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무레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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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동명의 드라마 원작 소설이다. 먼저 읽은 사람들의 평은 대체적으로 드라마와는 상반되는 내용이 많아 적잖이 실망했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그래서 읽을까 말까 고민하다 카모메 식당도 같은 이유로 읽지 않은게 생각나 그냥 읽어버리기로 결심했다. 

쉰두살의 독신여성 아키코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납득할 수 없는 직장내 부서발령으로 잔잔하기만 하던 인생에서 급작스런 파도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장고 끝에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를 이어받아 새롭게 꾸려가기로 결심하고 회사를 관둔다. 그리고 시마씨라는 여성 아르바이트 생을 고용하고 타로라 이름 붙인 고양이를 기르며 건실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과거 돌아가신 어머니의 친구였다는 할머니가 나타나서 아키코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그녀의 인생엔 다시한번 파도가 밀려오게 되는데...

줄거리를 적어놓고 보니 뭔가 엄청난 일이 있을 것 같지만 드라마와 큰 줄거리는 거의 같다. 아주 평범하고 소소하고 일상적이다. 하지만 아키코와 시마씨를 제외한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고 자잘한 에피소드도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드라마에선 아키코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이웃의 정을 나눠주던 사람들이 소설 속에선 등을 돌려버리니 비슷한 내용을 기대한 드라마 팬들로써는 적잖이 실망했을 것 같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어서 번역본이 나올 수 있었으나 드라마가 워낙 잘 만들어져서 상대적으로 소설이 빛바랜 경우랄까.

나는 처음부터 소설과 드라마는 전혀 다른 작품이라며 선을 긋고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과 드라마의 분위기가 서로 많이 닮아 있어서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원작이니만큼 아주 다를수는 없겠지만, 잔잔한 분위기라던가 소박한 수필같은 문장들이 드라마 속 풍경과 맞닿아 있어 예상보다 훨씬 즐겁게 읽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드라마와 달리 소설 중간중간 섞여 있는 유머들도 마음에 들었는데 아키코가 긴 머리를 한 자신의 남자친구를 마음에 들어어하지 않는 엄마를 보며 엄마가 좋아한 사람은 민머리인 스님이라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에선 빵 터지고 말았다. 다만 불륜이라는 소재를 쉽고 가볍게 다루는 일본 소설 특유의 정서에는 거부감이 느껴졌다. 비단 무레 요코의 소설만이 이런 것은 아니지만은.

드라마가 삶에 초점을 맞췄다면 소설은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드라마가 살아가는 일상 자체를 그린다면 소설은 아키코가 맺는 여러가지 관계를 풀어나간다. 엄마, 고양이, 시마씨, 엄마 가게의 손님이였던 사람들, 아키코 가게의 손님들, 배다른 가족일지도 모르는 사람들, 기타 지인들 등등 저마다 다른 관계들이 서로 엮이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키코는 손님과 자신의 관계라던가 다른 지인 같은 명백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꾸려나갈지 고민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소중한 가족과의 관계는 소홀하다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키코는 자신의 빈 가슴을 새로운 관계를 통해 극복해 나가는데, 아키코의 모습을 보며 슬픔을 극복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보다는 지속적인 관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레 요코의 책은 처음이였지만 이 책 하나만으로도 그녀가 왜 일본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작가인지 알만했다. 깊이감이 있다할 수는 없지만 현대 여성들이 관심 있어하는 소재들을 잘 모아서 대중적인 입맛에 맞는 소설을 쓰는 재능이 있는 작가니까. 일본 특유의 정서가 약간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만 극복해낸다면 기분전환 삼아 읽기 괜찮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더이상 미루지 말고 조만간 카모메 식당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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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다니엘 튜더 지음, 노정태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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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에 왔다 폭 빠져 10여년간을 한국에서 산 영국사람이 한국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다. 저자 다니엘 튜터는 한국맥주는 맛이 없다는  기고글로 한국에서 유명세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얻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나는 맥주나 술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그의 이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됐다. 그는 책속에서 최대한 객관적이려 노력하지만 가난과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처럼 책 속 여기저기에서 한국에 대한 애정이 엿보인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를 줄줄이 읇는 책의 초반부분을 읽노라면 이 사람이 얼마나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통탈한 사람일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이래서 외국인들 앞에서 못알아들을거라고 함부로 험담을 해선 안되는 거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외국인의 시각으로 보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신선하고 재밌다는 평 때문이였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색다른 담론을 들을 수 있을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현재 한국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나누는 담론만 나와서 약간 실망스러웠다. 어느정도 성숙한 청소년들이나 대학 신입생들이 읽는다면 좋은 인문학 책이 되겠지만 한달만이라도 꾸준히 신문을 구독한 사회인이라면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미 웬만한 국민들은 다 알고 있고 사회적으로 해결방안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해결방안이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시되지 않고 있는데 굳이 그 내용들을 다시 책으로 읽을 필요가 과연 있을까? 이것은 외국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문이라는 이 책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니 외국인의 시각으로 본 한국이란 책 설명글에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길.
 
