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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평점 :
<이 책의 미덕>일단 이 책의 장점은 번역서 같지 않음에 있다.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 매끄럽지 못한 전후연결이 일반적인 번역서의 한계라고 본다. 그런데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은 일단 그런 단점을 빗겨나 있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한국인이기에 번역가(그것도 같은 전공자)와 충분한 토론과 논의의 과정을 거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이런 일차적인 장점 외에도 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 한국사회의 노동계급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구체적으로 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라는 다소 딱딱하고 재미없을 주제를 생각보다 재미있게 해 준 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많은 자료들과 문헌들의 분석, 그리고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노동자, 노동운동가들과 직접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데 있다는 생각이다. 저자가 투자했던 10여 년의 열정과 애정이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것을 만나는 건, 독자에겐 더할 수 없는 행운이며, 기쁜 일이다.
<40여 년의 기록>이 책은 한국산업화과정, 그 40여 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경제발전보다는 그 과정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주체여야 하는) 노동자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노동자들은 유럽의 사회문화적 풍토와 역사적 경험과는 다르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은 장인문화와 프랑스 혁명의 유산, 게다가 정치제도와 정당의 역할까지 더해서 노동계급운동이 조직화되기에 적합한 토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그런 문화적·정치적 토양이 부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공순이/공돌이'라는 문화적 경멸과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라는 타의적 정체성이 그들을 지배한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타의적이고 부정적인 정체성을 극복하였는가? 이 책은 국가안보와 경제우선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덮씌워진 비인간적 대우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 진보적인 교회조직과 여성노동자들이 있었음을, 노동운동을 하던 대학생들과 운동가들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민주주의, 민중, 사회정의를 자각하게 되고,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제 노동자들의 연대가 가능해졌으며, 1987년의 노동투쟁은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이제 다시>이제 우리는 공순이/공돌이를 마음으로부터 지워내야 할 것이다. '박정희'를 경제발전의 견인차, 위대한 지도자로 추켜세우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회. 하지만 우리의 오늘은 그들의 땀과 눈물, 노고와 희생 그리고 투쟁 위에, 그것들을 밟고 서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들이 얼마나 지성적이고 진실하며 존엄한 사람들인가 그리고 한국의 공장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이들,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했는가를(12)' 인정해야 할 것이다.지금, 노동계급은 다시 기로에 서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노동자들의 정체성에, 그들의 계급연대에 미세한 틈을 만들고, 균열을 획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10여 년 후, 혹은 더 세월이 흐른 다음, 오늘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