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의 몰락 -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
모리스 버만 지음, 심현식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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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Berman은 소수의 풍요와 다수의 불행을 야기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사회보장제도의 약화, 소비주의 문화의 득세로 인한 지적 능력의 상실, 지식과 정신적 죽음들을 예로 들어 미국문화의 몰락을 얘기하고 있다. 기업문화, 소비문화의 확대와 지배가 미국사회를 활기 넘치는 것처럼 재현(representation)하고 있으나, 결국은 교양문화의 쇠퇴와 몰락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미국이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세계화, 특히 한국처럼 압축 경제성장과 천민 자본주의의 확장이 급격했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례로 들고 있는 것들은 미국 사회와 문화이지만, 한국사회와 문화의 그것이기도 하다. 몰락의 세계화인가?

Berman은 로마제국의 몰락과 미국을 운명을 연계지어 설명하면서, 중세의 수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사적 해법을 그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중세에 수도사들이 고대문화의 유산을 유지·계승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도 현대적 수도사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보전했던 문화와 지식들이 유럽 르네상스(문화부흥)의 시금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적 수도사? Berman이 말하는 수도사는 기업들이 지배하는 소비주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과정과 혼란을 거부한다. 이들은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고, 상업주의 광고의 허와 진실의 차이를 알고 있다. 문명의 핵심에 숨어 있는 계몽주의적인 건전한 가치를 중시한다. 이들은 사사로운 이득에 구애받지 않는 진리의 탐구, 예술의 함양, 비판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철저한 고수를 좌우명으로 한다. 수도사적 해법의 핵심 요소는 전통적인 기술, 남에 대한 배려, 성실성, 학문의 정통성 보존, 비판적인 사고, 계몽주의 지적 전통들인데, 이 모든 것들에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면 바로 싸구려 속물주의, 소비주의 문화, 이익 추구, 권력투쟁, 명성에 대한 동경, 자신을 드러내기 들을 과감히 배척하는 태도라고 한다.

물론 Berman이 제시하는 수도사적 해법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결국 그것의 지향점이 사회나 구조가 아닌, 개인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에 드는 의문이겠지만 말이다. 개인들 삶의 지향점을 변화시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 오래 걸리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좀 멀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Berman는 '그대의 삶이 말하게 하라'는 격언으로 글을 마치고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것은 우리들의 삶,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문득 백범선생이 유필로 썼다던, 서산대사의 선시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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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똘레랑스인가
필리프 사시에 지음, 홍세화 옮김 / 상형문자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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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똘레랑스였군>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으며, 똘레랑스를 처음 접했다. 그 태도 혹은 관점, 아니면 정신에 크게 매력을 느꼈다. 다시 온전히 한국사회의 구성원이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똘레랑스를 이야기 한다. 똘레랑스란 정확하게 어떻게 정의되고,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을까? 왜 프랑스 사람들은 그 정신에 입각해서 생활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까?

홍세화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는 그러한 의문에 답해주는 책이다. 똘레랑스는 용인, 관용, 중용들의 뜻으로 간단하게 풀이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유럽에서 5세기 동안의 토론과정을 거쳤고, 여전히 논의를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유럽에서 똘레랑스가 어떻게 정착되어 왔는가를 '질서의 이름으로', '유용성을 위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똘레랑스는 종교적 의미, 종교적 논의로 시작된 개념이었으나, 역사 속에서 똘레랑스는 그 한계를 넘어서서 보편적인 의미로 확장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다소 난해하고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저자 역시 '서로 다른 논증의 이와 같은 뒤얽힘, 즉 내밀한 부조화가 바로 똘레랑스사상을 더욱 부각시키고 또 이 사상에 힘이 되는 것이다. … 똘레랑스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이성은 다만 그 부조화, 그 충돌, 그 심오한 결합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241).'고 이야기하고 있다.

<똘레랑스의 법칙>
저자는 똘레랑스를 '인류애, 그리고 인간의 영원불멸한 권리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며, 앵똘레랑스로 말하자면 잔인성과 박해와 같은 것(33)'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본 똘레랑스의 법칙이다.
-­남이 나에게 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명백한 진리 앞에 굴복하는 마음을 가져라!
-­인간은 모두 다른 정신 유형을 가진 다양한 존재임을 자각하라!
­-공(公)적인 것과 사(私)적인 것을 구분하고, 공익에 관련된 것은 양보하지 말라!
­-토론과 논쟁에 임할 때는 진리를 무기로 삼아라!
-­자기중심주의, 1인칭의 특권을 과감하게 버려라!
-­똘레랑스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단호히 행동하라!