마치 한국사회를 소개하는 교과서처럼 평이한 이 책 속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딱 한군데 있었다. 한국에 대한 소개글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 본인이 외국인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문화 정책의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한국인이 외국인에 대해 느끼는 반감에 대해서만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외세가 아주 오래전부터 시시때때로 한국을 침략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당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역사는 가볍게 지나가고 단일민족이라는 지도자들의 세뇌와 유교적관념 때문이라는 설명에 집중한 것은 너무 일차원적으로 문제를 바라본 것 아닌가 싶었다. 개인적으론 저자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집필한 영문판을 번역할 것이 아니라 저자 본인이 영국생활과 한국생활을 비교, 분석하는 글을 새로 써서 출판하는 편이 춸씬 더 재밌고 흥미로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한국인으로써 한국에 대해 막연히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던 내용들을 정리된 텍스트로 읽고 내안에 나름의 정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또한 인구 고령화로 노동인구가 줄어드는 현시점에서 해외 노동자들을 유치하는 방법 외에도 결혼과 육아로 사회활동을 못하고 있는 여성들을 지원하여 사회활동을 유도함으로써 노동인구를 확보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읽은 보람 중 하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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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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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시대의 유명 화가나 서예가들의 작품들이 아닌 그들외의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담고 있다. 보통 대중들이 알고 있는 작가라고 한들 초중고교 시절에 배운 안견이나, 겸재 정선, 단원 김흥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나 안평대군, 흥선대원군 정도가 대부분일 것이다. 여기에 약간 더 추가하자면 최민식이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지는 바람에 유명해진 오원 장승업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싶다. 최소한 내 경우엔 그러했다. 사실 오원 장승업도 내내 까먹고 있다가 이 책을 일게 되면서 다시 기억이 났다.
 
이처럼 조선시대 그림에 대해선 하늘천땅지만 아는 까막눈이였으니 이 책은 여러모로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유홍준은 책의 서문에 밝혔듯이 나처럼 그림에는 까막눈인 사람들에게 그림보는 눈을 길러주기 위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림과 작가들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학창시절 시험을 대비해 쫒기는 마음으로 외우던 그림들이 어떤 역사적 배경으로 탄생됐고 어떤 고심과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인지를 파악하게 됐고 그러자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그림들의 매력과 감동이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지기 시작했다. 감동은 받았으되 그림의 무엇에 이끌려 감동을 받았는지 제대로 몰라 찜찜하던 감정들도 제대로 해갈됐다. 역시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이 책에는 많은 작가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작가는 책의 표지로도 쓰인 화가 북산 김수철이였다. 그의 그림은 조선시대에는 전형적인 동양화들, 예를 들자면 김흥도나 신윤복같은 스타일의 그림들만 전부일 거라는 틀에 박힌 내 생각을 전부 부셔뜨렸다. 그의 작품들은 현대의 그 어떤 작품과도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을정도로 세련되고 모던하며 낭만적이였다. 유홍준은 이 책에서 예민한 예술가들은 넓은 세상을 겪어보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집어내는 능력이 있다고 언급하는데 북한 김수철의 작품들을 보노라면 저절로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김수철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의 작품들을 탄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개성까지 용인해준 조선시대가 내 예상보다 훨씬 유연하고 도량넓은 사회였구나 싶어서 놀랍기도 했다.
 
