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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의 도시 ㅣ 시인의일요일시집 41
성은주 지음 / 시인의 일요일 / 2025년 12월
평점 :
성은주 시인의 『코끝의 도시』는 현대 도시인의 삶을 꿰뚫는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줍니다. 시집 전반에 흐르는 '관계'에 대한 탐구는 익명성과 단절이 지배하는 도시 풍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시인은 고립된 개인이 서로에게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가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틈새에서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을 섬세하게 찾아냅니다. 특히 "꾹 눌러놓은 빨래집게 같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도시인의 심리적 방어 기제를 탁월하게 은유하며, 동시에 그 속에서 타인의 온기를 갈구하는 내면을 절묘하게 포착합니다.
시인의 시선은 유용성을 잃고 버려진 것들, 혹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존재들에게 향합니다. "조약돌, 조개껍데기, 병 조각, 낚싯줄"과 같이 평범하거나 소외된 존재들에게 '관계'의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독자에게 잔잔한 울림을 선사합니다. 이는 시인이 단순히 대상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감싸며 붙잡는" 윤리적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입니다. 『코끝의 도시』는 바쁜 도시의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주변의 작은 존재들에게 다시 한번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따뜻한 공감의 언어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쓰는 일은 다시 사는 일 그는 오늘도 살아보겠다고 먹물을 터뜨려 침묵을 펼친다 검게 번지는 세상을 더듬다가 움켜쥐는 대신 감싸며 붙잡는다 - P12
빽빽한 이야기를 품은 연못을 펼치면 붓꽃은 첫 문장이 되어 보랏빛 문단을 이루고 오리 떼는 쉼표가 되어 물결의 행간을 가른다 - P20
나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 당연한 건 없는데 당연하다고 여긴 죄까지 더해 받은 벌 여닫던 사물함 속 어둠이 짙어질수록 보이지 않았던 나의 어둠이 이제야 보인다 - P29
가고 없는 엄마의 눈빛처럼 흔들린다 자라는 마음을 오래 지켜보다가 엄마라는 호칭이 생긴다 - P39
다정함은 기대하지 않을게요 식물은 괴롭히지 마요 담장 너머 석류 가지가 넘어왔다고 그렇게 자꾸 똑똑 부러뜨릴 건가요 석류 알 같은 아이를 원하던 일요일에 붉은 꽃 대신 흰 꽃이 쏟아졌죠 그때 알았어요 식물도 신경증에 걸린다는 걸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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