<그를 '똘레랑스'하지 않은 사회에, '똘레랑스'를 선보이다>
그런데 왜 유럽사회에서 그토록 오래 논쟁과 토론 속에 있었던 '그 개념'을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수입하지 않았을가? 왜, 그것이 홍세화씨를 통해 한국사회에 소개될 수밖에 없었을까? 프랑스에 유학한 지식인이 적지 않고, 지식수입에 있어서 만큼은 '할 역할'은 하고 있는 국내의 지식인들이 왜 그 개념을 유통시키지 않았단 말인가? 바로 이런 의문이 '똘레랑스' 그 자체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똘레랑스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고 행동이기에, 그것이 습속화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 사회가 문화와 생활 속에 용해시켜, 개개인의 몸으로 실천되고 체현되지 않는다면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똘레랑스 개념이 다소 모호해 보이는 것, '딱' 머리 속에 구체적인 그림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결국 똘레랑스가 '이해'가 아닌 '실천'이기 때문 아닐까? 몇 년 동안 그 사회에 머문다고, 책으로 이해한다고 그것이 '내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까지 하고 나니, 홍세화씨가 사회활동과 실천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이 마음으로 들어온다. 진보적이라고 믿어지는 사람들, 지식인들끼리, 전혀 똘레랑스하지 못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홍세화, 한국사회가 그에게 똘레랑스하지 않은 그 20여 년의 시간, 세월 속에서 그는 진정한 똘레랑스를 체득하고 온 것이다.

그가 선보인, 그가 직접 보여주는 똘레랑스가 한국사회엔 언제쯤 생활로, 일상으로 체현될까? '인간성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똘레랑스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정신(238)'이라고 한다. 우리는 언제쯤 '앵똘레랑'들의 선동에서 자유로운, 앵똘레랑에 저항할 수 있는 '똘레랑'의 개인들이 많은 사회가 될까? 그것이 한국사회의 진보를 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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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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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미덕>일단 이 책의 장점은 번역서 같지 않음에 있다.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 매끄럽지 못한 전후연결이 일반적인 번역서의 한계라고 본다. 그런데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은 일단 그런 단점을 빗겨나 있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한국인이기에 번역가(그것도 같은 전공자)와 충분한 토론과 논의의 과정을 거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이런 일차적인 장점 외에도 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 한국사회의 노동계급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구체적으로 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라는 다소 딱딱하고 재미없을 주제를 생각보다 재미있게 해 준 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많은 자료들과 문헌들의 분석, 그리고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노동자, 노동운동가들과 직접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데 있다는 생각이다. 저자가 투자했던 10여 년의 열정과 애정이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것을 만나는 건, 독자에겐 더할 수 없는 행운이며, 기쁜 일이다.

<40여 년의 기록>이 책은 한국산업화과정, 그 40여 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경제발전보다는 그 과정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주체여야 하는) 노동자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노동자들은 유럽의 사회문화적 풍토와 역사적 경험과는 다르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은 장인문화와 프랑스 혁명의 유산, 게다가 정치제도와 정당의 역할까지 더해서 노동계급운동이 조직화되기에 적합한 토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그런 문화적·정치적 토양이 부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공순이/공돌이'라는 문화적 경멸과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라는 타의적 정체성이 그들을 지배한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타의적이고 부정적인 정체성을 극복하였는가? 이 책은 국가안보와 경제우선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덮씌워진 비인간적 대우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 진보적인 교회조직과 여성노동자들이 있었음을, 노동운동을 하던 대학생들과 운동가들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민주주의, 민중, 사회정의를 자각하게 되고,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제 노동자들의 연대가 가능해졌으며, 1987년의 노동투쟁은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이제 다시>이제 우리는 공순이/공돌이를 마음으로부터 지워내야 할 것이다. '박정희'를 경제발전의 견인차, 위대한 지도자로 추켜세우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회. 하지만 우리의 오늘은 그들의 땀과 눈물, 노고와 희생 그리고 투쟁 위에, 그것들을 밟고 서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들이 얼마나 지성적이고 진실하며 존엄한 사람들인가 그리고 한국의 공장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이들,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했는가를(12)' 인정해야 할 것이다.지금, 노동계급은 다시 기로에 서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노동자들의 정체성에, 그들의 계급연대에 미세한 틈을 만들고, 균열을 획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10여 년 후, 혹은 더 세월이 흐른 다음, 오늘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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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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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온전히(?) 귀국하고 내놓은 책이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다. 악역? 그가 맡은 악역은 어떤 역할인가? 그는 말한다. 프랑스사회라는 거울로 한국사회를 봐야 하는 것. 그리고 23년 전, 그 과거의 기억과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봐야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맡겨진 악역이라고.왜 그것이 악역인가? 그의 책들(『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도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이 모두 프랑스사회라는 거울로 한국사회를 비추고 있다. 이 점이 한국사람들에게 때로 반감을 사거나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프랑스사회가 나에게 고마움과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비판 대상이 되지 않는 까닭은 우선 그것이 남들의 사회이기 때문(18)'이라고 말이다. 그는 프랑스사회라는 거울로 우리자신을, 한국사회를 돌아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과거의 기억과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보고 있는가? 별로 달라지는 않은 한국사회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기도 하거니와, 또 한편 '인간적 가치와 올바른 가치관은 오늘날 사람들의 일상에 별 영향을 주지 않(274)'음에 대해 인간적 가치를 끌어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수고를 기꺼이 하고자 함이리라. 프랑스사회라는 거울, 그리고 과거를 들여다보는 그의 거울은 한국사회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담고 있다.