작품 그 자체보다 작가 본인에게 가장 큰 매력을 느낀이는 매화를 그리다 백발이 되었다는 우봉 조희룡이였다. 물론 그의 매화그림은 본인이 평생을 좋아하며 몰두한 만큼 화려한 동시에 선비다운 중후함이 흘러 넘쳤다. 추사 김정희를 본받기 위해 노력했다는 글씨도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에게 감동받은 것은 평생을 한결같이 노력하고 정진했다는 점이였다. 조희룡에 대한 평들을 종합하면 그는 별다른 재능을 지니지 못한 아주 평범한 사람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노력한 끝에 매화그림에선 본인의 이름석자를 남겼놓았고, 후진양성에도 평생 힘써 북산 김수철을 비롯한 조선후기 화가들이 빛을 발할 수 있게 열심히 지원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본인의 재능이나 시대적 상황에 울분을 토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맡은 시대적 사명을 다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텐데 그의 노력이 정말 존경스럽다.
 
이 밖에도 몇몇 작가들을 더 꼽아보자면 관아재 조영석과 기생 홍랑을 빼놓을 수 없다. 조영석은 대체 어떤 붓을 쓰고 어떤 남다른 재주를 가졌기에 그토록 섬세한 인물들의 표정과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었는지 그의 그림을 보는 내내 참으로 신기했다. 그 시대엔 도구도 변변치 않았을테고 먹물로 한번 그리고 나면 수정도 쉽지 않았을텐데. 기생이라는 신분의 제약에 막혀 사랑하는 님과 헤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절개만은 그 어떤 사대부 못지 않은 홍랑의 시조와 글도 좋았고 책의 말미에 이르러 궁중미술과 서예작품들에 대해서 다뤄준 것도 맘에 들었다. 덕분에 당연히 중국에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십장생도가 조선에만 존재하는 고유양식이라는 것과 한석봉이 당시 유행하던 글씨체의 흐름을 바꿔놓았기 때문에 유명하다는 사실등도 처음 알게 됐다. 남대문 현판이 안평대군 글씨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책을 읽는 동안 학창시절에 배운 수묵화 그리는 방법도 새록새록 생각나기도 하고 신윤복이나 김흥도, 추사 김정희처럼 아는 인물들의 작품과 이야기가 나올때는 반가웠다. 유홍준의 책을 완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였지만 국내문화유산 관련한 책들 중에서 유홍준의 저서가 왜 독보적인지는 이 책 한권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유홍준처럼 어렵지 않고 세세하게 설명하며 작품에 애정넘치는 구절을 달아놓을 수 있는 이가 많지는 않을테니까. 그가 미학자로써의 사명감으로 마음에 빚을 덜기 위해 열심히 책을 내고 있다는 말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새삼 읽다가 중단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번에 다시 만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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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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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홀레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 박쥐를 드디어 읽게 됐다. 그동안 해리 홀레 시리즈를 워낙 재밌게 읽기도 했고 첫번째 작품이 웬만큼 성공하지 않고서야 시리즈가 장기간 길게 이어지기 힘든 만큼 해리 홀레 시리즈의 탄생작인 박쥐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해리 홀레 프리퀄은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고 어설프기도 했지만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는동안 느껴졌던 공백을 마침내 찾아 채울 수 있어서 만족스럽기도 했다. 요 네스뵈는 박쥐에 대해 날것 그대로의, 통제 불가능한 느낌이 좋아서 유일하게 반복해 읽는 작품이라고 언급하는데, 나는 번역본으로 접해서 그런지 몰라도 해리 홀레의 통제되지 않는 매력은 최근작들에서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박쥐는 번역자가 기존 시리즈와 달라서인지 데뷔작 특유의 어설픔 때문인지 전체 시리즈 중에서 가장 노말하고 담백한 작품이기도 하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접하기에 딱 적당할 만큼.

