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도 되는 날입니다 시인의일요일시집 44
신혜정 지음 / 시인의 일요일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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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정 시인의 『가만히 있어도 되는 날입니다』는 고통과 상실의 서사를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담아낸 시집입니다. 시인은 『검은 시절』에서 '남겨진 자를 위한 애도'와 '지워지는 존재'의 비극을 다루며, 사회적 폭력과 무관심 속에서 개인이 겪는 아픔을 조명합니다. 특히 "이야기가 청자들의 마음을 슬픔으로 물들이는 동안/그이가 지워지고 만다"는 구절은, 죽은 자가 아닌 살아남은 자의 감정에만 집중하는 사회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꼬집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 시집의 특별한 점은 고통을 직시하면서도, 그 고통이 단순한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존재의 변이와 진화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아가미』에서 "생에서 생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물에서 물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숨에서 숨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라고 질문하며, 인간의 조건을 벗어나려는 존재의 근원적인 욕망을 탐구합니다. 이는 폐를 터뜨려 꽃처럼 피어나고, 수중생물이 되어 물속으로 들어가는 등, 생물학적인 퇴행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역진화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변이는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재구성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시집은 인간의 폭력과 불의에 대한 깊은 사색을 담고 있습니다. 『4』나 『파워게임』 같은 시들은 제주 4·3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연상시키며, 무고한 희생자와 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합니다. 시인은 "무엇을 피하는지도 모른 채 달아나야 했던 아이가 남긴/가쁜 숨소리 같은 파도"를 통해 이름 없는 희생자들의 아픔을 상기시키며, 독자들에게 기억의 윤리를 촉구합니다. 이러한 시들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 현재에도 이어지는 폭력의 양상을 성찰하게 합니다.

어쩌다 발을 헛디뎌 나는 넘어졌나
낙상한 곳에 위치한 차원의 굴곡
골절 사이 아득한 간극 - P18

당신은 떠났고, 나는 감정의 일부를 상실했다
고독 앞에서는 누구나 취약해질 것
갓난아기처럼 투명해질 것 - P27

슬픔이라고 외친다 가슴을 치며 울 수도 없는 손이 없는 자여 통곡할 입이 없는 자여 그리고 너 눈이 없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들이여 - P39

아득하거나
너무 가까움이
문득 아찔하다는 생각
순간이
곧 영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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