는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이 회장님이 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지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추천사에서도 써 드렸듯이 보이지 않는 힘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을 때 디딤돌로 바꿔줄 뿐만 아니라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들게 도와주고, 과감한 실천과 실패속에서도 색다른 실력을 쌓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동인입니이다. 사건과 사고(事故)’가 연이어 일어나도 사고(思考)’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은인도 보이지 않는 힘이고, 불확실한 미래와 한계에 도전하면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심장 뛰는 미래를 맞이하는 자세도 보이지 않는 힘이 주는 선물입니다. 오솔길에서도 활주로를 개척할 수 있는 혜안과 안목을 주는 배움도 보이지 않는 힘 덕분이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나의 성공으로 맛본 성취결과를 나보다 어려운 곳에 기꺼이 헌신하고 봉사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도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에 충실하며, 삶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라!

 

평생을 인간됨의 자세에서 부단히 미덕을 쌓고 지혜를 만들어 지금의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은 세상으로 바꾸고 싶은 일념 하나로 살아내는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인생 좌우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입니다. 승리에 도취하지 말고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금언입니다. 둘째는 현재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과거를 후회한다고 미래를 걱정한다고 바뀌지 않으니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선물처럼 받고 의미심장한 순간으로 만들어라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입니다. 너의 운명을 거부하거나 그냥 수용하지도 말고 네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재창조하라는 말입니다. 세 가지 인생 좌우명을 몸소 실천하고 봉사하는 삶의 전형으로 살아오신 김승남 회장님의 스토리는 읽을수록 빠져들고 생각할수록 감동이 넘치는 삶의 지침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러 번 읽고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삶의 등불로 삼아야 할 경전이자 가르침의 경구로 삼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꽃 없이 열매만 열린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꽃받침과 꽃자루가 주머니 모양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꽃들을 안으로 감추는 것이다. 무화과 열매를 잘라보면 그 안에서 '작은 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꽃을 감추니까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이고, 열매가 열렸으니, 어쩔 수 없이 '꽃 없는 과일 무화과'로 이름 붙여졌다.” 제가 쓴 끈기보다 끊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실은 너무 작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서 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꽃 없이 열매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눈으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보이지 않는 재능의 꽃을 숨기고 살다가 보이지 않는 힘을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꽃을 피울 때가 있습니다. 언제 피울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보이지 않는 힘이 내면에 자라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깥의 힘이 언제 나에게 다가올지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카르페 디엠(carpe diem),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가슴에 품고 호랑이처럼 앞을 내다보고 소처럼 우직하게 꿈을 향해 걸어가는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철학을 믿으며 오늘도 한 걸음 내 딛을 뿐입니다. 오늘의 평범한 보행이 내일의 비범한 행보로 바꾸는 보이지 않는 힘을 믿습니다.

 

회장님은 저에게도 베풀고 나누며 사랑하는 삶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50권 출간기념회를 2009년에 했을 때에도 축사를 통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셨고, 작년에 드디어 출간한 코나투스 100권 출간기념회에도 오셔서 직접 축사도 해주시고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시간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기꺼이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늘 회장님에게 빚을 지고 살면서 보답하는 방법을 모색 중에 있습니다. 회장님께 받은 은혜를 저보다 힘든 삶을 살아내기 위해 버티고 견뎌내는 사람들을 위해 보잘 것 없는 저의 능력과 에너지를 기꺼이 사용하면서 회장님이 보여주시는 선한 영향력을 뒤따라가면서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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