 

해리 홀레 시리즈의 시작은 특이하게도 해리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인 노르웨이가 아니라 호주에서 시작한다. 책 속에선 호주를 오스트레일리아라고 표기해서 지명이 언급될때마다 오스트리아랑 계속 헷갈렸고 덕분에 책 속에 등장하는 호주사람들이 해리 홀레를 해리 홀리(Holly)라고 착각하는 것에 절로 공감됐다. 해리는 짜증내다가 체념해 버렸지만 나는 끝까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표현이 거슬리고 헷갈렸다. 어쨌거나 박쥐에 등장하는 해리는 호주사람들이 홀리라고 부르는게 납득이 갈 만큼 시리즈 전체를 통털어 가장 젊고, 밝고, 덜 머러저리스럽다. 아, 물론 술을 안 마셨을때에 한해서. 술이 들어가면 젊은 혈기만큼이나 시리즈 전체를 아울러 가장 머저리스러움을 보여준다.

 

길게 이어지는 시리즈들일수록 캐릭터의 성격이나 전체적인 완성도가 붕괴되는 경향이 있는데 해리 홀레 시리즈 역시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해리가 박쥐에서 자신이 과거를 털어놓으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면 최근 시리즈에선 아예 호주에서 사귄 여자친구에 대한 후회라던가, 박쥐에서 밝힌 본인으로 인해 사망한 동료에 대한 죄책감 등은 한번도 표출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게 삭제되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그래서 박쥐를 읽으며 해리에게 몹시 실망했다. 아마 이런 것이 시리즈를 역순으로 읽는 부작용 중 하나인것 같으나 해리 홀레 시리즈를 역주행 할수록 해리에 대한 실망감이 쌓여가는게 사실이다. 물론 사람이 평생을 애도하며 죄책감만으로 점철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모든 계기가 된 술을 끊을 수는 있는게 사람 아닌가. 해리는 맨날 알콜중독 유전자 탓만 하는데 프리퀄까지 읽은 이상 이제는 그냥 핑계로만 들릴 뿐이다. 노르웨이에도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해리 홀레, 이쯤 되면 중2암 말기가 틀림없다.    

 

나는 해리 홀레 시리즈를 통털어 등장한 여성 캐릭터 중 이 책에 해리의 여자친구로 등장한 비르기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용감한 그녀가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계속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해리와 함께 점점 성장하며 해리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녀의 퇴장이 참 아쉬웠다. 파란 눈의 붉은 머리칼을 지닌 비르기타를 상상할 때면 디즈니의 인어공주 에리얼이 생각나 그녀가 더 마음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수족관으로 바다를 꿈꾸며 사랑하던 그녀가 자신의 사랑인 해리를 위해 다 내던진 것까지, 그녀는 인어공주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진짜 인어공주가 아니듯 해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왕자님이 아니었기에 해피엔딩을 맞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져버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이였으니 안타까웠다. 비르기타 외에도 박쥐에서 해리의 가장 큰 조력자였던 앤드류나 레비도 인상 깊었다. 그 둘의 모습에 북유럽의 시니컬함을 더하면 현재 해리의 모습이 될 것만 같아, 앤드류가 그렇게 가버리고 해리가 울어버리는 순간만큼은 해리가 짠했다. 

