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여성의 섬세한 내면, 성폭력의 경험을 다룬 책으로 정의한다면 의미가 축소될 것이다. 해설의 표현처럼 글 속에서 복잡하게 일렁이는 감정들은 납작하게 정리되어 버린다. 나름대로 분류를 하자면 여성의 평범하면서 복잡 미묘한 관계를 다룬 「보내는 이」, 「여기 우리 마주」. ‘폭력 생존기’ 3부작이라 불리는 「눈으로 만든 사람」, 「나와 내담자」, 「내게 내가 나일 그때」. 토속적이거나 불교적인 분위기가 깔린 「운내」, 「美山」, 「11월행」, 「점등」이 있다. 나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소녀들의 관계를 그린 「운내」와 광화문 점등행사를 배경으로 종회의 입사 동기들이 등장하는 한 「점등」이 좋았다. 뚜렷한 서사나 비범한 주인공이 없어도 디테일한 설정들과 탄탄한 문장만으로도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었다. 비록 책 한 권이지만 최근 한국문학의 매력과 탄탄한 작품성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양자오의 독법은 작가가 활동하던 시기의 문제의식에 접근하는 것이다. 오로지 현재의 관점에서 독해할 때에는 작가의 의도를 오해,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학을 전공한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양자오는 19세기 산업혁명의 시기, 철학자의 계보를 잇는 학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조명한다. 그가 바라본 마르크스는 혁명가라기보다 세심한 지식인이자 철학자다. 공산당 선언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번외에 가깝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입장에 서서 노동가치, 소외를 개념으로 한 새로운 경제학을 창시했다. 그의 본질적인 문제제기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실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고전으로서 생명력을 갖는다.
대만학자로서의 정체성으로 자본론을 읽어내는 부분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