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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표지가 나를 더 사로잡았던 책. 언젠가 미술관련책에서 본 적이 있던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에서 우리의 눈길 혹은 그림에 대한 해석은 귀여운 왕녀 혹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화가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나 이 책의 표지는 우리가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혹은 진짜 못생겼네 라고 설핏 눈길을 던져줬던 한 여성에 조명을 둔다.
#1
인간은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합니다. 신께선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하는 인간은 결코 모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세상 모든 여자들과 달리 자신의 어두운 면만을 내보이며 돌고 있는 ‘달’입니다. 스스로를 돌려 밝은 면을 내보이고 싶어도...돌지마, 돌면 더 이상해...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달인 것입니다. 감춰진 스스로의 뒷면에 어떤 교양과 노력을 쌓아둔다 해도...눈에 보이지 않는 달인 것입니다. 우주의 어둠에 묻힌 채 누구도 와주거나 발견하지 못할...붙잡아주는 인력이 없는데도 그저 갈 곳이 없어 궤도를 돌고 있던 달이었습니다. 그곳은 춥고, 어두웠습니다. (283p)
이처럼 소설 속의 여인은 자신을 어두운 면만을 내보이며 돌고 있는 달이라 칭한다.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그녀에게 명명되었던 지독한 별명들, 별명이 늘어날 때마다 커진 어둠의 영역. 그녀는 초경의 순간, 벌거벗은 몸으로 거울을 보며 기쁘거나 놀랍거나 불쾌하거나...일반적인 여성들이 느끼는 여타의 감정이 아닌 ‘회의’를 느낀다.
외모 때문에 수많은 차별과 질시/모욕을 당하며 살아온 그녀의 진행형 상처에 한 남자가 다가온다.
#2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15p)
더없이 희생을 하면서도 그래서 늘 어머니는 숨거나, 가려진 느낌이었다. 아니 언제나 아버지에게 미안해한다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었다.
인간의 외면은 손바닥만큼 작은 것인데, 왜 모든 인간은 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부분을 더듬고 또 더듬는 걸까?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앞에서 압도되고, 코끼리에 짓밟힌 듯 평생을 사는 걸까?
무명배우였던 아버지, 갑자기 유명해진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크고 못생겼던 ‘나’의 어머니. 그런 스무 살의 ‘나’는 연민 때문인지 사랑때문인지 모르게 ‘그녀’가 눈에 밟힌다.
#3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번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 해.
그런 그에게 충고를 해 주는 또 한 명의 등장인물 요한은 아름답지만 백화점회장의 첩인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회의 편견과 냉대 속에서 마음을 닫은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4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영웅을 필요로 한다. 잘 좀 살아, 피리를 불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스타를 내세운다. 좀 예뻐져 봐, 피리를 불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피리를 불어주세요, 더 멋지게...피리를 불어주세요, 더 예쁘게..쫓고 쫓기는 경쟁도 그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하멜른의 어떤 쥐들도 피리 부는 자를 앞서 뛰진 못했지-큰 쥐, 작은 쥐, 홀쭉한 쥐, 뚱뚱한 쥐, 근엄하게 터벅터벅 걷는 늘은 쥐, 명랑하게 깡충깡충 뛰는 어린 쥐. 가족끼리 열 마리씩, 스무마리씩 쥐란 쥐는 죄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쫓아갔어. 그러고는 깊디깊은 베저 강에 빠져버렸지.
이렇게 마음에 상처 하나씩을 달고 있는 세 사람의 사는 이야기와 외모지상주의에 젖어있는,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해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지적을 작가는 사랑이야기에 잔잔하게 녹여내고 있다.
결말의 반전 역시 이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
#5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228p)
“내가 간직한 추억이란 이름의 상자는 언제나 어김없이 그날 밤의 헤어짐을 끝으로 굳게 뚜껑이 닫힌다. 더는 열 수 없는 상자가 되는 것이고, 열어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상자가 되는 것이다. 그녀가 준 LP를...나는 그날 밤 잃어버렸다. 그녀를 잃은 것도, 하물며 나 자신의 삶을 잃은 것도 그날 밤의 일이었다(347p)
어쩐지 한 시절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눈은 모든 것을 지우고, 혹은 썩어 사라질 모든 것을 보존시키고...잠시나마, 그래서 고스란히 흩어진 모두의 가슴속에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눈은 그쳤다. 파헤친다 한들 낙엽의 전부를 되찾지 못하듯이, 그 누구도 기억의 전부를 되찾지는 못한다.
어둠 속의 세상은 조문이 그친 장례식장처럼 공허한 느낌이었다.
두꺼운 책이라 후다닥 읽어내려가고 싶었지만,
문장이 좋아서 페이지를 쉽사리 넘겨내려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