 

박쥐의 바로 다음 작품 레드브레스트에서도 알 수 있지만 요 네스뵈는 역사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두 작품 모두 작품의 배경이 되는 호주와 노르웨이의 역사적 배경을 사건의 주요원인이자 갈등요인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레드브레스트 이후 요 네스뵈는 한참의 고민 끝에 본인이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는 하드보일드이자 스릴러 쪽이라는 것을 깨닫고 현재 시리즈의 모습으로 굳혔다고 하는데 만약 처음 요 네스뵈의 의도대로 시리즈가 쓰여졌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그랬다면 현대판 인디아나 존스 같은 시리즈가 됐으려나. 요 네스뵈의 이야기꾼 기질이라면 잘 맞아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시리즈도 기대하며 해리 홀레가 조금 더 나아진 모습으로 찾아오길 바래본다. 하지만 안 그럴거라는거 안다. 짱구아빠는 발꼬랑내가 나야 제맛이듯, 해리 홀레도 알콜 중독이여야 제맛일테니까. 이쯤되면 중독된게 해리인지 나인지 헷갈릴 정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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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다 이야기 - 요리 교실 사람들의 인생 일화
나카가와 히데코.선현경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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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으로 시집온 일본인 주부가 요리 교실을 운영하며 맺은 인연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가 한국생활 20년에 요리교실까지 운영하고 있는 배테랑 주부다 보니, 맺은 인연들도 참 다양하다. 한국땅에 사는 타향살이의 애환을 공감하는 일본인 친구들 부터, 아이들을 통해 알게 된 학부형들, 한국에 요리교실을 열면서 알게 된 인연, 혹은 요리교실에 필요한 식자재를 조달하다가 알게 된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자의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존재인 가족들까지. 인연이 다양한 만큼 각자 품은 이야기도 저자가 만들어내는 요리만큼이나 다양하고 소담하다. 덕분에 블로그에 올라온 일상 포스팅을 읽듯이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책에 쓰여진 여러가지 이야기들 중에서 마음에 남은건 종종 언급되는 부모님과의 에피소드들이였다. 꼼꼼하고 성실한 주부인 어머니와 황혼의 나이에 은퇴전까지 정력적으로 일하셨던 프랑스 요리사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드문드문 튀어나올때마다 우리 부모님 생각이 났다. 우리 부모님도 저자의 부모님처럼 지금까지 열심히 자식들 보면서 살고 계시니까. 새삼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국경도 시대도 초월하는구나, 그리고 자식은 몇살을 먹던간에 부모님 앞에선 언제나 어린 아이에 불과한거구나, 싶었다. 부모님이 길가에서 자식 또래 아이들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저자가 한국에 거주한지 20년이 되었으니 한국어와 한글에 능통할테고 당연히 이 책을 직접 집필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치고 나니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대체 뭘까, 고민하며 몇장쯤 읽고났을 무렵, 내가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는 다른 일본 에세이 번역본 어투같은 느낌의 글이 나오리라 예상했던 것인데 그러지 않아서 당황했던 것이다. 그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일본인들은 이런식으로 글을 쓰는구나라는 선입견이 나도 모르게 생겼었나 보다. 평소엔 번역투가 싫다고 투덜댔었것만. MSG에 길들여진다는게 이런 기분일까. 이미 MSG에 중독된 몸이지만.

 

고로 일본사람이 쓴 일본 원문 에세이가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으로 간접체험 해볼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구리하라 하루미의 "매일매일 즐거운 일이 가득"이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나나 키친"이란 책들도 원문은 이럴테지,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묘했다. 뭔가 한꺼풀 덧씌워져 있던 환상이 깨지면서 현실감이 들기도 하고. 우리나라 에세이가 번역된 느낌은 어떻게 원문이랑 다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동안 연희동 하면 막연히 연상되는게 두개 있었다. 머리가 반짝거리시는 29만원씨와 서태지. 둘로 인해서 그쪽 동네 치안이 좋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나카가와 히데코씨의 요리교실과 그녀의 이야기들이 훨씬 더 선명한 기억으로 추가될 것 같다. 나도 언젠가는 그녀의 요리교실에 슬쩍 가보고, 그녀의 집 근처에 있다는 장인정신 투철한 카페에도 들러보고 싶다. 책으로 하는 간접체험도 나쁘진 않지만 언젠가가 오늘이 되는 날이 오게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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