그의 글은 언제나 한결같다. 한결같음이 미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루함이 되기도 한다. 그의 글에 대한 지루함? 특히 조중동, 조선일보 문제­결국 이 문제는 우리사회의 변화와 진보에 관한 것이지만­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아는 사람은 너무나 많이 알아서, 이제 식상하기까지 한 그 조중동이 말이다. 나 역시 조중동 문제에 이젠 식상함과 짜증스러움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처럼 그 문제를 '이제' 파악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냥 짜증과 식상함'만'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알 사람은 다 알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고, 모르는 사람은 그냥 모르는 채 남아 있다. 그는 바로 이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해준다. '자신을 규정하지 않으면서 남을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타성은 '참여하지 않으면서 비판, 평가를 즐기는 타성'과 만난다. 스스로 정당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정치현상을 비판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255)'는 그의 말은 옳다. 나를 규정하지 않으며, 세상은 원래 그런 것으로 쉽게 단정하거나, 애써 체념해 버린다. 의식은 바뀌었을지 모르나, 몸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몸을 던지지 않고, 머리로만 판단하고 비판하는 셈이다.
그의 말처럼, 주장처럼 사회변화와 진보에 대한 모색은 당연히 '자신의 변화' 즉 '자신의 성숙'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덫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선 자기성찰이 일상적으로 필요(278)'하며,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은 우리의 그러한 학습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그러한 학습과 토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 기꺼이 악역을 맡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그들이 연대하기를, '연대를 사는 즐거움'을 진정 알게 되기를 바란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반성과 성찰을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한국사회의 개선과 진보'에 동참하기를 노래하고 있다.그가 악역으로 부르는 노래는 우리사회를 밝히는 노래이며, '가장 아름다운 노래'의 여운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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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과 그 비판자들
앤서니 기든스 지음, 박찬욱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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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과 그 비판자들」은 「제3의 길」의 비판에 대한 Giddens 자신의 대응이다. Giddens의 제3의 길은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비난받았다. 우파에게는 여전히 '복지국가의 환상'을 버리는 못하는 황당한 정치이념으로, 좌파에게는 '신자유주의에의 투항'이라는 의심을 자아낸 것이다. Giddens는 우파의 비판에는 신경쓰지 않지만, 좌파 내부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대응하고 있다.

Giddens는 제3의 길이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긴 하나, 세계화와 정보혁명에의 대응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세계화와 정보혁명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위해 전통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서 내세우는 이념과 가치-평등, 연대, 정의-는 그대로 계승하면서, 그 자체의 모순 타파를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Giddens는 시장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불평등과 환경파괴들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한다. 국가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과 국가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며, 양자의 갈등을 시민사회가 중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성장과 유지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Giddens 이론의 토양이 영국(유럽)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복지와 정의의 개념이 부족한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시켜 생각하기엔 다소 문제가 있는 듯 하다. 더구나 '시장경제와 생산적 복지, 즉 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을 표방했던 국민의 정부의 신자유주의를 경험한 우리사회엔 더욱 그러하다. 예상과는 달리 국민의 정부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부와 권력의 불평등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물론 복지와 정의에 대한 사회적 토양부족과 지식인들의 역할 부족도 큰 역할을 했다.

Giddens처럼 자신이 구축한 정치철학을 국가의 이정표로 제시할 수 있는 학자가 없는 우리사회에서 그의 저서는 그것만으로 많은 시사를 주는 듯 하다. 어찌되었던 Giddens를 가진 영국이나 Blair총리가, 한국이나 한국의 정치지도자들 보다 풍요로움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의「제3의 길과 그 비판자들」은 새로운 이론이나 방향이 제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방향은 이미 「제3의 길」을 비롯한 다른 저서에 제시되었다. 단지, 지식인과 정치의 관계,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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