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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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라 마르’라네!

산티아고 노인이 언제부턴가 내게 자꾸 말을 걸어왔다. 반대일 수도 있다. 언제부턴가 내가 기억 속에 있는 이 노인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중년이라는 이름을 내 스스로에게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나는 이 노인에게 뭔가 답을 구했다. 무엇에 대한 답이었을까? 내내 궁금하던 차에 딸아이 학교에서 가족 독후감 쓰기 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기회에 답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티아고 노인은 가난하다. 그의 오두막에는 침대, 테이블, 의자가 전부다. 그나마 그의 침대는 스프링 위에 신문지를 덮어야 하는 처지이니 참으로 딱한 형편이다. 먹을 것도 소년에게 늘 도움을 받는다. 그런데 왜 그는 불쌍해 보이지 않을까?

산티아고 노인은 외롭다. 그의 아내는 두 장의 채색된 그림을 남기고 죽었다. 그가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 소년 역시 이제는 그와 함께 배를 탈 수 없다. 테라스에 앉아도 그에게 말을 건네는 동료 어부가 없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물고기와 사투를 버릴 때도 소년의 도움을 순간순간 바랄 때도 그는 혼자였다. 그런데 왜 그에게선 쓸쓸함이 묻어나지 않을까?

산티아고 노인은 고집스럽다. 팔씨름은 정말 대단했다. 일요일아침에 시작하여 월요일아침까지 팔씨름을 했단다. 심판들이 교대를 하고 내기를 건 사람들이 무승부를 제안했지만 결국 승부를 냈다. 그는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도 멀고 깊은 곳만을 선택했다.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날이 84일 씩 이어져도 그는 대충 아무 거나 잡지 않았다. 참 현실감각이 없는 노인이다. 그런데 난 왜 이 산티아고 노인이 부럽기까지 한 걸까?

어느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년이 됐다. 하루도 빠짐없이 바다로 나간 노인처럼 나도 날마다 눈을 뜨고 무언가를 향해 열심히 노를 저은 것 같다. 근데 남은 건 노인이 모래사장에 놓아둔 물고기의 백골처럼 아무것도 없다. 많이 쓸쓸하고, 불쌍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처지의 산티아고 노인이 다시 만나고 싶었나 보다.

중고등학교 시절이리라. <노인과 바다>와 첫 대면을 한 것은 아주 작은 문고판이었다. 글씨도 엄청 작고 줄 간도 좁아서 읽기가 만만치 않았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변변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먹은 거라고는 아침에 마신 커피가 전부인 노인이 목숨을 건 사투를 버리는 장면은 깨알같이 작은 글자를 읽는 나에게도 사투를 요구했다. 간신히 읽고 났더니 물고기의 살점은 느닷없이 나타난 상어에게 다 빼앗기고 참 허무한 내용이었다. 그 시절에 나는 그 정도로 산티아고 노인을 이해했다. 최선을 다한 뒤에 휴식을 취하는 노인 정도로. 그 때는 ‘사자의 꿈’이나 ‘신념’이라는 단어를 눈여겨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산티아고 노인처럼 가끔 손가락이 뻣뻣하다고 느끼는 나이가 되어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에서 나는 ‘꿈’과 ‘신념’을 만났다. 이번에 읽은 문예출판사 <노인과 바다>의 뒷면에는 ‘인간 정신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불후의 명작!’이라는 문구가 있다. 내 생각과 같은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산티아고 노인에게서 불굴의 의지를 봤다. 물고기와 벌이는 치열한 싸움, 마치 동반자처럼 물고기와 함께 귀향하다 만나는 상어 떼와의 전쟁, 최후에 남은 것은 물고기의 백골 그러나 산티아고 노인은 또 ‘사자의 꿈’을 꿨다. 고생 끝에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지만 다시 꿈을 꾸는 그는 불굴의 의지를 가졌다.

산티아고는 바다를 생각할 적마다, ‘라 마르(la mar)'라는 말을 떠올렸다. 노

인은 한 번도 바다를 투쟁의 상대나 작업장, 혹은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바다는 큰 은혜를 주기도 하며, 모든 걸 간직하는 그 무엇으로 여

겼다. 노인의 바다는 내게 삶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노인이 아닌 다른 어

부들처럼 때에 따라 ’라 마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엘 마르(el mar)라고 부르

기도 했다. 바다를 ‘엘 마르’라고 부르는 이들은 바다를 사랑하기 보다는 바

다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나도 그들 축에 든다. 삶을 사랑

하기 보다는 삶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만 할 때 내게 삶은 투쟁의 대

상이고, 단순한 작업장일 뿐이었고, 심지어는 적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산티아고 노인이 앙상한 뼈만을 실코 돌아와서도 평온한 잠을 잘 수 있었

던 것은 바다를 ‘라 마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프리카의 사

자들처럼 모든 것을 간직한 바다에서 충만한 은혜를 느꼈다. 삶의 바다를 대

하는 내 눈이, 내 마음이 바뀔 필요가 있다. 삶이 은혜의 ‘라 마르’임을 안다

면 비록 지금 내 앞에 놓인 것이 상어에게 다 빼앗긴 앙상한 그 무엇일 뿐

이고, 지칠 대로 지쳤어도 다시 ‘사자의 꿈’을 꿀 수 있다. 산티아고 노인이

가진 신념이란 어쩌면 바다를 ‘라 마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

을 ‘라 마르’로 대할 때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 될 것

이다. 가난해도 불쌍해 보이지 않는 산티아고, 외로워도 쓸쓸해 보이지 않는

산티아고, 고집스러워도 오히려 부러운 산티아고 노인이 내게도 ‘라 마르‘의

마법을 걸어주면 좋겠다. 다시 ‘사자의 꿈’을 꾸는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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